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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설교
고린도후서 12:6-10
하나님의 은혜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주현절 넷째 주일이다. 어느새 2월이고, 내일 모레면 입춘이다. 그렇다고 봄맞이 기분은 들지 않는다.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신종코로나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염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은 배제와 혐오로 발전하고 있다. 졸지에 우한 사람들은 난민이 되었고, 중국사람 모두를 기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지어 한국인으로 우한에서 살던 교민들의 한국 임시거처 마련에도 처음에는 반대와 반발이 커서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고맙게도 환대하는 분위기로 돌아선 것은 다행이다.
우한은 텅 빈 도시다. 인구 천만 명이 사는 초대형 도시인데 지금은 대부분 빠져나갔거나, 집을 지키고 있다. 높은 아파트 사이로 이런 함성이 간혹 들린다고 한다.
“우한 짜요~”
중국어 ‘짜요’(加油)는 ‘힘내라!’라는 뜻이다. 이 외침이 아파트 사이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서로의 창문을 향해 격려한다. 지금은 누구를 비난하거나 책임을 묻기에 앞서 서로 격려함으로써 인류가 겪는 21세기 흑사병을 이겨내야 한다.
1)
1세기에도 유명한 전염병이 돌았다. 그 바이러스의 숙주와 보균자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지중해 연안으로 신속히 퍼져나갔다. 슈퍼전파자는 사도 바울이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유대 총독에게 바울을 이렇게 고발한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행 24:5).
본문은 고린도후서 10장부터 계속되는 사도 바울 설교의 일부이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변명하면서 설득하려고 한다. 흔히 본문을 ‘바보’ 설교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바울이 자신의 강함이 아닌 연약함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바보 같은 고백이 담겨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11:30).
‘바보’ 설교는 세상 사람의 눈에 자신이 보균자임을 밝히는 선언처럼 보인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 안에서 그는 연약함을 선택함으로써 온전함을 이루었다고 고백한다. 바울은 역설적인 표현을 통해 더욱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는 약한 것, 능욕, 궁핍, 박해와 곤고를 기뻐한다고 하였다. 내가 약한 그 때가 오히려 강하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어떻게 가능한가? 그의 말 속에 신앙의 신비가 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10).
그리스도교 신앙은 역설로 가득하다. 이러한 역설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앙의 신비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바울은 말뿐 아니라 삶이 역설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이전에 복음의 박해자로 살다가 이후에 복음의 전도자가 된 사람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평생 ‘자기부정’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긍정’케 하려는 일에 헌신하였다.
바울이 자랑하는 연약함은 무엇일까?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늘 강자의 편에 서 있었다. 율법에 대한 완고한 열정을 지닌 바울은 그 ‘강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섰다. 그는 첫 순교자 스데반이 성 밖에서 돌에 맞아 죽을 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의 옷을 맡아 주었다. 그 후 교회를 없애려고 집집마다 찾아 들어가,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끌어내어 감옥에 넣었던 장본인이다(행 7:54-8:3).
이때 하나님이 개입하신 방법은 그가 자부해온 ‘강함’을 꺾으신 일이다.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환상 중에 예수님을 만났는데, 사울의 기세가 가장 등등하던 때였다. 이것이 그의 유명한 회심사건이었다. 돌아보면 바울의 회심은 그의 인생 최고의 사건이었다.
“내 인생 최고의 날은 사명을 자각한 날이다”(칼 힐티).
회심 이후 사도 바울은 전혀 뜻밖의 사람이 되었다. 이전의 박해자가 아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강함으로 사람들을 억압하는 대신, 자신의 약함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봉사하게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역설적인 방법이다.
문제는 과거에 자신과 한편이었던 유대인들은 이젠 적이 되었고, 끊임없이 바울의 생명을 위협하였다. 반대로 바울이 박해하려던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아직 의심으로 가득한 사람들과 초대교회 그 연약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2)
사도 바울은 안팎으로 낀 인생이었다. ‘팔자가 사납다’는 말이 어울린다. 바울은 자신이 선택한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삶이 아주 꼬였다. 그래서 전염병과 같은 인생을 살았다.
사람이 평생 뜻을 함께 살던 사람들, 곧 과거에 속한 사람들과 단절하는 것은 얼마나 큰 어려움일까? 사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서 사는 일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바울의 경우 옛 사람과는 등을 지고 살았고, 새 사람들도 그를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참 불안하다. 복음의 적대자가 복음의 전도자로 180도 달라졌으니 그런 오해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사도 바울은 처음에는 ‘혐오와 배제의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같은 바이러스라도 이젠 ‘사랑과 구원의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변화를 설명한다. 그것은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다. 사도행전에 세 번이나 반복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누구나 그렇게 삶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바울은 평생 자기 인생의 역전, 변화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그는 그런 고난의 삶을 피하거나, 마다하지 않았다. 바울은 말로 구차하게 설명하기보다, 행동에 충실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과 수치, 모욕과 환란을 감내하였다. 심지어 그는 그 연약함으로 자기를 더 솔직하게 증거하였다.
바울의 편지를 보면 바울은 자신의 강함과 연약함 사이에서 늘 갈등하였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자신의 강함보다는 연약함을 선택하였다. 그가 타고난 성자여서 약자행세를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약함을 선택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강함 가운데 머물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증언한다.
바울은 약자의 입장에서, 약자의 편을 들면서, 약자로 살게 되었다. 그것은 바울이 선택한 믿음의 삶이었다. 바울은 그의 ‘육체’의 약점을 인정하고, ‘믿음’이란 장점을 최고로 극대화한 사람이다. 바울의 연약함은 하나님 앞에서 굴복하게 하였다. 그의 가시가 하나님 앞에서 그를 순종하게 하였다. 연약한 그때에 비로소 그가 강하신 하나님 안에 머물 수 있음을 깨달았다.
마울은 우리에게 권면한다. 약함을 자랑하라!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서는 무력함 이외에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할 때 그는 자기의 능력을 가장 깊이 체험할 수 있다.
바울의 가장 위대한 고백은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였다. 내가 약함을 깨달을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는 것이다.
“자신의 시험을 겪고 난 사람은 남을 향한 위로와 연민이라는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풍성한 복을 체험할 수 있다”(T. J. 바흐).
3)
바울의 ‘바보’ 설교를 들으면 그가 겸손한 사람으로 거듭났음을 알 수 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은연중 자기 자랑이 많다. 알 만한 사람은 누구나 그의 학력과 가문과 출신배경, 로마시민이라는 특권적 신분을 다 안다.
그러나 바울의 자랑이 그를 구원한 것이 아니다. 강한 바울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없었다. 높은 율법에 대한 학식이 그를 구원하지 못하였다. 로마 시민권이 그를 자유하게 하지 않았다.
“...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7).
바울은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영적 경험도 있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7).
그에게는 특별한 계시의 경험이 있었다. 이 계시는 바울에게 영적으로 우월함을 증거하는 증거였다. 그러나 이것조차 자신의 소명을 내세우는 증거로 삼지 않았다.
다만 바울에게는 자만할 수 없는 육체의 연약함이 있었다. 그는 이것을 육체의 가시라고 불렀는데, 이것을 사탄의 사자라고도 하였다. 이 가시는 ‘육체에 박힌 말뚝’처럼 그를 괴롭혔다. 일시적인 반대와 박해와 같은 환경적 요인이 아니다. 평생 그를 괴롭힌 육체적 고통 그 자체였다. 성경은 그 정체를 분명히 밝히지는 않았으나 안질, 학질, 간질 등으로 추정한다. 그것은 바울에게 평생 약점이었고, 멍에였으며, 낙인이 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이 궁지에 몰렸을 그 때가 하나님에게는 기회가 됨을 깨달았다. 그는 아픔조차도 하나님께 굴복할 기회로 받아들였다.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7).
자만의 반대말은 겸손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입장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사실 겸손은 약함의 증거가 아니다. 비굴함의 상태가 아니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면서 하나님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추려는 것이다. 바울은 육체의 약점까지도 자신을 다스리는 기회로 삼았다. 그의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넉넉히 받아들이는 기회로 삼았다.
심리학에서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일단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다. 겉으로 문제가 없으면, 무의식까지 뒤진다. 현재 나타나는 문제, 상처, 잘못된 결과는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과거에, 내면에, 마음의 심층에 새겨진 상처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결함모형’이라고 부른다. 콤플렉스, 우울, 불안, 분노, 성격장애 같은 것들이다. 모두 트라우마 탓으로 돌린다.
사람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결국 자신을 부정하고, 항복함으로써 그 현실을 인정하게 된다. 치유, 즉 얽힌 실타래를 푸는 것은 다음 일이고, 먼저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고 항복해야 한다. 그래야 치유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이론도 있다. 긍정심리학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약점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또 다른 장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약점만 있는 사람은 없다. 누구에게든 약점이 있고, 또 장점이 있는 법이다. 두 가지 면은 동시에 존재한다. 그러니 그 장점을 끌어 올리면 약점은 개선된다는 이론이다.
흔히 독일 축구대표팀의 예를 든다. 그들은 평소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한다. 그런데 월드컵에 나오면 독일팀은 늘 우승후보로 주목 받는다. 월드컵에만 나오면 펄펄 날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질문하였다. 독일이 월드컵에만 나오면 강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에 대해 축구 전문잡지 ‘포포투’가 해답을 내놓았다. 독일 축구의 힘은 강인한 정신력 즉 ‘위닝 멘탈리티’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희망의 관점이 바로 그것이다.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의 관점, 곧 ‘위닝 멘탈리티’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다. 그는 하나님이 마침표를 찍으신 자신의 인생에 대해 더 이상 물음표를 붙이지 않았다.
나의 약점은 세상에서는 열등감이다. 그러나 신앙의 역설에 따르면 하나님 안에서는 은혜를 구하는 통로가 된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9).
세상에서는 강함이 자랑거리이지만, 그 강함은 언젠가는 꺾이게 마련이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십자가가 있게 마련이다. 자기 십자가는 예수를 만나는 다리이다.
나의 강함으로, 나의 똑똑함으로, 나의 엘리트 의식으로 남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나의 연약함으로만 그들의 약함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가슴으로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나 만의 길을 가는 자는 그 누구로부터 추월당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내 연약함을 통해 은혜를 베푸시기를 바란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 믿음의 넓이와 깊이를 만들라. 그것은 연약한 나를 축하하는 것이고, 은혜 안에 있는 삶을 감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희망의 슈퍼전파자가 되라. 사랑과 평화의 바이러스를 실어 나르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연약함을 통해 오히려 더 큰 은혜를 베푸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첫댓글 인간의 약함이 하나님의 기회: (지성인)엘리트 의식으로 남을 이해할수 없다: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은 추월당하지 않는다.
나도 바울 처럼 약자의 입장에서, 약자의 편을 들면서, 약자로 살아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