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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마음공부방] 제3 수행편 제 2장 정기훈련과 상시훈련 제1절 정기훈련법 – 염불, 좌선
정전 제3 수행편 제 2장 정기훈련과 상시훈련
제1절 정기훈련법 – 염불, 좌선
설교 : 규산 이광규 교무
일시 : 원기 107년 2월 16일
타이핑 : 심현승
정전 제3 수행편 제 2장 정기훈련과 상시훈련 제1절 정기 훈련법 공부인에게 정기(定期)로 법의 훈련을 받게 하기 위하여 정기 훈련 과목으로 염불(念佛), 좌선(坐禪), 경전(經典), 강연(講演), 회화(會話), 의두(疑頭), 성리(性理), 정기일기(定期日記), 상시일기(常時日記), 주의(注意), 조행(操行) 등의 과목을 정하였나니, 염불, 좌선은 정신 수양 훈련과목이요, 경전, 강연, 회화, 의두, 성리, 정기일기는 사리 연구 훈련 과목이요, 상시일기, 주의, 조행은 작업 취사 훈련 과목이니라. 염불은 우리의 지정한 주문(呪文) 한 귀를 연하여 부르게 함이니, 이는 천지 만엽으로 흩어진 정신을 주문 한 귀에 집주하되 천념 만념을 오직 일념으로 만들기 위함이요, 좌선은 기운을 바르게 하고 마음을 지키기 위하여 마음과 기운을 단전(丹田)에 주(住)하되 한 생각이라는 주착도 없이 하여, 오직 원적 무별(圓寂無別)한 진경에 그쳐 있도록 함이니, 이는 사람의 순연한 근본 정신을 양성하는 방법이요, ... |
반갑습니다. 오늘 양도인 교우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지금 세상이 코로나로 인해서 여러 가지 많은 어려움과 불편함이 있고 또 지금 확진자 수가 많이 늘어나서 좀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인 것 같아요. 도인 교우도 본인이 심신간 편치 않은 상황에도 원고를 작성하고 더군다나 이것을 대독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영상을 만들어서 전달해준 도인 교우에게 너무너무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도인 교우 원고를 살피면서 제가 특별히 드릴 말씀은 없겠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원고가 참 잘 구성이 돼 있고 정기훈련법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도 충분히 할 수 있게끔 돼 있었고 염불과 좌선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도 또 분명히 할 수 있는 그런 좋은 원고였습니다. 그래서 제 설교도 설교지만 도인 교우의 영상을 보면 더 명확하고 아주 좋은 의미로, 내용으로 영상이 잘 전달됐을 거라 생각합니다.
[정기(定期)]
공부인에게 정기(定期)로 법의 훈련을 받게 하기 위하여 정기 훈련 과목으로 염불(念佛)·좌선(坐禪)·경전(經典)·강연(講演)·회화(會話)·의두(疑頭)·성리(性理)·정기 일기(定期日記)·상시 일기(常時日記)·주의(注意)·조행(操行) 등의 과목을 정하였나니, 염불·좌선은 정신 수양 훈련 과목이요, 경전·강연·회화·의두·성리·정기 일기는 사리 연구 훈련 과목이요, 상시 일기·주의·조행은 작업 취사 훈련 과목이니라. |
도인 교우가 영상에서 언급은 했지만 정기 훈련법이라는 의미에서 그 정기(定期)라는 표현을 자칫 우리가 일상적인 반복으로 이해를 할 수 있겠더라고요. 제가 다시금 연마를 하면서 보니까 정기라는 것은 정해진 기간이구나. 그것은 잠시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하루가 될 수도 있고, 일주일이 될 수도 있고, 아까 도인 교우가 얘기한 것처럼 저희들의 7일 간의 출가 여행이 될 수가 있고 다음 주에 계획된 정기 겨울 훈련이 될 수도 있고, 그런 기간이 정해진 기간을 정기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정해진 기간 동안 하는 훈련을 정기 훈련이라고 하죠.
정기 훈련법이라는 것은 정해진 기간 동안 훈련하는 데, 그 훈련 내용에는 정해진 법이 있는 것입니다. 도인 교우님이 그것을 교법에 바탕해서 한다고 얘기를 했죠. 초창기 선진들께서 보면 대종사님을 모시고 3개월씩 동, 하선을 했었습니다. 제가 공부를 잘 못해서인지 몰라도 동선(冬禪), 하선(夏禪), 여름과 겨울에 훈련을 하는 것이 의미가 있었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공부를 했었었는데 다시 가만히 이 정기 훈련이라는 것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니까 3개월이라는 것이 참 의미가 중요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졌어요.
군인들이 처음에 군인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5주 간의 훈련을 받습니다. 그리고 입영 후 3일 간 받는 훈련을 동화 교육이라고 표현을 하더라고요. 동화 교육 기간 중에는 입영 행사, 개인 물품 지급 등의 일정이 진행이 된답니다. 그리고 1~2주차는 군인 기본 자세라는 것을 배운답니다. 그리고 3~5주차까지는 기본 전투 기술 구비 훈련으로 소총의 조작 및 관리, 사격술, 경계 이런 것을 훈련들을 받습니다. 그렇게 해서 5주간의 훈련을 받고 나면 이 사람이 이등병 계급장을 붙여줍니다. 회사에서도 신입사원 교육을 받을 때 보면, 일정 기간을 정해놓고 그 회사에서 나아가고자 하는 지향점, 목적 이런 것을 다 배웁니다. 그런 것을 가르치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가 그 회사의 일원이 되어서 그 회사가 나아가고자 하는 것, 같은 목적을 이행을 하자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대종사님께서 훈련을 하신 이유가 뭘까요? 정기 훈련이라는 것을 원기 9년에 처음 제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원기 10년에 처음으로 시행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전에는 훈련이 없었느냐? 훈련이 있었습니다. 10일에 한 번씩 법회를 보게 한다든가 아니면 저축 조합 운동을 통해 근검절약하고, 담배를 끊고 술을 안 먹은 돈으로 절약절식, 생활 속에서 할 수 있는 그런 훈련들을 통해서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면서 어떤 감상이 드는지 물어보면서 문답감정을 하셨던 상시 훈련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훈련을 해서는 안 되겠다. 우리가 대중적인 훈련을 해야 되겠다”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시대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훈련]
그러면 왜 그런 대중적인 훈련을 하게 했을까요? 대종사님 당시 상황들을 보면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공부를 하면 안 되겠다 싶어서 공부들을 안 시켰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어떤 역량들을 계속 키워나가고 싶은 마음들이 있었겠죠. 누군가에게는 배우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을 겁니다. 물론 대종사님께서만 훈련을 하려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그 당시에 우리나라 여러 군데에서 정체성과 주체성을 살려나가기 위한 여러 가지 활동들이 물밑에서 있었습니다. 그런 활동들 속에서 대종사님도 “우리도 우리의 정체성이나 주체성을 살려나가야 되는 그런 교육들이, 그런 훈련들이 필요하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훈련법이라는 걸 제정을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3개월 동안, 하루에 24시간이니까 8시간은 잠을 자고, 8시간은 공부를 하고, 8시간은 육신의 노동을 하도록 공부를 시키셨습니다. 그러면 그 공부하는 여덟 시간을 네 단락으로 나눠서 두 시간은 좌선이나 염불을, 두 시간은 경전이나 강연을, 두 시간은 회화를, 그리고 두시간은 일기를 쓰게 하셨습니다. 눈이 잘 보이고 글씨라도 쓸 수 있는 분들은 갑(甲)반으로 두 시간 동안 일기를 쓰도록 하게 하셨고, 눈이 침침하신 분들은 을(乙)반으로 두 시간 동안 염불을 하게 하셨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를 끊임없이 수행하실 수 있도록 훈련이라는 개념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대종사님께서는 훈련을 8시간, 8시간, 8시간씩 이렇게 진행하시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구체적으로 준비를 하셔서, 구체적인 훈련을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런 훈련을 3개월 정도 한다면 능이 나겠죠. 사람들한테 “이렇게 좌선하는 거다. 이렇게 염불 하는 거다." 얘기하기가 수월했겠죠. 그 당시에 누가 좌선을 하려고 그랬겠어요. 염불을 하려고 그랬겠어요. 정신 통일되는 것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내 몸에 이렇게 습득하도록 하기 위한 그 기간이 3개월이었다라는 거죠.
대종사님께서 앞으로 만들어야 되겠다고 생각하신 그 광대무량한 낙원 세계를 만들기 위한 준비 작업인, 훈련이라는 것이 이렇게 시작이 됐다는 겁니다. 대종사님께서 깨침을 얻으시고 물질이 개벽되는 세상을 보니까 “앞으로 세상 사는 것이 너무 편리해지는데 이렇게 살아가서는 안 되겠다.” 이런 근심, 걱정이 있으셨던 거죠. 그래서 물질이 개벽되는 시대의 정신을 개벽해야 한다는 절대적 당위성, 시대적인 당위성이 있었던 거죠. 물질의 노예로 전락하겠다는 절체절명의 위기의식, 이를 극복하기 위한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이끌고자 하신 대종사님의 주세불의 그 자비 경륜 대자대비의 경륜이 면면이 흐르고 있는 교단의 개교의 동기입니다. 이처럼 시대적 상황을 극복할 방안으로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정기훈련법을 저희들이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대종사님께서는 진리적 종교의 신앙, 사실적 도덕의 훈련이라고 하셨습니다. 훈련을 할 때는 사실적으로 해야된다는 거죠. 내가 뭐가 안 된다면 될 때까지 하라고 그러셨잖아요. 그것이 사실적인 것입니다. “너는 잘 될 거 같아” 이러면 잘 됩니까? 공부를 해야죠. 될 때까지 해야죠. 그래야 그것이 사실적이죠. 그런 훈련을 대종사님께서 시키셨습니다.
대종경(大宗經) 제12 실시품(實示品) 2장 대종사 하루는 실상사에 가시었더니, 때에 노승 두 사람이 한 젊은 상좌에게 참선(參禪)을 하라 하되 종시 듣지 아니한다 하여 무수히 꾸짖고 나서, 대종사께 고하기를 [저런 사람은 당장에 천 불이 출세하여도 제도하지 못하리니 이는 곧 세상에 버린 물건이라.] 하거늘 대종사 웃으시며 말씀하시기를 [화상(和尙)들이 저 사람을 생각하기는 하였으나 저 사람으로 하여금 영영 참선을 못하게 하는 것도 화상들이로다.] 하시니, 한 노승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우리가 저 사람에게 참선을 못 하게 한다 하시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남의 원 없는 것을 강제로 권하는 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영영 그 일을 싫어하게 함이니라. 내가 지금 화상에게 저 산의 바위 속에 금이 들었으니 그것을 부수고 금을 캐라고 무조건 권하면 화상은 곧 나의 말을 믿고 바로 채굴을 시작하겠는가.] 노승이 한참 동안 생각한 후에 말하기를 [그 말씀을 믿고 바로 채굴은 못 하겠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화상이 그와 같이 확신을 하여 주지 않는데 내가 만일 강제로 권하면 화상은 어찌하겠는가. 필시 내 말을 더욱 허망하게 알고 말 것이니, 저 사람은 아직 참선에 대한 취미도 모르고 아무 발원도 없는데, 그것을 억지로 권함은 저 사람으로 하여금 참선을 도리어 허망하게 알게 함이요, 허망하게 아는 때에는 영영 참선을 아니할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는 사람 제도하는 묘방이 아니니라.] 노승이 말하기를 [그러하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제도하는 묘방이 되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저 바위 속에 금이 든 줄을 알았거든 내가 먼저 채굴하여다가 그것을 광채 있게 쓰면 사람들이 나의 부유해진 연유를 알고자 하리니, 그 알고자 하는 마음의 정도를 보아서 그 내역을 말하여 준다면 그 사람들도 얼마나 감사히 그 금을 채굴하려 할 것인가. 이것이 곧 사람을 제도하는 묘방일까 하노라.] 노승들이 고쳐 앉으며 말하기를 [선생의 제도하시는 방법은 참으로 광대하나이다.] 하니라. |
실시품 2장, 이 법문을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이상 세계에 대한 극락 수용도 아닌, 오직 진리적이고 사실적인 가르침을 통해 광대무량한 낙원 세계로 인도하려 하셨습니다.
원기 20년에 정관음행이라는 교무님께서 원불교의 훈련을 하시게 된 감상을 이렇게 적으신 글이 있어요. 그것을 제가 잠깐 좀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관음행 교무님은 법호는 경타원이시고 원기 20년에 100여 명이 입선한 총부 제21회 정기훈련 을(乙)회 동선에 입선해서 훈련을 받으면서 전무 출신을 서원하신 분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 당시에는 일본인들이 한국 사람들에게 교육을 시키지 않으려 했습니다. 정관음행이라는 분도 교육을 받고자 하였고, 여러 가지 활동도 사회적인 활동도 해봤지만 한계가 있었던 거예요. 본인이 가지고 있는 지혜의 한계가 있었던 거죠. 근데 마침 황정신행님의 인연으로 원불교에 왔는데 대종사님 말씀을 들어보니까 너무 시원한 거예요. 근데 그것을 이렇게 기술해 놓은 겁니다.
나는 소년 시대에는 아무 걱정 없는 생활을 하였으므로 세상 어려움과 일신 고통을 경험해보지 못하고 나의 앞에는 항상 행복이 올 줄만 생각하는 동시에 인간 고해라는 말씀을 사실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하다가 차차 세상 맛을 알게 된 것은 30세 이후인 바 모든 일이 마음에 어긋나고 현 사회 가정에 대한 여러 가지 불편 불안이 심신을 괴롭게 하여 아무리 감내할 방법을 생각하여도 감내할 수양이 사실 부족하여 비하건대 불붙은 강변에 소 날뛰듯 한다는 속어와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비로소 종교의 생활이 퍽이나 신성하고 안락하다는 추상을 가지게 되어 어느 때는 불교의 교리를 보았으나 모두가 미신 같아 신심이 잘 나지 아니하므로 혹 자탄하기를 성현에 가르치신 말씀이 믿어지지 아니하니 이는 나의 업보가 과연 중함인가 하는 생각도 났습니다. 그러던 차에 번민 망상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마음의 안정처를 얻지 못하고 차라리 깊은 산중에나 찾아가서 시비 없는 일생을 보내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바, 다행히 거년 추기에 우연히 친우의 인연으로 본회의 내용을 대강 듣고 한 번 그 사실을 알아보리라고 생각하던 차 선원에 참여하여 본회의 결의를 대강 듣고 보니 종사주의 명철하신 법설은 나의 심간을 직접 통하여 주시는 느낌이 있사오니 어찌 감사하지 않겠사옵니까. 그리고 제도에 대하여도 모든 것이 시대에 적절하고 하나도 결함된 바가 보이지 아니하여 나의 평소 이상하던 바의 몇 배 이상의 혁신이 되었사오니 이도 또한 부처님이 명철하신 지연이 아니시면 어찌 같은 조직을 성공하겠습니까. 나는 이제부터는 이 영원한 안심 입명의 곳을 얻었고 영원한 사업 장소와 복전을 얻었으니 나의 일생은 오로지 여기에 받혀서 천신만고를 당할지라도 조금도 퇴전치 아니하고 일변 배우고 일변 가르치며 일변 공부하고 일변 사업하여 종사주의 대도 운전의 조수가 될까 하나이다. |
이분이 세상을 살다보니까 우리 가족들이나 먹여 살리는 정도로 일생을 마치기에는 좀 아깝다 그래서 종교에 심취를 하시는 거죠. 불교의 교리를 배우면서 부처님 말씀이 괜찮겠다 싶어서 그런 활동들을 많이 하셨대요. 많이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믿고 따르던, 함께하던 사람들이 해도 해도 안 되고, 스스로 이렇게 자빠지니까 내가 부처님 말씀을 제대로 못 믿고 있구나 이런 스스로 자탄을 하는 거죠.
이상의 내용을 살펴볼 때 원기 이십년이라고 그러면 1936년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저희들이 교육을 받기가 굉장히 어려운 시기에 더더군다나 당시에 여성의 몸으로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엘리트한 여성이든지, 무언가 자신이 꿈꾸는 삶을 살아가려던 그런 여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분이 자신의 번민망상을 해결하고 교단 사업에 동참하여 소태산 대종사의 사업에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밝힘은 사실적인 제도에 깊은 감명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당신이 그리고 있던 그런 삶의 모습들을 사실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들을 명확하게 제시해 주셨다는 거죠.
소태산 대종사의 훈련은 사실적인 동시에 누구나가 행할 수 있는 떳떳한 길, 인도품 1장에 나오죠. 떳떳한 길이라는 것은 도를 의미합니다. 또 인도품 2장의 도를 행함으로써 나타나는 은혜. 즉 덕이 나타나는 것이 훈련이라 하겠습니다.
[정기훈련법의 핵심]
오늘부터 수요마음공부방에서 시작한 정기훈련과 상시 훈련을 얘기를 할 때 기억해야 되는 것은 정기는 일정 정해진 기간이다. 그리고 훈련을 받을 때는 사실적이어야 한다. 이 부분을 마음속 깊이 어디 메모라도 해놓고 들으셔야 될 겁니다.
그래서 정리해서 말씀드리자면 정기훈련법이란 아래와 같이 정의할 수 있습니다.
언제? | 일정 기간 또는 시간에 |
어디서? | 정해진 장소에서 |
누가? | 누구나 |
무엇을? | 11과목의 내용을 |
어떻게? | 사실적으로 익히고 떳떳하게 지켜가고 은혜가 생산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것 |
그래서 매일매일 시간을 정하거나 특정 기간을 정하고 11 과목을 훈련하는 시간을 갖게 되면 이것이 정기 훈련하는 시간이 됩니다. 또 그 시간을 마치고 일상에서 분주하게 살아가면 상시 훈련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지난 일요일 교도님 한 분이 정말 직장 생활하는 것에 대한 어떤 절박함 이런 부분들을 말씀하시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일에 대한 어떤 스트레스, 그런 것을 해소할 수 없는 답답함 이런 것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원불교에서는 새벽이면 좌선을 하라고 합니다. 저녁이면 참회 반성의 시간을, 염불과 또는 일기를 통해서 참회 반성을 하라고 합니다. 하루를 그렇게 준비를 하고, 정리하고 다음을 계획하는 이런 정기의 시간들이 있다면 나머지 상시의 시간을 지내기가 조금 더 수월할 겁니다. 늘 그렇게 마음을 평온하게 가지는 것에 익숙해지는 훈련을 하는 그것이 원불교의 정기 훈련입니다. 그래서 교무님들이 그렇게 아침에 선을 해라, 저녁에 염불 해라, 하루를 지내고 나서 일기를 써라 강조를 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내 생활이 정리가 되는 거죠.
[염불]
염불은 우리의 지정한 주문(呪文) 한 귀를 연하여 부르게 함이니, 이는 천지 만엽으로 흩어진 정신을 주문 한 귀에 집주하되 천념 만념을 오직 일념으로 만들기 위함이요, |
정기훈련법의 첫 번째, 두 번째 훈련 과목이 염불과 좌선입니다. 염불과 좌선의 방법과 같은 부분들은 추후에 염불법과 좌선법이 다시 나오니 자세한 내용은 그때 말씀드리고, 오늘은 이 두 훈련 과목이 갖는 의미를 좀 살펴볼까 합니다.
일본의 선시 중에 이런 선시가 있습니다. “산의 새소리에 산의 고요함을 깨쳤고, 낙엽이 지는 모습에서 바람을 느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고요함 속에서 무엇인가가 일어나기 전에는 고요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 안에서 무엇인가가 일어날 때는 우리는 고요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들 가만히 조용히 새벽에 있어보세요. 그게 고요한지 모르죠. 그러다가 지나가는 차 소리가 부앙~ 나면 ‘아 내가 좀 전까지 참 고요했었는데 차 소리가 들리는구나.’라고 알아차립니다. 경계는 고요함을 깨닫게 하는 새 소리이며 바람을 느끼게 하는 낙엽입니다. 경계를 다하여 마음이 일어났을 때 “그동안 내가 마음을 이렇게 길들여 왔구나.” 알아차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 없는 경계를 대하면서도 경계라는 인식도 못하고 익혀진 습관대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할 때 “내가 이 사람을 미워하고 있구나. 이런 상황이 싫구나.” 이것을 알아차리는 그 순간이 마음공부를 시작하는 시간이고 훈련이 시작되는 시간이에요. 예를 들어 이전에는 평온했습니다. 그런데 대일 교우를 만나면 마음이 행복해집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행복한지 알아차리는 순간이 저희들이 마음 공부하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수 없는 경계를 대하면서도 경계라는 인식도 못하고 익혀진 습관대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일렁이는 파도에 있으면 일렁이는 파도가 원래의 모습이라 생각을 하지만 파도 없는 물결의 고요함을 알기에 파도의 거셈을 알게 됩니다.
대종경(大宗經) 제1 서품(序品) 19장 대종사 또 말씀하시기를 [과거 불가에서 가르치는 과목은 혹은 경전을 가르치며, 혹은 화두(話頭)를 들고 좌선하는 법을 가르치며, 혹은 염불하는 법을 가르치며, 혹은 주문을 가르치며, 혹은 불공하는 법을 가르치는데, 그 가르치는 본의가 모든 경전을 가르쳐서는 불교에 대한 교리나 제도나 역사를 알리기 위함이요, 화두를 들려서 좌선을 시키는 것은 경전으로 가르치기도 어렵고 말로 가르치기도 어려운 현묘한 진리를 깨치게 함이요, 염불과 주문을 읽게 하는 것은 번거한 세상에 사는 사람이 애착 탐착이 많아서 정도(正道)에 들기가 어려운 고로 처음 불문에 오고 보면 번거한 정신을 통일 시키기 위하여 가르치는 법이요, 불공 법은 신자의 소원 성취와 불사(佛事)에 도움을 얻기 위하여 가르치나니, 신자에 있어서는 이 과목을 한 사람이 다 배워야 할 것인데 이 과목 중에서 한 과목이나 혹은 두 과목을 가지고 거기에 집착하여 편벽된 수행길로써 서로 파당을 지어 신자의 신앙과 수행에 장애가 되었으므로, 우리는 이 모든 과목을 통일하여 선종의 많은 화두와 교종의 모든 경전을 단련하여, 번거한 화두와 번거한 경전은 다 놓아 버리고 그 중에 제일 강령과 요지를 밝힌 화두와 경전으로 일과 이치에 연구력 얻는 과목을 정하고, 염불·좌선·주문을 단련하여 정신 통일하는 수양 과목을 정하고, 모든 계율과 과보 받는 내역과 사은의 도를 단련하여 세간 생활에 적절한 작업 취사의 과목을 정하고, 모든 신자로 하여금 이 삼대 과목을 병진하게 하였으니, 연구 과목을 단련하여서는 부처님과 같이 이무애(理無碍) 사무애(事無碍) 하는 연구력을 얻게 하며, 수양 과목을 단련하여서는 부처님과 같이 사물에 끌리지 않는 수양력을 얻게 하며, 취사 과목을 단련하여서는 부처님과 같이 불의와 정의를 분석하고 실행하는 데 취사력을 얻게 하여, 이 삼대력(三大力)으로써 일상 생활에 불공하는 자료를 삼아 모든 서원을 달성하는 원동력을 삼게 하면 교리가 자연 통일될 것이요 신자의 수행도 또한 원만하게 될 것이니라.] |
서품 19장에 보면 염불과 주문을 읽게 하는 것은 번거한 세상에 사는 사람이 애착 탐착이 많아서 정도에 들기가 어려운 으로 처음.불문에 오고 보면 번거한 정신을 통일시키기 위하여 가르치는 법이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파도 위에 조그마한 보드를 타는 걸 윈드 서핑이라고 그러죠. 윈드 서핑을 하면 다가오는 파도는 나를 밀어주는 좋은 도구이나 그에 맞서면 그 파도를 이겨내야 하는 거친 장벽이 됩니다. 저희들이 경계를 대할 때도 그러죠. 경계를 “아, 경계이구나” 라고 생각하면 그 경계는 저에게 은혜를 주는 은혜의 도구입니다. 나를 누가 툭 때렸을 때 “아 내가 저 사람에게 뭔가 실수를 했지. 내가 저 사람하고 무슨 감정이 있었지.” 이것을 알아차리는 경계고 그 사람에게 원한 관계를 풀 수 있는 은혜의 발견이 되는 거죠. 근데 그것을 모르고 “왜 때려. 니가 뭔데 때려.” 이래버리면 그 원한 관계를 풀 수 있는 방법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염불은 윈드 서핑을 하듯 파도가 밀려오는 방향에 집중해서 파도인지 모르게 그 물결을 즐기는 겁니다. 요란한 경계에 처해 있으되 주문 한 귀의 소리를 맡겨 그 주위 잡념과 혼탁한 생각들을 한 소리로 모아가는 정신수양의 방법입니다. 경계가 왔을 때 “경계가 왔구나” 수없이 되뇌이다보면 내가 다음의 마음을 어떻게 내야 될지를 알게되는 것입니다. “아 이 사람이 나를 때릴 만한 이유가 있었겠구나. 이 사람하고 나하고 뭐 그런 불편한 일이 있었겠구나” 이것을 안단 말이죠. 그러고 나서는 그 사람에게 표현을 할 때는 “내가 좋아서 그랬어? 나에게 불편한 마음이 있었어?” 편하게 얘기를 할 수가 있다는 거죠. 그렇지 않고 경계가 온 줄도 모른다면 그것마저도 모른다는 거예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외부의 경계가 많을 때는 염불과 좌선 중 염불로 대체하는 것이 맞습니다. 주변이 막 시끄러우면 그거보다 더 큰 소리를 내버리든지 아니면 내가 소리 하나에 집중을 해서 꾸준히 들어가 보면 정리가 됩니다. 방금도 성현 교무님이 염불을 하는데 저하고 운곡이 안 맞습니다. 그러면 저는 제 소리에 귀 기울이려고 자꾸 노력을 하면 제 소리가 정리가 됩니다. 아예 큰 소리를 내버리든지 아니면 제 소리에 이렇게 귀 기울이든지, 그렇게 집중할 수 있는 것을 만든다고 그러면 내 스스로를, 나의 복잡한 생각들을, 복잡한 여러 가지 상황들을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불이라는 것은 꼭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라는 것은 아닙니다.
면접을 앞둔 사람이 두근두근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럴 땐 어떻게 해야 될까요.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그것을 끊임없이 되뇌면서 스스로를 자신감을 불어넣는다면 면접에 떨어지고 붙고 이런 부분이 아니라 떨리는 그 마음을 정리할 수 있다는 거죠.
[좌선]
좌선은 기운을 바르게 하고 마음을 지키기 위하여 마음과 기운을 단전(丹田)에 주(住)하되 한 생각이라는 주착도 없이 하여, 오직 원적 무별(圓寂無別)한 진경에 그쳐 있도록 함이니, 이는 사람의 순연한 근본 정신을 양성하는 방법이요, |
그렇다면 좌선은 언제 하는 것이 좋을까요? 고요할 때 하는 정신 수양 공부입니다. 시끄러우면 작은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고요하면 작은 소리도 큰 소리처럼 들립니다. 외경이 요란할 때는 그 일에 집중한다고 작은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큰일이 닥치면 작은 일은 보이지 않습니다. 좌선은 고요할 때 세밀한 경계를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좌선을 하다 보면 아련했던 기억들도 떠오르고 각종의 분별 망상이 일어나는데 이는 다 외경이 고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마음이 올라옴을 알아차리고 그대로를 지켜만 봐도 그 마음은 어느새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기를 반복하면서 두렷하고 고요한 마음을 회복해 가는 것이 좌선입니다.
오늘 교당에 오니까 무슨 냄새가 나죠. “아 교당에서 뭘 먹었구나.” 알아 차려지죠. 이 육근을 작용하는 동안은 교당에 잠깐 불이라도 하나 꺼져 있으면 “교당이 어둡네.” 그런 여러 가지 상황들이 내 스스로를 뭔가 마음이 툭 일어나게 만든단 말이죠. 우리가 육근을 작용하는 이상에는 경계를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경계를 대하여 경계를 넘어서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 경계를 넘어설 수가 있습니다. 저희들이 생활을 하다가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기도 합니다. 그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그 해법을 배워야합니다. 더하기를 모르는 아이에게 1 더하기 1은 2가 된다는 것을 알게 해주려면 그 원리를, 그 법을 알려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 법을 모르면 도저히 그것은 이해가 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내 삶에 문제가 생겼구나.” 그러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들을 그러면 “어떻게 풀어가야 될까” 스스로 뭔가 자문자답을 통해서 해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내 주변의 스승들, 내 마음을 지켜봐 줄 수 있는 그 스승들을 만나서 문답감정이라는 것을 통해서 또 해결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염불과 좌선을 하다가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있으면 또 물어보는 거예요. 제가 이것은 도저히 이 마음 쓰는 것은 도저히 해결이 안 됩니다. 이것은 어떻게 해결을 해야 될까요. 그것을 끊임없이 문답하고 문답하다 보면 그 해법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정신 수양을 하는 이유]
오늘 내용을 좀 정리를 해드리자면 정기 훈련이라는 것은
언제 - 일정 기간을 두고
누가 – 누구나가
무엇을 - 11 과목을 훈련하는 겁니다.
어떻게 - 떳떳하게 그리고 사실적으로 훈련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를 은혜가 나올 수 있게끔 훈련해 나가는 것이 정기 훈련입니다.
염불은 외경이 심할 때, 밖으로 요란한 경계가 많이 일어날 때, 한 소리에 집중을 해서 그 소리에 내 일념을 모아갈 때 공부하는 정신수양의 과목입니다. 좌선은 외경이 고요할 때 외경이 고요할 때 내 스스로의 내면을 살피면서 공부하는 공부법이죠.
대종경(大宗經) 제3 수행품(修行品) 50장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수도인이 경계를 피하여 조용한 곳에서만 마음을 길들이려 하는 것은 마치 물고기를 잡으려는 사람이 물을 피함과 같나니 무슨 효과를 얻으리요, 그러므로, 참다운 도를 닦고자 할진대 오직 천만 경계 가운데에 마음을 길들여야 할 것이니 그래야만 천만 경계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큰 힘을 얻으리라. 만일, 경계 없는 곳에서만 마음을 단련한 사람은 경계 중에 나오면 그 마음이 바로 흔들리나니 이는 마치 그늘에서 자란 버섯이 태양을 만나면 바로 시드는 것과 같나니라. 그러므로, 유마경(維摩經)에 이르시기를 "보살은 시끄러운 데 있으나 마음은 온전하고, 외도(外道)는 조용한 곳에 있으나 마음은 번잡하다."하였나니, 이는 오직 공부가 마음 대중에 달린 것이요, 바깥 경계에 있지 아니함을 이르심이니라.] |
정신 수양을 하는 이유를 수행품 50장을 봉독하면서 오늘 시간을 마쳐야 될 것 같습니다. 대종경 수행품 50장 말씀을 늘 마음속에 되뇌면서 우리가 정신수양 공부를 왜 해야 되는지, 그리고 대종사님께서 왜 정신수양 공부로 저희들에게 단련시키고자 하셨는지 그리고 그 정기되는 기간이 하루하루가 아니고 일주일이 아니고 1년이 아니고 그때그때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늘 마음속에 명심하고 하루에 잠깐이라도 그 정신 수양을 통해서 다시금 내 스스로를 내면을 내가 문제가 되는 경계거리를 다시금 내 본래 마음에 다시 되돌려서 그 성품자리에 되돌려서 그 경계를 잘 이겨내는 여러분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상 마치겠습니다.
원불교 안암교당 | 원기 107년 02월 16일 ▣ 수요공부방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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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승회장님~ 정성스런 타이핑 감사합니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