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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십이 지파 이야기(4)
창세기 30: 22~24
○ 요셉을 낳은 라헬
22.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고로 창8:1, 시127:3
23.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삼상1:6, 눅1:25
24.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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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에게는 열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중 두 명의 아들 요셉과 베냐민은 야곱의 노년에 태어난 아들로서 임신이 불가능했었던 여인,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 라헬에게서 태어납니다.
야곱에게는 4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라헬을 제외한 세 여인들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라헬의 언니 레아에게는 여섯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이 있었고, 레아의 몸종 실바와 라헬의 몸종 빌하에게도 각각 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아이를 낳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라헬의 경우는 아무리 기다리며 노력해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라헬은 다른 세 여인의 아들들이 자라나는 것을 지켜보면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을 겪습니다. 그녀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아이를 낳고 싶었습니다.
라헬은 언니 레아가 불임 치료제로 알려진 합환채를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을 레아와 동침시키는 대가를 지불하고 그 약을 얻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인간적인 노력은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문을 닫으면 열 자가 없고 하나님이 문을 열면 닫을 자가 없습니다. 이럴 때는 인간적인 노력을 하면 할수록 허사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라헬은 하나님께서 태를 열지 않으셨기 때문에 아무리 인간적으로 애쓰고 노력해도 임신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러나 하나님께서 드디어 라헬의 태를 열어주십니다.
2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 고로”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했다’라는 말은 ‘라헬을 잊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기다림을 거절로 해석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절이 아니라 기다림일 뿐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안타깝게 드렸던 기도들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좌절하고 거절당했다고 생각하며 상처를 받습니다.
라헬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라헬을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은 라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 태를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여러분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응답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를 포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고난을 겪고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은 능력이 없어서 그냥 두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가 안타깝게 몸부림치며 기도하는 것을 일찍 들어주시지 않고 시간을 끄는 이유는 우리들을 불가능한 상황까지 끌고 가시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기도응답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과 수단과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선물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이 특별히 주시는 아기는 정상적인 상태에서 낳는 아기와는 다르다는 것을 가르쳐 주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임신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어서 아기를 주셨음을 알게 하기 위하여 오랜 시간을 기다리게 하십니다.
그 예가 아브라함과 사라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을 만나서 아이를 낳으리라는 약속을 받은지 25년 만에 이삭을 낳습니다. 그때 이미 사라는 경수가 끊어진 상태였고, 아브라함은 1백세에 이르른 때였습니다. 그렇게 불가능한 상황 가운데 아이를 얻었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 아이를 주셨음을 확실히 알게됩니다.
이렇게 태어난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한 때가 나이 40세였습니다. 그들에게도 20년동안 아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20년 만에 기도의 응답으로 쌍동이인 에서와 야곱을 얻습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험난한 인생을 살았던 야곱에게는 여자가 4명이나 있었습니다. 그 중 세 여자는 쉽게 아이를 낳는데 라헬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라헬이 어렵게 낳은 아이는 하나님이 특별히 주시는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하기 위해서입니다.
23, 24절을 보십시오.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더라”
드디어 라헬에게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요셉입니다.
‘요셉’이란 ‘하나님이 부끄러움을 씻겨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요셉은 열두 아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아들이요,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레아가 네 번째로 낳은 유다의 가문에서 태어나셨지만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은 유다가 아니라 요셉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주는 인물입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보다도 요셉에게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합니다.
열두 지파 중 요셉에게만은 두 지파의 몫을 줍니다. 그래서 요셉 지파 대신에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열두 지파에 들어갑니다. 그만큼 요셉은 큰 복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41장 50∼52절을 보십시오.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을 낳되 곧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 낳은지라 요셉이 그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자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므낫세라는 이름은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 집안의 모든 일을 잊어버리게 했다’ 즉 ‘하나님이 나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다 씻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요셉은 므낫세를 낳기 전까지 험난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그는 30대가 되기까지 고독하고 어려운 시기를 겪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모함하고 오해해서 감옥에 집어넣기도 하고, 웅덩이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셉은 어떤 일을 만나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꿈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은 매사에 불평과 원망으로 맞섭니다. 하지만 요셉은 타고나기를 유머가 넘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요셉을 보면 예수님을 만나는 것같고 희망과 용기를 얻게 됩 니다. 요셉에게 므낫세가 태어난 후 요셉은 ‘내 고통과 억울함과 모든 수치는 이 아이가 태어남으로 끝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요셉의 아버지인 야곱은 부인이 4명이나 있었고, 형을 속여서 집에서 쫓겨나는 등 말하기 부끄러운 과거가 많았습니다. 누구든지 인간의 과거는 부끄러운 면이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므낫세가 태어남으로써 이 모든 수치와 고통이 끝났다고 말하고 요셉은 있습니다.
세상 질서와 다른 하나님 나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과거로부터 비롯된 수치와 아픔은 다 끝난 것임을 믿습니다. 황충이 먹어버린 듯 기억하기도 싫은 과거, 부모님의 수치스런 과거, 이런 것들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사라진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므낫세의 동생 ‘에브라임’은 ‘하나님이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라는 뜻입니다. 므낫세가 ‘부끄러운 과거를 단절’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두 번째 아들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고 창성한 열매를 얻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된 우리의 상태가 이와 비슷합니다. 과거에는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예수 믿고 깨달은 사실은 ‘이제는 하는 일들마다 30, 60, 1백배의 열매를 맺어 복이 넘치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태어나고, 이들을 통해서 요셉 대신에 두 지파가 탄생됩니다. 야곱은 임종이 가까와짐에 따라 자식들을 축복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할 때 당혹스러운 사건이 하나 발생합니다.
창세기 48장 10∼16절을 보면 야곱이 임종할 때가 되어서 자녀들을 축복할 때 야곱은 요셉 본인이 아니라 그의 두 아들을 축복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장자를 축복할 때 오른손을 그 머리위에 얹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큰 아들을 야곱의 오른손 앞으로 데려갑니다.
그런데 축복하는 순간에 갑자기 야곱은 손을 엇갈려서 아이들의 머리에 얹습니다. 오른손을 차남인 에브라임에게 얹고 왼손을 장남인 므낫세에게 얹었던 것입니다. 야곱이 늙어서 갑자기 정신이 이상해 진 것도 아닌데 이런 이상한 상황이 연출됩니다. 그러자 당황한 요셉이 상황을 바로 잡으려고 합니다.
창세기 48장 19, 20절을 보십시오.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그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이 너로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너로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리라 하여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놀라운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모든 일이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방법과 질서대로 되어나가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갈등이 생기는 이유 중 하나는 이처럼 자기 식으로 응답해 달라고 하는 데 있습니다. 요셉도 큰 아들에게 장자권이 있다는 세상적인 질서대로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 방법을 바꾸시면 사람들은 당황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형이 동생을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이 어린 아랫 사람이 나이가 더 많은 윗 사람을 섬기는 것은 세상적이고 상식적인 질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윗 사람이 아랫 사람을 섬길 수도 있다는 진리를 알게 됩니다.
상처와 실패를 끊는 축복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독립해서 자기 사업을 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독립해서 성공하면 그것은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남의 밑에서 일하는 것도 축복이라고 합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자기보다 늦게 입사한 사람이 진급을 빨리 해서 상관이 되어 그 밑에서 섬겨야 할 때 자존심이 상하고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는 것을 주변 사람들을 통해 봅니다.
므낫세는 장자인 자신의 축복권이 동생한테 주어지는 것으로 인해서 자존심이 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공평하시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었지만 므낫세는 불평하지 않고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므낫세는 에브라임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복을 받았지만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가 행복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또 ‘어떤 자리에 있느냐’에 행복이 달려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책임자가 되어야만 하나님이 자기를 축복했다고 생각합니다. 종종 우리는 ‘꼬리가 되지 말고, 머리가 되게 하옵시고’라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위치나 소유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독립해서 자기의 사업을 해야만 성공했다고 생각하지만 ‘독립’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연합’입니다. 자신이 리더가 되지 않은 상태라도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고 섬기는 것도 아름다운 축복이라는 사실을 므낫세를 통하여 봅니다.
세상의 갈등은 간단합니다. 모두가 이 ‘질서’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누가 윗사람이 되는가’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간주됩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모든 고생을 참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그 질서가 깨지면 배신당했다고 생각하고, 인생이 패배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삶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야곱의 열두 지파 가운데 이런저런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르우벤이라는 아들은 아비의 침상을 더럽혔고, 시므온과 레위는 살인한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사용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지파인 유다도 하나님의 자녀요, 르우벤도 하나님의 자녀요, 첩의 자식들도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몸종에게서 태어났든지 본처에게서 태어났든지 모두 제사장의 가슴에 보석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천국의 놀라운 비밀, 구원의 비밀을 발견하게 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과거와 출생 때문에 그리고 자기가 실패했다는 것 때문에 스스로를 괴롭히고 열등감과 분노와 상처를 가지고 살아갑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어떤 자리에 있든지, 어떤 출생이었든지 간에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것이 열두 지파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과거의 실패나 서열상 낮은 자리로 밀렸다는 것 때문에 인생을 낭비하거나 자신을 괴롭히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면 받아들이십시오. 억울한 상황에서도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리면 그것이 큰 복입니다. 윗 사람이 아랫사람을 섬기고도 평안하다면 그런 상황인들 어떻습니까. 적게 받고도 많이 받은 사람을 시기하거나 질투하거나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동생 밑에서 일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므낫세를 보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므낫세 지파에 대해서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명기 33장 16, 17절을 보십시오.
“땅의 보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나무 가운데 거하시던 자의 은혜로 인하여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찌로다 그는 첫 수송아지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도다 이것으로 열방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리니 곧 에브라임의 만만이요 므낫세의 천천이리로다”
므낫세는 집안의 모든 저주를 끊으며 태어나서 동생을 섬기는 지파가 됩니다. 한편 에브라임은 동생이었지만 므낫세 대신 장자의 축복을 받습니다. 이후로부터는 에브라임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에브라임은 어떻게 므낫세 대신에 장자의 축복을 받게 되었을까요? 에브라임이 무슨 일을 잘했다거나, 자격이 있다거나, 므낫세가 어떤 실패를 했기 때문에 장자의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밖에 해답이 없습니다.
감사의 기쁨
우리는 지위의 높고 낮은 것에 가치를 두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킵니다. 세상의 가치에 기준을 두기 때문에 하나님이 실수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받으면 됩니다. ‘왜 형은 크게 주고 나는 적게 주느냐’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법칙입니다. ‘형을 더 많이 주세요. 저 사람을 더 축복해 주세요. 제가 섬기겠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나는 작아져도 좋고, 섬겨도 좋고, 안 받아도 좋다. 병들어도 좋고, 누군가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라고 마음 먹은 사람은 불행해지지 않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도 이렇게 사십시오.
예수님께서 한 달란트 받은 사람,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 열 달란트를 받은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제각기 받은 것은 달랐지만 많이 받은 사람만이 복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달란트의 차이는 하나님의 편애가 아닙니다. ‘왜 하나님은 저 사람에게는 능력을 많이 주시고 나에게는 적게 주시나?’ 또는 ‘어떤 사람은 크게 목회를 하는데 왜 나는 이렇게 작게 하나?’라고 비교하지 마십시오. 이런 고민을 하지 않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자기의 처한 상황대로 살면서 감사하십시오. 원망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과수원 주인이 품꾼을 고용했는데 아침 9시에 온 사람, 오후 3시에 온 사람, 5시에 온 사람한테 품삯을 똑같이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침 9시에 온 사람은 화가 나서 ‘아침부터 고생한 내가 겨우 한 시간 일한 사람하고 똑같이 받는 것은 불의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것이 자신의 뜻이라고 대답합니다.
주인은 불평하는 일꾼에게 자신은 처음에 약속한 대로 했을 뿐이며 1시간 일한 사람한테 대접해 주고 싶은 자신의 긍휼한 마음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고 합니다. 비교하지 마십시오. 키 큰 사람은 큰 대로, 작은 사람은 작은 대로, 많이 배운 사람은 많이 배운 대로, 적게 배운사람은 적게 배운 대로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은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요셉 이후 야곱에게 또 다른 아들이 태어납니다. 베냐민이라는 아들입니다. 늦둥이 막내로 태어난 베냐민의 출생에는 슬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창세기 35장 16∼18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산하여 심히 산고하더니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베냐민을 낳을 때 라헬은 난산으로 인해 죽고 맙니다. 그래서 라헬은 슬픔이라는 의미로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야곱은 베노니가 아니라 ‘오른손의 아들, 강한 아들’이라는 뜻의 ‘베냐민’이라는 이름으로 바꿔줍니다. 이렇게 베냐민이 태어난 곳이 베들레헴입니다. 그래서 어머니 라헬은 베들레헴에서 장사지냅니다.
베들레헴에서는 베냐민 외에도 다윗과 예수님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베냐민 지파 중에서는 사울왕과 에스더서에 등장하는 모르드개 그리고 신약시대의 사도 바울이 태어납니다.
베냐민 지파를 끝으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이야기가 마무리 됩니다. 요셉의 두 아들이 열두 지파로 들어가는 대신 레위가 제사장 지파로 따로 분리되어서 열두 지파가 만들어 집니다. 지파에 관련된 말 중 ‘므낫세 반 지파’라는 말은 지역이 두 개로 나누어졌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축복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네 명의 여인에게서 배다른 형제들로 태어나서 도덕적, 영적 수준이 제각기 달랐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불러 세우셔서 열두 지파를 만드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도 베드로나 가룟 유다처럼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섞여 있었지만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예수님의 증인을 삼아서 땅끝까지 파송해서 복음을 전하는 영광된 사도들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역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서 구원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출생이나 형제 사이의 문제나 위치와 지위 등이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복에 동참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용조 목사
출처: 성경 벌레들 원문보기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