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적 개인’을 통해서 근대사회의 이중성을 드러내다
루카치는 현실 속에 은폐된 진짜 현실의 모습을 들추어서 이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실주의’라고 보았다. 원래 루카치는 공산주의자도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러시아에서 활동하면서 이윽고 헝가리에 공산당을 창립한 쿤 벨러(Kun Béla, 1886~1939)와 관계를 맺은 이후 갑작스럽게 마르크스주의자로 변신하여 주위의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인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기 이전에 이미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 이후의 사상과 거의 같은 궤적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징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이전의 가장 중요한 저서로 손꼽히는 《소설의 이론》(Theorie des Romans, 1916)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루카치는 여기서 소설을 근대적인 문학 형식으로 규정한다. 루카치는 스스로를 헤겔주의자로 자처한 만큼 헤겔의 철학을 자신의 이론에 적용하였다. 헤겔적 유산 중의 하나가 《소설의 이론》에서 소설을 고대나 중세의 문학적 형식이 아닌 바로 근대적 문학의 형식으로 본 것이다. 그는 헤겔의 예술철학이 남긴 유산을 ‘미적 범주의 역사화’라는 말로 집약한다.
미적 범주의 역사화란 말 그대로 미적인 범주들은 각각 역사적 산물로서 해당 사회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미적 범주란 조각, 건축, 회화, 문학 등과 같은 예술의 장르를 의미할 수도 있고, 나아가 문학 내에서도 서정시, 서사시, 소설, 로망스 문학, 희곡 등과 같은 장르 내의 장르를 의미할 수도 있다. 헤겔은 한 역사적 시대마다 특정한 장르가 대표성을 지닌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이러한 사실이 사회구조나 인간 지성의 필연적인 진화 과정과 맞물려 있음을 강조하였다.
루카치 역시 소설이란 미적 범주, 즉 장르가 전적으로 근대사회의 역사적 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 이유는 최초의 소설로 간주되는 새뮤얼 리처드슨(Samuel Richardson, 1689~1761)의 《파멜라》(Pamela, 1742)만 보더라도 명백하게 나타난다. 서간체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중세의 로망스 문학과 달리 매우 현실적으로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 소설에 드러난 이야기들은 황당한 이야기가 아닌 마치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처럼 진실성을 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가는 매우 정교하고도 합리적인 체계에 의해서 소설 세계를 구축한다.
이 세계는 예전의 문학 장르와는 달리 매우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세계이다. 그리하여 소설가는 마치 자연과학자가 체계적이고도 합리적으로 세계의 질서를 설명하듯이 소설의 세계를 구축한다. 과거의 문학 장르와 달리 독자들은 소설에 나타난 가상적 세계를 마치 현실의 세계로 착각하여 받아들인다.
바로 이 점에서 소설 속의 세계는 하나의 객관화되고 독립된 현실 세계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소설이 지닌 합리적인 체계성 때문이다. 로망스 문학과는 달리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축지법을 써서 먼 거리를 순간 이동하거나 입에서 불을 뿜는 용과 싸움을 벌이지 않는다. 작가는 매우 정교한 방식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소설의 세계를 구축한다. 소설의 세계는 근대의 자연과학자들에게 세계가 마치 독립된 자연 질서를 지닌 자족적 세계로 나타나듯이 독자에게 독립된 하나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는 근대 경제학자들이 발견한 시장경제의 법칙이 마치 현실 자체의 법칙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것과도 상통한다. 이렇게 보자면 소설이 왜 근대적인 미적 범주에 속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구축된 소설 속의 세계는 실제가 아니며 근대인들이 꿈꾸는 허위적인 세계일 뿐이다. 이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가 꿈꾸는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세계는 시장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이지만 그것은 오로지 자본주의 사회의 가상에 지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소설가들의 소설에는 항상 가장 완벽하게 구축된 세계가 하나의 가상일 뿐임을 보여주는 모순된 요소들이 존재한다. 그러한 균열은 바로 소설의 주인공을 통해서 드러난다. 루카치는 이렇게 소설에 내재된 균열, 다시 말하면 근대 사회 자체의 균열을 드러내는 소설의 주인공을 ‘문제적 개인’이라고 부른다. 루카치에 따르면 근대소설은 결국 문제적 개인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이다.
문제적 개인은 합리적인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와 그것으로부터 일탈하는 일종의 신비로운 힘, 즉 마성에 대한 매혹이라는 이중성을 지닌다. 도스토옙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1881)의 소설 《죄와 벌》(Prestuplenie i nakazanie, 1866)에서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지적인 인물이지만 동시에 합리성을 넘어 ‘초인’이라는 마성에 지배된다. 이는 곧 근대사회의 합리적인 특성과 그것이 지닌 허구성의 괴리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루카치의 사실주의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닌 문제적 개인이라는 정형화된 인물을 통해서 근대사회의 근원적 균열을 드러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문제적 개인’을 통해서 근대사회의 이중성을 드러내다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