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독립운동가요 언론인으로 또한 발명가로서 바쁘게 활동하면서도
한국에서 온 초기이민자, 유학생 그리고 사진결혼을 하고 온 여인들을 위해
기도와 사랑으로 봉사하다 끝내 건강을 잃고 4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대위 목사는 그동안 별로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의 종이었다.
이대위(1879∼1928)는 1878년 평양근처 강서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는 한학을 공부했고 그 후 미국선교사들이 세운 숭실 중학교를 다녔는데
그곳에서 근대학문과 크리스토교를 배우게 되었다.
그가 고향에서 결혼한 아내와 함께 미국유학길에 오른 것이
1903년 그의 나이 25세 때였다.
오레곤 주에 있는 포틀랜드 아카데미 대학준비과정을 마친 그는
버클리대학에 입학하여 샌프랜시스코에 정착하면서
그의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이민사회를 위해 봉사하기 시작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사회는 반아시아인 감정이 고조되어
교육청이 아시안 학생들이 백인학생들과 같이 공부하는 것을 금지시켰을 정도였다.
반면에 하와이에서 노동계약이 끝난 많은 한국인 이민자들이 샌프란시스코로 몰렸고
따라서 유학생들과 애국지사들로 이곳을 찾아왔다.
이대위는 이미 이곳 교포사회에서 지도자로 일하고 있던
안창호, 장경 등과 함께 그해 9월에 <친목회>를 만들어
한인사회의 친목과 단합에 힘을 모으고 이를 바탕으로 항일운동을 위한
<공립협회>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 목사는 당시 미주한인사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서재필,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등과 비교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민족지도자요
독립운동가였으나 그의 생각은 다른 운동가들과는 달랐다.
그는 하나님 사랑은 조국 사랑과 통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조국광복의 최선의 길’이라고 믿고
1906년 12월 샌프랜시스코 한인감리교회 창립에 참여하여
선교운동과 민족운동을 병행하였다.
그는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방법으로 서로 돕고 사랑하며
기도하는 이민사회를 키워나가며 동포들의 애국정신을 고양한다면
조국광복의 난관도 극복할 수 있다고 믿고
교회를 통한 목회와 언론기관을 통한 계몽에 큰 힘을 쏟았다.
1906년 12월6일 섄프랜시스코 한인감리교회 창립에 참여한
이대위는 샌프랜시스코 대지진이 일어나자 교회를 중심으로
한인들을 위한 구호사업에 진력하였으며 32세때인
1911년 샌프랜시스코 감리교회 3대 단임전도사로 취임하여 세상을 떠날 때까지
17년을 한 교회에서 봉직하였다.
그는 1912년 (평신도)목사안수를 받았다.
1913년에 한인최초로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를 졸업 사회학 학사학위를 받은 그는 1918년에야 샌프랜시스코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미국 남감리교회에서 정식으로 목사안수를 받았다.
공부와 목회에만 전념할 수 없는 바쁜일정때문이었던듯 하다.
그는 목회하는 가운데 샌프랜시스코 감리교회의 주보 ‘대도’를 통하여 복음전도 뿐 아니라 동포들의 교양증진과 본국과 세계각국의 정세를 알리는데 노력하였으며
그가 발간한 ‘대도’는 후에 ‘이민 백년사’ 집필에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샌프랜시스코 교회를 중심으로 인근 지역에 여러 한인교회들을 설립하고 부흥시킴으로 미국남감리교회 안에 한인교회 지방회를 조직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성격이 강인하고 부지런하였던 이 목사는 교회만이 아니라
자기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느곳에서나 봉사하였다.
1909년 2월에는 <대한인국민회> 창립을 주도했으며 1910년 1월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부회장에 선임되어
총회장 황사용과 함께 국민회 기초를 다졌을 뿐 아니라
1913년부터 1918년까지 북미지방총회 회장을 세 번이나 연임하면서 국민회를 정식인가를 받은 사단법인으로 자리를 굳혔을뿐 아니라
미 국무장관으로부터 국민회가 한국인들을 위한 공식기구로 인정한다는 약속을 받아
나라잃은 한인들의 가정부(假政府)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기관지 <신한민보>를 복간하여 주필로 수많은 글들을 직접 쓰며 참여하였다.
한일합방이 되자 그해 7월 <애국동맹단>을 조직하고 일본 왕에게 강력한 합병 반대서한을 발송하는 한편 각 지방에 독립군 양성소를 설립하고 필요한 재원 마련에 힘썼다.
샌프랜시스코한인교회 담임목사였던 이대위 목사는 항구선교사(Port Missionary)라는
공식직함도 가지고 있어서 한일합방 이후
미국에 몰려오는 애국지사들과 유학생들을 위한 신원보증을 서주기도 하고
불법으로 입국해 오는 한인들의 이민수속을 돕기위하여
이민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일할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이 목사는 200여명의 애국지사들과 500여명의 유학생들 그리고 70여명의 사진신부들의 입국을 직접 도왔다고 하는데 당시 한인 유학생들의 이민국서류를 보면
도착지가 샌프랜시스코 1053 Oak St. David Lee(이대위 목사 주소)로 되어 있다.
1919년 3.1운동 당시 국민회 북미지방 총회회장으로 대한독립선언,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 후 이승만, 김규식, 송헌주와 함께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임시정부 활동에도 관여하면서 외교활동을 폈다.
그는 미국무장관에게 편지를 써서 재 샌프랜시스코 일본영사관의 한국인 간섭에
항의하여 <국민회>가 한국인들의 대표기관임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 목사는 일찍부터 언론을 통한
계몽과 2세 한글교육에관심이 많아 샌프랜시스코 한인감리교회를 담임한 후에는
휴간중이던 교회주보 <대도>를 복간하였으며 국민회 회장이 되어서도
역시 휴간중이던 <신한민보>를 복간하여 교포들의 교양 향상과 계몽에 큰 힘을 쏟았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1915년 3월에 ‘인터타입 한글식자기’를 발명하여
신문 활자 혁명을 일으켰으며 이 식자기는 교회주보 ‘대도’와 ‘신한민보’를 찍어 국내외 정세와 독립운동 소식을 전했을뿐 아니라
문서전도와 한글교재 출판에도 유용하게 사용되었으며
1915년부터 1970년까지 신한민보를 제작하는데 사용되다가
지금은 LA의 <한국이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927년 건강이 나빠져서 모든 교포사회의 직책을 사임하고 교회일에만 전념하였다.
성격이 강인하고 한번 결심하면 실행하고야마는 이 목사는
미 감리고 선교부를 찾아가 담당목사의 멱살을 잡고
“왜 일본인 이민자 교회는 세워주면서 한국인을 위한 교회는 세워주지 않느냐?
우리도 교회건물이 필요하다”고 항의하여
1년 후에 교회터를 살 수 있는 자금을 받아냈다고 한다.
그렇게 마련한 터에 교인들의 정성어린 건축헌금으로
1930년 자체교회건물을 완공 1994년까지
샌프란시스코연합감리교회의 건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목사는 과로로 인한 8년간의 병고로 교회건물의 완공을 보지 못한채
1928년 6월 17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 순간까지도 동포들의 평안을 염려하면서 보고싶은 동포들의 곁을 떠났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그의 병명은 과로로 인한 폐결핵이었다.
1910년대부터 20년대까지
샌프랜시스코에서 이 목사의 도움을 받지 않은 한인은 없을것이라 말할 정도로
낯선 땅에 도착한 한국인을 제일 먼저 영접하고,
교포가 이민국에서 문제가 생겼다하면 제일 먼저 달려가고,
일자리와 아파트를 얻어주는 것은 물론
사진 한장 들고 온 신부들을 결혼하도록 주선해주고 결혼주례까지 서주는 한편
교포사회의 대소사를 챙기던 이 목사는 미주 한인사회 전체를 이끌어간 재미 민족운동의 실질적인 지도자였으며 ‘민족목회와 민족운동’의 중심에 서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그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으로 보여주었음에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까마득하게 잊혀져 가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에서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2005년에는 이대위 지사 천장위원회(위원장 문충한)를 구성하고
그의 유해를 한국의 국립묘지로 이장하였다.
이대위 목사의 유해는 그가 그처럼 그리고 사랑하던 고국 땅에 묻혀 있으나
싸이프러스 공원묘지에 있는 그분의 옛 무덤 자리와 묘비는 그대로 보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