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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영화 <황야의 결투>
이 영화는 서부극의 거장이자 전설이라고 일컬어지는 존 포드 감독이 스튜어트 레이크가 쓴 소설 <Wyatt Earp: Frontier Marshal>을 원작으로 만들었다. 와이어트 어프와 닥 콤비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OK 목장 결투’를 테마로 해서 <OK 목장의 결투>, <OK 목장의 결투 2>, <툼스톤>, <와이어트 어프> 등이 나왔는데 이 중에서 가장 낭만적이고 감동적인 것은 존 포드의 이 영화를 치고 있다.
포드 감독의 치밀한 연출 아래 할리우드의 지성파 배우인 헨리 폰다와 우악한 인상의 빅터 마츄어가 각각 와이어트와 닥 할리데이 역을 말아 열연하고 있다. 보안관, 카우보이, 바텐더, 유랑극단 배우, 이발사 등이 등장하면서 서부개척 당시의 생활상과 당시 사람들의 생기 넘치는 모습을 잘 그려냈다.
역마차가 지나다니고 먼지가 폴폴 나는 황량한 서부의 풍경 속에 감도는 시정(詩情)이 영화의 전편에 흐르고 있다.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버트 랭카스터와 커크 다글라스가 주연한 <OK 목장의 결투>가 남성적이라면 <황야의 결투>는 여성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요일 아침, 와이어트와 클레멘타인이 팔짱을 끼고 교회로 향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클레멘타인의 스카프와 리본이 바람에 날리고 맑은 하늘에는 구름 몇 점만이 있을 뿐 멀리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낭만이 물씬 풍긴다.
사진, 억울하게 살해당한 막내 동생의 묘 앞에서 와이어트 어프
이어서 건축 중인 지붕 없는 교회에서 와이어트와 클레멘타인이 추는 스퀘어댄스 광경과 의사인 닥 할리데이가 “살 것이야 죽을 것이냐”라며 ‘햄릿’의 명대사를 읊는 장면도 잊지 못할 장면 중의 하나다. 이밖에 옛 연인인 할리데이를 찾아온 클레멘타인을 멀리서 바라보던 와이어트는 바텐더에게 묻는다. “사랑해본 적 있어요?” “평생 바텐더로 살았는걸요” 서부의 총잡이답지 않은 낭만적인 질문과 바텐더다운 쿨한 대답도 뇌리에 남는다.
사진, 어프와 클레멘타인의 첫 만남
영화의 주제곡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의 멜로디는 결투를 주제로 한 황량할 수도 있는 서부영화를 서정적으로 수놓고 있다. 영화가 대성공을 거둔 후, 이 민요도 따라서 유명해졌다. 한국에서는 1949년에 상영되어 서부극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이 영화에서도 포드 감독은 애리조나주의 모뉴먼트 게곡에서 올 로케를 했다. 포드는 <역마차>, <황색 리본>, <리오 그란데>, <아파치 요새> 등 9편의 서부극을 모뉴먼트 계곡에서 촬영한 바 있다.
사진, 오프와 닥 할리데이(검정 옷)
II. 서부극의 거장, 존 포드
존 포드는 영화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서부극의 거장’이라는 닉네임이 항상 따라다닌다. 포드는 무성영화 이후 맥이 끊길 위기에 처했던 서부극을 영화 <역마차>를 통해 부활시킨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감독보다 서부극을 잘 이해했고 걸작 서부극을 많이 만들었다. 한편 포드는 서부극만큼 비서부극도 다수 만들었으며, 생전엔 서부극보다 비서부극으로 높이 평가받은 인물이기도 했다.
이는 그의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네 작품(밀고자, 분노의 포도,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아일랜드의 열풍)이 모두 비서부극이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그의 영화여정 중 서부극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포드의 영화인생을 따라가는 것은 바로 서부극 역사를 더듬는 길이기도 하다.
존 포드는 영화가 탄생한 해인 1885년 미국 메인 주에서 아일랜드 이민의 후예로 태어났다. 메인 주립대학을 중간에 그만두고, 형의 손에 이끌려 할리우드에 오게 된 그는 잭 포드란 이름으로 1917년에 그의 첫 작품 <토네이도>를 연출하게 된다. 이어 <철마>, <세 악당> 같은 무성영화 시대의 웨스턴을 만들어내게 되는데, 그는 이 시기부터 야외에서 행해지는 액션 신에 장대한 스펙타클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초기 웨스턴의 원형인 카우보이 극에 시각적 요소를 강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진,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 <수색자>, 배경은 그 유명한 모뉴먼트 계곡
1930년대는 할리우드에서 감독 포드의 입지를 굳히는 시대였다. 1935년 아일랜드 혁명의 무용담을 그린 영화 <밀고자>로 최초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탔고, 1939년에는 <젊은 링컨>과 <모호크 족의 북소리>, 그리고 그의 초기 걸작이자 대표작이 된 <역마차>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고전 서부극 4대작(황야의 결투·셰인·하이 눈·역마차)의 하나로 손꼽힌다. 1930년대는 서부극 장르가 위기에 몰려 있었다.
몇 년 동안 <빅 트레일>과 <시마론> 등의 서부극에 많은 비용을 처들이고 실패만 거듭한 메이저 영화사들은 모두 진저리를 치며 웨스턴에서 손을 뗐다. 소규모 영화사들만 B급 서부극을 만들면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 때 등장한 <역마차>가 흥행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서부극 장르의 부흥에 크게 기여한 기폭제 역할을 했다.
포드는 1940년 <분노의 포도>, 1941년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로 연속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며 감독으로서 완숙한 기량을 보여주었다. 1952년에는 아일랜드 출신인 그의 기질을 유감없이 보여준 <아일랜드의 연풍>으로 네 번째 아카데미상 감독상을 받았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전쟁 다큐멘터리들을 만들며 잠시 할리우드와 멀어졌던 포드는 이전 영화보다 더욱 서정적이고 인간미가 풍부한 서부극을 만들었다.
사진,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명작 <황야의 결투>와 기병대 삼부작 <아파치 요새>·<황색 리본>·<리오 그란데>가 그것이다. 50년대로 넘어오면서 잠시 휴식을 취했던 포드는 1956년 그의 진정한 걸작으로 꼽히는 영화 <수색자>와 1962년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를 발표한다. 이 영화들은 서부와 사라져가는 영웅을 그린 서부극에 대한 고별사와도 같은 작품들이었다.
그는 존 웨인·헨리 폰다·제임스 스튜어트 등을 발굴해서 대배우로 키우기도 했다. 특히 존 웨인의 경우 영화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마차>에 출연시켰다. 웨인은 이를 발판으로 승승장구하면서 훗날 서부극의 대명사로 자리 잡는다. 서부극의 대표적인 명소인 모뉴먼트 밸리도 그가 처음 발굴했다.
1939년도 작품인 <역마차>에 이곳이 처음 소개된 이후 <황색 리본>·<리오 그란데>·<아파치 요새> 등 9편의 서부극을 모뉴먼트 계곡에서 촬영했다. 그가 이렇게 모뉴먼트 밸리를 촬영장소로 여러 번 활용하면서 관객들은 서부극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가 되었다. 포드 이후로도 <옛날 옛적 서부에서>를 비롯해서 많은 서부영화의 로케 장소로 이용되었다.
사진, <수색자> 촬영장에서 포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포드는 기록영화 촬영팀을 이끌고 태평양과 북아프리카 등의 전투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1941년부터 종전까지 4년간 이 팀은 여러 편의 전쟁 기록영화를 만들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포드가 미드웨이 섬에서 직접 일본군의 공습과 미군의 반격을 찍은 <The Battle of Midway>였다. 포드는 촬영 도중 파편에 맞아 심하게 다치기도 했다. 2019년 롤랜드 에머리히가 찍은 영화 <미드웨이>에서 포드가 미드웨이 섬에서 다큐멘터리를 찍는 장면이 나온다.
1944년 6월에는 육해군 합동 촬영 팀을 이끌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영상물을 찍기도 했다. 젊었을 적에는 ‘OK목장의 결투’로 유명한 총잡이 와이어트 어프를 만나, 몇 년 동안 친하게 지냈다. 그리고 그의 증언을 토대로 찍은 영화가 <황야의 결투>였다. 1948년 54세 때 세트에서 불의의 사고로 왼쪽 눈을 실명하면서 선글라스를 착용하거나 눈가리개를 하고 다녔다.
그는 무뚝뚝한 성격답게 기자들의 질문에 썰렁한 답변으로 일관해서 물어보는 사람들을 머쓱하게 만들곤 했다. 예를 들어 "어떻게 할리우드에 오셨나요?"라고 물어보면 "기차 타고" 라고 답변하는 식이었다. 그나마 대답을 회피하거나 본심과 반대되는 답변을 해대는 통에 인터뷰하기에 고약한 인물로 소문났었다. “영화를 만드는 건 좋아하지만, 영화에 관하여 떠드는 건 싫다구.”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괴팍한 상남자로 유명했다.
툭툭 내뱉는 말투와 변덕스러운 성격, 그리고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할 말은 하는 사람이었다. 포드는 정치적으론 보수주의자였지만, 도를 넘어 지나치게 설쳐대는 *매카시즘을 극도로 혐오했다. 당시 공산주의 콤플렉스에 너나할 것 없이 몸 사리고 있던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굉장히 깡다구가 있는 인물이었다.
아래는 50년대 미국에서 매카시즘이 한창 불어 닥칠 때 감독협회에서 존 포드가 행한 연설의 일부이다.
“나는 존 포드요. 서부극을 찍는 사람입니다. 미국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 방에서 세실 B. 드밀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어떻게 보여주는지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드밀을 바라보며) 그러나 나는 당신이 싫소. 오늘밤 여기서 당신이 말한 것도 싫소.”
* 매카시즘
50년대 초반 극우적인 상원의원 매카시가 선봉이 되어 벌인 빨갱이 색출운동을 말한다. 한동안 미국 전역을 들썩이게 했다. 할리우드도 예외가 아니었다.
할리우드에서 매카시즘 바람을 주도한 인물 중의 한사람이 바로 명감독이었던 세실 B. 드밀(십계, 삼손과 데릴라 감독)이었다. 드밀과 그의 추종자들은 무려 4시간에 걸친 연설을 하며 매카시즘 전파의 선봉에 섰다. 드밀은 협회의 모든 감독들은 ‘충성맹세’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분위기를 몰고 갔다. 이때 드밀에게 정면으로 들이받은 인물이 바로 포드였다.
이 연설에는 포드의 두 가지 특징이 드러나 있다. 우선 반골기질로서의 비판적인 태도이다. 매카시즘이라는 일방적 애국주의에 많은 감독들과 영화인들이 주눅이 들어 있을 때, 포드의 배짱 있는 한 마디는 회의장에 팽팽하게 어린 긴장의 얼음판을 깨버렸다. 그의 발언 이후 분위기가 역전된 것은 물론이다.
두 번째는 서부극에 대한 자부심이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감독상을 네 번이나 받았지만, 한 번도 서부극으로 수상한 적은 없었다. 당시 서부극은 저급한 장르로 치부될 때였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을 소개하며, “서부극을 만든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서부극 장르에 대한 그의 자신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포드는 마초기질이 다분했고 카리스마가 대단했던 인물이었다. 그 앞에서는 할리우드의 내노라하는 배우들도 함부로 나대거나 감독의 지시를 거부하거나 항변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영화를 제작할 때나 그 이후나 항상 자신이 보스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고, 그 권한을 즐겼다. 아래는 할리우드 거장들의 그에 대해 바치는 찬사다.
알프레드 히치콕 : “존 포드의 영화는 시각적 희열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 “그의 작품이 영원히 기억될 것이기에, 존 포드도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마틴 스콜세지 : "그는 미국 고전 영화의 정수이며, 오늘날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모두 알게 모르게 존 포드의 영향을 받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 "존 포드는 미국 영화계의 선구자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영화인은 전부 존 포드의 영향을 받았다. 그게 서부극이든 〈분노의 포도〉이든 간에."
III. 서부개척시대의 카우보이
서부개척 당시 텍사스 초원에는 엄청난 수의 롱혼이라는 긴 뿔 육우가 서식하고 있었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 남부를 지배했던 스페인 사람들이 가져온 소들이 야생화한 것이다. 이 소떼들을 붙잡아 텍사스를 벗어나 동북부 도시로 연결된 기차역으로 소떼를 운반하던 직업이 바로 원조 카우보이(Cowboy)였다. 카우보이는 목동(牧童) 내지는 소몰이꾼 등으로 부른다. 카우보이들이 가축을 잡을 때 쓰는 올가미 밧줄, 가죽 바지, 챙이 넓은 모자와 굽 높은 장화, 소에 찍는 낙인들은 멕시코로부터 들어왔다.
남북전쟁이 끝난 다음 철도가 텍사스 인근까지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때 소값은 동부에서는 40달러를 호가했으나 텍사스에서는 3~4 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텍사스 목축업자들은 소들을 철도로 운송해서 동부로 실어 나르면 떼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이래서 목장주들은 소들을 이끌고 철도역까지 운송해야하는 머나먼 대장정을 구상하게 되면서 소몰이를 전담하는 카우보이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먼저 가난한 멕시코인들이나 흑인들이 카우보이를 하겠다고 찾아왔고 이어서 소문을 듣고 동부에서 많은 백인들이 일자리를 찾아서 몰려왔다. 종착역으로 향하는 기나긴 소몰이에 참가했던 카우보이들 중에는 너덜너덜한 회색군복을 입은 남북전쟁에 참전했던 남군출신들도 꽤 있어서 이채를 띠었다.
장거리 소몰이의 최종 도착지는 대개 캔자스의 애빌린, 위치토, 엘즈워스, 닷지 시티 등이었다. 게리 쿠퍼나 존 웨인이 나오는 서부 영화를 보면 이런 카우보이들의 삶이 무척이나 낭만적이고 폼 나게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 이들이 겪었던 고생이란 낭만과는 거리가 퍽 먼 것이었다. 물과 풀을 찾아 광야를 며칠씩 헤매는 것은 보통이고 카우보이들끼리 좋은 초지와 물을 두고 피 터지는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묘사된 카우보이의 낭만은 신화에 불과할 뿐이지만 이것이 미국인들의 정서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카우보이 이야기는 미국 역사를 미화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카우보이들은 이 소떼를 몰고 철도가 지나가는 중부까지 수천 마일을 올라와 철도 주변 대도시의 도축장에 팔아넘기면 소들은 열차에 실려 동부로 수송되었다. 이 와중에 지역 신문에 카우보이라는 존재가 과대포장되면서 알려져서 카우보이에 대한 전설이 후대에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 카우보이들의 활동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영화는 존 웨인, 몽고메리 클리프트 주연의 <Red River>였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카우보이는 잘 생긴 용모와 풍채를 지닌 멋진 백인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삶은 고되고 거칠었으며 저임금과 노동 속에서 술을 위로삼아 삶을 이어갔다.
대부분 소몰이꾼들은 수송대장(주로 목장주)을 위시로 해서 5~6명의 카우보이, 요리사, 예비용 말을 돌보는 한두 명의 말 전문 카우보이로 구성되어 있었다. 카우보이들은 6~7 마리 중에서 골라 탈 수 있었다. 이들은 텍사스에서 여름 내내 초원에서 놓아기르던 소들을 보통 1,000~5,000마리씩 소시장이 있는 철도역으로 몰고 갔다. 이 수송대의 맨 앞에서 요리사가 보급품을 실은 마차를 덜커덩 거리면서 몰고 갔다. 그들의 먹을거리는 주로 토마토 통조림, 밀가루, 콩, 커피, 베이컨, 말린 과일 등이었고, 이밖에 양파묶음과 식초단지, 당밀통도 가지고 갔다.
요리사 마차 뒤에는 카우보이들이 말떼를 몰고 따라갔고 소떼가 그 뒤를 이었다. 소떼들의 앞에 선 두 명은 ‘포인트맨’, 양쪽에서 따라가는 몇 명은 ‘스윙 맨’, 뒤쪽은 ‘드래그 맨’들이 라고 했다. 폭풍이 몰아쳐서 소떼가 놀라 도망치는 경우도 있었다. 강을 건널 때가 가장 조마조마한 순간이었다. 소들은 양옆에서 카우보이들의 인도를 받으며 가까스로 강을 건너갔다. 도중에 인디언이나 소떼들을 강탈하는 무법자들도 만났고 농경 지를 지날 때에는 농민들로부터 욕설을 바가지로 먹기도 했다.
여로의 종착지인 철도역이 있는 카우타운에 도착하면 카우보이들은 소를 우리에 가두어 두고 거래인에게 팔아 넘겼다. 상인들은 소들을 중서부로 수송하거나 시카고 등지에 있는 도살장으로 보냈다. 카우보이들은 보통 100달러 수준의 보수를 받았다. 그들은 이 돈을 받자마자 목을 축이러 술집과 도박장을 겸비한 살롱으로 갔고, 일부는 매춘굴로 득달같이 달려갔다.
그 때 어느 살롱도 애빌린에 있는 ‘알라모’만큼 비까번쩍하는 곳은 없었다. 이 살롱에는 빛나는 황동으로 장식한 긴 바, 초록색 펠트를 깐 도박 테이블, 그리고 화려한 장식이 붙어있는 대형 거울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는 멋진 살롱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살롱은 허술하고 누추했다.
1870년대 중반, 텍사스에 철도가 들어오면서 종착역까지 2,400km나 되는 긴 소몰이 여행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목축업자들은 텍사스를 떠나 점차 캔자스와 다코타 산맥을 지나 네브라스카, 콜로라도, 와이오밍, 몬타나 등 북쪽으로 진출했다. 목축업자들은 튼튼한 황소는 북쪽의 초원지대에서도 잘 자란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장기간의 소몰이 여행도 필요 없어지고 현지에서 방목하는 형태의 목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목장에서 일하는 카우보이들은 군대막사 모양의 방 하나짜리 합숙소에서 거주했다. 벽에는 안장, 굴레, 박차 그리고 기타 장비가 함께 걸려 있었다. 식사는 커피, 말린 과일, 콩, 말린 고기, 베이컨, 기름에 튀긴 비스킷 정도였다. 허허벌판 초원에서 밤을 보낼 때에는 자리를 깔고 눕기 전엔 전갈이 있는지, 추운 평원의 밤을 새우고 일어나 부츠에 발을 넣기 전에는 그 속에 방울뱀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그런 다음에는 온종일 말을 타고 뙤약볕 아래서 모래먼지를 뒤집어썼고 다시 형편없는 식사와 끔찍한 잠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카우보이들의 보수는 적었고 어떤 때는 술값도 충분치 않았다. 마침 총도 있고 해서 그냥 강도로 변하기도 했다. 때론 여러 카우보이들이 작당하여 강도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 같은 모습은 오 헨리의 단편 소설인 <사라진 검은 독수리>에서 자세히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이윽고 너도나도 중북부 고원지대로 몰려와 방목을 하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자연산 목초에 의존하고 있었던 방목업자들은 에이커당 소의 수가 일정한 수준을 넘자 목초공급이 부족하게 되었다. 특히 1866~7년 한파로 수만 마리의 소가 얼어 죽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제 방목하는 좋은 시절도 거의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마침 값싼 철조망이 개발되어 이제 목축업자들은 소떼를 끌고 초원에서 방목하지 않게 되었다. 철조망으로 울타리를 쳐서 집약사육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고원의 대목장에서 소들이 효율적으로 출하되고 질 좋고 값싼 쇠고기가 동부지역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으로 수출되기 시작했다.
이제 카우보이들은 소몰이를 하거니 소를 잡기 위해 로프를 던지기보다는 울타리를 수선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고용 일꾼이 되었다. 수많은 소떼들을 몰고 광활한 초원을 질주하는 카우보이 시대는 끝이 났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전설은 책과 영화에서 한껏 미화되어 미국인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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