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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상황의 특수성이 바로 여기에서도 안타까움을 야기하고 있네요. 또한 해외에서 태동하기 시작한 한국 공산주의가 한국땅으로 이식되는 과정은 앞으로 우리가 살펴볼 수 있겠죠. 기대를 가지고 지켜봅시다. ^^
* 양지선 : 4) 이점에서 이 장은 -> * 문제가 되는 점을 정리하여 [바르고 고운 우리말 우리글]에 게시하세요.
* 이미승 : 1) 태동하기 지삭한 ->>:
수정하였습니다.
수정하였습니다. 게시하였습니다. ^^
이번 장에서는 자유시 사변의 의의에 대해서 중요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이동휘를 중심으로 한 비귀화 한인에서 귀화 한인 중심인 이르크츠크파로 주도권이 이동했다는 사실은 이동휘에게는 부정적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이 후 이동휘는 민족주의자들에게 반발감을 사게 되었으며, 이동휘에게 내려진 코민테른의 공식 결과 또한 이동휘를 좌절하게 만듭니다. 자유시 사변은 이동휘가 공산주의 운동을 하는 데 있어 사기를 한풀 꺾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렇게 계속된 대립과 분파주의적 에너지 낭비의 당시 현실과 더불어 귀화 한인들의 헤게모니 장악은 사실상 우리 한국공산주의의 본격적인 시작을 늦추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공산주의의 본격적인 시작을 늦추게 만들었기도 하지만, 이러한 이동휘의 실패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의 공산주의 운동을 위한 싹의 틔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죠. ^^
* 배유란 : 1) 주도권이 변화했다는 ->> 주도권이 이동했다는 2) 부정적인 영향력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 부정적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3) 이 후 이동휘는 ->:
수정하였습니다.
발표를 들으면서 자유시 사변이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에서 갖는 의의와 코민테른의 중요성에 대하여 생각해볼 수 있어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자유시 사변을 통하여 최초로 ‘헤게모니’의 이양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동휘를 주축으로 한 상해파가 주도권을 잡고 있던 공산주의 운동사에서 이제는 이르크츠크파가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발돋움을 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전투가 선택되었고 폭력이 사용되어, 결국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다는 사실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일임이 틀림없기에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네요. 비 귀화 한인들로 이루어졌던 상해파에 비해 이르크츠크파는 철저히 귀화 한인들로
이루어져 있는 말 그대로 ‘전문가’ 집단이었습니다. 상해파의 비전문성과 대비되는 이러한 그들의 전문성은 코민테른의 눈에 띄기에 충분했고 그들은 코민테른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한국 공산주의의 새로운 강자로 급부상하게 됩니다.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선구자’라고도 불렸던 이동휘는 이제 그 발판만을 마련해 둔 채 쓸쓸히 쇠퇴의 길을 걷고 맙니다. 1,2절의 발표를 들으면서 현실의 냉혹함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네요. 초창기에는 이동휘에게 지지와 후원을 보내며 그의 편이 되어 주었던 코민테른이었지만, 결국에는 자신들의 목적과 더욱 부합하다고 생각되어지는 이르크츠크파에게로 등을 돌리며
이동휘를 외면하고 말았으니까요. 부단한 노력과 철저한 전문성만이 현실에서 도태되지 않고 주인공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길임을 알 수 있었고, 한국 공산주의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 이르크츠크파가 앞으로 한국 공산주의의 역사에서 어떤 꽃을 피울지 정말 궁금해집니다. 발표하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현실적'이라는 것이 공산주의 운동사에서 어떻게 작용되어지는지를 또 한 번 깊이 생각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냉혹한 시대 상황에 맞서 살아남기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행로는 그들의 생존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던 것이지요.^^
* 윤수경 : 1) 되어주었던 -> 2) 이르크츠크파에 의해 앞으로 어떠한 공산주의의 꽃을 피우게 될지에 ->>
* 이미승 : 1) 낭만적일 수 없었을 겁니다. ->> 순탄지 않았을 겁니다. 2) 문제였을테니까요. ->
수정하였습니다.
수정했습니다.
한국 공산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는 않았으나 마치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던 장절이었습니다. 한국 공산주의 운동은 태생부터 불안하게 출발하였습니다. 한국에서 한국인이 한국‘적’인 운동으로 무장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해외, 그 중에서도 러시아 지역을 거쳐 국내로 공산주의 운동의 거점이 옮겨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상해파와 이르크츠크파의 권력 투쟁은 해외에서 있었던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또 다른 한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서 상해파인 이동휘는 힘을 얻기 위해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건너가게 되는데요. 이후에도 힘을 얻지 못한 비귀화 한인들의 경우에 코민테른의
상해파 인정은 ‘정통성’을 공인받는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자유시 사변으로 인해 상해파는 몰락하고 귀화 한인들로 이루어진 이르크츠크파로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주도권이 사실상 넘어가게 됩니다. 비전문인에서 전문인으로 넘어감과 동시에 이르크츠크파가 행할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전략과 전술 등 그 노선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저는 발표를 들으면서 이육사의 <광야>라는 문학 작품이 떠올랐는데요. 시에서는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만 홀로 아득할 때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릴 것이라는 시적 화자가 등장합니다.
저는 이 시적 화자가 이동휘라고 생각해보았는데요. 이동휘는 한국 공산주의 운동에 있어 가난하지만 희망적인 노래의 '씨앗'을 뿌린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육사의 <광야>를 인용하신 부분, 인상깊네요. ^^ 우리가 이동휘의 몰락을 그저 패배자로의 모습으로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그 패배를 발판으로 해서 한국 공산주의 운동에 희망의 노래의 '씨앗'을 뿌릴 수 있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습니다.
지난 학기 유럽사회주의 역사 발표 중 제 2인터내셔널 부분을 이미승학우께서 하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우연히도 한국공산주의 운동사에서도 같은 부분을 맡으셔서 더 인상 깊었습니다. 제 2인터내셔널의 그 많은 군중 속에 커다랗게 보이는 태극기……. 모든 공산주의의 지휘통제실 격인 코민테른으로부터 명령을 하달 받음으로서 정통 사회주의의 ‘아류’ 정도 되는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 것입니다.
* 박인승 : 1) 한국공산주의 운동사에서도 -> 2) 하달 받음으로서 ->> * '로서'와 '로써'의 차이를 정리하여 [바르고 고운 우리말 우리글]에 게시하세요. 3) 정통 사회주의의 ‘아류’ 정도 되는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 것입니다. ->> 이동휘는 한국 공산주의 운동에서의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정통 사회주의의 주류가 아닌 아류, 즉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자유시사변에서 패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자유시 사변에서의 상해파와 이르크츠크파의 대결을 통해 하자가 없이 보이는 이르크츠크파에 의해 한국 공산주의의 제 2막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차라리 한 우물만 팠다면, 민족주의 운동에만 전문가가 되었다면 각 진영들간 교류와 회합을 통해 '치욕스럽지만은 않은 시대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네, (ㅋㅋ) 지난 유럽 사회주의 역사 발표에서도 오늘 보여드린 태극기 사진을 보여드렸었습니다. 역시 한국 공산주의의 초기 운동에 있어서 러시아 볼셰비키는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이 참 중요하죠. 하지만 인승 학우~ '하자가 없이 보이는 이르크츠크파'라는 표현이 조금 어색하지 않나요? ^^
이미승 학우의 발표 잘 들었습니다. 명쾌한 해설, 깔끔한 파워포인트 모두 저에게 본받을 점이 되네요. ^^ 코민테른의 영향력이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더욱 실감하게 되는 2장 1,2절이었습니다. 절의 제목이 조선공산당과 코민테른, 자유시사변과 코민테른인 이유가 있었더군요. 그리고 저는 이미승 학우가 토론할 내용으로 던진 세 가지 항목은 참 적절하게 선정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자유시사변을 통해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주도권이 상해파에게서 이르크츠크파로 공고하게 옮겨졌다는 사실을 확실히 짚고 넘어갈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이르크츠크파는 꼭 무력을 사용해야만 했는가하는 사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류 역사상 전쟁은 쉬지 않고 이어져 왔습니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라면 혁명가들에게 전쟁이란 그 수단 중의 하나일 뿐인 듯 보입니다. 오늘 수업 시간에 배웠듯이 선전과 선동을 통한 이성적이고 충분히 교양적인 혁명을 이루어 나간다면, 무력의 사용은 줄어 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진아 학우, 감사해요.^^ 함께 살펴보았던 것처럼 전쟁은 정말 어떤 목적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진아 학우의 지적처럼 혁명가들에게 전쟁이 자신들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처럼 여겨졌던 일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앞으로 도덕, 윤리를 가르칠 교사로서 이러한 점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문제라고 봅니다.
이미승 학우, 오늘 발표 잘 들었습니다. 역시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윤교대표미녀다웠습니다. 먼저 발표내용에 대한 코멘트를 하기 전에 교수님이 지적하셨던 “왜 자유시라고 불렸는가”에 대해서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헤이룽강 연안의 자유시(自由市)는 러시아 혁명 이전에는 알렉세예프스크로 불렸고 그 이후에는 스보보드니로 바뀌었습니다. 스보보드니는 한국어로 ‘자유’라는 뜻을 가졌고 그 뜻처럼 소련이 약소민족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한다고 선전을 한 지역이었습니다. 교수님이 표현하신 것처럼 자유시 사변은 한국공산주의의 원죄적 사건이자 치명적인 약점이었습니다.
* 문승환 : 1) 단점이었습니다. ->> 아킬레스건이었습니다.
이것은 태생적 한계를 지닌 이동휘 집단에 의해 한국공산주의운동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공산주의의 가장 큰 특징인 ‘완결성’에 의해서 이동휘는 인정받을 수 없었습니다. 공산주의는 무조건 따라야만 하는 무오류의 사상이며, 감히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었는데 비귀화한인이었던 이동휘는 이러한 ‘완결성’을 지니지 못한 채 초기 한국공산주의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결국 자유시 사변을 통해 상해파에서 이르크츠크파로 헤게모니가 이동하였고, 국내에서 공산주의운동을 위한 준비를 끝마치게 되었습니다.
승환선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 수업 이후에 자유시에 대해서 철저하게 조사를 해 보셨군요. 이동휘가 지니고 있던 한계를 공산주의 사상이 가졌던 특징인 '완결성'에 비추어 설명을 해주신 것이 흥미롭네요. 이 시기, 러시아에서의 공산주의는 지적하신대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동휘는 이러한 힘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한계를 지녔던 것이죠. 한계점에 그대로 노출된 이동휘의 패배는 필연적인 수순이 아니었나 합니다.
* 문승환 : 2) 시작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수정하였습니다.
2장은 한국의 공산주의운동이 해외에서 국내로 옮겨지는 전환점이 잘 나타나는 장입니다. 이번 장의 2절에서 나오듯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이 해외에서 국내로 옮겨지게 되는 계기는 자유시 참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시 참변 이후 비 귀화한인들은 더 이상 해외에서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분파인 이르크츠크파는 완전한 볼세비키가 되어 더 이상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을 이끈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한국공산주의 운동이 전환점이 필요했을까요? 저는 한국공산주의 운동은 전환점이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 박상율 : 1) 이르크츠크파는 완전한 볼세비키가 되어 국제프롤레타리아 동맹을 이끌 뿐이지 더 이상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을 이끈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 * 글의 내용이 모호하군요. 말하려는 내용이 명료히 드러나도록 보완하세요. 2) 이에 대해 교수님은 한국공산주의 운동이 과연 전환점이 필요했을 것이냐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 * 내가 그러한 질문을 던졌던가요?
수정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노트에 적혀 있어서 교수님께서 언급하신 줄 알았습니다.
* 박상율 : 3) 적혀있어서 ->
수정하였습니다.
그리고 해외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해외, 그것도 러시아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은 1장에서 언급되었듯이 필연적으로 분파를 낳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볼세비키의 영향 아래서 분명 볼세비키가 되고자 하는 사람과 귀화하지 않고 공산주의 활동을 하려는 사람이 나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동휘라는 거물이 있다 한들 코민테른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는 귀화한인들을 이겨내기는 힘들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공산주의 운동은 볼세비키의 지원이 아닌 자체적인 공산주의 운동이 필요했고 비극적인 분파주의의 극단인 자유시 참변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박상율 학우의 지적처럼 '전환점'은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에 있어서 필요했다는 것에 저 역시 동감합니다. 이러한 전환점을 바탕으로, 해외에서의 공산주의가 서서히 이동하여 한국에서 그 싹을 틔울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었던 것이죠. 만약 자유시 사변이라는 사건이 없었다면 한국 공산주의는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가 되었겠지요.
* 박상율 : 1) 해외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이었기 -> 해외에서의 공산주의운동이었기 2) 러시아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은 -> 러시아에서의 공산주의운동은 3) 공산주의 활동을 하려는 ->> 공산주의운동을 하려는 4) 한국공산주의 운동은 -> 한국 공산주의운동은 5) 자체적인 공산주의 운동이 -> 자체적인 공산주의운동이 6)자유시 참변이 -> 자유시참변이
* 이미승 : 1)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에 -> 한국공산주의운동사에 2) 자유시 사변이라는 -> 자유시사변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