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 산수(祝 傘壽)
청계문학 제 30집/가을호 (2020) 원고
이학원(강원대학교 명예교수, 이학박사
부산교육대학 2회 졸업)
나는 나이가 팔십이 다 되도록 산수(傘壽)란 말이 무슨 말이고 무슨 의미인지, 잘 모
르고 지내왔다.
지난 음력 오월 스무 아흐렛날(2020년 7월 19일)이 내 나이 여든 살이 되는 생일이
었다. 막내 숙부님의 3남 2녀 사촌동생들이 여든 살 생일 축하 난을 보내왔다. 서울
에서 꽃집 배달직원을 시켜 98km의 경춘선 전철을 타고 춘천까지 와 직접 난을 전
해주고 서울로 올라갔다.
귀하고 정성어린 난 화분 선물을 받아들고 예쁜 리본에 쓰인 “축산수(祝傘壽)” 란
한자를 읽는 순간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축산수(祝傘壽)란 말은 팔십세 생일을 축
하한다는 의미일 터인데, 왜 한자의 우산 산(傘)자를 넣어 80 이라는 의미를 나타내
는지, 여태까지 한 번도 듣고,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팔십 나이가 다 차도록 산수
(傘壽) 란 단어의 정확한 의미와 뜻을 전연 모르고 지냈으니, 내 무식 정도가 도를
한창 넘었다는 생각으로 얼굴이 화끈거렸을 것이다.
곧 바로 인터넷에 들어가 팔십 나이, 팔십세, 팔십세 생일, 팔십 생일잔치 등의 낱말
을 넣어 그 의미와 뜻을 찾아보았다. “팔십 살 생일잔치를 ‘산수연’이라 한다. 팔십
생일을 ‘산수’ 라 한다.”고 적혀 있었다. 한글로 기록해 놓았을 뿐, 한자로 쓴 ‘傘
壽’란 표기도 해 놓지 않았고, 더구나 한자의 우산 산(傘) 글자가 사람의 나이 80을
왜 나타내고 있는지, 그 이유나 의미에 관한 설명은 전연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인터넷을 사용한 세월이 족히 40여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내용 설명이 부실하고 무
식하기는 팔십 나이인 나와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이숭녕 박사가 감수한 ‘새국
어대사전’을 찾아봐도 산수(傘壽)란 낱말이나 뜻과 의미 설명이 없었다.
21년 전 내 아버지 비문을 짓고 썼던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한문교육과 명예교수인
한문학자 황재국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여쭈어보았다. 명쾌한 설명을 해 주었다.
“우산을 뜻하는 우산 산(傘) 글자를 해체해 보면, 맨 위에 여덟팔(八) 글자 모양이
있고, 맨 밑 부분을 보면 열십(十)자 모양의 글자가 있다. 이를 합치면 팔십(八十, 8
0)이 된다. 우산 갓 모양을 닮은 팔(八)자 안을 살펴보면, 사람인(人)자 같은 글자가
4개나 보인다. 네 사람이 우산을 쓰고 있는 모습과도 흡사하여 팔십 나이를 나타내
는 한자로서 안성맞춤인 글자이다. 산수(傘壽)란 의미는 ‘이래 뵈도 아직 쓸모가 있
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48세, 49세, 77세, 80세, 88세, 90세, 9
9세와 같은 중요 나이에 붙어있는 한자어 별칭과 그렇게 부르게 된 사유를 자세히
적어 종이쪽지에 메모를 한 후, 사진을 찍어 카카오 톡으로 즉시 보내 주었다.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과 같은 박학다식(博學多識)한 귀한 동갑내기 친구다.
나이가 팔십이면 황혼녘 인생이다. 예고 없이 찾아왔던 수많은 삶의 위기를 지혜와
인내와 용기와 희망이라는 파란 우산을 빌려 쓰고, 쏟아지는 눈비와 찬 이슬을 피해
용케 살아남은 사람들이 여덟팔(八)자 안에 보이는 사람인(人)자 모양의 네 사람이
다. 이런 의미로 팔십 나이를 산수(傘壽)라 하고, 팔십 생일잔치를 산수연(傘壽宴)이
라 부른다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상형문자와 뜻글자라는 한자어 묘미를 처
음으로 느끼며 실감이 왔다.
“학부를 마치면 다 안다고 기고만장 하고, 석사를 마치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
에 좌절하고, 박사를 따면 나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썼던 서
울대 컴퓨터공학부의 문병로 교수의 글이 생각났다. 요즘 들어 보통 사람들은 환갑
연(還甲宴,60세)이나 고희연(古稀宴,70세), 희수연(喜壽宴,77세), 산수연(傘壽宴,80
세), 미수연(米壽宴,88세), 졸수연(卒壽宴,90세), 백수연(白壽宴,99세)과 같이 오래 산
것을 축하하는 잔치를 잘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집안 가족이 모여 밥 한 끼 먹는 것
으로 잔치를 대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1차산업인 농업 중심의 동족촌(同族村) 중심 사회
에서 첨단기술과 초고속 스피드를 지향하는 4차산업 사회로 발전하면서 부모자식
간에, 형제자매 간, 일가친척들과 지인(知人)들이 각각 국내외로 뿔뿔이 흩어져 매
일 바쁘게 살아가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작
년 말부터 중국 우한에서 발생 전파되기 시작했다는 우한폐렴바이러스라는 괴질이
우리나라에 까지 전파 확산되면서 그 대응책의 하나로 등장한 것이 ‘사회적 거리
두기’란 것이 있었다. 말할 때 입에서 나오는 침방울이 상대방에게 닿지 않도록 2~5
미터 이상 떨어져야 한다는 방역 당국이 내 놓은 국민들의 일상생활 지침 중의 하나
가 되었다. 이 사회적 거리 두기가 철저히 이행되면서부터 인정(人情)간의 거리도 멀어지고, 부모자식간의 거리, 형제자매간의 거리, 친인척간의 거리, 친구 사이의 거
리도 차츰 멀어져 가는 이상한 세상으로 변해갔다. 인정(人情)이 메말라가는 삭막하
고 팍팍한 삶의 세상으로 변화되어 간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며느리가 30만원을 들여 팔순 생일상을 차려주었다. 용돈으로 쓰라면서 생일 축의금으
로 100만원을 내 놓았다. 옆에 앉았던 마누라가 즉석에서 그 중 50만원을 빼앗아 갔다.
마누라 팔순까지는 6년이란 세월을 더 기다리고 있어야만 빼앗긴 원금 50만원과 그 이
자를 덧 붙여 나도 강탈해 올 수 있을 것인데, 그 때까지 살아 있을 수 없을 것이 뻔하기
에 빼앗긴 이 즐거움을 잘 간직하며 여생을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밖에 별도리가 없
을 것 같다.
시인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제(詩題)를 써놓고, 피를 토하듯
빼앗긴 조국 산하에 광복이라는 따뜻한 봄이 찾아오기를 염원하고 기원하더니, 결
국에는 빼앗긴 그 들인 내 조국에 광복이라는 따뜻한 봄이 다시 찾아왔다. 그러나
산수(傘壽)의 해질녘, 이 장엄한 황혼 길에 들어선 늙은 내가 마누라에게 빼앗긴 그
까짓 작은 돈 50만원을 두고 살아서 못 받을까봐 하루 빨리 돌려달라고 기도하며,
안달하고, 아우성을 치며 살아야만 되겠소?
여보! 그 돈은 영원히 안 갚아도 되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당신의 돈을 당신이 가져
간 것이었소. 여보! 당신의 청춘과 사랑과 헌신을 훔친 늙은 도둑 하나가 흘러간 세
월과 그리움으로 눈을 적시며, 황혼 길에 긴 그림자를 늘어뜨리어 외롭게 당신 곁에
서 있을 뿐이오. 여보! 나는 한평생 당신에게 진 빚을 못 갚은 영원한 채무자(債務
者)일 뿐이오.
강원대학교 명예교수, 이학박사
청계문학 자문의원, 청계문학 시, 수필부문 신인상 수상
한국 DMZ교육연구소 소장, 강원대학교 교사교육원 원장
강원대학교 중등교원연수원 원장,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교 연구교수
황조근정훈장 수상(대한민국 정부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