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올리버 R 에비슨은 캐나다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모교 교수로 강의를 하며 시장 주치의를 맡는 등 부유층 환자들을 전담하고 있었다. 기독교 의학 청년회 활동도 꾸준히 했던 그의 인생을 바꿔 놓은 건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언더우드 목사의 강연이었다. 깊은 감동을 받은 에비슨은 1893년, 33살의 나이에 토론토에서 누리던 모든 부와 명예를 내려놓고 아내, 아이들과 함께 조선으로 건너왔다.
조선에서 그의 활약은 눈부셨다. 옻나무 수액 알레르기를 일으킨 고종을 단번에 낫게 하고, 의학교를 만들어 한국 최초 면허의사들을 키워냈다. 한국어 의학교과서를 처음으로 발간하는가 하면 콜레라 방역사업에도 앞장섰다. 자선사업가 세브란스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받아 1904년 세브란스병원을 만들었다.
그렇게 조선에 대한 사랑을 실천했던 에비슨은 75세의 나이에 캐나다로 돌아갔다.
조선땅을 밟은 지 42년 만이었다.
KBS1 특집 다큐가 10일 오후 11시40분
‘조선을 사랑한 의사 에비슨 42년의 기록’ 편을 방송한다.
선교의사 3대 후손인 인요한 교수가 에비슨 인생 여정을 안내한다.
인 교수는 미국 뉴욕, 필라델피아와 캐나다 토론토, 스미스 폴스 등
해외현장과 국내에 에비슨의 발자취가 남은 곳을 찾아간다.
조선으로 출발하기 얼마 전 아내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된 일,
일본군과 시가전으로 부상한 병사들이 몰려들면서 남자 환자들은 치료하지 않았던 여성 간호부들이 치료에 나선 일화, 외국인과 다니는 것이 부끄러워
뒷길로만 에비슨을 안내한 어학교사, 경복궁 연못 향원지에서
고종의 초대로 스케이트를 탔던 일 등 흥미로운 일화들이 소개된다.
후손들의 생생한 증언과 의학, 사학, 종교계 전문가의 인터뷰도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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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33살에 조선에 온 선교 의사 에비슨의 인생이 다큐멘터리로 제작됐다.
에비슨은 옻나무 수액 알레르기를 일으킨 고종을 단번에 치료했다.
경복궁 연못 향원지에서 스케이팅을 탔던 그는 왕실의사 시의로 발탁돼
당시 침체된 제중원 재건에 힘썼고 의학교를 만들어 한국 최초 면허의사들을 키워냈다.
백정에게 상투를 틀 권리를 찾아준 반면
개화를 위해 단발을 결심한 배재학당 학생 이승만의 상투를 잘라주기도 하면서
조선인과 희로애락을 함께 했다.
한국어 의학교과서를 최초 발간했고
전염병 콜레라 방역 사업에 앞장섰으며
현대식 건물로 세브란스 병원과 의학교를 세워
조선에 서양 근대 의학을 전파하는데 이바지 했다.
자신이 꿈꾸던 것들이 모두 이루어진 1935년 에비슨은 홀연히 조선을 떠났다.
그는 왜 조선에 왔고 또 왜 갑자기 조선을 떠났던 것일까.
선교의사 3대 후손 인요한 교수가 시공을 넘나들며
에비슨 인생 여정을 안내할 예정이다.
당시 정황에 대한 후손들의 생생한 증언과 의학, 사학,
종교계 전문가 인터뷰를 더해 깊이와 재미를 모두 잡은 특집 다큐
'조선을 사랑한 의사 에비슨 42년의 기록'은 오는
10일 밤 11시 40분 KBS 1TV에서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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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슨은 제중원과 한국에서 서양의학 발전에 최대 공헌자다.
제중원의 중흥과 세브란스병원과 의과대학으로 발전하게 한 주역이었다.
그는 영국 요크 주에서 태어났으나 가족을 따라
1866년 6세 때 캐나다 온타리오 주로 이주하였다.
토론토대학의 안정된 교수직을 그만두고 한국 선교사로 와서 헌신하고
은퇴 후에는 미국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나그네 인생의 여정 속에 한국의 의학과 교유긔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청소년 시절에 약방에서 일하며 학교도 다녀
후에 토론토대학의 약대 교수로 활동하였고,
토론토대학 의대를 마친 후에는 모교의 교수가 되었다.
토론토대학 YMCA운동에도 적극 가담했던 에비슨은
하디와 게일의 한국 선교사 파송에 참여했다.
후에 언더우드를 만나 그의 권고를 받고
교수와 의사로서의 기득권을 버리고
한국 의료선교사에 지원하여 1893년 4월에 캐나다를 떠나
부산을 거쳐 8월 말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에비슨은 내한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고종의 피부병을 치료하여 왕실의 주치의가 되었다.
이후 10년간 혼자서 주치의로 활동하였다.
에비슨은 언더우드와 의료와 교육 선교에 뜻을 같이하고 협력했다.
특히 평양 지회의 동료 선교사들이 병원의 확장과
서울에 대학설립을 극구 반대할 때 상부상조했다.
그는 전술한 대로 제중원의 기틀을 바로잡고
조선 정부의 정부 병원 체제를 선교부가 주도하게 만들었다.
제중원의 학교도 정상화되어 1899년에는 해부학 교재를 만든 것을 필두로
다른 분야의 의학교과서를 만들어 의학교육에 박차를 가했다.
1900년에는 뉴욕의 선교대회에서 한국의 의료선교에 대한 연설로
세브란스의 기증을 받게 되어 병원을 신축하고
양적인 그리고 질적인 발전을 이룩해 오늘날의 세브란스병원을 이루는 데에
초석을 놓았다.
그의 부인도 간호업무를 도왔고, 병원은 물론 밖에서도 여자들에게 전도했다.
목요일 밤마다 여러 계층의 한국인들을 초청하여 한국문화를 익히며
문화교류에도 힘썼다.
그의 자녀들 가운데 3명이 한국 선교사로 봉사하였다.
어빈(C. H. Irvin)
어빈은 북장로교 선교부 파송을 받아 1893년 11월 말
에비슨의 병원 확장 계획에 따라 부인과 함께 임명되어온 첫 의사였다.
제중원에서 에비슨을 돕다가 부산에서 활동하던 브라운이 병으로 귀국하자
부산 지방으로 전임되었다.
그는 부산에서 활동하는 동안 나병 환자 선교를 개척하였다.
그녀는 매사추세츠 주 몬슨에서 태어났고,
그곳의 몬슨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이 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학생 선교자원 운동의 진원지인 노스필드 신학교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여자의대를 좋업하였다.
의대 재학 중에 선교사를 지망하여 제중원에 간호사로 오는 제이콥슨과 함께
1894년 4월 6일에 내한하였다.
제중원에서 영어와 생리학을 가르쳤고, 재정책임자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녀의 한국어 선생은 이승만이었다.
1900년에는 남장로교 선교회의 오웬과 결혼하고 남장로교로 이적하면서
제중원도 사임하였다. 광주 수피아 여자 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기도 하였다.
피시(Mary Alice Fish)
피시는 네바다 주 버지니아시티에서 출생하였다.
그 가문은 5대에 걸친 장로교 목사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장로였으며, 어머니는 청교도 가문 출신이었다.
산타로사신학교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여자의대에 입학해 공부하다가
쿠퍼 의대를 졸업하였다.
필라델피아 병원에서 인턴을 마치고 무디 성경학교와 스코필드 성경학교를 마쳤다.
피시는 1897년 11월 제중원에 부임한 후, 평양으로 전임되었다가
1899년 모펫과 결혼하였다. 평양에서 1904년에 맹인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질에 걸려 1912년 7월 12일에 당시 나이 42세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