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전(消火栓)과 제수변(制水弁)
아파트의 문을 나오면 바로 소화전(消火栓)이라고 써 놓은 글이 눈에 뜨인다. 그런데 이 말의 뜻을 명확히 아는 사람은 드물다. 소화(消火)는 불을 끈다는 말인데 ‘전(栓)’이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 명확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화전을 그저 불을 끄는 기구를 보관하는 함이란 뜻으로 짐작한다.
그런데 이 전(栓) 자를 자전에 찾아보면 ‘나무못, 빗장, 마개’를 뜻한다고 나와 있다. 불을 끄는데 나무못이나 마개가 왜 등장하는지 도무지 뜻이 잡히지 않는다. 이 전(栓) 자는 기물器物의 개폐부開閉部를 가리키는 말이다. 외래어 콕(cock)이나 밸브(valve)의 의미와 같으며 고유어로는 ‘고동’이라 한다. 유체(流體)의 양이나 압력을 제어하는 장치를 가리킨다. 즉 물의 흐름을 제어하는 ‘빗장이나 마개’의 역할을 하는 장치를 말한다. 수도꼭지를 연상하면 된다. 그러니 소화전은 불을 끄는 데 필요한 물을 열고 닫고 하는 ‘마개’의 역할을 하는 장치란 뜻이다. 이를 방화전防火栓이라고도 한다.
이 전(栓) 자는 소화전 외에 방화전(防火栓), 급수전(給水栓), 전용전(專用栓), 수도전(水道栓) 등에 쓰이고 있다. 모두 물의 흐름을 제어하는 마개 역할을 하는 장치를 일컫는다. 전용전은 한 집에서만 사용하는 수도전인데 비슷한말은 ‘전용꼭지’라 한다.
그러면 이 글자가 중국과 일본에서는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살펴보자. 중국에서 전(栓 shuān)은 기물의 개폐부(開廢部) 즉 수도꼭지(cock, stopcock)란 의미로 쓰인다. 즉 물을 열고 닫는 역할을 하는 꼭지의 뜻이다. 소화전을 活栓(huóshuān) 또는 旋塞(suánsāi)으로도 쓰는데 다 똑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의 전(栓)이나 색(塞)은 다 같이 ‘마개’란 뜻이다.
일본에서도 역시 전(栓 せん) 자는 수도 따위의 개폐 장치, 수도꼭지로 쓰인다. 그러니 소화전은 불을 끄기 위하여 쓰이는 개폐 장치(수도꼭지, 수도 고동)가 들어 있는 시설이란 뜻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똑같이 소화전(消火栓)이란 말을 쓰고 있고, 전(栓) 자는 개폐 장치란 뜻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소화전(消火栓)도 이들 이웃 나라의 말을 그대로 들여와 쓰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 코로나 예방주사를 맞고 혈전증(血栓症)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세간에 널리 돌아,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혈전증은 혈전(血栓) 곧 혈관 안에서 피가 엉기어 굳은 덩어리에 의하여 생기는 병이다. 핏덩어리가 혈관을 막아서 생긴 병이다. 이 경우의 전(栓)은 ‘마개’의 뜻으로 읽혀진 것이다. 혈전이 마개와 같이 혈관을 막아서 생긴 병이기 때문이다.
시가지의 인도를 걷다 보면 ‘제수변’이나 ‘이토변’, ‘배수변’이라는 맨홀 뚜껑이 많이 있다. 제수변(制水弁)은 지수전(止水栓)이라고도 하는데 상수도 등의 물을 통제할 수 있는 기계장치를 설치한 곳이다. 각 가정에 수돗물을 내보내는 작은 관이 연결되어 있는 큰 관을 잠그거나 풀 수 있는 밸브가 설치되어 있다. 이때의 ‘변(弁)’도 마개 역할을 하는 ‘전(栓)’과 같은 뜻이다.
즉, 제수변은 가정으로 가는 작은 관이 중간에서 터지거나 관을 보수해야 하는 등의 문제가 있을 경우에, 그곳으로 물이 흐르지 못하도록 큰 관을 잠가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설치된 장치로서, 큰 수도꼭지 밸브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이토변’은 수도관을 수리할 때 그 속에 들어간 흙 등의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한 밸브가 설치되어 있는 곳이다. 그리고 배기변은 수도관을 수리하면서 들어간 공기를 빼내기 위한 밸브와 장치들이 들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 말은 일본말을 그대로 가져와서 쓰고 있으므로 언뜻 들어서는 뜻이 잡히지 않는다. 이 말의 ‘변(弁)’ 자는 ‘판(瓣)’ 자를 써야 맞는 말이다. ‘판(瓣)’은 본래 ‘꽃잎’을 가리키는 글자인데, 판막(瓣膜) 즉 날름막을 뜻한다. 우리 몸의 심장이나 혈관에서 피 흐름을 제어하는 기관이 날름막이다. 날름막은 피의 흐름을 제어하는 마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이 이 ‘판(瓣)’자를 ‘변(弁)’자로 쓰는 것은 두 글자의 음이 벤[べん]으로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획수가 복잡한 ‘판(瓣)’자 대신, 쓰기 편한 ‘변(弁)’자를 쓰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판(瓣)/변(弁)’으로 두 글자의 음이 다를 뿐만 아니라 ‘판(瓣)’은 날름막을, ‘변(弁)’은 고깔을 뜻하기 때문에 두 글자의 뜻이 판연히 다르다. 그래서 이 두 글자를 바꾸어 쓸 수가 없다. 제수변이라 하면 우리말로는 ‘물을 제어하는 고깔’이 되므로 전혀 말이 안 된다. 이토변이나 배기변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제수변은 제수판이라 해야 한다. 이토변, 배기변도 이토판, 배기판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 일본 사람들이 쓴다고 해서 무조건 따라서 쓸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첫댓글 오늘 강의는 참 어렵습니다. 전이 개폐장치를 뜻하고, 변이 또 같은 뜻이고, 판이 날름막, 변이 고깔이군요. 어서 변을 판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는 날이 왔으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