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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밖을 나서면 흠뻑 들어오던 아카시아 향도 이미 수그러들고 있습니다. 산길에는 그 꽃잎들이 하얗게 길을 덮고 있습니다. 그렇게 봄도 기울고 기온은 이미 여름을 향하고 있습니다. 푹신하던 발걸음이 다시 먼지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비가 내리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그저 몇 방울 떨어지다 말고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주 1회 정도는 비가 내리면 참 좋겠다 싶습니다. 나무도 풀도 숲도 산도 살아납니다. 그 속을 지나는 우리도 절로 생기가 넘칩니다. 그냥 파란 하늘만 본다고 좋은 것이 아니지요. 촉촉한 대지로부터 생명체는 그 생기를 얻습니다. 다시 비가 오기를 기다립니다.
치과 치료를 다녔습니다. 지난 한달 동안 매주 한 번씩 서울 동대문 근처까지 다녀왔습니다. 그 날은 그냥 그렇게 하루를 지내게 됩니다. 가고 오는 시간과 기다리며 치료받는 시간, 다녀오면 몸도 맘도 지칩니다. 치과 치료라는 것이 얼마나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지 받아본 사람은 다 알 것입니다. 더구나 그 치료비라는 것도 웬만한 동네 의원 다니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한 동안 어렵게 모은 돈이 그대로 빠져나갑니다. 저만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어려서부터 유난히 치과하고 인연이 깊습니다. 하나도 좋은 일이 아니지요. 돈은 고사하고 정말 지치는 일입니다. 글쎄 또 언제 다시 곧 갈 것입니다. 오복 중의 하나라는 옛말이 거저 나온 것이 아니지요.
여왕도 늙어갑니다. 어느덧 중순, 여름을 준비해야지요. 젊음의 계절이라는데 나이든 사람들에게는 인내의 계절이 되겠지요. ㅋㅋ 암튼 건강해야지요. 다시 건강하고 복된 한 주를 기다립니다. *)*
2022년 5월 21일 김종우 목사 드림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사무엘상 14 : 6)
<민스미트 작전>
전쟁에서 ‘기만술’은 매우 유용합니다. 물론 그 유명한 ‘손자병법’에도 나옵니다. 그러나 일반 세상에서는 다른 사람을 속이는 일이며 소위 ‘사기’입니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냥 폭력을 당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마음의 상처를 입습니다. 잘 알듯이 몸이 아픈 것보다 치유가 더 힘들 수도 있습니다. 마음을 다치고 정신적 상처를 입으면 그 고통은 꽤나 오래 갑니다. 더구나 트라우마로 자리 잡고 꾸준히 괴롭힙니다. 그래서 사기죄는 중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전쟁에서는 어떤가요? 전쟁의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승리 외에 없습니다. 옛날 같으면 패전은 죽음 아니면 노예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사느니 죽는 게 낫다 싶을 것입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무슨 수단을 가리겠습니까? 휘하 병사들을 살리는 일이고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일입니다. 일단 이기고 봐야 합니다. 수단방법이 정의로운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접어야 합니다. 우리 편, ‘우리’가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 적을 속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구애받을 일은 아닙니다. 문제는 과연 속아 넘어가느냐 하는 것이지 그 방법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것은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상대방 곧 적군이 아군의 의도대로 믿어주어야 합니다. 어쩌면 더 치밀하게 현실보다 더 그럴듯한 현실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다른 군사작전보다 더 까다롭고 힘든 작업을 해내야 하는 것입니다. 구상도 좋아야 하지만 그것을 현실처럼 만드는 배우(?)들도 대단한 연기를 해내야 합니다.
잘 아는 제2차 세계대전에는 그 규모만큼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기막힌 기만작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전쟁이란 땅을 얻기 위한 쟁탈전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땅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희생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정복자는 인명에 대하여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일단 땅을 차지하는 것이 목적이고 목적 달성에 충실할 뿐입니다. 그러나 지키는 쪽은 땅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곳의 사람들이 어쩌면 더 중요합니다. 희생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당연히 작전을 세우고 행함에도 보다 더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경제원리가 적용된다고 볼 수 있지만 아무튼 최소의 희생을 감내하며 반드시 성공하고 승리를 해야 합니다.
유럽의 판도를 보면 지중해에서 군사적으로도 시칠리아 섬은 매우 요충지입니다. 연합군은 이곳을 반드시 쟁취해야 합니다. 당연히 침략자인 독일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빼앗겨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곳에만 23만의 대규모 군사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무작정 들어갔다가는 빼앗는 것은 고사하고 무수한 병력만 잃고 말 것입니다. 함부로 대들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곳의 적군을 어떻게 다른 곳으로 이동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 선결 과제입니다. 독일군의 최고사령관 명령 하나만 있으면 해결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듣고 믿고 그 중요한 곳에서 군사를 다른 곳으로 빼돌립니까? 그렇게 만들어야 합니다.
히틀러가 가장 신뢰하는 측근이 누구인가 알아야 하고, 그 사람이 어떤 사건에 대한 보고를 받아야 하고, 그 사건은 대단히 중대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사건을 만들어야 하고 사람을 찾아야 하며 그 사람이 그 사건을 믿을 수 있도록 일을 꾸며야 합니다. 참으로 대단한 이야기 구성이 필요하고 또한 그 인물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고는 매우 신빙성이 있어야 합니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확신을 가지고 하나하나 가능성을 짚어가며 준비해야 합니다. 사실 아무리 철저히 준비한다 해도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어떤 돌발사태가 발생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세상일이 그렇지만 사람은 나름 최선을 다해 준비합니다. 때로는 예행연습까지 하면서 준비합니다. 그래도 예측불허의 사태가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손 놓고 바라볼 수만은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네 현실입니다. 도전은 우리네 인생의 과제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인생은 다른 동물과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사람만이 목표를 세우고 예측하고 계획하고 준비하여 시행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인생이라면 한 번의 실수나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가 될 수 있지만 국가의 존폐가 걸린 문제라면 몇 사람 목숨으로 대체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 작전을 결정하는 지휘관의 심사는 누구보다도 무거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나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지요.
물론 전쟁영화입니다. 그런데 총성은 별로 없습니다. 최전선에서 총과 대포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영향은 엄청날 것입니다. 전쟁의 현장에 있는 병사들의 생명이 좌우됩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규모의 병력이 자칫 그냥 불구덩이에 내던져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작전의 성공 여부에 따라 그 결과는 전쟁의 흐름도 바뀔 것이고 무엇보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오락가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총탄이 빗발치지 않아도 보는 내내 가슴이 쫄깃해집니다. 이런 영화도 있구나 싶지요. 영화 ‘민스미트 작전’(Operation Mincemeat)를 보았습니다. ‘민스미트’ ‘다진 고기’라는 뜻입니다. 사실 고기도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답니다.
질문 11. - 어느 산으로 도망가요?
마지막 때를 당하면 산으로 도망하라고 말씀합니다.(마 24 : 16) 도대체 이 많은 산들 중에 어느 산으로 가야 하지요?
외국인들이 우리 대한민국을 부러워하는 것 중에 하나가 도시 내에 또는 근처에 산이 있다는 것입니다. 서양의 도시들은 대부분 벌판에 세워져 있답니다. 그래서 산행을 한번 하려면 차를 타고 도시를 떠나 멀리 가야만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수도 서울만 해도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도시 중심에 남산,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면 가까이 청계산과 관악산, 도봉산, 북악산, 북한산, 까치산, 불암산 등 줄줄이 서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주말에 당일치기로 산을 다녀올 수 있습니다. 그런 나라가 많지 않답니다. 산에 올라 도시를 내려다보는 풍경 또한 흔치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남산에 올라 서울 야경을 내려다보는 즐거움을 어디서나 가질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외국 관광객들 중에는 이제 산악인들이 많이 껴있습니다. 도시 관광은 물론이고 산행까지 할 수 있다니 금상첨화라는 것입니다. 아무데서나 그런 관광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 정말 복 받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도 좀 특별한 산들이 등장합니다. 잘 아는 에덴동산은 산이라고 하기에는 좀 동네 뒷동산 같은 느낌이 듭니다. 조금 유명한 산들이 몇 있습니다. 우선 노아가 홍수를 견뎌내고 방주를 머물게 했던 ‘아라랏 산’이 있습니다. 지금 터키 지방에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시내 산’이 있습니다. 모세가 40일 금식하고 하나님께로 십계명 돌비를 받았던 산입니다. 그 외에는 다윗이 예루살렘 성을 지었던 근처에 ‘시온산’ 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 기도하신 ‘감람산’이 있습니다. 조금 더 성경을 아는 성도라면 선지 엘리야가 우상숭배자들과 대결했던 ‘갈멜산’과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크고 높은 산 ‘헐몬 산’을 알 것입니다. 성경에서 낯익은 산들은 그 정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우리가 그 이름을 다 알 수 없는 산들이 많습니다. 하기야 나라마다 지역마다 크고 작은 산들이 많지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산들도 많습니다.
자 그런데 예수님이 마지막 때 곧 세상 끝을 이야기하면서 산을 언급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참 이상하지요. 마 24 : 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그 때에 곧 마지막 때에는 산으로 도망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느 산으로 도망하라는 것이지요? 성경에 나오는 산입니까, 아니면 세상 어디에 있는 어떤 산을 이야기하는 겁니까? 이제는 사실 하나님 백성이 유대 땅보다는 다른 나라들에 더 많습니다. 특히 오늘날 어디에 있는 하나님 백성,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이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설마 신앙도 없는 지역이나 사람들에게 오시지는 않겠지요. 유럽입니까, 미국입니까, 아프리카입니까, 아시아입니까? 어디입니까? 어느 나라에 있는 산으로 가야 합니까? 각자 알아서 가까이 있는 산으로 가면 됩니까? 우리 하나님이 그렇게 두루뭉술합니까? 우리처럼 그냥 적당히 신앙생활 하면 천국 들여보내 주신답니까? 우리가 여태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이제는 회개하고 마음을 확실하게 잡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천국은 그렇게 얼렁뚱땅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대학 들어가는 것만도 못하다니 천국이 그렇게 싸구려입니까?
다시 짚어봅니다. 마 24장은 예수님이 ‘세상 끝’ 곧 마지막 때를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장래 일입니다. 그러므로 문자대로 읽을 것이 아니지요. 비유입니다. 이미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해, 달, 별처럼 문자대로 볼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비유하신 뜻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누구에게 산으로 도망하라고 말씀하시는가 보겠습니다. ‘유대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다른 곳에 있는 사람들은 해당도 안 되네요. 저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유대인들 외에는 도망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입니까? 그러니 이 ‘유대에 있는 자들’ 또한 비유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당시 하나님 백성이라 하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 외에는 소위 이방인이지요. 그러니 유대에 있는 자들이란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 백성’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로 말한다면 ‘유대인’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니 오늘의 현실로 바꾼다면 마지막 때 그리스도인들은 산으로 도망하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느 산이야 하는 것이지요.
우선 성경은 사람을 ‘흙’으로 지었다 하고 ‘흙’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창 2 : 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을 등지고 나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창 3 :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사람을 ‘흙’이라 하셨습니다. 때로는 ‘땅’ 또는 ‘밭’으로도 표현합니다. 잘 아는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를 봅니다. 마 13 : 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여기 ‘좋은 땅’은 곧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 밭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땅(밭)이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산은 흙이 잔뜩 쌓여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게 비유를 풀자면 산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지요. 아주 쉬운 예로 우리말에 ‘인산인해(人山人海)’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 백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이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 백성입니다. 그 하나님 백성이 모여 있는 곳을 구약시대에는 ‘성전’이라 하였고 신약시대에는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산은 흙이 모여 있는 곳, 다시 말해서 하나님 백성, 성도가 모여 있는 곳 즉 성전(교회)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성전이라고 하면 ‘예루살렘 성전’을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마지막 때 어떻게 된다고 하셨습니까? 마 23 : 37 - 38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하나님은 구원하시려 하였지만 그 백성은 원치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살해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까지도 원치 않고 멸시천대하며, 핍박하다 못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어쩌시겠습니까? 버릴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라보시며 탄식하신 이유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하신 것은 당시의 일어날 일이 아닙니다. 예언입니다. 그러니 마지막 때 곧 예수 재림 때 일어날 일입니다. 물론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재림 때도 똑같이 일어날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 다시 오실 때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하고 있어야 합니다. 초림 때 하나님 백성의 특히 지도자들, 하나님의 종이라 하던 목자들이 나서서 주님을 핍박하고 쫓아내었듯이 재림 때 다시 오신다 해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재림 때는 누가 하나님 백성입니까?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의 목자들이 또 앞장서서 재림하신 주님을 핍박하고 멸시천대하며 쫓아낼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18 :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그 때는 세상에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것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는 사실부터 깨달아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의 종이라 하는 목자들이 주님께 주장할 것입니다. 마 7 :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렇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23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니 두려운 마음으로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런 목자들이 있는 교회들 또한 하나님과 예수님이 함께 계시리라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달리 표현한다면 그 산(교회)에는 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이 계신 산을 찾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계신 산으로 가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때 그 산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구약에도 하나님이 계시는 산이 있었습니다. 시 68 : 15 - 16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임이여 바산의 산은 높은 산이로다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뇨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영히 거하시리로다” 먼저 생각해볼 것은 ‘산들이 산을 시기한다’는 말입니다. 비유임을 짐작할 수 있겠지요? 산이 무슨 생명체입니까? 시기를 하다니요! 그러니 이 ‘산’이 산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 하나님이 거하시려는 산이 나옵니다. ‘바산’이 유대에 있는 지방의 지명임은 틀림없습니다. 거기에 높은 산이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바로는 민 21장에 나오는 ‘바산 왕 옥’입니다. 이스라엘을 대적했다가 패망한 왕입니다. 그가 지배했던 바산 지역을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되었지요.
아무튼 산이, 산이 아니고 하나님 백성이 모인 곳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과 함께 하시고 그 백성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버린 하나님 백성이라 칭하던 유대인을 떠나십니다. 그렇게 예루살렘 성을 버리셨습니다. 다시 오신다면 주님은 어느 산에 오시겠습니까? 그러나 이것 하나는 마음에 담고 있어야 합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용어입니다. 그 자체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의미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면 지금 팔레스타인에 있는 나라 또는 그 민족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사용할 때도 있지만 성경을 볼 때는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을 뜻하고 ‘하나님 백성의 나라’를 뜻하는 것입니다. 옛날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기에 ‘예루살렘’이라고 하면 곧 ‘하나님 계신 곳’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마지막 때 성도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계시는 산으로 가야 합니다. 거기에 구원이 있고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마지막 때 유대에 있는 자들 곧 하나님 백성은 그 산으로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도대체 그 산이 무슨 산이고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요? 이 마지막 때의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는 이야기는 바로 ‘요한계시록’에 있습니다. 계시록을 읽으면 예수님이 등장하는 산이 나옵니다. 계 14 : 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여기 ‘어린양’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은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면서 말한 것이 있습니다. 요 1 :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자 예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바로 ‘시온산’입니다. 물론 실제로 시온산은 지금 유대 땅에 있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 성도는 모두 저기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나라가 있는 곳으로 가서 시온산에 올라야 합니까? 그게 아니라는 것은 이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온산’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백성이라면 그곳으로 찾아가야 합니다. 슥 8 : 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여기 나오는 명칭을 봅니다. ‘시온’ ‘예루살렘’ ‘진리의 성읍’ ‘여호와의 산’ ‘성산’ 모두 다른 것을 지칭하는 것일까요? 짐작할 수 있지만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그곳을 가리켜 시온, 예루살렘, 진리의 성읍, 여호와의 산, 성산이라고 칭한다는 말입니다. 한 가지 추가로 설명한다면 그곳은 ‘진리의 성읍’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말씀이시고(요 1 : 1) 당연히 그 말씀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요 17 :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진리의 말씀이 나오는 곳이 하나님과 예수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마땅히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을 찾아가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때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을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성경을 가지고 전하는 목자에 따라서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미 예를 들었듯이 예수님과 당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 성경을 가지고 전하는 말이 달랐기에 서로 갈등을 빚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마 15 : 7 - 9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이 말씀은 사 29 : 13을 그대로 인용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니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은 하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성전)에 앉아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듣지만 그 말씀이 ‘사람의 계명’이라면 그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자기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성의를 다하겠지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아닙니다. 당신의 말이 아니라 다른 말을 하고 있는데 그 예배를 받으시겠습니까? 유대인들이 ‘우리 아버지는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야.’(요 8 : 41) 하고 주장하지만 예수님은 달리 말씀하셨습니다. 요 8 :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한 마디로 ‘너희 아버지는 마귀다,’ 그 말입니다. 믿어집니까? 자기네 생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여태 하나님을 믿고 살아왔는데 마귀라고요? 말도 안 돼지요. 중요한 것은 왜 그런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 속에 진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것을 전하지 않고 ‘제 것’을 전했다는 말입니다.
왜 똑같은 성경을 가지고 다른 말 곧 사람의 계명을 전하는 것이지요? 사 29 : 11 - 12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또 무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나는 무식하다 할 것이니라” 이전에 말씀드렸듯이 ‘묵시’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달리 표현한다면 하나님이 장차 이루실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예언(약속)대로 이루어지기 전에는 아무도 모르게 봉하셨습니다. 이루어지면 하나님이 당신의 목자를 보내어 그 사건을 다 보이시고 알려주시고 본대로 들은 대로 전하라 하십니다. 그 때 비로소 그 목자가 전하는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입니다. 그러니 그 전에 그 성경을 해석하거나 전하는 것은 모두 자기 생각이고 사람의 계명이며 거짓말입니다.
다시 오늘 말씀 ‘산’으로 돌아옵니다. 이제 산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성경에서 예언(약속)의 말씀 안에 나오는 ‘산’의 의미는 남산이나 북한산처럼 눈에 보이는 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곳을 말합니다. 마지막 때 도망가야 할 산은 하나님 진리의 말씀이 나오는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께로 보고 들은 목자가 자기가 보고들은 대로 증거합니다.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하나님도 이미 가르쳐주신 적이 있습니다. 신 18 : 21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그렇지요? 이렇게 답해주십니다. 22절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찌니라” 즉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증험과 성취함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약속(예언)하신 말씀에 대한 실제 사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목자는 약속하신 말씀이 어떻게 사건과 일치하는지 증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문제는 하나님의 목자가 자기가 보고들은 것을 증거하는데도 하나님 백성이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요 3 : 31 - 32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그 예수님이 장차 될 일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미리 말씀해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요 14 : 29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맞습니다. ‘이룰 때 믿으라고’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하신 말씀과 이루어진 사건을 맞추어보고 믿으라는 뜻입니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 때나 마지막 때나 보고들은 것을 전해주어도 하나님 백성이 믿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네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를 것이기 때문이지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고 하나님의 목자는 하늘에서 보고들은 것을 말할 테니 말입니다. 그것을 분별하여 그 말씀을 전해주는 산으로 찾아가야 진리를 만나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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