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81
3월31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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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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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luhdUFnUVpk (김민회 시몬 신부님 집전)
■cpbc 2022년 사순특강■
<제1강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 가십시오>
박희전 루케시오 신부(작은형제회 프란치스코회)
https://youtu.be/HV3s_uLqXb0
<제2강 돌아오너라> 송미경 베로니카 수녀(성 바오로 딸 수도회)
https://youtu.be/yGmnx4jRn2A
<제3강 전환의 시기인 사순>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의정부교구)
https://youtu.be/wGhyxuDyoio
<제4강 생태적 회개와 '찬미받으소서' 여정>
백종연 바오로 신부(환경사목위원회 위원장 서울대교구)
https://youtu.be/fcqUz_kvw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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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참기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탈출기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 보면, 모세의 처지가 무척이나 안스러워 보입니다. 많은 경우 그의 처지는 주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서 있는 샌드백이나 동네북 같은 존재였습니다.
주님과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 모세 사이의 대화가 참으로 흥미진진합니다. 타락한 이스라엘을 보신 주님께서는 백성의 대표 격인 모세를 불러 호통을 치십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트려 그들을 삼켜 버리게 하겠다.”(탈출기 32장 9~10절)
주님만 모세에게 진노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틈만 나면 모세에게 화를 내고, 그를 괴롭혔습니다. 출애굽 이후 40년간의 광야 생활 내내, 여차하면 자신들의 리더인 모세에게 득달같이 달려가 따졌습니다.
“대체 우리를 왜 그 좋은 땅 이집트에서 끌어낸 것이요? 그 잘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대체 언제 구경하게 되는 것이오? 대체 언제까지 이 밋밋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식으로 먹어야 하는거요? 당신이 섬기고 받드는 주님이라는 자가 과연 있기는 한거요?”
이렇듯 모세는 주님과 백성 사이에 끼어 평생토록 마음고생, 몸고생 많이 한사람입니다. 하루하루가 스트레스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차라리 차고 있던 완장 벗어 던지고 멀리 도망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무던한 사람,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태도는 늘 한결같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끝도 없는 불평불만을 잘 인내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약속의 땅까지 그들을 잘 인도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그들을 잘 다독였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신과 우상숭배, 타락과 방황 앞에 주님께서도 가끔씩 인내심의 한계를 보이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인간을 닮으신 분이시니, 우리와 똑같은 인격체로서의 감정을 지니셨고, 그런 배경과 함께 당신 백성과 소통하셨습니다.
폭발 직전까지 가신 주님 앞에 모세가 취한 태도는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눈물로 애걸복걸합니다.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가며 자비를 청합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의 대표 격인 모세와 주님 사이에는 끝도 없는 밀당이 계속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큰 힘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당신의 백성에게 진노를 터뜨리십니까? 어찌하여 이집트인들이, 그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해치려고 이끌어 내서는, 산에서 죽여 땅에 하나도 남지 않게 해 버렸구나, 하고 말하게 하시렵니까? 타오르는 진노를 푸시고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돌아보니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주님께 간절히 청했겠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나의 이 머리칼보다 많은 죄, 부족함, 미성숙을 고스란히 보고서도 호통치지 않고, 나를 대신해서 주님께 참아달라고,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라고 청했을 것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이웃들의 부족함,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료 인간들의 악행이나 타락을 목격할 때, 우리 역시 모세처럼 주님 앞에서 간절히, 목숨 바친 눈물의 기도를 올려드려야겠습니다.
“주님 참기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주님 저들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조차 모릅니다. 너그럽게 용서해주십시오. 주님 이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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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Rt1zzhynBZ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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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 뱀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사랑의 시작인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에 대한 ‘증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먼저 자신이 자신을 증언하는 것은 유효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누구나 자기주장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선 ‘세례자 요한’을 내세우십니다. 그는 빛 자체는 아니지만, 빛을 증언하는 인물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일’을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자기 일을 하지 않고 아버지의 일을 하기에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었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도 여러 기적과 목소리를 통해 아드님을 증언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성경’도 예로 드십니다. 모세의 성경이 다 당신에 대한 증언이라 하십니다.
이렇게 여러 증언을 내세우시는 이유는 그런 것들로 믿으라는 말씀이 아니십니다. 그런 많은 증거가 있는데도 믿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를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섬기기로 한 사람들이기에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오시는 그분을 믿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요한 5,44)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이들이 겪게 되는 현상이 있는데 ‘인지부조화’입니다. 그냥 ‘고집’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중국의 그 많은 무술 고수들이 쉬샤오둥이라는 격투사에게 깨졌습니다. 쉬샤오둥은 중국 무술이 실전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증명하고픈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지고 나서도 바닥이 미끄러웠다느니, 쉬샤오둥이 다칠까 봐 일부로 봐주었다느니, 아침을 잘못 먹어 설사해서 그렇다는 이유로 패배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분명 모든 증거가 중국 전통무술의 실전성 부재를 말하고 있는데, 그들이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자신들도 느끼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전성의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누군가를 믿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믿는 고집을 버려야 합니다. 자신에게 영광을 주려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증거를 가져다 놓아도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을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은 망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행복이라 가르쳐줘 굳게 믿고 따라왔는데 알고 보니 그 반대였음을 깨달으려면 열심히 자아를 믿고 달리다 넘어져 봐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 안에서 ‘유혹자’를 찾아내게 됩니다.
김미경 강사가 4년 만에 ‘어쩌다 어른’에 출연하여 강연한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논문표절로 9시 뉴스에 나오기 전까지는 돈도 많이 벌고 자신의 이름을 딴 TV쇼를 할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물론 그때도 정신병원에 가봐야 할 정도로 심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꿈을 좇으라고 젊은이들에게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망하고 나니까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자아가 자신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녀는 극단적인 생각을 할 정도로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걸었습니다. 그러다 자신이 자신의 꿈의 노예가 되어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 안에는 제1존재, 제2존재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제1존재는 태어날 때의 본래 나이고 제2존재는 자라면서 생겨나 꿈을 좇으라는 새로운 나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제2존재가 바로 나인 줄 알고 착각하고 살아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자신은 제1존재였습니다. 성공하지 못하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더라도 그냥 밥 먹고 잠자기만 해도 행복한 나가 꿈을 좇으라는 제2존재에 의해 가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말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제1존재로 살다가 또 기회가 오면 제2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한 것입니다. 제2존재, 곧 우리가 에고(ego)라고 부르는 이 존재의 본성을 아직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전보다는 아니겠지만 또 세속-육신-마귀에 집착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자아에게 영광을 돌리고 자아를 섬길 날이 오기 때문입니다.
자아에 집착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갤럭시가 좋냐, 아이폰이 좋냐의 문제와 같습니다. ‘확증편향’이 생깁니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끝까지 밀어붙여, 결국에 틀렸어도 돌아서지 않습니다. ‘인지오류’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느 것이 좋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판단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법은 서로 근거를 놓고 싸우는 일이 아닌 이 분열의 근본 원인이 ‘자존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곧 모든 싸움의 원인이 ‘자아’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니 모든 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 압데라는 어리석고 고루한 사람들이 모여 살기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슈트루치온이라는 치과의사는 이웃 마을 게라니아에 왕진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간밤에 암당나귀가 새끼를 낳아서 자기 당나귀를 포기하고, 당나귀 몰이꾼인 안트락스의 당나귀를 돈을 주어 빌리고 같이 옆 마을로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황무지를 지나다가 날씨가 매우 무더워 잠시 당나귀를 세우고 당나귀 밑에 드리워진 그늘 속에 주저앉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당나귀 몰이꾼은 ‘당나귀 그림자에 대한 대가’를 요구합니다. 나귀를 빌린 것이지 그림자를 빌린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치과의사는 절대 줄 수 없다며 거절하고, 논쟁이 거듭되자 재판관에게 찾아갑니다.
재판관은 중재를 시도합니다. 몰이꾼에게는 나귀의 그림자에서 쉴 수 있도록 허락하고 치과의사는 감사의 성의 표시만 하면 될 것 같다고 말합니다. 둘은 동의합니다. 그러자 양쪽에 변호사가 붙습니다. 자신이 꼭 이기게 해 주겠다고 호언장담합니다. 그러자 둘은 갈 데까지 가보자고 합니다.
치과의사는 자기편을 더 만들기 위해 수선공 조합의 조합장을 찾아갑니다. 조합장은 치과의사의 후원자가 되기로 합니다. 한편 비조합원인 몰이꾼은 신전의 사제에게 줄을 대고자 합니다. 도시에는 개구리를 섬기는 신전과 염소를 섬기는 신전이 있었습니다. 당나귀 몰이꾼은 개구리를 모시는 신전의 사제에게 줄을 댑니다. 이 소식을 들은 치과의사는 염소를 섬기는 신전 쪽을 자신의 편으로 만듭니다.
둘은 서로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들려고 고군분투하게 됩니다. 마침내 도시는 치과의사를 지지하는 ‘당나귀 그림자당’과 당나귀 몰이꾼을 지지하는 ‘당나귀당’으로 나누어졌습니다. 당나귀당은 개구리 신전에, 당나귀 그림자당은 염소 신전에 모여서 의지를 불살랐습니다. 이제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된 것입니다.
재판은 합리적인 시선으로 볼 때 당나귀그림자당 쪽으로 전개되는 듯싶었습니다. 당나귀의 그림자까지 당나귀 몰이꾼의 소유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재판을 내려버린다면 두 파간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싸움이 될 것이 뻔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이 모든 문제는 당나귀에게서 비롯되었으니 당나귀를 재판정에 증인으로 세웁시다”라고 의견을 제시합니다. 그러자 모두가 동의했습니다. 한 사람이 당나귀를 보더니, “이 모든 것이 저 당나귀 때문에 생긴 것이다”라고 소리쳤고 사람들은 일제히 당나귀를 죽이고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렸습니다. 그러자 마을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참조: ‘인생의 방해꾼들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지혜’, 유튜브 채널, ‘지혜롭다’]
정말 이 마을에 전쟁이 일어날 뻔한 것은 당나귀 때문이었을까요? 당나귀는 그저 희생양일 뿐입니다. 사람들 안에 있는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마음이 그 근본 원인입니다. 그들은 또 다른 당나귀를 찾아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할 것이고 다른 의견은 묵살해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자아가 에덴동산의 뱀임을 명확히 깨달아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 싸우게 된 것은 선악과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들 안에 있는 뱀 때문이었습니다. 그 뱀을 모르면 그 싸움의 원인이 사라져도 다른 원인을 찾아 자기 영광을 추구할 것입니다.
자아를 뱀이라는 구체적인 상징으로 이해해야 더는 자아에게 영광을 돌리고 자아를 믿는 일이 없습니다. 누가 뱀에게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내 집에 더는 살지 못하도록 죽이려 할 것입니다. 세계 평화로부터 내 마음의 평화까지, 이 모든 평화가 깨지는 근본 이유는 각자의 마음 안에 있는 자아를 뱀으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이것만 알면 세상은 천국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려주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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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5,31-47 : 너희를 고발할 사람은 모세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에 관하여 하신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32절) 그분은 믿지 않을 수 없는 진실한 증인이시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요한을 찾아갔을 때도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음을 상기시키신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35절) 바로 그 요한이 주님을 증언하였다.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주셨다.”(요한 1,33)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36절) 예수님께서는 권능을 증거로 대시면서 당신이 아들이시라고 입증하신다. 그분이 하느님의 권능으로 하신 일들이 바로 하느님께서 그분을 보내셨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분이 하신 일들은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37절) 이 말씀은 그분께서 행하신 일들이 모두 그분에 관한 아버지의 증언이라는 것이다. 그분의 일들은 아버지께서 그분을 보내셨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즉 아들이 행하는 일은 아버지의 증언이므로 그리스도 안에는 같은 본성이 작용하고 있으며 아버지께서는 그 일들로 인해 그분을 증언하신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는다.
또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39절) 그들은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하지만,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분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40절) 그렇기 때문에 그들 마음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신다.(42절) 이 말씀은 믿음 없이 단지 성경을 읽기만 해도 구원을 얻는다는 생각이기 때문에 진정한 성경의 열매는 거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내용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성경을 읽기만 하는 것을 그들은 자랑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결정적 말씀을 하신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43절) 성경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이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기록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는 복되어라.”(시편 118,26) 그러므로 그분은 그들에게 나타나신 바로 그 주 하느님, 곧 하느님의 말씀이셨다. 그분이 바로 복되신 분이시다.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사람들 가운데 오셨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었던 모세이다.”(45절) 그들은 모세를 믿는다고 하면서 감히 모세가 기록해 놓은 그분을 거스르고 있다. 그것은 모세를 잘못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을 고소할 이는 그들에게 율법을 준 모세가 될 것이다. 그들이 모세를 올바로 알았더라면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46절)에 그리스도를 믿었을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들은 모세의 글을 믿지 않기에 예수님의 말도 믿지 못한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를 다 이루신 분이시다. 그분은 하느님께로부터 오신분이시며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믿고 생활해야 한다. 이 사순시기에 더욱 그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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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을 믿게 하는 증언>
3월 31일의 복음 말씀은 처음 복음을 선포할 때의 사도들의 입장에서 읽는 것이 좀 더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요한 5,36)
사도들은 복음을 선포할 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부터 선포했습니다.(사도 2,32.36)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부활’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부터 믿어야 다른 교리를 믿을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시작이고 마지막입니다. 만일에 부활을 안 믿는다면, 다른 교리들을 믿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일들도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그 일들도 역시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할 때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안 믿는 사람들은 부활부터 증명하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할 수 있는 ‘물증’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는 사도들과 신자들의 ‘증언’이 있을 뿐입니다.(1코린 15,3-8)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사도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증언을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모두 자신들의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서 생애 전체와 목숨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요한 5,33-35)
여기서 ‘진리’는 ‘예수님은 메시아’라는 진리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요한의 증언이 중요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고, 메시아이신 분’이라고 증언했습니다.(요한 1,29-34) 요한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이 있었는데(요한 1,35-37), 그 수는 별로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의 예언자로 믿은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마태 11,18)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신다. 나는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분의 증언이 유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요한 5,32.37-38)
사도들은 예수님의 신원을 증언하는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고 증언했습니다.(2베드 1,18) 그러나 부활 증언처럼 그 증언을 입증할 수 있는 물증은 없습니다. 사도들 자신들의 삶과 죽음이 증거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믿으면 사도들의 증언도 믿게 될 것이고, 못 믿으면 안 믿을 것입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요한 5,39)
사도행전 8장을 보면, 에티오피아 내시가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다가 필리포스의 도움을 받아서 믿음을 갖게 되고 세례를 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사도 8,26-38) 그 과정에서 성령의 인도가 있었는데, 그래도 에티오피아 내시 자신이 열린 마음으로 믿으려고 노력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똑같은 성경을 읽어도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믿게 됩니다.(사도 17,10-12)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요한 5,40-44)
겉으로만 보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성경 공부도 열심히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참 신앙’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바리사이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만(형식적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에게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고, 자기를 과시하고 자랑하려는 욕망만 있었습니다. 또 그들은 구원과 생명을 추구하지 않고 현세적인 복만 추구했습니다. (기복신앙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기 있는 명강사들이나 유명한 설교가들을 보면,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하고, 복을 얻는 방법에 관한 말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을 듣기 싫어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45절의 모세가 고소를 할 것이라는 말씀은, ‘모세 율법’이, 즉 ‘성경’이 고소를 할 것이라는 뜻인데, “너희가 성경 말씀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너희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또 이 말씀은, “너희는 성경을 잘 알고 있다고 큰소리치면서도 왜 성경 말씀대로 살지 않느냐?”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옛날 유대인들에게만 하신 말씀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말씀들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들입니다. 믿는다면 믿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신앙이 곧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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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사 경본에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부활의 희망 속에 고이 잠든 교우들과 세상을 떠난 다른 이들도 모두 생각하시어 그들이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뵈옵게 하소서. 저희에게도 자비를 베푸시어 영원으로부터 주님의 사랑을 받는 하느님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그 배필이신 성 요셉과 복된 사도들과 모든 성인과 함께 영원한 삶을 누리며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소서.” 부활의 희망을 가지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성모님과 성요셉, 복된 사도들과 모든 성인들의 전구를 구하며 자비를 청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살아있는 이들만의 신앙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로 천국으로 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모든 성인들의 전구로 죄 중에 있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함께 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은 희망을 버리는 사람이 가는 곳이라고 합니다. 마치 별이 없는 밤하늘과 같다고 합니다. 연옥은 그릇된 희망을 품은 사람이 가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우정을 배신한 사람이 가는 곳이 지옥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황금으로 소를 만들어서 숭배했습니다. 그릇된 희망을 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연옥에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유다는 별이 없는 밤하늘과 같은 지옥을 체험했습니다. 바빌론으로 유배 가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바빌론이 지옥이 아니라, 희망이 사라진 현실이 지옥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희망을 걸었던 모세는 비록 광야에서 방황하였지만, 형 아론이 동족을 선동해서 황금 소를 만들어 경배하였지만, 지옥에 있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희망에 응답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셨다.” 바빌론 유배지에서 하느님의 침묵을 체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하느님의 부재(不在)를 탓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지 않았던 자신들의 불신(不信)을 처절하게 반성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빌론은 이제 지옥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희망은 새로운 공동체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성전과 땅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에서 말씀과 실천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과 함께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구원은 단순히 생명 활동을 이어가는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은 가치와 의미의 문제이며, 구원은 존재의 변화를 뜻합니다. 구원은 새로운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구원은 깨달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순간을 살았어도 가능한 것입니다. 구원은 모든 것을 버리고, 포기했어도 주어지는 신앙의 문제인 것입니다. 구원은 유전적인 형질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 정신, 의미, 영혼의 문제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생명의 활동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표징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따름으로 우리에게도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혜로운 회개의 때입니다. 나의 기도가 죽은 이들에게 희망이 되면 좋겠습니다. 성인들의 전구를 청하며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충실히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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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당신이 진정한 메시아이심을 밝히십니다. 이를 위해 당신을 증언할 사람으로 세례자 요한을 들지요. 그러면서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등불처럼 어둠을 밝혀 사람들을 회개하도록 이끌고, 뜨거운 열정으로 하늘 나라가 다가왔음을 선포하지 않았습니까? 끝내 요한은 자신을 태워 어둠을 밝히다가 꺼지는 등불이 됩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증언하려고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친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요한만을 증인으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당신의 말씀과 행동이 바로 당신이 메시아임을 입증하는 것이라 주장하십니다.
이는 결국 하느님의 능력이 예수님 안에서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따라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증언하시는 분은 결국 하느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이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느님 말씀을 늘 대하면서도 막상 성경에 내포된 하느님의 뜻을 찾기보다는, 그저 성경의 글귀 한 자, 한 자에만 얽매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죽은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행동하는 분이시기에, 하느님의 말씀도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대하면서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파악하고, 그에 따라 실제로 행동해야 합니다.
이렇게 행동하는 신앙인이 될 때, 우리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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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한인규 세례자 요한 신부님]
<하느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의 권한>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의 권한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친히 증언을 해주신다는 내용입니다. 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31절에서 40절까지의 내용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증언하는 세 가지의 경우를 말씀하시면서, 무엇보다 아들 그리스도를 위한 하느님 아버지의 증언을 강조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둘째 부분은 41절에서 마지막 47절까지인데, 여기에서는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이러한 참된 증언들에도 불구하고 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불신앙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당신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특히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라고 하며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심을 분명히 증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시고 있는 일들로서 자신을 증언하십니다. 여기에서 당신께서 하시고 있는 일들이란 병자들을 치유하거나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등 여러 가지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기적과 같은 행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성서가 당신을 증언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특히 끝에 부분에서는 유대인들이 희망을 두고 있는 모세의 가르침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이러한 증언들을 일일이 설명하실 이유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증언들을 굳이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였습니다.
예수님은 41절에 나온 말씀처럼 굳이 사람으로부터 찬양을 얻고자 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오직 하느님만 찾고 하느님께로부터만 인정을 받길 원하는 분이었습니다.
옛말에 主一無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글자 그대로 ‘하나를 주장하여 다른 데로 나아감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그야말로 영원하신 하느님께만 집중된 삶이었고, 하느님 뜻으로부터 조금도 벗어난 적이 주일무적의 삶이었습니다.
요즘은 살아가는 것만 해도 힘든 세상입니다. 하지만 바쁜 시간 중에라도 약간만 시간을 내어서 하느님께 마음을 둘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조금은 더 넉넉해 질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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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
<맨 몸으로 하느님을 전할 수 있을까?>
하느님을 전해야 하는 일, 우리는 지금 이 일을 선교라고 부릅니다. 세상에 아직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려주고 하느님을 믿어 우리와 함께 사랑하며 살게 하는 것이 복음 전파의 목적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더러운 악령을 제어하는 권세만을 주신 채 다른 어떤 것도 허락하시지 않으십니다.
더러운 악령을 제어하는 능력을 받은 것은 좋지만 지팡이 외에 아무것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은 제자들의 입장에서 얼마나 황당한 일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은 먹을 것이나 자루도 가지지 말고 전대에 돈도 지니지 말며 신발은 신고 있는 것을 그대로 신고 속옷은 두 벌씩 껴입지 말라고 하시고, 어떤 곳에서건 이리 저리로 옮겨 다니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것이 없으니 막막할 뿐입니다. 더군다나 그나마 허락된 악령을 제어하는 권세만 해도 생각해 보면 악령 들린 사람들과 만나 겨뤄야 하는 곤란한 일을 보여주거나 사람들이 악하게 살아가는 삶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힘겨운 상황들을 짐작하게 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시각에 예수님의 이 복음 전파의 사명은 무슨 특수 훈련을 시키시려는 듯 보일 뿐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에게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복음 전파의 정신이라고 불가능한 이상처럼 말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먹을 것도 변변치 않아 먹을거리를 걱정하거나 얻어 먹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돈도 없어서 무얼 하나 사줄 수도, 또 과시할 수도 없고, 거친 길을 걷는 것조차 쉽지 않고, 입을 옷 또한 걱정해야 하니 이 일을 어찌하겠습니까?
그렇다고 이름을 좀 얻었다고 이리 저리로 기웃할 수도 없는 처지가 제자들의 처지입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사람 위에 어떤 것도 얹지 않고 하느님을 전해야 합니다. 딱 보기에도 부족해 보이는 자신들만을 보여주며 완전하신 하느님을 전해야 하는 처지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발에 먼지를 털어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것도 없으면서 너무 자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런 사람들이 되길 원하셨나 봅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어이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의 불안한 생각에 세상에 이런 보잘것없는 모습은 어떤 영향력도 없다고 생각하기에 다시 생각해도 불가능한 도전으로만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런 사명은 특별한 것도, 시험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일이 충분히 이루어지리라 믿고 계십니다.
더 기가막힌 것은 그렇게 길을 떠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충실히 실천하고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를 꾸미는 수도 없는 장식들로 하느님을 전하려 듭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굶지도 않고, 돈도 많이 버는 듯 사람들에게 선전을 하거나 적어도 그렇게 보여지는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종교와 비교를 하면서도 그 끝에는 모든 이유가 돈이 없어서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조금 더 멋지게 꾸미면 사람들도 좋아할 것이라 말하고 그렇게 하느님을 전하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분명한 예수님의 기준을 여러 곳에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특별함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 속에서도 악령에 맞설 수 있는 올바른 길을 걷는 사람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히려 우리는 가진 사람에게서 조차 가지려는 시도를 그만두게 해야 하고 모두를 사랑하며 나누라고 말해야 하는 가르침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를 꾸미려 하는 시도들이 주님 말씀 앞에, 그리고 우리가 믿고 살아가는 신앙 앞에 얼마나 잘못 왜곡되어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여러 가지 조건이 안 된다는 이유로 하느님을 전할 수 없다고 둘러대는 사람들, 그러나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오히려 내려놓고 사람들에게 다가갔을 때 하느님을 전할 수 있는지를 묻고 계십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지니고 있기에 그것을 놓을 수 없어서 하는 변명으로 하느님의 일을 미루고 거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기억합시다. 제자들에게 주어진 이 불가능한 사명은 사실 나자렛 목수인 예수가 그들에게 다가선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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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나는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오늘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보다 더 큰 분이신 예수님께서 오늘 성경의 모든 말씀이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는데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미사를 드리기에 앞서 우리 안에 진정 하느님을 향한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한지, 행여나 우리의 완고한 마음이나 편협된 지식 때문에 진정 하느님의 사랑을 잊고 지내 그분을 몰라 보고 있지는 않은 지 반성하며 주님의 자비를 청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말씀처럼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이시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셨으며, 그분과 하나되어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모든 영광을 받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구약의 모세에서부터 세례자 요한에 이르기까지 성경에 이미 예언된 분이시며 당신 스스로 약이 되어 우리 모두를 치유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구약의 백성들 가운데 배운 이들과 지도자들은 새로운 신약을 거부합니다. 왜 그들은 신약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일까요?
오늘 복음을 잘 살펴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세가지로 말씀하십니다. 먼저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하였지만 유대인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적도 없고 말씀을 자신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았으며 하느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하느님 안에 갇혀 있을 때 우리는 듣고 싶은 소리만 듣게 됩니다. 구약을 제대로 섭취했다면 그들은 신약의 예수님을 알아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관습에 얽매여 있어 본질을 잊어 버린 것입니다.
두 번째로, 구약 성경을 연구하면 이미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된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들의 교만한 마음 때문입니다. 그들은 앎이 있었지만 지식일 뿐, 깨어남이 없었던 것입니다. 앎이 있었지만 그들의 교만은 겸손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낮은 자로 오시는 새로운 하느님께서 그들 곁에 계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교만과 편견 때문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이름으로 온 당신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심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모든 율법과 예언서들이 사랑으로 요약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집단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이렇게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지 못하게 한 세 가지 요소는 지금 우리 안에도 있지 않은지 반성하게 됩니다.
나는 지금 과연 그분 곁에 머물며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과연 그분의 사랑을 믿고 인내로이 견디어내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내가 체험한 하느님에만 집착하며 다른 사람을 구속하려고 들지는 않습니까?
나는 지금 과연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과연 진정 예수님의 그 마음으로 사랑하는 이를 자유롭게 해 주고 있습니까?
사랑과 용서의 열매를 맺지 못할 때 우리는 입으로 “주님, 주님” 하지만,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의 뜻이 아니라 나의 뜻만을 고집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아니라 "자아"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그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내가 원하는 사랑만을 고집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모시지 못하고 "내 방식의 사랑"을 우상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온 마음으로 온 정성으로 온 영혼으로 그분을 사랑으로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 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같은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하도록 합시다. 그렇게 우리가 그분의 마음으로 마주 오는 이들을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할 이들을 사랑한다면 우리 마음 안에 평화와 자유로움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의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예수님! 당신의 복된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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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서>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유효하지 못하다. 그러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나는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분의 증언이 유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희가 그의 글을 믿지 않는다면 나의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서>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서
누구를 두려워하는가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서
누구에게 바라는가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서
누구의 눈길을 의식하는가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서
누구의 마음에 들고 싶은가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서
누구의 증언을 필요로 하는가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서
누구의 일을 하고 있는가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서
누구의 영광을 추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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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눈 먼 열심>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만큼 풍성한 수확도 기대할 수 있으니 신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정작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열심히는 하지만 눈먼 열심으로 쉽게 지치고 결과도 좋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물론 자기 자신 안에 화를 쌓게 됩니다. 따라서 참된 열심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요한5,39-40).
유다인들은 열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하느님에 관해서, 메시아에 대하여, 율법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두루두루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작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심지어 하느님의 의를 세우고 하느님의 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예수님을 처형하였습니다. 아무리 많이 알고 연구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헛일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우리도 참 바쁘게 움직이며 많은 일을 합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우리도 참 바쁘게 움직이며 많은 일을 합니다. 또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들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꼭 해야 하는 일을 하는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하느님 마음에 꼭 드는 일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우리는 실상 많은 일을 하면서도 주님의 일에는 소홀합니다. 많은 지식을 쌓으면서도 주님을 진정으로 마음에 모시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반 서적을 보는 시간의 극히 일부만이라도 신심서적을 읽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합니다. 텔레비전 앞에서는 몇 시간을 보내지만, 성경을 펴들고 있는 시간은 너무도 미약합니다.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살자"는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모든 것의 원천이신 하느님에 관해서 정성을 모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1코린 15,58).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로마12,11).
주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한 오늘이기를 기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죽이려는 이들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이들도 살리려고 무던히 애쓰셨습니다. 그러한 큰마음으로 갈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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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의 중심 내용은 어제 복음(요한 5,17-30 참조)에 이어서 유다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변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증언하실 때 그 증언이 유효하지 못하다는 것을 아시고, 당신의 정체를 확증할 수 있는 증언들을 제시하십니다.
첫 번째, 세례자 요한의 증언입니다.(5,33-35 참조) 그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1,6)으로, 장차 오실 분에 대하여 증언하였습니다.(1,19-34; 3,27-30 참조)
두 번째,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입니다.(5,36 참조) 이 일들은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권한을 위임받아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어 행해졌습니다.
세 번째는, 하느님 아버지의 증언입니다.(5,37 참조) 그분께서 직접 당신 아들을 위하여 증언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의 증언입니다.(5,39 참조) 성경은 신적 기원을 지니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예수님께서 자리하고 계십니다.
성경의 중심 주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에 관한 다양한 증언을 알려 주셨지만,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생명의 원천이시고 아버지에게서 파견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5,40.43 참조) 유다인들의 이러한 배척은 불신에서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안에 하느님 말씀이 머무르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다고 지적하십니다.(5,38.42 참조) 그들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나누는 영광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5,44 참조)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 주셨고, 인간의 역사 속에서 그분을 알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이 완고하여 우리 자신만 바라보면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신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이시라는 사실을 알려 주며, 우리의 마음을 열어 그분을 받아들이고 구원자로 고백하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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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요한5,43)
<예수님을 믿게 하는 증언들!>
오늘 복음(요한5,31-47)은 어제 복음에 이어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다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써, 이미 다 드러나 있는 '예수님을 믿게 하는 증언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언급하신 증언들은 '네 가지'입니다.
첫째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고, 둘째는 '예수님께 맡겨진 일들'이고, 셋째는 예수님을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이시고, 넷째는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하는 증언들에 관한 말씀을 묵상하면서, 먼저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증언들을 잘 받아들이면서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가고 있는 나의 모습인지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그리고 나도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믿게 하는 증언으로써의 도구가 되고 있는지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이미 내 앞에 잘 드러나 있는 예수님에 관한 증언들을 잘 믿고 따라가는 형제자매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의 행실을 통해 예수님께서 세상에 드러나는 '또 하나의 증언'이 되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탈출 32,7-14)는 모세의 중재기도로 이스라엘 백성이 죽을 몸에서 다시 살아나게 되는 말씀입니다.
'나의 중재기도'로 네가 다시 살아나는 '또 하나의 모세'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4처 :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만나심을 묵상합시다.
십자가의 길에 성모님이 예수님을 찾아오셨을 때 "용기를 내어라. 힘을 내어라.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위로하셨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성모님이 오셔서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힘을 내어라.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길이 외롭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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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유명 강사가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그는 고등학교 때, 그렇게 뛰어난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특히 공부를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담임선생님이 어느 날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머리가 나빠서 졸업이나 할지 모르겠다.”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계속 머릿속에 간직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이 말을 마음에 새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답니다. 그러자 더 열심히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판단이 자신의 미래에 영향을 주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 결과 지금 아주 유명한 강사가 되었습니다. 종종 어렸을 때의 말을 마음에 담고 사는 사람을 봅니다. 그 말로 인해 자신이 성장할 수 없었다면서 분노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새기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늘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말이면 담고, 필요하지 않으면 버릴 수 있는 사람은 ‘나’였습니다.
다른 이의 판단이 100% 옳을 수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 안에서도 그런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다른 이의 판단에 무조건 동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미래를 바라보면서 자기 마음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반대자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백성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뛰어난 학식이 있었고, 인품도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은 100% 틀렸습니다. 율법서에는 어떤 사람을 죄인으로 고발하려면 적어도 한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 하고,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일 경우에는 두세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조항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고발할 때 적용될 조항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위 증언은 당신의 신성을 증명하는데 요구되는 사항이 아니며,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굳이 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사고방식을 따라 당신의 신성을 증명하십니다. 그리고 그 증명을 세례자 요한, 예수님께서 행한 여러 가지 기적, 하늘에 계신 아버지 자신, 마지막으로 성경을 통해 증명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자기들 생각에 맞지 않는다고 거부하는 모습,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면서 죄인으로 만들어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만큼 구원의 길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잘못된 판단은 멈춰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의 판단에 대해서도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또 주님 뜻에 맞게 사는 것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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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을 증언하는 삶>
- 예수님 알기, 살기, 닮기, 참나의 삶 -
어제 방문했던 30대 중반의 젊은이를 잊지 못합니다. 은둔적 삶을 살다가 지인의 권고로 수도원의 저를 찾았다 합니다. 대화 도중 성인이 되고 싶다 했고 이어 준 답변입니다.
“성인은 수도원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곳곳에 있습니다. 제 삶의 자리에서 좋고 깊은 관계 속에서 자기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성인입니다. 관계를 떠나서는 성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선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기도하십시오, 공부하십시오, 일하십시오. 그리고 운동도 하면서 심신을 단련하십시오.”
면담성사를 위해 수도원을 찾았던 분들에게 참 많이 강조했던 내용이 성인이 되라는 권고입니다. 믿는 이들의 궁극의 목표이겠습니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비상한 별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 고유의 유일한 참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닮의 여정은 참내가 되어가는 성인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성인이 되는 여정은 그대로 예수님을 증언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증언하면서 저절로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믿게 하는 증언 넷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는 증언들을 제시합니다.
1.세례자 요한의 증언입니다(5,33-35).
2.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입니다(5,36).
3.하느님 아버지의 증언입니다(5,37).
4.성경의 증언입니다(5,39).
이들보다 자명하고 확실한 증언은 없습니다. 모두가 예수님께 수렴되고 집중됩니다. 무엇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께 대한 최고의 증언입니다. 그러나 무지에 눈먼 유다인들은 주님을 믿지 못합니다. 참으로 무지에는 답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유일한 답은 회개뿐인데 복음의 유다인들에게는 기대 난망입니다. 요즘 사순시기 새벽 성무일도시 계속되는 초대송 후렴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그러니 늘 깨어 주님의 말씀을 ‘경청(傾聽, 敬聽)’하는 일보다 무지에 대한 좋은 처방은 없습니다. 참으로 경청할 때 회개와 자기를 아는 겸손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경청을 위한 침묵이요 경청에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회개와 겸손, 순종입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도 은혜롭습니다. 그대로 하느님을, 예수님을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꿈과 희망을 잃고, 길을 잃고, 삶의 목표와 방향을 잃고, 삶의 중심과 의미를 잃고 혼란 중에 방황하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 온갖 우상들의 노예살이입니다. 현대인들의 특징입니다. 이들 모두를 일거에 해결해 주는 열쇠가 되는 분이 바로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사랑, 예수님 알기, 예수님 살기, 예수님 닮기가 믿는 모든 이들의 필생 과제임을 깨닫습니다.
무지한 유다인들에 대해 예수님은 이들이 존숭尊崇해 마지 않는 모세의 예를 들어 이들의 무지를 일깨웁니다. 심지어 모세조차 그 아득한 옛날에 예수님을 증언했다는 것입니다.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다음 신명기에 나오는 모세의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동족 가운데에서 너와 같은 예언자 하나를 일으켜,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내가 명령하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일러줄 것이다.”(신명18,15.17-18)
오늘 복음의 유다인들은 이 말씀을 망각했습니다. 바로 이런 모세는 그대로 예수님의 예표와 같습니다. 예수님 또한 이런 모세를 영원한 롤모델로 삼았음이 분명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하느님을 배반하여 타락한 백성을 살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분투, 노력하는 모세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참으로 감동스럽습니다.
하느님과 모세의 치열한 줄다리기 싸움을 연상케 하는 모세의 기도입니다. 말그대로 주님과의 영적 싸움을 연상케 하는 중재자 모세의 기도입니다. 얼마나 간절하고 집요한 모세인지 결코 물러나지 않습니다.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모세의 사랑을 반영합니다. 찬미와 감사의 기도만 있는게 아니라 주님과의 치열한 전투같은 중재의 기도도 있습니다.
하느님이 모세를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했으며 모세 또한 얼마나 주님을 신뢰하고 사랑했는지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모세의 동족 사랑에 감동했음이 분명합니다. 마침내 모세의 승리, 사랑의 승리입니다.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셨다.”
바로 이런 모세를 능가하는 우리의 영원한 중재자 예수님이며 이런 예수님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이런 예수님을 어찌 증언하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예수님 역시 모세처럼 우리를 위해 예나 이제나 영원히 우리의 영원한 중재자가 되시어 치열히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기도 말미에는 꼭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를 붙입니다.
예수님을 증언하는 삶은 예수님을 닮는 삶이요 참내가 되는 삶입니다. 여기서 기도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기도하게 되고 기도할 때 회개와 겸손이요 주님을 날로 닮게 되며 동시에 참나의 발견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을 증언하는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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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yv1jZ7g-0J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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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요한 5, 40)
봄꽃도
아름다운
꽃으로
가장 좋은
생명을
드러낸다.
진실로
사랑하지
않고서는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없다.
사랑과 생명은
하나이다.
참된 생명을
증언하시는
우리의
예수님이시다.
진실로
믿지 않으며
진실로
사랑하지도 않는
우리들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우리들을 향해
안타까운
마음을
토해내신다.
하느님을
떠난 이들은
생명의 삶과
점점 멀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이신
당신의 삶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신다.
삶의 마지막은
모두 하느님을
증언한다.
세상
모든 것들은
다 하느님께로
귀결된다.
마지막
우리들 삶에
필요한 것은
빛이며
구원뿐이다.
하느님 말씀을
밟고 지나가는
우리들
여정이다.
우리가
희망을
걸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시다.
예수님의
다른 이름은
하느님을 향한
참된 증언이며
참된 진리이며
참된 빛이며
참된 말씀이며
영원한 생명이며
참된 영광이며
참된 희망이다.
참된 믿음
참된 생명으로
초대하시는
주님을 따르는
희망의 새날이다.
믿음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모든 여정이다.
믿음의 힘으로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알게 된다.
진실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은총의
사순이다.
이 희망의
이름을
주고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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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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