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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한장] ‘광개토대왕비’가 서울에 왔다
국립중앙박물관, 중국 지안(集安)에 있는 유물 모습 그대로…높이 8m, 너비 2.6m의 디지털로 복원
조선일보 2024.02.12. 11:17
2023년 12월 24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역사의 길'에 디지털로 재현한 광개토대왕릉비가 전시돼 있다. 박물관에서 새롭게 태어난 비석은 중국 지안(集安)에 있는 유물 모습 그대로를 높이 7.5m(받침대 포함 시 8m), 너비 2.6m 크기의 발광다이오드(LED) 기둥에는 사진과 영상 자료를 토대로 구현한 비석 모습을 각 면에서 볼 수 있다. /남강호 기자
‘와...멋지다’
지난 2014년 ‘원코리아 뉴라시아 자전거 평화 대장정’ 취재 당시 옛 고구려 수도 국내성이 있던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에서 본 ‘광개토대왕릉비’의 느낌과는 조금 달랐다. 수백, 수천년의 세월을 단 몇분에 걸쳐 압축해서 보여주는 화려한 영상에 빠져 그떄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데 약간의 시간차가 있었다. 모래바람과 태풍, 혹한 등의 날씨를 견디며 이제는 중국의 보호각과 유리벽 안에 담대하게 서있던 광개토대왕릉비의 느낌과는 조금 달랐다. 두 능비를 본 후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들었지만 그 느낌의 공통 분모는 ‘멋지다’는 느낌인듯하다.
우리 역사상 훌륭했던 왕으로 기억하고 있는 광개토대왕의 기념비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남강호 기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옛 고구려 수도인 국내성(현 중국 지안시) 동쪽 언덕에 서 있는 광개토대왕릉비가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디지털로 되살아났다.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 광개토왕(재위 391~412)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아들 장수왕이 414년 세운 비석이다. 높이 6.4m, 무게 37t의 화강암 바위 네 면에 1775자가 새겨져 있다.
박물관은 지난 2023년 12월 24일 상설전시관 ‘역사의 길’에 세워진 디지털 광개토대왕비를 공개했다. 높이 8m(받침대 포함), 너비 2.6m 규모의 LED 기둥을 설치해, 최대 높이 6.4m에 달하는 광개토대왕비의 실제 크기와 재질, 비문 내용 등을 영상으로 재현했다.
지난 2023년 12월 24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역사의 길'에 디지털로 재현한 광개토대왕릉비가 전시돼 있다. /남강호 기자
광개토대왕릉비가 서울에 오다
https://youtu.be/40cI9Ywxc9o?si=fYfHJL-_sqaGf90r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해석
출처: 국립문화재연구원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 노태돈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인사)
옛적에 시조(始祖)이신 추모왕(鄒牟王)께서 나라를 세우셨는데 (왕께서는) 북부여에서 나오신[17] 천제(天帝)의 아드님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셨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 덕(德)이 있었다. ... 수레를 타고 순행하시다가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 왕께서 나룻가에서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하백(河伯)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를 물에 띄우라."라고 하셨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떼가 물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상(山上)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왕이 왕위에 싫증을 내니, (하늘이) 황룡(黃龍)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이에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가면서[18] 몸을 돌려서 세자(世子)였던 유류(儒留)를 왕으로 명하고서 "도(道)로써 흥치(興治)하라." 하셨다. 유명(遺命)을 이어받은 세자 유류왕은 도(道)로서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은 왕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
17세손(世孫)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연호를 영락이라 하였다. 태왕의 은택이 황천(皇天)까지 미쳤고 위무(威武)는 사해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하늘이 (이 백성을) 어여삐 여기지 아니하여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갑인년(414년) 9월 29일 을유에 산릉(山陵)으로 모시었다. 이에 비를 세워 그 공훈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여주고자 한다. 그 말씀은 아래와 같다.
패려(稗麗)[19]가 고구려인에 대한 (노략질을 그치지 않으므로), 영락(永樂) 5년(395년)[20] 을미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21]에 이르러 그 3개 부락(部洛) 6~700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말·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襄平)으로 가는 길을 지나 동으로 후성(候城), 역성(力城), 북풍(北豊), 오비해(五備海)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
백잔(百殘)과 신라(新羅)는 옛부터 속민(屬民)으로서 조공(朝貢)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 백잔과 ▨▨와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영락(永樂) 6년(396년) 병신에 왕께서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셨다. 우리 군이 (3자 불명)[22] 하여 영팔성(寧八城), 구모로성(臼模盧城), 각모로성(各模盧城), 간저리성(幹氐利城), ▨▨성, 각미성(閣彌城)[23], 모로성(牟盧城), 미사성(彌沙城), ▨사조성(▨舍蔦城), 아단성(阿旦城), 고리성(古利城), ▨리성(▨利城), 잡진성(雜珍城), 오리성(奧利城), 구모성(句牟城),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 막▨▨▨▨성(莫▨▨▨▨城), ▨이야라성(▨而耶羅城), 전성(瑑城), 어리성(於利城), 농매성(農賣城), 두노성(豆奴城), 비▨▨리성(沸▨▨利城), 미추성(彌鄒城), 야리성(也利城), 태산한성(太山韓城), 소가성(掃加城), 돈발성(敦拔城), ▨▨성, ▨루매성(▨婁賣城), 산나성(散那城), 나단성(那旦城), 세성(細城), 모루성(牟婁城), 우루성(于婁城), 소회성(蘇灰城), 연루성(燕婁城), 석지리성(析支利城), 암문▨성(巖門▨城), 미성(味城), ▨▨▨▨▨▨▨리성, 취추성(就鄒城), ▨발성(▨拔城), 고모루성(古牟婁城), 윤노성(閏奴城), 관노성(貫奴城), 삼양성(彡穰城), 증발성(曾拔城), 유▨노성(儒▨盧城), 구천성(仇天城), ▨▨▨성을 공취(攻取)하고, 그 수도를 … 하였다. 백잔(百殘)이 의(義)에 복종하지 않고 감히 나와 싸웠다. 왕이 위엄을 갖추고 크게 노하여 아리수(阿利水)를 건너 정예병을 보내 그 수도를 압박하였다. ... 중심을 공격하고 ... 나누어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잔주(殘主)[24]가 곤란하고 급박해져, 남녀 생구(生口) 1천 명과 세포(細布)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무릎 꿇고, 스스로 이제부터 영구히 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잔주가) 이전에 미혹에 빠져 저지른 허물을 은혜로이 용서하고, 이후 순종해 온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百殘主)의 아우와 대신 10인(大臣)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영락 8년(398년) 무술에 교를 내려 한 부대의 군사를 파견해 식신(息愼)의 땅과 계곡을 살펴보게 하셨다. 이때 (이 지역에 살던 저항적인) 막▨라성(莫▨羅城), 가태라곡(加太羅谷)의 남녀 삼백여 인을 잡아왔다. 이 이후로 (식신은 고구려에) 조공하고 (그 내부의) 일을 보고했다.
영락 9년(399년) 기해에 백잔(百殘)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25] (이에) 왕이 평양(平穰)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왕께 아뢰기를, "왜인(倭人)이 국경에 가득 차 성과 해자를 부수었습니다. 노객(奴客)[26]은 (대왕의) 민(民)[27][28]으로서 대왕께 귀의하여 분부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사신을 돌려보내면서 (고구려의) 계책을 알리게 했다.
10년(400년) 경자에 왕이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왜군이 가득하였지만, 관군이 막 도착하자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城)이 곧 귀순하여 항복하였다.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29] … 신라성(新羅城) ▨성(▨城) …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69개의 성을 모두 지키고 ... (이하 내용 중 거의 대부분이 불명. 대체로 고구려군의 원정에 따른 임나가라 지역에서의 전투와 정세 변동을 서술하였을 것이다.) 예전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나랏일을 논의한 적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대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 복구(僕句) ... 조공하였다.[30]
14년(404년) 갑진에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帶方)의 경계를 침범하였다. … 석성(石城)(을 공격하고…), 연선(連船)[31] … 이에 왕이 군대를 이끌고 평양을 거쳐 (…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요해처를 끊고 (적을) 소탕하니, 왜구(倭寇)가 무너져 패배하여 참살한 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17년(407년) 정미에 왕의 명령으로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파견하여 … 합전(合戰)하고 참살해 모두 소탕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1만여 벌이며, 군수물자와 병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사구성(沙溝城), 누성(婁城), ▨주성(▨住城), ▨城▨▨▨▨那▨城을 파하였다.
20년(410년) 경술, 동부여(東扶餘)는 예로부터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왕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가 토벌하였다. 군대가 여성(餘城)에 도달하자, 동부여의 온 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여 (투항하였다). 왕의 은덕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에 군대를 돌렸다. 이때에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관군을 따라 함께 온 자는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 비사마압로(卑斯麻鴨盧), 타사루압로(椯社婁鴨盧), 숙사사압로(肅斯舍鴨盧), ▨▨▨압로(▨▨▨鴨盧)였다. 무릇 공격하여 깨뜨린 성(城)이 64개, 촌(村)이 1,400개였다.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 연호(烟戶)(의 출신지와 호수는 다음과 같이 한다.) 매구여(賣句余) 민(民)은 국연(國烟)이 2가(家), 간연(看烟)이 3가. 동해가(東海賈)는 국연이 3가, 간연이 5가. 돈성(敦城)의 민은 4가가 다 간연. 우성(于城)의 1가는 간연으로, 비리성(碑利城)의 2가는 국연. 평양성민(平穰城民)은 국연 1가, 간연 10가. 자련(訾連)의 2가는 간연. 배루인(俳婁人)은 국연 1가, 간연 43가. 양곡(梁谷) 2가는 간연. 양성(梁城) 2가는 간연. 안부련(安夫連)의 22가는 간연. 개곡(改谷)의 3가는 간연. 신성(新城)의 3가는 간연. 남소성(南蘇城)의 1가는 국연.
새로 약취해온 한(韓)과 예(穢)(의 연호는 다음과 같다.) 사수성(沙水城)은 국연 1가, 간연 1가. 모루성(牟婁城)의 2가는 간연. 두비압잠(豆比鴨岑) 한(韓)의 5가는 간연. 구모객두(勾牟客頭)의 2가는 간연. 구저한(求底韓)의 1가는 간연. 사조성(舍蔦城)의 한예(韓穢)는 국연 3가, 간연 21가.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의 1가는 간연. 경고성(炅古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객현한(客賢韓)의 1가는 간연. 아단성(阿旦城)과 잡진성(雜珍城)은 합하여 10가가 간연. 파노성(巴奴城) 한(韓)은 9가가 간연. 구모로성(臼模盧城)의 4가는 간연. 각모로성(各模盧城)의 2가는 간연. 모수성(牟水城)의 3가는 간연. 간저리성(幹氐利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미추성(彌鄒城)은 국연 1가, 간연이 7가. 야리성(也利城)은 3가가 간연. 두노성(豆奴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2가. 오리성(奧利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수추성(須鄒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5가. 백잔남거한(百殘南居韓)은 국연이 1가, 간연이 5가. 태산한성(太山韓城)의 6가는 간연. 농매성(農賣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7가. 윤노성(閏奴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22가. 고모루성(古牟婁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8가. 전성(瑑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미성(味城)은 6가가 간연. 취자성(就咨城)은 5가가 간연. 삼양성(彡穰城)은 24가가 간연. 산나성(散那城)은 1가가 국연. 나단성(那旦城)은 1가가 간연(看烟). 구모성(勾牟城)은 1가가 간연. 어리성(於利城)의 8가는 간연. 비리성(比利城)의 3가는 간연. 세성(細城)의 3가는 간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 살아 계실 때에 교(敎)를 내려 말하기를, "선조 왕들이 오직 멀고 가까운 지역에 사는 구민(舊民)[32]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은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해 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에게만 맡겨서 무덤을 지키고 소제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왕의 말씀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에 따라 한(韓)과 예(穢)의 220가(家)를 데려다가 수묘케 하였다. 그런데 그들 한인과 예인들이 수묘의 예법(禮法)을 잘 모를 것이 염려되어, 다시 구민 110가를 더 데려왔다. 신(新)·구(舊) 수묘호를 합쳐, 국연(國烟)이 30가이고 간연(看烟)이 300가로서, 도합 330가이다.
선조(先祖) 왕들 이래로 능묘에 석비(石碑)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수묘인 연호(烟戶)들이 어긋나고 섞이게 되었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께서 선조 왕들을 위해 묘상(墓上)에 비(碑)를 세우고 그 연호를 새겨 기록하여 착오가 없게 하라고 명하셨다. 또한 왕께서 규정을 제정하시어, "수묘인을 이제부터 다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며, 비록 부유한 자가 있을지라도 또한 함부로 사들이지 못할 것이다. 이 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 자는 자신이 수묘(守墓)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17] "북부여에서 출생하셨으며"라고 해석할 수 있다. 삼국사기 등에는 금와가 유화를 만난 곳이 금와가 왕인 동부여의 영역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후 기록에서는 북부여로 나오며 동부여가 기원전 1세기 당시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제기되므로 학계에서는 북부여가 타당하다고 보고 있다.
[18] 이 설화는 훗날 장수왕 대에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그대로 옮겨간 듯한데, 황룡이 기린으로 바뀌는 등 과정을 거쳤다. 부벽루 참조.
[19] 또는 비려(碑麗).
[20] 일각에서는 삼국사기 광개토왕 원년의 거란 정벌과 같은 기사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문제는 이 기사에서는 왕이 거란까지 친정을 했다고 기록 되어있는데 몇 달 후에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까지 또? 친정에 나서서 한강 일대의 관미성까지 함락 시켰다고 기록 되어 있어서, 시공간적으로 무리인 해석이 아닌가 싶다.
[21] 오늘날 요하의 지류인 내몽골의 시라무렌강.
[22] 일본 학계에서는 3자 중 첫 글자를 東으로 파악하여 '동진하였다'라고 풀이한다. 왜가 백제를 격파하고 신라 쪽으로 동진하여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하마다 고사쿠가 제2차 한일 공동역사연구회에서 투고한 논문에 해당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23] 삼국사기에서 관미성을 함락한 시기는 신묘년(391년)의 일이지만, 391년은 전치문이므로 396년에 끼어넣었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따라서 릉비에 나온 다른 기사의 훈적의 연도 또한 조금씩 역사적 사실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24] 백잔의 주인. 곧 백제의 왕을 지칭한 것인데, 비문은 백제를 철저히 하대하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이는 고구려가 백제에 의해 왕이 피살되는 치욕을 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25] 아마 397년 5월 백제가 태자 전지를 파견하여 군사 원조를 받은 것에 대해 서술하는 것으로 보인다. 화통은 양자가 동등한 관계에서 이루는 관계이므로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관계이다.
[26] 간혹 왜가 '(신라왕 자신을) 노객으로 삼으려고 합니다.'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한일공동역사연구위원회는 노객을 신라왕 자신이 광개토왕에게 자칭하는 명칭으로 결론 내렸다. 한국 사학자 김태식 교수와 일본 교수 하마다 고사쿠 또한 각자 투고한 논문에서 동일한 의견을 피력하였다.
[27] 간혹 '(고구려 혹은 대왕의) 노객을 왜가 민(民)으로 삼으려고 합니다'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일본학계에서도 주장하지 않는 해석이다. 하마다 고사쿠는 제2차 한일 공동역사연구회에서 투고한 논문에서 '(대왕의 혹은 고구려의) 노객(奴客)이란 (그 신분이란, 대왕의) 민(民)이니 왕께 귀의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별거 아닌 차이 같지만 신묘년 기사에 나온 신민의 성격과 어느 쪽이 주체인지 파악하는 데 아주 중요한 단서이다. '민(民)으로 삼으려고 하니 귀의한다'는 문맥상 말이 되지만, 이미 왜가 노객(신라왕)을 민(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는 것은 모순된 말이다. 이미 왜의 민(民)이 되었다면 광개토왕한테 사신을 보낼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가야사 전문가 김태식이 한일공동역사연구회에서 투고한 내용이다.
[28] 앞서 병신년에 아신왕이 대왕의 노객이 되겠다며 항복하는 모습을 상세히 기록한 것으로 보아, 프로파간다 성격이 매우 짙은 능비 원문의 특성상, 내물왕이 말한 노객 또한 고구려의 노객임을 뜻할 가능성이 크다.
[29] 이 부분은 '안라국 사람 수비병'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며, '나인(羅人)을 수비병으로 두었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후자의 설을 따를 경우, '라(羅)'로 끝나는 고대 한반도의 국명이 한둘이 아닌지라 나인(羅人)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말이 많은 편이다.
[30] 이에 대해서는 한일 양국 학자들 간의 의견 차가 있다. 한국 학계에서는 복구(僕句)를 동사로 보고 '알현하다'로 의역하여 '신라 매금이 직접 조공을 하였다'라고 해석하는데, 일본 학계에서는 복구(僕句)를 인명으로 보고 후에 고구려로 볼모로 보내지는 복호를 음차한 것으로 추정한다. 신라의 고구려 종속 수준에 있어 의견 차를 보이는 것이다.
[31] 수군(水軍)을 동원하였다는 뜻인 듯하다.
[32] 기존 고구려인들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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