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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유럽의 역사(프레데리크 들루슈 편,까치,1997)중에서
1085년의 톨레도 점령은 이슬람 세계와 기독교 세계 사이의 힘의 균형이 적어도 유럽에서는
완전히 역전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5년 뒤에는 시칠리아에 대한 아랍의 지배가 끝났
다. 이 섬은 노르만족의 수중에 떨어졌고,그 후 이탈리아 남부 전역으로 뻗어나간 알타빌라
왕국의 본거지가 되었다.
어떤 주군의 군사적인 종신이 되려면 그 종신은 주군으로부터 "은대지"(나중에는 라틴어에
서 나온 이말보다 게르만족 의 용어인 "봉토"가 더 널리 쓰이게 되었다. 은대지는 토지와 농
노를 합친 총제적인 것이다),다시 말해서 "충복"이 오직 군사적인 봉사에만 전념할수 있을
만한 어느 정도 규모의 토지와 농노를 받아야만 했다.
자기 가문에서 수많은 기사들을 배출하고 있었던 토지영주들은 이미 오래전(7세기 이전임은
분명하다)부터 그들의 농노들에 대해서 전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자신의 "충복들"과
자유신분의 여타 속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오래된 토
지 영주권에다 "공적"영주권을 중첩시킨 후 영주들은 영주령내의 사법권을 독점하고 그곳의
주민 전체에 대해서 행사했다. 게다가 그들은 각종 세금과 봉사(성채의 유지와 관련된 부역
이라든가 농촌의 기사들에 대한 접대의무)를 강요했다. 이러한 "강제권"에는 곡식을 빻거나
빵을 구울 경우 반드시 성주가 설치해놓은 시설들을 (사용료를 내고)사용해야 하는 의무도
포함되어 있었다.
방금정의한 바와 같은 "봉건제"가 유럽 전역에서 동시에 출현했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노
르망디공들의 권력은 영주들에 의한 권리 침해에 의해서 조금도 약화되지 않았다. 이와 같
은 상황은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영국 및 일부 아일랜드에 봉건적-주종적 관계를
도입한 장본인이 바로 이 지역들을 정복한 노르망디 인들 자신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지방
의 기사들과 영주들에 의한 그와 같은 특권의 찬탈은 노르망디 인들에게 복속된 시칠리아 왕
국에서도 역시 저지되었다. 독일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좀더 뒤늦게(12세기와 특히 13세기에)
나타났다. 프랑스의 경우,(앞서 규정된 의미에서의) "봉건제"는 10세기 말이채 못 되어 뚜렸
하게 나타났다. 카롤링거 왕조 막바지의 왕들은 실제 그들의 권력이 상어가죽처럼 오그라드
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으며,987년 위그 카페의 즉위로 비롯된 새로운 왕조의 도래 역시 이
와 같은 상황을 전혀 변화시키지 못했다. 프랑스의 왕권이 가장 심각한 위협에 처런것은 위
그 카페의 아들인 경건왕 로베르 2세(재위 996~1031) 때였는데, 이 당시 공권력의 분해는
그 절정에 도달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특히 980년에서 1030년 사이에 일어난 한 가지 새로운 변화가 일부
역사가들로 하여금 그 반세기를 두고 "봉건혁명"이라고 부르게 만들었다. 영주권의 출현과
공권력 탈취의 주요 장본이었던 기사집단이 그후로는 오래도록 혼란과 폭력과 부정의 요인으
로 나타나게 되었다. 교회가 기사들에 의해서 수행되는 역할의 정당성 문제를 제기한 것은
바로 앞서 언급한 시기가 끝나갈 즈음,다시 말해서 국왕은 더이상 백작이나 영주들이 탈취
한 권력에 맞설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졌을 때였다. 많은 주교들은 그저 현
실을 개탄하고 국왕이 정의와 평화의 보증자였던 옛 시절을 그리워 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보다 더 많은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은(클뤼니 수도원에 의해서 제시된 모범을 따라)전
사들의 폭력을 규제하려는 대규모 운동을 벌이는 데 결연히 벗어나섰다.영주들과 종신들은
교회에 모여 "신의 평화"를 존중할 것을 엄숙히 서약해야만 했으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파문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좀더 뒤에(이용 가능한 사료들로 미루어 보건데 이것은
11세기말 이후로 여겨진다)교회는 무예를 근본적으로 기독교화함으로써 단순한 규제 조치 이
상으로 나아가고자 시도했다.
장기간에 걸친 인구성장이 950년경부터 유럽전역에서 시작되었다. 그이전 상황은 어떠 했을
까?
542년에서 7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지중해연안 전역뿐만 아니라 갈리아 지방까지도 휩쓸었던
몇차례의 대대적인 선페스트가 고대 말엽에 숱한 인구를 희생시켰다. 이 전염병은 그뒤로 두
서너 세대 이상 동부 지중해 일대에 연속적으로 창궐했다. 한편 서방은,비잔틴 제국과 언제
나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남부 이탈리아 지역을 제외하면,여기에서 벗어났던 것처럼 보
인다. 650년에서 950년에 이르는 3세기 동안,인구의 증가는 완만하면서도 불규칙하게 진행되
어(몇몇 경우들을 제외하면)대체로 5세기 수준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얼핏 보기에 몇
몇 지역들은 이미 8세기에 인구가 비교적 과잉상태였던 것 같기도 했다. 9세기에 유럽의 농
업은 안정적인 곡물 경작에 의존하기 보다는 여전히 숲의자원들(돼지 방목, 사냥, 과실 채
집)에 좀더 의존 했던 듯하다. 함부로 파괴하기에는 숲은 인간의 생존에 너무도 중요한 요소
였다.
(유럽의 인구는 )10세기의 3800만명에서 14세기 초에는 7500만명을 넘어섰다.
13세기의 "꽉 찬"유럽은 14세기에 와서 "텅 빈"유럽이 되어버렸다. 1150년에서 1300년 사이
에 유럽의 인구는 5000만명에서 7300만명으로 늘어났던데 반해,1350년에는 고작해야 5100만
명이었으며 1400년도에도 4500만명 정도에 불과하게 되었다. 왜 이와 같은 인구감소가 일어
났을까? 그 근본적 원인으로 서는 무엇보다도 흑사병(1347-51)을 꼽을수 있다.
1150년과 1300년 사이에 유럽은 엄청나게 인구가 증가했다. 그 결과 곡물에 대한 수요가 늘
어나고 그 가격이 상승했다.
1316년에는 유럽전역 기근에 시달렸는데, 이는 향후 한 세기 반이나 지속될 농업위기가 바야
흐로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3세기에는 사람들이 꽤 잘 먹고살 수 있었던 데 비
해 14세기에는 일시적이고 국지적인 기근을 제외하고서라도 매우 광범위한 기근사태가 여러
차례 닥치곤 했다.
14세기중에 새로운 지불방식이 발달했다. 곧 환어음이 그것이었는데, 이것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일정 금액을 특정장소에서 증서에 지명된 제3자에게 지불하도ㅓ록 명
령하는 증권이었다. 가령, 브루헤의 어떤 상인이 베네티아에서 상품을 구매하고자 할 경우
그는 그 판매자의 브루헤 소재 대리점에 필요한 금액을 납입한다. 그대가로 그는 환어음을
교부받아 이것을 주문서와 함께 베네치아로 보낸다. 판매자는 지불수단인 그 어음에 배서하
고 해당금액을 지급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현금이 왔다갔다하지 않았으며,브루
헤에 남아 있는 돈은 이제 베네치아 상인이 물품을 구입할 때 결제대금으로 쓰이게 되었다.
간혹 환어음 발행과 현금 결제 사이의 유예기간이 상당히 긴것을 고려하여 원금에 이자가 붙
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은행가들은 환어음을 조직적으로 거래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이
내 훌륭한 수입원이 되었다. 피렌체, 볼로냐, 밀라노, 베네치아, 로마 등이 이 수익성 높은
장사의 손꼽히는 금융 중심지들이었다. 바르셀로나와 발렌시아, 파리, 아비뇽, 제네바, 런
던 등도 이거래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브루헤는 명실상부한 북유럽 금융의 중심지로 발돋
움 했다. 부유한 은행가 가문들이 그들 도시 안에서, 그리고 나아가서는 왕실과 교황청에서
점차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대단한 위광을 부여한 문예 보호자
로서의 역할이 이와 같은 영향력에 덧붙여지는 경우도 이따금 있었다. 이탈리아의 메디치가
와 스트로치 가,독일 신성로마제국의 푸거 가와 벨저 가, 프랑스의 자크 쾨르 가 등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한자동맹도시(1374-1435)-애초에는 상인조합으로서 발족했던 한자는 급속히 북유럽과 독일
의 도시동맹으로 발전함으로써 정치적 통일체는 아니었으나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그러
나 그 정치적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었는데. 예를 들면 덴만크 왕위 계승전쟁에 개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흥국가의 출현(폴란드,리투아니아),네덜란드 도시들 및 잉글랜드 도시들의
경쟁에 눌려 쇠퇴했으며 30년 전쟁에 의해서 발트해에서의 상업활동이 중단되자 한자는 완전
히 명맥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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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로 본 중세유럽(에디트 엔넨,한울아카데미,1997)중에서
바이킹 시대의 교역중심지는 비르카와 하이타부였다. 하이타부는 9세기에 라인 일대와 스칸
디나비아의 교역을 위한 화물중개지였다. 900년에 시작된 하이타부의 번영은 1000년경에 침
체에 접어들어 11세기 중엽에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들었다. 그 뒤를 이어 슐라이 강
의 북안에 새로운 정주지인 슐레스비히가 생겼다. 하이타부의 면적이 9세기에는 약 10ha,10
세기에는 24ha 정도였던 것에 비하면, 비르카는 그 절반밖에 안 되는 크기에 불과했다. 비르
카와 하이타부는 후대에 축조된 반원형 누벽에 의해서 보호 되었다.
이탈리아는 많은 도시들이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또한 이른 시기부터 상업활동에 눈
길을 돌렸던 대부분의 대토지소유자를 포함한 도시주민들이 도시적인 속성을 보유하고 있었
고, 그리고 비잔틴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확보하고 있었다.이러한 요소들로 인하여 이탈리아
는 955년 오토1세의 대헝가리전 승리,960년 비잔틴 제국에의한 크레타 섬의 정복 그리고
1015~1016년 피사와 제노아에 의한 사르디니아 섬의 정복으로 이탈리아인의 교역로가 활짝
열리게 되었을때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다. 신흥도시인 베네치아는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성
공적으로 교역상관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이집트에서 베네치아의 중개상들은 카이로를 넘어 나아갈수 없었다. 나일 강 상류를 향
한 항해는 회교상인들에게 장악되어 있었다. 1261년 동로마제국이 새로이 중흥을 맞았을때,
베네치아의 소유지는 다시 흡수 소멸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3세기말에 절정기에 맞았던 제
노바에게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즉 피사는 쓰러지고, 시칠리아는 분할되고, 서아프
리카의 아랍인들은 약화되고, 스페인은 전쟁상태에 있고, 프랑스의 함대는 아직 초보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프로방스의 코뮌들은 쇠퇴하였다. 마침내 제노바와 베네치아 사이에 어느 정
도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졌다. 이들 두도시는 비잔틴 제국 전역에서 관세를 면제받았다. 베네
치아가 대륙에 중요한 항구를 소유하고 크레타를 호함한 그리스 군도의 남부 도서들을 획득
한 덕분에 특히 이집트-시리아 교역을 장악했던 반면에, 제노바는 에게 해 북부의 도서에서
세력을 확장하였다.
제노바는 카파를 획득하고 1316년 식민지를 도나우 강의 하구에있는 타나로 옮겼다. 곧이어
1325년 이곳에 베네치아인들이 등장했다. 14세기말 제노바는 크림반도에서 상당한 지위를 구
축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도시로 러시아 곡물을 수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1343
년 타나가 잠시 타타르의 수중에 들어갔을때 비잔틴 제국과 이탈리아에서 향료가격이 인상했
음은 말할 것도 없고 곡물과 절인 생선의 부족사태를 빚는 등 대단히 민감한 사태들이 발생
했던 사실에서 잘 드러났다.1281년부터 제노바인들은 트라페춘트에 확고하게 정착했다.1319
년 베네티아가 그뒤를 따랐다. 소금, 사탕수수, 치퍼른 포도주, 면화, 대청, 낙타직, 금사,
금란 등 매우 풍부한 수출품목을 가진 치퍼른 섬은 1193년까지 비잔틴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
으나, 이곳에서 이탈리아 상인들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피렌체까지도
이곳에 발판을 마련했던 14세기에는 대단히 많은 수의 이탈리아 상인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서 제노바가 가장 강력한 지위를 구축하였다. 오랫동안 한갓 지방세력에 불과했던 피렌체는
14세기 말엽에 이집트와의 교역을 둘러싸고 그들보다 먼저 교역을 장악하고 있던 경쟁자들
과 벌어진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피사항과 리보르노 항을 획득한 피렌체는 1422년 이집
트의 여러 국왕과 통례적인 면허사항들에 관하여 담판을 지었고, 1455년 정기적인 함대순례
를 지직하였다. 그러나 당분간은 베네치아를 비껴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1300년 이후에 우리는 페르시아 특히 테브리즈에서 베네치아인, 제노바인,피사인들을 마주
치게 된다. 페르시아는 그보다 동쪽에 위치한 인도와 동아시아로 진출하기 위한 교도보가 되
었다. 인도와 동아시아를 향한 여행은 1350년경에 중단되었다. 이탈리아인들의 동방교역의
특징은 교역적자에 있었다. 그것은 이탈리아인들이 장구한 문화적 전통을 가진 이 지역사람
들이 필요로 하거나 높이 평가했던 상품들을 공급하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