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부터 밤 9시10분까지 부지런히 일을 하고(아침에 등산복 차림으로 나갔다),
급하게 신사동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세 번 갈아타고(4호선-2호선-3호선)차 떠나기 10분전에,
늘 그렇듯 1호차에 배낭을 실었다.
그 시간까지 저녁을 못 먹어 마트에서 삼각김밥과 우유를 샀다. 앞쪽에 자리를 잡았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른다.
다만 이제부터는 릴렉스하게 눈을 감고 남쪽으로 여행을 떠나는 일만 남았다.
차가 알아서 가 줄 일이다.
짝꿍 토끼님이 옆에 앉았다. 초면이지만 참 편안했다.
얼마동안 인사를 나누고 못다 한 말은 산행 때 하기로 하고 ,
우리는 잠을 청했다.
새벽에 향일암에 도착했다.
어떨 결에 잠에서 깨어 카메라만 챙겨 향일암으로 향했다.
10미터정도 걷자 정신이 좀 들었다.
그때 올려다 본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금방이라도 비가내릴 모양이었다.
‘우산을 가져 올 걸. 아냐, Gore-tex를 입었으니 괜찮을 거야’
평상시 같았으면 다시 가서 우산을 가져왔을 것이다.
요즘은 좀 게을러졌는지 귀찮다.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고, 카메라를 옷 속으로 맸다.
향일암으로 들어서는 초입은 가파른 골목길이었다.
초입을 빠져나오자 산 한 봉우리를 넘어 온 듯 숨이 찼다.
빗줄기는 더 굵어지고 있었다.
앞에 가는 세 명의 회원은 버려진 커다란 우산(코카콜라 광고문구가 그려진,
그래서 그들은 마치 걸어 다니는 가게의 광고맨들을 연상케 했다)을 받치고 걸었다.
어둠 속으로 향일암의 대웅전이 눈에 들어왔다.
많은 여행자들과 불자들이 대웅전 안 촛불아래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두 손을 모으고 합장만 했다.
참배자들은 촛불 항내가 가득한 경내에서 자신과 가족의 소원을 빌고,
사랑을 이루지 못한 연인들은 사랑을 제목으로 빌 것이다.
나의 시선은 잠시 촛불에 머물렀다.
물론 촛불을 좋아해서이기도 했다.
때로는 일부러 전등을 끄고 촛불을 켠 채 그를 유심히 살펴보며,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촛불은 자신의 몸을 태움으로써 밝은 빛을 내어 어둠을 밝히고,
자신은 희생되어가는, 아름다운 자기희생인 것이다.
열려진 문으로 바람이 들어오자 불꽃은 잠시 흐트러졌다 다시 곧바로 섰다.
누군가 뒤에서 인사를 했다. 돌아보니 옛 회원인 ‘가자고’님이었다.
반가워 그동안의 안부를 서로 물었다.
대웅전을 벗어나 경내를 둘러보았다.
낮게 드리운 잿빛 구름 아래로 소나무 사이사이 바다가 보이고,
활짝 핀 동백꽃과 피기를 준비한 꽃과 잎에 빗방울이 불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대웅전 뒤로 가는 길은 좁았다. 등치가 큰 사람은 빠져나가기 힘들 정도로.
날은 서서히 어둠에서 벗어나고 일출은 볼 수 없지만,
보슬비 속에 빗물을 머금은 흐드러지게 핀 벚꽃, 동백꽃...
신선한 봄을 만들어내어 운치를 더했다. 멀리 암벽위로 진달래꽃이 보였다.
남쪽에는 그 어디에서도 봄이 한창이었다.
밤새 잠을 못자고 피곤해선지 아니면 봄에 취해선지 모르겠으나,
마치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향일암 아래로 물은 잔잔했다.
그 위로 두 척의 배가 불을 켜고 물위를 서서히 미끄러지고 있었다.
오동도로 떠나기 위해 향일암을 벗어나 우측으로,
임포(林浦)를 끼고 도로 위를 걸었다.
다시 내리는 비로 가자고님과 우산을 받치고.
맑은 날 호수나 포구를 따라 걷는 것도 좋지만 비가 내리는 가운데,
우산을 받고 걷는 것은 더욱더 좋다.
적당히 낀 구름과 비는 임포를 더 그럴싸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카메라에 그를 담았다.
임포(林浦)
오동도에 도착했다.
초등수학여행 이후 처음 밟은 오동도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마치 전에 한번도 온 적이 없는 것처럼.
내 부족한 기억을 탓하지 않았다.
세월이 그렇게 많이 흘렀으니. 라고 자위하면서도 애써 기억을 더듬어갔다.
남쪽 봄으로의 초대를 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오동도를 떠나기 전, 얼굴이라도 보자고.
그냥 친구를 불러내 오동도를 같이 걸을까도 생각을 했지만 담 기회로 미뤘다.
오늘은 혼자서 옛 추억 속으로 빠져들고 싶어서여서였다.
비는 오락가락했다.
오동도 입구에서 동백섬까지 길게 나 있는 방파제 길을 따라 우산을 쓰고 걸었
다.
우산을 타고 내리는 비 소리가 정겹다.
“그대를 누구보다 사랑한다”는 꽃말을 가진 동백꽃의 동백섬!
< 冬柏 > / 성삼문
[설중동백 고아하고 초졸함은 매화보다 낮고
아리따움은 너무 지나칠 정도인가
이 곶이 우리나라에 만으니
봉래라는 이름이 마땅하도다]
*동백은 겨울에도 곶을 피우고 잎보다 곶으로 추위를 견디는,
그 기개를 높이 찬양하여 선비들은 엄한지우(嚴寒之友)로서 군자(君子)라 칭했다.
어린시절,
산 밑에 자리한 집에서 학교까지는,
언덕배기, 공동묘지, 저수지, 과수원 등을 통과해야 했다.
늦은 밤 집으로 오는 길은 정말 무서웠다.
집으로 오는 길의 마지막 관문인,
언덕배기에는 커다란 동백나무 세 그루가 있었는데,
밤이면 마치 유령의 섬으로 쯤 보였었는데,
세월이 흘러 오동도 동백꽃을 보고 있노라니,
무서움은 사라지고 오히려 그리움으로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온통 짙은 초록과 붉은색의 물결이었다.
떨어진 꽃을 벼 이삭 줍듯, 행여나 꽃술이 다칠까 하나하나 주워 모으는,
내 모습을 가을님은 카메라에 담았다.
계단을 밟고 내려가니 바다와 만나는 절벽이다.
물위로 솟은 작은 바위 위로 물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외롭지만은 않는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조금은 위험스러워 보이지만 암벽 오르듯,
조심스럽게 벽을 타고 건너편 바위로 옮겨갔다.
새벽~, 마나~, 서시, 가을님...사진도 찍고 돌멩이로 물도 튀기며,
좋은 사람들과 아름다운 풍경에는 어린이 어른이 따로 없다.
다들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있었다.
절벽을 따라 바다를 벗어나자 다시 계단으로 올라왔다
대나무 숲길이 이어졌다.
대나무 사이로 연분홍 벚꽃과 동백꽃들이 사이사이 보였다.
꽃과 대나무의 조화다
대나무 숲을 잠시 걸었다.
그리고 다시 입구쪽으로 가는데 팔손나무가 넓은 손으로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내 손바닥을 그의 손바닥에 가져다 대었다. 그의 손은 내손보다 훨씬 컸다.
물기가 촉촉히 밴 그의 손은 차갑기보다는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팔손나무(잎이 7~9개로 갈라진 손바닥 모양)
시계를 보니 친구와 만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가 너무 신나게 놀았나보다.
동백섬을 빠져나오며 나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오동도 매표소 앞으로 오라고. 나는 긴 방파제 길을 뛰었다.
등에 땀이배고 얼굴이 화끈했지만,
바닷바람을 마시며 마치 마라톤선수처럼.
오동도가 다 내 것이었다.
오고가는 관광객들이 힐끗힐끗 보았다.
입구에 친구가 트럭을 몰고 와 있었다.
다음 코스인 영취산으로 가는 시간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차를 옆에 파킹한 채 자동판매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마시며 짧은 대화를 나눴다.
기념으로 사진 한 장 찍자했더니 세수도 안했다며 거절했다.
바쁠텐데 한달음에 나온 것이었다.
밥사줄려고 했는데...회도 사줄려고 했는데...
떠나는 친구가 못내아쉬운 모양이었다.
"담에, 시간내서 다시 올게"
갓김치
친구는 하얀 상자하나를 건넸다.
직접 담근‘돌산 갓 김치’였다.
상당히 무거운 걸로 봐서 며칠 전 담은 김치를 통째로 가지고 온 것이었다.
어제 밤과 오늘까지 네끼를 갓김치에 밥을 먹었다.
소식가가 대식가로 변할 처지에 놓였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