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복음 27장 1-2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는 종교지도자들
가야바는 아무리 심문을 해도 입을 여시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말하라”고 하자 그제서야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로서 앞으로 무슨 일을 하실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 계시다가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자 가야바는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했다고 몰아붙였습니다.
왜 그것이 신성모독이라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한 것과 동일하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것을 옆에서 들은 사람들이 “네가 그리스도라면 너를 친 자가 누군인지 말해보라”고 하면서 때렸습니다. 이들은 일종에 가야바에게 동조를 하면서 아부를 하기 위해 예수님을 주먹과 손바닥으로 친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가야바와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함께 의논했습니다. 그로인해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사형집행권이 없었기 때문에 로마 관리의 힘을 이용해야만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다름 아닌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정상적으로 예수님을 가장 먼저 환영해야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첫째로 이세상의 지헤와 지식으로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을 보면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로는 알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신학책을 많이 읽어도 지식만으로 예수님을 알수가 없습니다. 실존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지 않는 한은 예수님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에 가서 한국의 김치맛을 설명한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아프리카 사람들 가운데 김치 맛을 본 사람이 없이 때문에 아무리 말과 글로 표현하려고 해도 그 맛이 어떤 것인지 느끼게 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김치를 가지고 가서 한 사람씩 맛을 보여주면 그들은 김치 맛을 이해할 것입니다. 신학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연구해도 이론적으로만 알지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 수는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예수님을 알게 하시면 예수님을 개인적이고 실제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는 지속적으로 이어집니다. 왜냐하면 날마다 예수님을 더욱 더 알게 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사랑이 삶으로 보여지고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듯이 사이 좋은 부부는 서로의 눈만 봐도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압니다. 목소리만 들어도 어떤 감정인지 압니다. 만일 상대방이 장난을 하기 위해 거짓말을 해도 금방 눈치를 챕니다. 하지만 사이가 나쁜 부부는 서로를 오해하기 쉽상입니다. 말을 하면 그 말만 가지고 판단하지 그 말속에 있는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또한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서로 의심의 눈초리로 봅니다. 그리고 말투도 역시 퉁명스러우며 상대방에게 일어난 일을 남을 보듯이 합니다. 자기 일처럼 느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의 살아있는 친밀한 관게는 기쁘게 살아가며 하루 하루가 활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에 마음을 쏟아 일합니다. 그 사랑의 힘이 너무나 커서 고난을 겪을 줄 알면서 선교사로 일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도 서슴지 않고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위한 봉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예수님과의 관계는 세상이 이해하지 못합니다. 겉으로는 좋은 일한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미련하다고 비방합니다. 아무 이익도 없는데도 매일 같이 퍼다 나누어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성과없는 것처럼 행하는 선한 일이 언제가 하나님의 시간에는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적으로는 미련하다고 여겨지는 지혜가 오히려 구원에 이르는 지혜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세상적으로 지혜롭다고 하는 지혜는 이 세상의 삶에서는 두드러지게 뛰어날지 몰라도 예수님을 아는 데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을 보면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이나 백성의 장로들은 모두가 똑똑하다고 일컬음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지혜자라고 해서 랍비라는 칭호를 주면서 사람들은 그들을 높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도 많이 읽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눈에 그리스도는 숨겨졌습니다. 바로 앞에 서 있어도 예수님 안에 감춰진 하나님의 형상도 영광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따랐던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을 보면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에 의해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로움이요, 하나님이 구별하신 거룩함이며,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이것을 모든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은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바로 이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기뻐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이해하지 못해도 말입니다.
두 번째로 이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알거나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 은혜는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와도 거부합니다. 은혜가 은혜인 것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후에 땅을 치고 후회할 노릇이지만 그 당시에는 절대로 믿어지지 않았고, 자기들 역시 ”그리스도가 목수의 아들로 올 리가 없어“하면서 업신여긴 것입니다. 이것이 겉으로 보이는 것만 중요시 여기는 사람과 내면을 보시는 하나님의 차이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했던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한 일은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긴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말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싫어합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싫어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싫어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교회를 싫어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싫어하는 이유가 예수님 자신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시비를 걸어 악을 행하게 하고 세상 법정으로 끌고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예수님을 의지하십시오. 아무 저항없이 당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승리하시고 부활의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으셔서 여러분들을 위한 중보를 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세상에서 시험을 이길 수 있고,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할 수있으며 또한 부활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힘든 일을 만나고 힘없이 당하는 일들이 많아도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주님이 여러분들의 도움이 되십니다. 유대인들에게 버림을 받아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셨던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일어나는 결박당하는 일, 남의 손에 넘겨져서 억지로 끌려다니는 일뿐 아니라 여러분들을 죽일 정도로 미워하면서 죽이려고 달려드는 사람들 앞에서도 그 결과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이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성령께서도 여러분들과 함께 계셔서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를 수 있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이 복이 여러분들 모두에게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