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를 생각하라(누가복음 12:24)23.04.30.주일낮설교
TV 인간극장 보면서 감동된 말이 있어 올립니다.
60세에 결혼한 탈렌트 최석구씨가 결혼 선배인 이한위씨를 만나 신혼생활 조언을 구했는데 이한위씨가 하는 말이 너무 좋았습니다.
흐물흐물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모두가 편하고 행복하다고요.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은 새 중에 까치는 길조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침에 까치가 울면 좋은 일이 있든지 반가운 손님이 찾아올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까마귀는 흉조라고 합니다.
그래서 까마귀 울음소리는 어쩐지 음산하고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까마귀를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까마귀를 사람들이 왜 싫어합니까?
창세기 7,8장을 보면 그 당시 사람들이 항상 악한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을 한탄하시고 그들을 쓸어버리기로 작정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의인이었던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명하셨고 노아는 순종하여 배를 만들어 온 가족 전체가 방주 안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40일간 하늘의 창을 열어 하늘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시고 땅의 샘을 터지게 하여 땅에서 물이 뿜어오르게 하시니 온 세상이
물 천지입니다. 온 세상이 물로 가득합니다.
그러니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를 타고 둥둥 떠다닙니다.
그리고 40일이 지난 다음에 노아가 까마귀와 비둘기를 날려 보냅니다.
노아가 이제 창을 열고 까마귀 한 마리를 날려 보냅니다.
물이 어느 정도 말랐으면 까마귀가 나뭇잎 하나라도 입에 물고 오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까마귀는 날아다니며 노아에게 돌아오지 않습니다.
노아는 다시 비둘기를 날려 보냅니다.
비둘기는 먹을 것도 없고 앉을 곳도 없으니 지쳐서 돌아옵니다.
일주일 후 다시 비둘기를 날려 보냈더니 새로 돋은 감람 잎사귀 하나를 물고 옵니다. 일주일 후 또 비둘기를 보냅니다. 이제는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깨끗한 곳이 있어 거기에 깃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건 때문에 사람들은 까마귀는 싫어합니다.
1.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창세기 8장에서 까마귀는 은혜를 모르는 새로 취급받습니다.
까마귀는 방주에 들어와 구원은 받았습니다.
노아는 까마귀에게 사명을 주었는데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까마귀는 1년 가까이 보살펴 준 노아의 은혜를 저버린 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까마귀는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새라고 손가락질하고 싫어합니다.
그리고 목사님들도 설교할 때,
은혜를 모르는 까마귀처럼 살면 안 된다고 설교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주님의 십자가 은혜로, 주님의 생명으로 생명을 얻었으면, 생명을 걸고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충성하고 주님께 감사해야 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까마귀와 같은 교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은혜와 복만 받고 교회를 위해서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유익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까마귀 같은 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선과 악을 완전히
구분하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을 주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은혜로 보아야 합니다.
선과 악으로 까마귀를 본다면 까마귀는 분명 노아에게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은혜를 저버린 새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까마귀를 예수님의 관점에서,
믿음의 관점에서 은혜로 본다면 어떻게 볼 수 있을 까요?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돌아오려 했지만 무슨 사정이 생겨서 못 올수도 있는 것입니다.
돌아오려 했지만 길을 잃어버려서 못 올수도 있는 것입니다.
돌아오려 했지만 강력한 태풍이 불어 못 올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는 관점입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남편이 다섯이나 되는 사마이라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기 때문에 외로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여인을 예수님을 사랑해 주셨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예수님이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다릅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는 사람도 예수님은 그 사람을 귀히 여기고
그를 사랑해 주시고 이해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는 관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친구가 잘 못하고, 성도가 잘 못하고, 형제가 잘 못하고, 목사가 잘 못하고, 장로가 잘 못하고, 권사가 잘 못하고, 집사가 잘 못하면,
욕하고, 손가락질 하고, 비방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관점으로 사람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이고, 은혜의 삶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던지고, 끝까지 따라다니면서
군사를 모집해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울을 다윗은 죽일 수도 있었지만
예수님의 마음으로 용서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죽었을 때도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자였습니다.
이러한 다윗을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크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다윗처럼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금세기 한 유대인 철학자를 통해서 전 세계의 진지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 책 하나가 출간되었습니다.
유태인 철학자인 마틴 부버의 책 가운데 ‘나와 너’ 라는 책이 있습니다. 인생은 관계 속에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신앙도 나와 영원자 너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그는 말합니다.
탈무드는 이런 흥미 있는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 왔습니다.
“하루를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이발을 하라.
일주일간을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여행을 하라.”고.
여행 떠나서 일주일이 지나면 집에 오고 싶지 않으십니까?
“한 달을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새 집으로 이사를
가라.”고. 새 집의 감격은 한 달을 넘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 해 동안 행복하기를 원하는가? 결혼을 하라.”고.
허니문의 감동은 일 년 이상을 넘기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탈무드의 절정은 바로 이것입니다.
“일생이 행복하기를 원하는가 이웃을 섬기라”고.
그렇습니다. 평생을 행복하게 사는 가장 중요한 비밀...
이것은 내가 이웃을 품고 이웃을 섬길 때 비로소 가능한 삶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이고, 용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방하고, 정죄하고, 손가락질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까마귀는 나쁘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까마귀를 사랑하시고 기르십니다. 24절...
2. 걱정하지 않는 까마귀를 생각하며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까마귀를 기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까마귀는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기르시고 먹이십니다. 그래서 까마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까마귀가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대부분의 새들은 80-90%의 시간을 먹잇감을 구하는데 사용하지만,
까마귀는 10%의 시간만 먹잇감을 찾는데 사용한다고 합니다.
까마귀는 잡식성이라 쉽게 먹을 것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까마귀는 먹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또 까마귀는 새들 중에 가장 영리해서 먹잇감을 잘 구한다고 합니다.
딱딱한 호두를 까먹을 수 있는 새는 까마귀가 유일하다고 합니다.
호두를 까먹는 까마귀가 관찰되었습니다.
까마귀들은 횡단보도에 신호가 들어오면 호두를 갖다 놓습니다.
그러면 차들이 지나가면서 호두를 깨고 갑니다.
그때 까마귀가 와서 먹는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걱정하지 않아도 충분히 생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까마귀를 생각하며 생존의 문제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 뒤에 보면, 예수님께 염려와 근심으로 사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의 풀도 하나님께서 입히시고 자라게 하시는데 무엇을 그렇게 걱정하느냐는 안타까운 말씀입니다.
염려와 걱정은 믿음이 적을 때 생긴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이 염려와 걱정으로 이어집니다.
큰 믿음을 가지면 염려도 걱정도 없다는 뜻입니다.
왜 똑 같이 직장생활하고 사업을 하고 생업에 종사하며 가정과 자녀들을 돌보는데, 어떤 사람은 주일예배도 잘 드리고 봉사도 잘하고,
어떤 사람은 예배도 못 드리고 봉사의 흉내도 못 냅니까?
믿음의 차이입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을 믿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잘 하며 걱정을 안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생계에
곤란을 겪을까봐 걱정되어서 못합니다. 염려에 빠집니다.
“걱정도 팔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필요한 것을 걱정할 때 쓰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다 책임져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믿지 못해서 걱정하며 먹고 사는 일에 매달리는 성도들이 걱정이 팔자입니다.
성경은 염려와 근심을 다 이방인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잠언 17장 22절에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마음의 근심과 염려는 건강을 심하게 손상시킵니다.
이것은 믿음이 적은 자들에게 생기는 현상입니다.
큰 믿음을 가지면 근심이 사라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명을 잊지 않아야 함을 배워야 합니다.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생존의 문제를 걱정하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