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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동 세대문집에서 협회 출발 협회 간판을 붙인 북학동 세대문집은 처마 끝에 손이 닿을 정도로 초라한 집이었다. 그러다 보니 간판은 동네 아이들이 떼어다가 놀이판으로 쓰기도 하였고 반대하는 사람이 메쳐 쪼개 버려서 다시 연결해 붙이는 등 수없이 훼손당했다. 머리 숙여 세 개의 대문을 거쳐 집안에 들어서면 두세 평 넓이 마당 한구석엔 우물이 있고 그 옆으로 조그만 장독대가 있었다. 바른쪽에는 세 사람이 누우면 꽉 차고 발이 닿는 반 평가량의 안방이 있었고 왼쪽에는 한 평 못 되는 사랑방이 있었다. 안방에는 남자들, 사랑방에는 여자들이 기숙했다. 낮은 천장은 머리가 닿으면 기우뚱했다. 이처럼 협회는 초막과 같은 데서부터 출발하였다. 참아버님께서는 소수가 모였어도 웃옷이 땀에 젖도록 수천 명에게 하시듯 우렁찬 목소리로 기도와 말씀을 하셨다. 어느 한 사람에게 말씀을 하시고도 한 시간 넘도록 우시면서 간절히 기도를 하셨다. 모두 성령 충만한 은혜로 통곡이 벌어져 눈물로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1945년 광복 이후 준비된 기독교가 참아버님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탕감노정을 거친 후 협회를 세워 세계복귀의 출발 기대를 닦으셨다. 7 내가 맨 처음에 붙인 통일교회 간판은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였습니다. 기독교 통일을 하기도 힘든데 신령까지 통일을 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때에는 아버님이 돈 한 푼 없었습니다. 방에 누우면 발이 닿을 정도인데, 그것도 세(貰)로 얻은 것입니다. 거기에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는 사람들을 위해 종 같은 입장에서 내가 할 일을 다 했습니다. 내가 종의 입장, 양자의 입장에서 그렇게 해서 합격되어 가는 것입니다. 내가 해방되어 가는 것입니다. 8 맨 처음 통일교회 간판을 붙인 집은 오막살이 집이었습니다. 그 집 대문이 세 개였습니다. 우리같이 키가 크고 뚱뚱한 사람이 들어가려면 몸을 옆으로 하고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됩니다. 거기에 간판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라고 붙였습니다. 세계의 기독교를 통일해도 어머어마 한데 신령한 세계까지도 통일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세계 기독교도 통일하지만 신령한 세계도 통일하겠다는 협회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굉장합니까? 처마 끝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라고 간판은 붙였는데, 들여다보니 세 대문입니다. 9 통일교회 간판을 서울 북학동에 있는 집에 붙였는데, 그때 그 집은 아마 서울에서 제일 작은 집이었을 것입니다. 방에 들어가 가로로 누우면발이 닿습니다. 세로로 누워야 겨우 안 닿습니다. 그런 방이 하나 있고, 또 다른 방이 있었는데 그 방도 그런 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이 유명한 것은 대문이 세 개 있어서 세 대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대문이 큰 문이 아니고 머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조그마한 대문입니다. 또 간판을 붙이는데 처마 끝이 손에 닿으니까 간판을 붙인 자리는 아이들도 건드릴 수 있는 높이였습니다. 간판을 엄청난 집에다가 붙이지 못하고 상상할 수 없는,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제일 작은 집에다가 붙여 놓았으니 거기에 누가 관심을 갖겠습니까? 간판이 동정받을 만큼 얼마나 천대받았는지 모릅니다. 동네 아이들이 놀 때 이것을 떼어서 놀이판으로 쓰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상처를 입었는지 모릅니다. 또 반대하는 사람이 와서는 ‘기독교를 통일한다고? 이단이구먼!’ 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내리쳐 가지고 둘로 쪼개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역사적인 간판을 그냥 버릴 수 없어 그 간판에 못을 쳐서 연결시킨 뒤에 다시 붙였습니다. 10 나는 아무리 처마 밑이나 움막집에 있더라도 ‘내가 하나님을 여기에서 모셔야 하는데 이 자리가 정성이 부족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복귀원칙에 있어서 제일 조그마한 집에서 세계적인 정성을 들일 수 있는 대표자가 나와야 될 것이 아니냐.’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님의 사상입니다. 그다음에는 ‘조금 더 큰 집에서 세계적인 대표에 적응되는 정성을 들여야 될 것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통일교회는 작은 데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북학동 세대문집에서 발전하여 이처럼 커 나온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이것이 통일교회의 주류사상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천하가 다 알 만큼 소문을 내면서 다니는데도 통일교회가 작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무엇을 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
北鶴洞(プカクトン)の三つの門の家で協会出発 協会の看板を掲げた北鶴洞の三つの門の家は、軒先に手が届くほどのみすぼらしい家だった。そのため、看板は近所の子供たちが外しては遊びに使ったり、反対する人がたたきつけて割ってしまったりしたため、再びつなげて掛けるなど、何度も壊された。頭を下げて三つの門を通過し、家の中に入ると、二、三坪の広さの庭の片隅に井戸があり、その横に甕(かめ)を置く小さな台があった。右には、三人が横になればいっぱいになり、足がつく半坪ほどの居間があり、左には、一坪にならないサランバン(客間を兼ねた主人の部屋)があった。居間には男性たち、サランバンには女性たちが寝泊まりした。低い天井は、頭がつくと板が傾いた。このように、協会は草ぶき小屋のような所から出発したのだった。 真のお父様は、少ない人数しかいなくても、まるで数千人いるかのように、上着が汗でびしょぬれになるほど、大きく力強い声で祈り、み言を語られた。一人に対してみ言を語られるときも、一時間以上、涙を流しながら切実に祈られた。神霊に満ちた恩恵によってその場にいる全員が痛哭し、涙で床をぐしょぐしょにぬらした。一九四五年の光復後、準備されたキリスト教が真のお父様を受け入れなかったため、蕩減路程を経たのちに協会を立てて、世界復帰の出発基台を築かれたのである。 7 私が一番初めに付けた統一教会の看板は「世界基督教統一神霊協会」でした。キリスト教を統一することも大変なのに、神霊まで統一しようと言ったのです。当時、お父様はお金が一銭もありませんでした。横になると足が(壁に)つくくらいの部屋なのですが、それも借りたものでした。そこから始めたのです。訪ねてくる人たちのために、僕のような立場で私はやるべきことをすべてやりました。私が、僕の立場、養子の立場でそのようにして、合格していくのです。そうして私が解放されていくのです。 8 最初に統一教会の看板を付けた家は、粗末な家でした。その家には三つの門がありました。私のように、背が高くて太っている人が入ろうとすれば、体を横にして頭を下げて入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こに「世界基督教統一神霊協会」という看板を付けました。世界のキリスト教を統一しても、ものすごいことなのに、神霊的な世界までも統一しようと言ったのです。世界のキリスト教も統一しますが、神霊的な世界も統一しようという協会なのです。どれほどすごいでしょうか。軒先に「世界基督教統一神霊協会」という看板を付けたのですが、のぞいて見ると、門が三つです。 9 統一教会の看板をソウルの北鶴洞にある家に付けたのですが、当時、その家は、恐らくソウルで最も小さな家だったでしょう。部屋に入って横に寝れば、足が(壁に)つきます。縦に寝れば、何とか足を伸ばして寝られます。そのような部屋が一つあり、そのほかにも部屋がありましたが、その部屋も同じような部屋でした。それで、その家が有名なのは、門が三つあるということで、「三つの門」と言います。その門は、大きいものではなく、頭を下げなければ入れないほどの小さな門です。また、看板を付けたのですが、軒先が手の届く所にあるので、看板の位置は子供も触れるほどの高さでした。 看板を、大きな家に付けることができず、想像もできない、誰も信じられない最も小さな家に付けたのですから、誰がそこに関心をもつでしょうか。看板が同情されるほど、どれだけぞんざいに扱われたか分かりません。近所の子供たちが遊ぶ時は、これを外して遊び道具に使ったりもしました。それにどれほど傷がついたか分かりません。また、反対する人が来ては、「キリスト教を統一するとは異端だ!」と言いながら、それをたたきつけて二つに割ったこともありました。それでも、そのような歴史的な看板をそのまま捨てられないので、その看板に釘を打ちつけてつなげてから、また掛けたのです。 10 私は、いくら軒の下や、穴蔵にいたとしても、「私が神様をここにお迎え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に、この場は精誠が足りない」と思いました。「復帰原則において、最も小さな家で世界的な精誠を尽くせる代表者が現れ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はないか」と思ったのです。これがお父様の思想です。それから、「もう少し大きな家で世界的な代表に適応する精誠を尽くさ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はないか」と考えたのです。 このように、統一教会は小さな所から出発しました。北鶴洞の三つの門の家から発展して、このように大きくなってきたのが統一教会です。これが統一教会の主流思想です。そのような立場で、天下にすべて知られるほどうわさを立てながら歩き回っても、「統一教会は小さい」と非難する人は一人もいませんでした。その立場で何をしたのかが問題です。 |
The Bukhak-dong three-gate house The three-gate house in Bukhak-dong where the sign of the Holy Spirit Association was hung was a shabby house with eaves so low that people could reach them with their outstretched hands. This being the case, neighborhood children sometimes took down the sign and used it as a game board. Sometimes people who opposed us threw it down and broke it, so it was damaged often and had to be repaired and reattached to the house. When you entered the house, you had to pass under three gates with your head bent low. They opened into a small courtyard of about ten square meters with a well at one corner. Next to the well was a small platform for clay jars filled with traditional Korean condiments. On the right side of the house was the master bedroom, about two square meters in area, so small that when people lay down in it, their feet touched the wall and there was barely room for three. To the left was a second bedroom, a guest room that was not even three square meters in area. The men used the master bedroom, while the women slept in the second bedroom. The rooms had a low paper ceiling that would bend upward if your head touched it. As is apparent from this description, HSA-UWC began in a place that was little more than a shanty. Although only a small number of people gathered inside, True Father still prayed and spoke in a roaring voice as if speaking to thousands of people. He spoke so passionately that his shirt would be drenched in sweat. Sometimes he would speak to just one person, yet afterward he would weep for more than an hour and offer a heartfelt prayer. Everyone who came there was filled with so much divine grace that they all wept their hearts out, and the floor would be soaked with their tears. 7. The name I created for the Unification Church was "Holy (Divine) Spirit Association for the Unification of World Christianity." It was hard enough to bring unity within Christianity on earth, yet I was striving to bring unity in the spirit world as well. Back then I did not have any money. So I rented this place where the rooms were so small that when I lay down my feet would touch the wall. It was from such a humble place that I started the church. I took the position of a servant, doing everything for the people who came. In this way I advanced from the position of a servant to that of an adopted son. This was the path of my liberation. (093-057, 1977/05/01) 8. The first house where we displayed the Unification Church sign was a small shanty. The entrance had three gates. People who were tall and wide like me had to enter sideways, with our heads down. It was there that we mounted the sign, "Holy Spirit Association for the Unification of World Christianity." It is an enormous task to unite Christianity on earth, and yet this was an association that aspired to unite Christianity not only throughout the physical world but in the spiritual world too. Isn't this a formidable vision? We had placed the sign under the eaves, at one end of the house. Yet despite the grand name on the sign, when you looked at the house, you would see nothing but a shanty. (200-081, 1990/02/24) 9. We put up the first sign of the Unification Church at the Bukhak-dong house in Seoul. That house was probably the smallest house in Seoul. When I lay down sideways, my feet touched the wall. Only when I lay down lengthwise would my feet not touch the wall. One room was like that, and a second room was about the same. This house was known for its three-gate entrance, and so it was called "three-gate house." Those gates were tiny, so we had to lower our heads in order to enter. The sign was hung up under the eaves, which were so low that even children could reach up and touch it. Our sign was not hung on a great big house but on the smallest house in the city. Who would be interested in us? People even pitied the sign because it was so mistreated. The neighborhood children often took it down and played with it, and it was often damaged. Once a person who opposed us came and said, "You want to unite Christianity? That's heresy!" Then he smashed the sign with a rock, breaking it into pieces. I could not throw away this historic sign, so I put the two pieces back together with metal braces and hung it up again. (200-162,1990/02/25) 10. Whether I lived under the eaves of some house or in a shanty, my thought was, "I have to attend God here and offer greater devotion." My belief was, "According to the Principle of Restoration, the leader who can offer sincere devotion for the world should be able to do it even in the tiniest house." This was my way of thinking. Then I would say, "Now that I have offered sincere devotion in this tiny house, I should be able to offer it in a bigger house befitting a world leader." The Unification Church began in this place. The Unification Church has grown to this size starting from this tiny Bukhak-dong house with its three gates. This is the main philosophy of the Unification Church. Although there have been many rumors about us, so much so that all the world has heard about us, no has one criticized the Unification Church for its small size. What was most important was what we did in that place. (062-241, 1972/0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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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