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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10월28일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
[수원] 우리는 살아있는 주님 성전의 벽돌들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제1독서 에페 2,19-22
† 복음 루카 6,12-19
시몬 성인과 유다 성인은 열두 사도의 일원이다. 시몬 사도는 카나 출신으로
열혈당원이었다가 제자로 선택되었다. 그는 주로 페르시아 지역에서 선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유다 사도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과
구별하여 ‘타대오’라고 불리기도 한다. 『신약 성경』의 유다 서간 저자인
유다 사도는 유다 지역에서 선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사도는
예수님의 친척일 가능성도 있다. 예수님의 형제로 언급되는 복음 구절에
같은 이름이 나오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마태 13,55)
★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의 신자들에게 교회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퉁잇돌이라고 가르친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진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밤새워 기도하신 뒤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시어 사도라고 부르셨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은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을 통하여 사도라는 인물의 중요성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뽑기 전 산에서 밤새워 기도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도들이
교회의 기초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도들이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늘 나라를 세상의 권세로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주님과 삶을 가장 가까이 나눈 이들이지만 그분의
수난이 다가오자 두려워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 곁으로 다시 모여들었고, 끊임없이 회개하며 스스로를 정화해
나갔습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전하고자
목숨까지 내놓으며 마침내 교회의 든든한 초석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 가운데에서 그들을 뽑으신 이유를 묵상해 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감탄하거나 칭찬하는 화려한 장신구와 같은 이들이
아니라 투박하지만 긴 시간의 단련을 통해 마침내 진가를 보일 ‘원석’과
같은 이들을 택하시어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빛나는 진실을 간직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못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열정과 인내와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그들에게서 보셨으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두 사도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적 약점을 이겨 내며 주님의 길을 굳건히 걸었던
‘진실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지난여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크나큰 감동을 남기시고 이 땅을 떠나실 때 시인 고은이 남긴
말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진실이 무엇인지를 그의 얼굴이 보여 주고 갔다.
나는 그의 말보다 그의 얼굴에서 그 진실을 만났다.”
교회의 기초인 사도들은, 신앙인의 얼굴은 다름 아니라 진실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 준 분들입니다. ‘작은 사도’로 살아가는 우리 또한 화려한
겉치레가 아니라 ‘진실한 얼굴’을 갖도록 애써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서울]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
2014년 가해 10월28일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셨다.>
+ 루카 6,12-19
‘조선, 중앙, 동아’는 우리나라의 언론사입니다. ‘한겨레, 경향’도
우리나라의 언론사입니다.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참 많이 다릅니다.
한쪽은 정권에 우호적인 기사를 많이 다룹니다. 기업이 발전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아직은 통일을 언급할 때가 아니라고
합니다. 북한에 무조건 퍼주는 대북정책은 안 된다고 합니다. 북한의 핵
위협이 있기 때문에 ‘전시 작전권’은 아직 회수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세월호 사건도 이제는 그만 이야기하자고 합니다. 자주와 통일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을 ‘종북 좌파’가 아닌가 하는 시각으로 대합니다. 지금의
풍요와 결실은 박정희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산업화 세력의 공이 크다고
말을 합니다.
다른 한쪽은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를 많이 다룹니다. 기업은 법인세를
더 내야 한다고 합니다. 서민들을 위한 복지가 더 확대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북한의 돌출 행동에도 불구하고 대북정책과 지원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과 같은 대북사업은 더
확대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미국과 약속한 한반도의 ‘전시 작전권’도
회수해야 한다고 합니다.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도 ‘기소권과 수사권’ 있는
특검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지금의 풍요와 결실은 열악한 환경에서
땀을 흘린 노동자들의 공이 크다고 합니다.
이것은 분열과 갈등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사건과 정책을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 볼 수 있어야 사회는 건강하게 성장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건과 정책을 하나의 관점에서만 바라본다면 그것은 전제주의 국가이고,
독재국가이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노동신문은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
비판적인 기사를 다루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정권에 대한 찬양과 찬사만이
가득할 것입니다. 우리는 북한을 열린사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북한
사회가 민주화되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성서는 ‘용비어천가’만을 다루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업적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을 더하거나 빼지 않고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분노를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영광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십자가를 이야기 합니다.
그분의 억울한 죽음도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이야기 합니다. 두려워서 다락방에 숨었던 일, 유다의 배반을
이야기 합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의 이야기도 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이야기도 솔직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정신에서
다시금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사도들과 언쟁을 벌이는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도 전해주고 있습니다. 고아나 과부들이 교회에서 소외 되었던 일도
말하고 있습니다. 성서는 이렇게 열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성령께서 교회를 이끌어 주시고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지고 있습니다.’ 마치 연어가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다시금 삶의 원천인 강가로 돌아오듯이 우리는 험한 세상을 살아가지만
그리스도께서 맺어주신 그 사랑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돌아가야 할 곳은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사도 시몬과 유다 성인의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불러 주셨던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 갔고, 주님의 품을
그리워하며 거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었습니다. 사랑하고 살기에도
부족한 인생입니다. 나누고 살기에도 바쁜 인생입니다. 늘 감사드리고,
항상 기도하고, 언제나 기뻐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기타] 우리 모두의 국적은 하느님 나라.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14년 가해 10월28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독서묵상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에페소서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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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묵상이 아니라, 저희 본당 자랑 좀 해야 할 듯 합니다.
저희 본당이 있는 곳은 일본 굴지의 회사들 공장이 적지 않게 모여있는
인구 약 23만 명 정도 되는 공업도시입니다. 따라서 약 1만 4천명의
외국인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모여 사는 곳이지요. 그러다 보니 저희 본당
역시 다양한 국적을 가진 이들이 모여 있는 다국적, 다문화 교회입니다.
평균 30여 개의 다른 국적의 사람들이 있으며, 8개국어의 언어들이
다수자의 언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제가 이곳 주임으로 부임된 후 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처음
주임신부로 부임을 해서 본당 분위기를 파악해보니,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본당이지만, 언어나 국적별로 여러 공동체가 존재하고 각기 다른
사제들이 와서 미사를 봉헌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하나의 교회가 아닌,
하나의 장소를 교대로 사용하는 이방인 집단들이 같이 따로 살아가는
처지였던 것이지요.
가톨릭이라는 하나의 이름을 모두 가지고 있었지만 같은 장소에 있는 다른
나라 교회였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우선 언어별로 미사를 하러 오시던
신부님들께 저의 사목방향을 정중히 말씀 드리고,
더 이상 오시지 않아도 된다는 의사를 밝힙니다.
원칙을 하나 세웁니다. 하나의 본당, 하나의 공동체, 하나의 가족이 이
본당이 이루어야 할 과제라고 말입니다.
먼저 일본인 신자들에게 부탁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국제적이라고 해도,
이곳은 일본이고 당연히 여러분이 주인이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다른 국적의 형제들을 최선을 다해서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합니다.
조건상 일본인만이 할 수 있는 것들로 외국인 형제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한 가족이 될 것이고, 이를 위해서
손을 먼저 내밀어 주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사실 일본인 신자들은 주인
의식을 갖는 것 자체를 차별의식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교회이니
차별은 있어서도 안되고 필요하다면 공동체간 서로 도와주는 정도로
만족하면 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음은 각 언어별 미사를 제가 직접 봉헌하게 됩니다.
그리고 부탁합니다. 여러분의 본당 신부는 나라는 것을 먼저 강조합니다.
모국어 미사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할 수 있게 배려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주일 미사는 일본어 교중 미사에 참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못을 박습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9년째 저는 다섯 나라
말의 미사를 봉헌하며 약속을 지키고 있습니다.
물론 발음조차 흉내내기 힘든 언어 미사는 손님 신부님을 청하고 있습니다.
각 언어별로 소사목회를 조직하고 본당 전체 사목회에 연결이 되도록
합니다. 9년째 매주 8개국어로 주보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일본어 교중
미사에서는 가능하면 다양한 방법을 통해 외국 형제들에게 메시지를
전합니다. 페이스 북과 같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서, 번역이나,
다하지 못한 친교나 면담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으니 이야기 하려면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여간 지금은 일본인, 외국인 할 것 없이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교회임을
의식하고 하나가 되어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떤 행사가 있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언어소통 문제나 문화의 차이는 더 이상 벽이 되지를 않습니다.
손짓과 몸짓, 아는 단어들 사용해 해가며 너무도 자연스럽게 막힘 없이
움직여지고 있습니다. 어제는 바자가 있었는데, 준비하는 과정부터
끝마무리의 미사에 참여하는 모습까지 그리도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미소가 떠나지 못하게 하는 하루였습니다.
오늘 미사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한 가족임을
강조하십니다. 참 많은 이들이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살고 있는 시대입니다.
대한민국 역시 많은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든 지 오래되었습니다. 가끔
외국인들에 대한 옳지 못한 처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참으로 안 좋습니다.
적어도 신앙을 가진 이들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의 국적은 하느님 나라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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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하느님의 거처 -기도와 공동체-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0월28일 화요일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에페2,19-22 루카6,12-1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셨다.>
+ 루카 6,12-19
하느님의 거처 -기도와 공동체-
"신부님은 단체생활을 하니 늦지 않게 들어가야 하지요?"
어제 만남에서 무심코 던진 어느 형제의 말 중, '단체생활'이란 말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 즉시 '공동생활'로 정정해 주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단체라기보다는 공동체입니다.
기도의 공동체요 기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공동체입니다.
기도가 공동체를 만들고 공동체가 기도합니다.
기도는 공동체의 영혼과 같습니다. 기도없는 공동체는 죽은 공동체요
기도가 활발한 공동체는 생명력 넘치는 공동체입니다.
기도의 분위기를 보면 공동체의 정도가 드러납니다.
하여 제가 가정공동체의 형성을 위해 강조하는 두 필수요소가 '기도'와
'식사'입니다. '기도와 공동체'의 렌즈를 통한 오늘 말씀의 묵상을 나눕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공동체도 예외가 아닙니다. 제자들 열둘을 뽑아
사도공동체를 만들때 선행된 예수님의 기도가 감동적입니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복음의 평범한 서두 말씀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매사 가장 중요한 우선 순위는 기도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우리 분도수도회의 모토도 '기도하고 일하라'로 매사 기도를 앞에
둡니다. 분도 성인 역시 '그 무엇도 하느님의 일(공동기도)보다 앞세우지
말라'말씀 하십니다.
기도 후 사도들을 뽑으신 예수님이요, 기도를 통해 탄생된 사도들의
기도공동체입니다. 기도는 모든 능력의 원천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뽑은 분별의 지혜도, 또 권능의 말씀과 치유도 기도에서 나왔음을 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느님 능력의 통로입니다. 기도할 때 마음도 눈도 귀도 활짝 열려
개인도, 공동체도 하느님 능력의 통로가 됩니다.
에페소에서 바오로가 보여주는 교회의 비전도 순전히 기도의 열매입니다.
기도를 통해 계시된 놀라운 비전의 교회공동체입니다.
눈에 보이는 건물이 아닌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성원은
외국인도 이방인도 아닌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하느님의 한 가족인 영예로운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을 기초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모퉁이돌로 하여 세워진 건물의
교회입니다.
성장하는 유기적 공동체인 교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의 공동체는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공동체입니다. 하여 공동체의 성장과 성숙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공동체라하여 다 똑같은 공동체가 아니라 기도에 따라
그 질과 양은 천양지차입니다.
바오로의 교회론이 참 은혜롭습니다. 하느님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거룩한 성전이자 하느님의 거처인 우리 안에, 우리 교회공동체 안에
있다는 놀라운 영적통찰입니다. 이런 영적통찰은 그대로 기도를 통한
하느님의 계시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매일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거룩한 성전으로 성장하는,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지는 우리들의 (수도)공동체입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우리는 살아있는 주님 성전의 벽돌들
2014년 가해 10월28일 성 시몬과 성 유다 타대오 사도 축일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셨다. >
복음: 루카 6,12-19
< 우리는 살아있는 주님 성전의 벽돌들 >
스파르타의 왕이 자기 나라를 방문한 이웃나라 군주에게 스파르타의
성벽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군주는 주위를 아무리 돌아보아도
성벽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스파르타 왕에게 “당신이 그렇게
자랑하고 있는 성벽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스파르타
왕은 자기의 훌륭한 군대를 가리키면서 “이 사람들이 이 국가의 성벽이며,
모든 사람들은 이 성벽을 이루는 벽돌들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로마가 강성하여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때에도 로마에는 성벽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단합이 잘 되었기 때문에 어떤 민족도 감히 로마를 칠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분열이 생기며 힘이 약해지자 성벽을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수많은 아랍민족들에 둘러싸여 있고 숫자적으로도 상대가
안 되지만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고 소리를 질러댑니다. 그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바로 이스라엘의 단합력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스타벅스를 비롯한 많은 회사들이 자신의 나라에 엄청난 돈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나면 미국에 있는 유태인들은 모두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한 나라가 허물어질 수 없이 강성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전쟁이 나면 외국에서 자진해서
돌아오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만약 모두가 돌아올 수 있다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30년만 지나도 젊은 사람들이 노인들을 부양해야 하는 수가 지금의 몇 배는
될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300년 정도 지나면 우리나라가 스스로를
유지할 수 없는 인구가 되어 나라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노령화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일까요? 자녀를 낳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낳아
기르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고
자녀를 많이 낳으라는 첫 번째 계명을 주셨습니다. 모두가 편한 것만을
찾는다면 큰 집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급박한 것은
자연입니다.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다보니 오염 때문에 그리고 자연의 파괴
때문에 앞으로 100년이면 북극과 남극을 제외한 대부분의 땅은 인간이
거의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된다고 합니다. 결국 우리의 이기주의가 우리
모두의 파멸을 앞당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지구 안에 살고 있고 또 한 나라 안에 살고 있습니다. 각자 개인의
영위만을 바라면 우리가 만들고 있는 큰 집은 조금씩 허물어지고 맙니다.
결국 혼자 살겠다던 사람도 함께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중국을 전부 가톨릭국가로 만들뻔 한 때가
있었습니다. 예수회의 마태오 리치가 중국 문화를 완전히 섭렵하고
국왕까지 마음을 빼앗았지만 다른 수도회들이 이것을 교황청에 밀고하였고
결국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쫓겨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아마도 다른 수도회에 대한 시기심에서 나온 결과인 것 같습니다.
남이 잘 되는 것이 교회 전체가 잘 되는 것이었는데도 내가 잘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어리석음은 어떤 공동체에서나 다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교회에서만은 이런 위험을 막기 위해 교회를 하나의 집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본당 안에도 많은 단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단체가 본당보다 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본당 사제가 한 단체에 대해
섭섭하게 대한다면 그것이 본당 전체를 위한 일임에도 크게 반발하고
일어서기도 합니다. 사실 한 건물엔 상당히 많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서로가 한 건물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한
건물이 바로 그리스도의 집임을 인식한다면 그 전체를 위해 개인의 뜻은
희생할 수도 있어야겠습니다. 각자가 자기를 먼저 챙기다가는 교회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파리 시내에 세계박람회 기념으로 철구조물인 에펠탑을 건립할 때의
일입니다. 파리의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모파상을 비롯한 많은 지성인이
그 일을 무척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탑이 완공된 후 모파상은 매일 에펠탑
카페에 올라가 차를 마시고 글을 썼습니다. 너무도 뜻밖의 일이어서 누군가
그에게 “그렇게 이 탑의 건립을 반대하고 싫어하던 당신이 어떻게 이 탑을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모파상은 “이 탑에 들어와 앉아
있으면 이 탑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파상은 개인적으로 나라가 하는 일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의 한 사람으로써 이미 정해진 것에 대해서는 자신의 뜻을
접고 그 나라의 대의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우리 각자가 사는
것보다는 우리 각자의 희생으로 한 교회가 그리스도를 모시는 튼튼한
성전이 되어가고 있음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많은 것들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014년 가해 10월28일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셨다.>
+ 루카 6,12-19
제가 아는 신부님 중에서 운전을 아주 잘 하는 신부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 차를 타면 편안하다고 이야기하고 또 도저히 주차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곳도 척척 주차를 하시는 등 아주 능수능란한 운전 실력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운전을 잘 하기 때문에 이제까지 사고 한 번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이상하게도 크고 작은 사고를 참 많이
당하셨습니다. 즉, 자신의 잘못보다는 상대 운전수의 잘못으로 인해 사고를
겪게 된 것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운전을 잘 하기 때문에 사고를 피할
가능성은 많지만, 그래도 사고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하긴 운전을 잘 한다고 해서 교통체증이 심한 곳에서 앞으로 쭉쭉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앞에 사고가 나서 꼼짝달싹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을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즉, 자기만 잘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어쩌면 이 세상은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때, 편안함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만 잘 나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나’에게만 모든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언젠가 어떤 분께서 이런 질문을 던지시더군요.
“‘나는 준다.’는 현재형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준다.’의 미래형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사람들은 “나는 줄 것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나는 준다.’의 미래형은 ‘나는 받는다.’입니다.”
내가 미래에 무엇인가를 받기를 원한다면, 지금 이 현재에 무엇인가를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나의
이웃들에게 무엇을 주고 있었는가 라는 반성을 하게 되네요.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을 맞아 오늘 복음에서는 열두 제자를
뽑으시는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 많고 재주 많은
사람들을 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당신을 팔아 넘겨 배신자의
소리까지 듣게 될 유다 이스카리옷까지 제자로 뽑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을 다 아시고서도 주시기 위해 부르시는 주님의 사랑이 여기에
담겨 있다는 것이지요.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 역시 주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라는 부르심, 하느님 나라 건설에 힘을 쏟으라는 부르심,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라는 부르심. 그리고 이 부르심에 철저히 응답했을 때,
구원이라는 큰 선물에 이를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자기중심적이고 세속적인 욕심만을 내세우며 사는 우리들입니다.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받은 나는 지금 현재 어떤 응답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많은 것들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더’ 달라는 요청만 하면서 배신에 배신을 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계단의 처음과 끝을 다 보려고 하지 마라. 그냥 발을 내딛어라(루터 킹).
하느님의 준비
어느 남자가 하느님께 기도했다.
“저 예쁜 여자와 결혼하게 해주시면 절대 바람피우지 않겠습니다. 만일
바람을 피운다면 저를 죽이셔도 좋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러나 살다보니 바람을 피우게
되었다. 남자는 처음에 두려웠으나 죽지 않게 되자 몇 번 더 바람을 피웠다.
3년이 흐른 어느 날 배를 타게 되었는데, 큰 풍랑이 일어나자, 옛날에
하느님과 한 약속이 떠올랐다. 이 남자는 무서웠지만 나 혼자도 아니고, 백
여 명이나 함께 배를 탔으니 설마 나 하나 죽이려고 배를 가라앉히진
않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 때 하느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너 같은 놈 백 명 모으느라 3년이 걸렸다.”
재미있는 이야기이지요? 하지만 이 안에서도 우리가 생각하고 반성할 것이
있네요.
죄 짓지 말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안
그러면 벌 받습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동틀 무렵까지 이야기 나누며
2014년 가해 10월28일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셨다.>
+ 루카 6,12-19
동틀 무렵까지 이야기 나누며
여름에 캠핑 가 불 지피고 노래 게임하며 지나다 보면 시간 잘 갑니다.
때론 동틀 무렵까지 열심히 이야기 나누며 토론에 열도 올립니다.
그 때의 추억이 아직 아름다운 장면으로 머릿속 스크린에 살아납니다.
그러면서 생각나는 친구들이 궁금해지고 가끔은 전화해서 만나기도 합니다.
그렇게 맺어진 우정이 이렇게 끈끈한 것은 아마 깊은 대화 때문일 겁니다.
예수님도 아빠 성부와 밤새 깊은 대화 후 제자들을 뽑으신 것 이해 갑니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루카 6,12~13)”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청주] 주님은 역시 다르시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10월28일 성 시몬과 유다 사도 축일
(루카6,12-19 ; 에페소 2,19-2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셨다.>
+ 루카 6,12-19
주님은 역시 다르시다.
축일을 맞이한 모든 이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굳건한 믿음과 사도적
열성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냥 뽑으신 것이 아니라 밤을 새우시며 기도한 다음
뽑으셨습니다. 그 기도의 열매는 확실했습니다. 열혈당원이라 불리는
시몬과 세리 마태오를 비롯하여 배신자 유다까지도 그 대열에 속해
있었습니다. 시몬과 마태오는 서로의 위치가 대립적입니다. 우리나라를
비유하자면 일제 강점기의 독립군과 친일파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피의 증거자’가된 야고보와 복음과 묵시록을 통한‘영혼의
증거자’로 불린 요한은 격정적인 성품이었습니다. 그들은 은총에 의해
온화하게 바뀌었습니다. 겁이 많은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거짓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불리던 나타나엘이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도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마태26,33).하고 장담했지만 죽음 앞에서는“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마태26,72).하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습니다. 개별적으로 볼 때 별 볼
일없는 사람들이 뽑힌 것입니다. 이것이 밤새껏 기도한 결과입니다. 그냥
뽑았으면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뽑혔을 텐데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렸기에 장차 당신을 배신할 배반자들까지도 뽑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5,16). 이것이
스승의 참 모습입니다. 그분의 품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내가 그분의 품을 떠날 뿐입니다.
제자들은 부족함이 많았지만 예수님을 만나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잘못을 범한 베드로는 으뜸제자로서 역할을 다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열혈당원 시몬은 늘 투쟁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투쟁과는 상관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살았고 또
전했습니다. 죄인 취급 받던 마태오도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세관장 자캐오를 생각하면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남을
속여먹은 것은 네 곱절로 크게 갚아주고 구원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세리마태오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다는 잘못은
뉘우쳤지만 죄책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변화된 삶을 살면 행복이 오고, 변하지 않으면 끝이 불행합니다. 주님의
자비를 믿으면 미래가 열리고, 믿지 못하면 그 자체가 영벌입니다.
일상의 삶을 봅니다. “여자는 결혼 후 남자가 변하길 바라지만 남자는
변하지 않는답니다.” 아니 오히려 기대와는 반대로 변한답니다. 또한
“남자는 결혼해도 여자가 변하지 않길 바라지만 여자는 변한답니다.”
여자도 역시 남자가 기대하는 바와는 다르게 변한답니다. 집에서는
체육복을 입고 그야말로 아줌마가 된답니다. 서로 서로 부족함을 채워주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변해야 하는데 부족함에 대해 서로 잔소리만 늘어 가면
불행합니다. 변하되 상대를 바꾸려 하지 말고 내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세례전이나 세례 후나 변한 게 없으면
불행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예수님과의 만남이 깊어져야 행복합니다.
사도들이 주님을 만나 새 삶을 살았듯이 우리도 새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참된 스승 앞에 참된 제자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필리3,21).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열정 없이는
2014년 가해 10월28일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셨다.>
+ 루카 6,12-19
열정 없이는
시몬 사도에게는 언제나 ‘열혈당원’이란 꼬리표가 달렸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 불림 받기 전에 유다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치던
사람이었습니다. 일제 군경에 맞서 무장 투쟁하던 ‘독립군’으로 보면
됩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는 몇몇 굵직굵직한 정파가 나름대로 세를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당파로는 바리사이, 사두가이가 있었고, 세례자
요한을 따르던 무리도 있었습니다. 그중에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창시한
‘열혈당’이 있었는데, 극단적 국수주의파로 정복국가 로마를 향한 잔혹한
테러 행위도 마다하지 않던 행동당파였습니다. 얼마나 폭력적이었던지
후에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포위되었을 때 화해주의자들을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끝내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사해부근 마사다로 도피하여
죽기까지 항전하였습니다.
이런 열혈당에 속해있던 시몬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를 당신 제자단에
가입시킵니다. 시몬 안에 들어있던 불같은 열정을 높이 사신 것입니다.
물론 제자단 가입 후 예수님으로부터의 집중적인 과외수업으로 성격이
많이 부드러워졌겠지요. 그러나 독립 투쟁하던 시절의 그 성격 유형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복음 선포 과정에서도 그는 과격했으며 그야말로
온몸을 내던지고 불살랐습니다.
중년기, 갱년기 탓인지 주님을 향한 열정, 복음 선포를 향한 열정이 많이
사라졌음을 슬픈 눈길로 내려다봅니다. 가끔씩 삶의 에너지가 모두
빠져나간 열정 없는 영혼들도 바라봅니다. 참으로 서글프고 맥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열정이 없다는 것은 마음이 없다는 것, 영혼이 없다는 것, 의지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안에 아무런 열정 없이 흐리멍텅한 모습으로는
기도도 할 수 없습니다. 열정 없이는 하느님 체험도 요원합니다. 열정
없이는 우리가 행하는 사랑의 사도직도 그 빛을 잃고 맙니다. 결국 열정
없이는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을 향한 활활 타오르는 열정이 있어야 내면의 잡다한
생각들과 분심들을 태워버릴 수 있습니다. 용광로 속에서 순금을 걸러내듯
열정을 통해서 영혼의 순수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보다 특별한 성소로 부르신 이유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기 전 심사숙고하시는 모습이
루카 복음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복음 6장 12~19절)
한없이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분명히 하느님께서 우리를 눈여겨보셨습니다.
심사숙고 끝에 오랜 기도 후에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크신 당신 자비를
우리에게 베푸셔서 우리를 고귀한 당신 제자직에 불러주셨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 안에 남아있는 주님을 향한 열정의 불씨를
되살려야겠습니다. 우리 안에 복음 선포를 향한 간절한 열정이 활활
불타오르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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