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윤태룡의 악의적인 선동에 답한다
ad veritatem (youg****) 채팅 작성일 2018.06.19. 11:31 | 조회 38 “미국은 1958년 한반도에 전술핵을 배치했고, 이는 1991년까지 지속됐다” “우리는 한반도 핵지대화의 시작은 북한에 의해서가 아니라, 핵무기 배치와 관련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입장을 견지한 미국에 의해서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1958년, 미국이 한반도에 전술핵을 배치해 북한의 입장에선 미국을 견제하여야 함이 당연하 바, 한반도 핵지대화의 시작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것이 윤태룡의 논지다. 근데 과연 그런가? 한반도에 북핵의 그림자를 드리운 당사자가 진지첸이 아니라 미국이라고? 맞는 말일까? 결과적으로 팩트와 논리를 완전히 왜곡한 궤변 중 궤변이다. 그럼 이제 조목조목 반박 들어가면 되겠지? 종북좌파 진영이 끊임없이 주장하는 게 한국과 미국의 우파 정권들이 북괴를 빠져나올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계속 몰고 갔고 그런 북괴 입장에선 어쩔 수 없이 자위적 차원에서 북핵을 구상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일종의 면제권을 부여. 한마디로 대한민국 사람이 북괴 시각에서 북괴의 입장을 전적으로 대변하는 것이다. 여기에 한발 더 나아가 1989년 영변의 핵연구단지에서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시설들이 국제사회의 정보망에 첫 포착된 이래 이 시점을 북핵의 시발점으로 보면서 70년대 박정희 정부의 자주적 핵무장 즉, 핵개발 시도가 이런 북괴의 핵개발을 자극한 유인(誘因) 중 하나라며 선전하기도 했다. 우파 진영은 그럼 어떤가? 북핵은 개돼중-뇌물현 정권의 소위 '퍼주기'식 대북 정책(햇볕정책-무분별한 현금 지원)을 매개로 그 막대한 자금을 핵개발하는 데 전폭적으로 투자됨으로써 이뤄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얘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핵개발의 가속화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참이고 시점으로 해석하면 오류다. 한마디로 북핵의 중·후반부 개발 과정을 적절히 설명하는 상관계수일 뿐 북핵이라는 결과의 인과관계를 논하는 독립 변수는 아니다. 그럼 북괴의 핵개발 역사는 어디서부터 시작됐나? 바로 중국인 진지첸(김일성) 시절이다. 6·25 전쟁의 패퇴로 인한 恨이 김일성으로 하여금 핵개발을 추진하도록 만들었다. 좌파들이 흔히 주장하는 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핵개발 시도가 북괴를 자극시켰다는 건 명백한 허위다. 그리고 윤태룡의 거짓말처럼 58년도 미국의 전술핵 배치 때문도 아니다. 그 전에 김일성은 핵을 개발할 원대한 시도를 이미 하고 있었다. 진지첸은 6·25 정전 협정(1953년 7월 27일) 직후부터 북괴의 공군력 증강과 핵개발에 골몰하고 있었는데 6·25 당시 미 공군과 미국의 핵보유 위력을 현장에서 뼈저리게 절감하였기 때문이다. 진지첸에게 있어 미 공군의 전투력은 도저히 넘볼 수 없는 것이었다. 엄청난 美 공군의 무력에 북괴 인민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리고 또 당했다 계속 당했다ㅋㅋㅋㅋㅋㅋㅋㅋ 美 공군의 막강한 화력에 대해 진지첸이 느낀 열등감 및 수치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정전협정을 통해 공짜로 물려 받은 서해 5도 이북 지역의 도서들을 대남 무력도발의 핵심 거점으로 삼아 해군력을 다시 재건하면서 NLL를 수시로 침범하고 인근 해역에 대한 영유권을 끊임없이 주장했던 것이다. 핵과 관련한 김일성의 限은 사실 미 공군보다 더 깊다. 그렇다면 얼마나 깊었길래? 1950년 7월 진지첸은 조국해방 전쟁 마감을 위한 지상전투용 군사장비들을 투입해 달라고 소련의 스탈린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 요청을 거절했다. 거절했던 배경과 관련 여러 추측이 가능한데 첫째로 미국의 핵무기 때문, 또 하나로는 스탈린이 모택동이 수장으로 있던 중국의 부상을 경계하였기 때문. 북괴와 더 친밀했던 건 소련이 아니라 사실 중국이었고 동란의 향방을 가늠할 결정적 군사 제공 또한 소련보다는 중국의 몫이 훨씬 컸다. 무튼 소련의 안일한 소극적인 태도에 진지첸은 무척 실망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소련이 그토록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을까? 그 이유로 김일성은 미국의 핵무기를 소련의 대규모 참전을 억제하고 중국에 정전을 강요한, 적화통일을 무력화시킨 최대의 원흉으로 지목했다. 판세를 완전히 뒤집을 수 있는 엄청난 억압과 강압 효과. 핵무기란 존재는 그토록 효과적이었다. 언젠가 적화통일이라는 일생일대의 대업을 완성하기 위해선 핵무기 개발은 너무도 요원해 보였다. 자신의 김일성주의 수령 독재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써도 핵무기는 절실했다. 그래서 김일성은 동란이 종결된 1953년 당해 소련과 원자력 체결협정을 맺었고 54년엔 소련에 핵무기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소련이 거부하자 김일성은 독자적인 핵개발 루트를 구상하기에 이르렀는데 1950년대 중반부터 북괴는 이미 핵과학자를 양성하기 시작했고 1960년대엔 영변과 박천에 원자력연구소를 설립, 1963년에 소련으로부터 IRT-2000 연구로를 제공받았다. 또 1970년대 영변핵 연구단지 건설을 진행하여 1980년대에 부분 가동을 시작했다. 영변의 5MW 연구로는 1986년에, 재처리 시설은 1989년에 부분 가동을 시작했다. 어때 종북좌좀 태룡아? 어디서 씹구라를 까 ㅈ도 아닌 병신 쉑히가ㅋㅋㅋㅋㅋㅋㅋㅋ 뭐 미국이 핵지대화를 먼저 시작하니 그에 대응한 핵억지 차원이었어?ㅋㅋㅋㅋㅋㅋ 한반도 핵무기의 시원은 1953년이야~ 미국이 첫 포문이 연 것이 아니라ㅋㅋㅋㅋㅋ 오랜 기간 동안 핵개발 집념을 불태운 북괴의 핵 공갈을 감안할 때 70년대에 이미 자주적 핵무장론을 주창하시어 먼 훗날의 국가안보까지 내다보신 박정희 각하는 대체... 평화란 결국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주체가 진취·자주적으로 나아갈 때만 균형이 유지·성립된다는 걸 몸소 보여주셨던 박정희 대통령. 그리고 한가지 더 첨언하고 싶은 건 '자국국방'은 자못 적절한 시기란 게 존재한다는 거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엔 그게 가능했지만 지금은 그저 공허한 메아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미국,일본이라는 든든한 안보동맹의 힘을 빌리지 않고 현 시점에서 자주국방을 외치기엔 주변국들의 국력이 너무 커져 버렸다. 시기를 완전히 놓친 것이다. 국력방정식이란 게 있다. 국력의 기본적 요소는 인구,영토,부존자원이다. 군사력,경제력도 매우 중요하다. 허나 가장 중요한 하나가 빠졌다. 바로 국가지도자를 중심으로 합일된 마음을 도출할 수 있는 건전한 시민관이 그것이다. 이것이 국력의 핵심적 요소다. 인구와 영토 그리고 자원이 풍부해도 강대국이 못된 나라들이 많다. 이건 셰일가스가 많이 누적돼 있는 영토에 살아도 그 셰일가스를 자원으로 캐올리지 못하는 즉, 채굴할 수 있는 수압패쇄의 기법을 보유하지 못한 상황과 아주 비슷하다. 국력은 (국토면적/인구수 등+경제력+군사력)x(지도자의 전략+국민의 의지)로 산출된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부분이 바로 지도자의 전략과 국민의 의지다. 이 부분이 0이 되거나 1 밑으로 나타나게 되면 전체 국력은 떨어진다. 미국은 왜 베트콩에게 패망했나? 자유월남을 향한 미국인들의 의지와 전략이 완전히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올바른 정치지도자의 부재와 국민의 의지가 박약하면 국력은 미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난 지금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했지만(20대라서) 자유대한민국의 위대했던 60~70년대 시절을 한번 상상해 본다. 자주국방이 가능했고 국가경제발전이 유연했던 우리에게 다시는 오지 않을 그 찬란했던 시기를... 네이버에서 '대긍모'를 검색하자! 이전글 문재앙 보유국의 흔한 뇌구조 (1) 다음글 보수의 대안 the수시 입시컨설팅 모바일 .정치외교학과컨설팅,학생부종합전형,입시로드맵,청소년 논문,자기소개서,면접 지도 http://thesusi.com NO.1 입시컨설팅 라엘 모바일 수시 및 정시 컨설팅, 합격 예측프로그램, 입시준비, 자소서첨삭, 대입 면접 준비 http://www.laeledu.com Ads by NAVER도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