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헷갈릴지 몰라서 알려드립니다....* 최부의 표해록에 연암의 열하일기를 접목 시키는 추가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명나라와 청나라 조선 전기와 후기 강남과 강북의 다른 여정...꾸밀수록 무진장 쏟아져 ... 지겹지만 안 할 수도 없다 싶어...
64. 조선시대 사신 영접 그리고 글 겨루기
앞선 글에서 보았지만 명나라 황제 홍치제의 스승이기도 한 동월이 온다고 하자 북경서부터 첩보를 입수하고 그 사실을 조정에 알려온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먼저 파악하고 준비를 하는 조선, 안타까운 일이지만 천사라 하였던 그들의 영접을 한 번 보자. 1425년 2월 세종은 하루 종일 분주했다. 한양에 들어온 명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는 일 때문이다. 세종은 모화관으로 직접 나아가 사신을 맞이하여 창덕궁으로 인도했다.
조선의 건국 초기 명나라와의 관계는 좋지 못했다. 그것은 조선이 요동 영토에 야심을 품었기 때문이다. 1394년 명나라 주원장은 사신을 보내 조선을 격렬히 비난했다.명나라는 요동 떡밥의 주동자로 지목한 '정도전'을 묶어 보내라고 요구했다. 심지어 조선을 정벌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이에 이성계와 정도전 등은 반발하여 요동 정벌을 해볼까?"하는 생각을 갖기도 하고 이른바 등거리 외교 식으로 거란과 고려가 그러하였듯 다른 측면에서는 여진과 친하게 지내는 척 하기도 했다. 훗날 세조 때는 건주여진 추장 아들이 조선으로 귀화도 하지 않던가. 한때는 그야말로 양국관계의 긴장은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1398년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죽고 태종이 왕위에 오르고, 명에서도 영락제가 즉위하면서 양국관계는 다행히도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다만 영락제는 팽창주의자였다. 그는 몽골, 베트남을 점령했고 요동의 여진족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권력행사에 나섰다. 영락제의 공세적인 요동 정책은 당연히 조선에도 커다란 위협이었다. 때문에 태종과 세종은 명나라에 고분고분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서 실리를 도모하고 안정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세종 즉위 이후 양국의 관계가 안정 궤도에 오르자 두 나라 사이에는 사신이 자주 오갔다. 특히 세종 재위 때에만 사신을 총 131 차례나 파견하였으니, 1년 평균 4차례로 보낸 셈이다. 명나라는 집권 기간동안 총 188회를 파견하였고 세종 재위 때에는 총 36번 파견하였으니, 약 1년에 1번 꼴로 보낸 것이다. 주목할 것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에 왔던 칙사들 중에는 유독 환관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미 앞서 살펴 본 바가 있다.
이들 명나라 사신들은 탐욕스러웠고, 제 멋대로 굴기 일쑤였다. 또 갖가지 무리한 요구로 조정을 괴롭혔다. 당시 명나라의 사신은 중국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오는 사신이라 하여 '칙사'라고 불렀고 칙사 대접이야 말로 국가적인 대사였다. 사신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일단 길부터 부랴부랴 닦아야 했다.당시 조선은 도로 사정이 상당히 열악했다. 때문에 사신이 올 때마다 번번히 도로를 정비해야 했는데. 진창길은 흙으로 덮고, 구덩이는 매꾸고, 돌은 치우고, 잡초는 제거하고 이러는 과정에 백성의 경작지를 손상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사신의 원활한 통행을 위해 칙사 영접 전담 기구인 '영접도감'을 설치했다. 그리고 명나라 사신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도착하면 곧바로 정승 급 인물이 접반사로 임명되어 영접을 나갔다. 이어 사신이 도중 지나는 안주, 평양, 개성 등 주요 도시에도 고위급 신료들을 보내 문안하게 했다. 때때로 사신은 평양에 이르러 단군묘, 기자묘, 동명왕묘에 참배를 하기도 했다.공식 일정이 끝나면 한강에 유람선을 띄워 접대하거나 조선 문신들과 시 낭송회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아울러 조선 왕실은 사신들에게 수시로 예물과 예단을 증정하여 환심을 사려했고 사신이 귀국할 때면 환송의 의미로 또 한 번 거나하게 고별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코스는 입성할 때와 마찬가지로 거점마다 사신에게 문안 인사를 시켜, 가는 길까지 융숭하게 대접했다. 조선은 명의 요구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라도 사신들을 회유해야 했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히 사신들은 뇌물을 요구했다. 실제로 1429년 명나라 사신이 귀환할 때 챙겨갔던 뇌물은 200 궤짝이나 되는 엄청난 분량이었다. 궤짝 1개 당 나르는 인부가 8명 필요했으니 챙겨간 뇌물을 운반하는 행렬만 도합 2Km의 거리였다. 여기에 사신단을 수행하는 서반과 군관들이 자행하는 폐단도 만만치 않았다.
이들은 칙사의 후광을 등에 업고 조잡한 잡물 등을 강매했고 조선 상인들과 민간인들로부터 물자를 약탈해 문제가 되었다. 급기야 환관 출신 사신들이 조선에서 보인 탐욕과 횡포가 명나라에서도 크게 문제가 됐다. 이후 한 때 명나라는 환관이 아닌 문관을 사신으로 보내기도 했다. 이들 문관 출신들은 조선에서 별다른 추태를 벌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칙사 영접 과정에서 조선이 너무 겉치레를 한다고 지적하기도 할 정도였다. 특히 연회 시 기생들을 동원해서 가무를 추는 것을 '오랑캐 풍속'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또 문관 사신들이 오면서 사신들과 조선의 접대 신료들이 주고받은 시문을 모은 시집(황화집)을 편찬하는 것이 하나의 관행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
바로 이러한 때 동월이 조선을 다니러 온 것이다. 영향력이 상당하기 때문 앞으로 그가 다녀간 후에 그가 남긴 글은 거의 정설로 굳어지기 때문 바짝 긴장한 조선이었다. 당시 글을 잘 쓴 김종직을 불러들일 생각까지 하는 조정인데 나중 역사적인 사실을 잘 설명했다고 성종은 허종을 치하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가 돌아가 어찌 설명하는지를 또 사절단이 파악을 해서 또 조정에 장계를 보내온다. 이러하듯 우리 조상은 면밀히 파악하고 당시 그들을 다루었다. 덩치 큰 대국이라 어쩔 수 없이 약소국으로 지냈지만 내용으로는 절대로 밀리지 않으려 했다. 신숙주나 성삼문을 요동에 보내 중국어를 익히고 닦도록 하여 그들을 놀라게 했으며 성종 시절 채수 또한 중국을 다녀오는 길에 요동의 글을 잘 하는 대인을 하나 찾아 임금에게 아뢰며 대비를 하자는 글이 조선실록에 적혀 있음을 앞서 이미 살펴보았다. 영민한 선조들은 글에서 절대 밀리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와 그들의 한자 쓰임은 다르다. 이를 연암 박지원은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
<중국 사람들은 글자로부터 말 배우기로 들어가고 우리나라 사람은 말로부터 글자 배우기로 옮겨가므로 화(華)ㆍ이(彝)의 구별이 이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로 인하여 글자를 배운다면 말은 말대로 글은 글대로 따로 되는 까닭이다. 예를 들면 천(天) 자를 읽되 ‘한날천(漢捺天)’이라고 한다면, 이는 글자 밖에 다시 한 겹 풀이하기 어려운 언문(諺文)이 있게 된다. 설부(說部) 중에 《계림유사(鷄林類事)》가 실렸는데, 천(天)을 가른 한날(漢捺)이라 하였다. 작은 아이들이 애당초에 ‘한날(漢捺)’이란 무슨 말인 줄을 알지 못한즉, 더군다나 천(天)을 알 수 있겠는가. 정현(鄭玄)의 집 여종이 모두 《시경(詩經)》으로써 문답할 수 있었다 하여, 천 년 동안 아름다운 이야기가 떠돌고 있지마는, 그 실제에 있어서는 중국 사람들은 부인이나 어린이도 모두 문자(文字)로 말을 하므로, 비록 눈으로는 정(丁) 자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으나 입으로는 봉(鳳)을 토(吐)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은 모두 그들의 입에 익은 항용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의 어린이가 시내를 격해서 어머니를 부를 때,
물이 깊어서 건너지 못하외다 / 水深渡不得
라는 말을 처음 듣고는 크게 놀라서,
“중국엔 다섯 살 먹은 아이가 입을 열자 시가 이룩되데그려.”
한다. 이는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은 말이 이러함이요, 무슨 뜻이 있어서 글귀를 이루려는 것은 아니다. 노가재(老稼齋)가 일찍이 천산(千山)에 놀러 갔다가 어떤 술 파는 촌 할미를 보고서,
“길이 궁벽하고 사람이 드문 이곳에 누가 술을 사 마시오.”
하고 물었더니 그는,
꽃 향내 풍기니 나비 옴도 저절로 / 花香蝶自來
라고 대답하였다. 여러 말이 아니되 사의(辭意)가 명창(明暢)하여 저절로 운치 있는 말이 되었다. 이는 다름 아니라, 글자로 인하여 말 배우기로 들어간 묘증(妙證)이다. 우리 집 소비(小婢)가 사람됨이 지극히 혼미(昏迷)하여, 어느 날 떡을 얻어 먹게 되었을 때, 엿을 얻어 가지고는 기뻐서 치하하는 말로,
“파촉(巴蜀)도 역시 관중(關中)이랍니다.”
하니, 이는 지패(紙牌 노름의 일종)에 유행되는 말이다. 그가 애초부터 파촉이나 관중을 아는 것이 아니었으나, 다만 그 둘이 다르지 않음을 알았은즉, 그 말은 저절로 맞아버린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중국말이 알기가 어렵지 않을 뿐더러, 반드시 정씨(鄭氏)의 여종이 천고에 유식하기로 이름 높지 못한 것을 알았다.>
한자를 같이 쓴다고 해도 당연 중국과 우리는 다르다. 연암 말대로 중국 사람들은 글자로부터 말 배우기로 들어가고 우리나라 사람은 말로부터 글자 배우기로 옮겨가므로 화(華)ㆍ이(彝)의 구별이 이에 있다. 문자로 가지고 말을 하는 사람과 뜻을 알고 글자로 파고드는 경우와는 능수능란함에 현격한 차이가 생길 수밖에. 그럼에도 우리 조상들은 실로 대단했다. 요즘 한류 열풍으로 우리나라 말 배우기가 한창인데 그 시대 사람들이 이를 보면 어찌 생각을 할까. 자기 고유 말을 갖고 거기에 중국어로 시를 능통하게 지어 대적을 하는 사람들이니 그 영명함이라니, 중국 사신들이 이제야 제대로 깨치지 않을까. 아울러 동란섭필에서는 연암은 중국말에 있어서 한자의 음운에 뛰어난 우리나라 선비를 말하는데 그가 누구일까. 바로 최부의 외손 유희춘이다. 어디 그의 말을 더 들어 보자.
<《원시비서(原始秘書 저자미상)》에 이르기를,
“고려의 학문은 기자(箕子)로부터 시작되었고, 일본의 학문은 서복(徐福 진 시황 때의 방사(方士) 서시(徐市). 복은 별명)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안남(安南)의 학문은, 한(漢)의 군현(郡縣) 제도를 세우고 자사(刺史)를 두어 중국의 문화를 펴서 뒷날 오대(五代) 말기에 절도사(節度使) 오창문(吳昌文)의 시기에 와서야 성황을 이루었다. 중국으로부터의 문화가 외지로 퍼져 나간 지 수천 년 사이에, 그들의 학문이란 모두 이적(夷狄)의 풍습을 면하지 못하고 궁하며 고루해서, 성인의 가르침을 계승하기 부족함은 대개 그 성음(聲音)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 기묘하고 심오한 이치야 붓 끝으로 가히 전할 수 없으므로 서로 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가위 절실한 이론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협음(叶音)의 묘미를 알지 못하므로 유미암(柳眉菴)을 지음(知音)에 능하다고 불렀지만, 그가 언문(諺文)으로 해석한 모시(毛詩)는 협음을 따르지 못하였으므로, 운(韻)이 끊어진 곳이 많았다. 예를 들면, ‘왕희지차(王姬之車 《시경》중의 문구)’란 차(車) 자를 마(麻) 자 운을 따르지 않고 어(魚) 자 운을 따라서 ‘거(車)’ 음으로 한 것이 곧 이것이다.>
그런 불가피성이 있음에도 시를 잘 지은 선조들, 그런데 자기 방식으로서만 파악하고 얕본 작자들이 그 시대는 많았다. 하기야 앞서 보았지만 강남과 강북을 나누고 만주와 한족을 구분하려 드는 사람들이려니, 연암의 피서록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중국 사신들을 접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글재주가 뛰어난 선비를 엄선하여 임기응변의 수작을 대비하여야 한다. >
아마도 글로 짓까불며 우열을 말하고 골탕 먹이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는 한 예를 들었다.
<전수지(錢受之 전겸익(錢謙益: 명말 청초의 학자). 수지는 자)의 이른바,
나라 안에 창이 없이 한 사람만 앉아 있네 / 國內旡戈坐一人
는 김모재(金慕齋)가 지은 시인데 그의 본집(本集 《모재집(慕齋集)》)에 실려 있다. 수지가 《황화집(皇華集 화찰 저)》에 발(跋)을 달 때에 이 시를 들어서 조롱하였다. 그러나 그 실상은 화홍산(華鴻山)찰(察)이 조서를 받들고 우리나라에 왔을 때에 비로소 작용(作俑)한 것이다. 예를 들면,
넓디넓은 이 들판엔 가이 없는 물이요 / 廣野無邊水기나긴 저 하늘엔 기러기 한 점뿐일러라 / 長天一點鴻
라는 따위가 곧 그것이다. 이는 야(野) 자는 넓게 쓰고, 천(天) 자는 길게 쓰며, 수(水) 자는 그 편방(偏傍)을 떼어서 무변(無邊)이 되고, 홍(鴻) 자는 비점(批點)을 쳐서 한 점(點)이 된다. 이를 일러서 두 글자의 뜻을 포함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배신(陪臣)이 원접사(遠接使)로서 용만(龍灣)에 가자면 반드시 사학(詞學)에 능통한 선비를 묘선(妙選)하여 종사(從事)를 삼아서 별안간 나타나는 응수(應酬)에 대비하였으며, 조사(詔使)는 역시 도중에서 으레 이러한 문제를 구상하여 두는 법이다. 이는 접반(接伴)을 곤란하게 하기 위함이다. 당시의 접반을 맡은 이들도 또한 반드시 이러한 문제를 미리 연습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이 드디어 한 예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를 기뻐서 함은 아니거늘, 수지가 홍산을 위하여 이 《황화집》에 발을 쓸 때에 그 실상(實狀)은 모두 없애 버리고는 다만 우리나라 사람의 한 글귀를 뽑아내어 웃음거리를 삼았을 뿐더러 또 그들과 함께 창수를 하지 말라고 경고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동국(東國) 인사의 마음을 후련하게 할 수 있겠는가. >
연암은 전겸익이라는 작자가 황하집에 짓까불어 쓰고서는 조선과 시 겨루기를 하지 말라고 적은 것에 대해 격분하고 있다. 아마 무척 자존심이 상하였던 모양이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녀석이 까불고 있네, 너나 잘해라 하는 식의 글이 연암의 또 다른 글에 실려 있으니.어디 연암이 전겸익에 대해 한 말을 알아보자.
<최두기(崔杜機)성대(成大) 의 〈이화암노승가(梨花菴老僧歌)〉에,오왕이 연극 보다가 뭉텅 상투 슬퍼했고 / 吳王看戲泣椎結전수가 중이 되어 춘추 필법 위탁했네 / 錢叜爲僧托麟筆라 하였으니, 우리나라 선배들이 매양 중국 일에 대하여 풍문에 휩쓸려서 실적에 충실하지 못함이 일쑤이다. 이에 이른바 오왕은 오삼계(吳三桂)를 말함이요, 전수는 전겸익(錢謙益)을 말함이다. 겸익이나 삼계가 모두 되놈(청나라)에게 항복하여 머리털이 희도록 오래 살았으나 무료히 지나는 중에, 그 하나는 비록 의거(義擧)에 의탁하였으나 임금의 칭호가 벌써 참람하였고, 또 하나는 저서에 뜻을 붙였으나 대절이 이미 이지러졌으니, 비록 교활하게 후세의 공격을 회피하고자 한들 누가 믿어 주리요. 우리나라 상말에 대체로 사물(事物)에 어두운 것을 ‘몽롱춘추(朦朧春秋)’라 한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춘추를 이야기하기 좋아하나 몽롱하기가 이러한 종류와 같은 것이 많으니, 어찌 만인(滿人)들의 조소를 입지 않으리요.>
말인 즉 최두기(조선 영조 때의 시문학자)는 멋모르고 변절한 오삼계가 상투를 보고 명(明)을 생각해서 울었다 하고, 또 전겸익이 청(淸)에 벼슬까지 한 것을 지사인 듯 칭찬하였는데, 이는 모두 ‘몽롱춘추’라는 것이다. 어디 전겸익이 그럴만한 위인이 되느냐 하는 소리다. 그래도 연암은 분이 안 풀렸는지 동란섭필에서도 전겸익을 성토하고 있다. 굳이 사전에서 전겸익이 누군지 찾을 필요도 없다. 낱낱이 파헤친 연암 선생 덕분이다.
<전목재(錢牧齋) 겸익(謙益)의 자는 수지(受之)다. 그의 신분은 반은 중국이요 반은 오랑캐이며, 그의 문장은 반은 유교요 반은 불교이다. 그의 명절(名節)은 땅을 쓸다시피 되어 마침내는 부랑자(浮浪子)의 칭호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위로 스승되는 손고양승종(孫高陽承宗 고양은 손승종이 살던 지명(地名)이다)에게 부끄러울 것이요, 아래로는 그의 제자 구 유수 식사(瞿留守式耜 유수는 벼슬 이름)에게 부끄러울 것이요, 중간으로는 그의 아내 하동군(河東君) 유여시(柳如是)에게 부끄러울 것이다. 수지(受之)가 늙어 죽을 때는 하동군이 아직도 젊었는데, 여러 악소년들이 수지를 질투하던 나머지 그의 아내 유를 욕보이고자 했더니, 유는 자살해 버렸다.>고 연암은 적고 있다.
또 다른 글에서는 동림당(강소성 무석의 동림서원을 중심으로 일군의 유학자들이 당시의 여론을 형성하였는데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의 수괴 전겸익, 그의 말은 그렇게 시작한다.
<동림당(東林黨)의 무리들은 조선을 좋아하지 않았다. 전목재(전겸익)는 동림당의 괴수인즉 우리나라를 야비한 오랑캐라고 보는 것을 청론(淸論)으로 삼았으니 분하고 억울함을 이길 수 있으랴. 더구나 우리나라 시문(詩文)에 이르러서는 말살(抹殺)하기가 일쑤여서 그의 《황화집(皇華集)》발(跋)에 보면,
“본조(本朝)의 시종(侍從)으로 있던 신하가 칙사가 되어 고려에 갈 때는 으레 《황화집》을 편찬한다. 이 책은 가정(嘉靖) 18년 기해년(1539년)에 황천(皇天) 상제(上帝)에게 태호(泰號)를 올리고 황조(皇祖)ㆍ황고(皇考)에게 성호(聖號)를 올릴 때 홍산(鴻山) 화수찬(華修撰) 찰(察)이 황제의 조서를 반포하면서 지은 것이다. 조선의 문체(文體)는 평연(平衍)한데 여러 사림(詞林)들이 깎고 고치는 것을 아끼지 않고 먼 곳 사람들을 회유하는 데에 뜻을 두었으므로 보배롭고 고운 시구는 극히 적었다. 그 중 배신(陪臣)의 편집(篇什)을 보면 글자 두 자가 일곱 자의 뜻을 포함하였으니, 예를 들면,
나라 안에 창도 없이 한 사람만 앉아 있네 / 國內旡戈坐一人
와 같은 글귀는 그 나라의 소위 동파의 체(體)일 것이니, 제공(諸公)은 아예 그들과 더불어 창수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우리나라 문체가 진실로 그의 말과 같은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어찌 헐뜯기를 이 같이 할 수가 있었으랴. 나는 짐짓 이것을 자세히 기록하여, 목재가 우리나라를 훼방하는 것이 동파와도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연암은 그 말로 끝나지 않았다. 그가 살던 시대에서 그를 어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도 낱낱이 적어 그를 궐기하고 있다.
<지금 건륭의 조서를 보면 수지를 배척해 말하기를,
“스스로 청류(淸流)인 듯이 큰소리를 치다가, 뻔뻔스러운 얼굴로 항복을 하고서 거짓 중 노릇을 하여 창자도 없고 수치도 몰랐다.”
하였으니, 가위 전겸익으로서도 부끄러워 죽을 일이다. 우리나라 선비들은 수지의 이 같은 실행(失行)을 모르고 다만 그의 《유학(有學 전겸익의 시문집)》과 《초학(初學 전겸익의 시문집)》 등 책만을 보고는 그를 미상불 애석히 여길 뿐 아니라, 그의 시문(詩文)을 초출하여 문 승상(文丞相 문천상(文天祥). 승상은 벼슬)이나 사첩산(謝疊山 사방득(謝枋得). 첩산은 호)의 글 아래에 많이 늘어놓기도 한다. 근년에는 자못 그의 책판을 없애고 간직하기를 금하는 영이 있다는 말도 들었지마는 그러나 과거 공부를 하는 속생(俗生)으로서는 반드시 다 알지 못할 것이므로 여기 자세히 기록해 둔다.>
그들 전겸익과 오삼계는 명말과 청초시대를 지낸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마 명나라가 망한 이유를 너무도 잘 알 것이다. 왜 명이 망하였는지에 대해 연암은 이를 또 나름 잘 설명하고 있다. 다음은 이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