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장춘몽이라 했던가...
풍운아
삼 봉 정 도 전
글,편집: 묵은지
500년 가깝게 역사를 지탱해 오던 고려를 무너뜨리고 다시 새로운 역사로 이어갈 자신의 나라를 세우려는 이성계의 야심을 위해 헌신적인 공을 들여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풍운아 삼봉 정도전은 그 덕에 태조 이성계로부터 두터운 신임과 그에 걸맞는 엄청난 무소불위의 권력을 받아 누렸습니다. 이런 후한 비호아래 새로운 나라를 위하여 자신이 구상했던 국정 제도 전반에 걸친 개혁을 소신있게 이끌었으며 나름대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로는 참담하기 짝이 없었는데 그것은 다른사람도 아닌 자신을 아껴주고 비호해 주었던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태종)에게 잔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정도전은 조선을 세운 공덕으로 이성계의 무한한 신임을 받았지만 흐르는 세월은 막을수 없었기에 늙고 병든 이성계는 더이상 그의 위상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품은 뜻을 고집스럽게 정사에 펼치다가 정적이 된 이방원에게 미움을 사게되어 졸지에 죽음을 당하며 자신이 실현하려는 원대한 꿈과 인생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이성계는 고려의 장수로 우군 도통사라는 직책을 맡아 군사를 이끌고 요동 정벌에 나섰다가 그 유명한 '4불가론' (첫째, 작은나라가 큰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않다. 둘째, 농사철에 전쟁을 하면 않된다. 셋째, 왜구가 침범할 염려가 있다. 넷째, 장마철이라 활을 쏠수 없고 전염병의 우려가 있다.)을 핑계삼아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였습니다. 내친김에 자신의 상관이었던 '최영'장군을 제거하고 쇠약해진 고려를 무력을 앞세워 평정, '우왕' 과 '창왕'을 내리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보위에 올리는 등 고려 정권을 장악하고 새로운 나라인 조선을 건국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불안정한 정치적인 혼란이 가중되어 나라안은 온통 권력의 주도권 싸움으로 치열한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길이 다른 정적이거나 같은 노선에 있다 하더라도 서로 자기 생각이나 행동이 다르면 가차없이 죽이던가 멀리 유배를 보내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던 시기였습니다. 정도전 본인의 죽음도 그러했지만 선죽교에서 철퇴로 피습을 당해 죽은 '정몽주'나 유배지에서 죽임을 당한 '이숭인' 등은 그 대표적인 권력을 향한 쌍방간의 파벌 주도권 싸움의 희생양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정도전은 1342년, 경상도 봉화지역의 향리출신 집안에서 태어나 일찌기 젊은 나이에 과거급제를 하여 관직에 발을 들여 놓았는데 부친 '정운경' 역시 과거 출신으로 고위 관료직을 역임하는 덕에 정도전은 어릴적부터 주로 개경에서 생활하며 유학자이자 성리학자인 '이제현'과 그의 뒤를 이은 '이 색'의 문하생이 되어 '조 준', '남 은', '길 재', '정몽주', '이숭인' 등과 함께 학문을 수학하였습니다. 후에 이들은 각자 고려 사회의 중요 학자나 관료가 되었지만 불안정한 시국 속에 서로 엇갈린 파벌로 갈라진 정적이 되어 죽고 죽이는 견원지간이 되었습니다. 처음 관직에 발을 들여놓은 젊은 시절의 정도전은 워낙 강직한 성격으로 매사를 쉽게 타협하지 못하는 바람에 주변과의 매끄러운 조화를 이루지는 못했는데 그래도 혈기 넘치는 젊은 신진파인 그의 능력을 알아본 '공민왕'은 그를 매우 총애하였습니다. 하지만 공민왕이 자신의 부인인 익비 '한씨'와 간통을 하고 임신까지 시킨 '홍 윤'에 의해 도리어 죽임을 당하면서 이 공민왕 시해사건을 수습한 '이인임'과 그들의 세력은 또다시 자신들이 거머쥔 권력을 이용하여 세력을 키우는 등 부패한 정치를 일삼았습니다. 이런 고려의 망국 정치에 환멸을 느낀 정도전은 낙향을 결심하였는데 그를 시기하는 세력들에 의해 다시 유배까지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시기에는 중국 대륙도 원나라와 명나라가 한창 세력싸움을 하는 중이었는데 중국의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한족이 주류를 이룬 명나라의 '주원장'과 세력이 약화된 몽골계 원나라와의 사이에 전쟁으로 원나라가 전쟁에 지면서 북쪽으로 밀려나 결국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있던 때 였습니다. 이러한 주변 정세를 내다 본 정도전은 망해가는 원나라를 멀리하고 세력이 강해지고 있는 명나라와 친해지자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려 조정에는 그때까지도 국제 정세에 둔감하였는지 이른바 '친원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친명파'를 자청하는 정도전을 왕따 시키고 배척하였습니다. 친원파 '이인임'을 주축으로한 권문세족의 득세와 탐관오리들의 부패, 왕가의 측근들과 어울려 정계를 어지럽혔던 '신 돈'과 그의 손아귀에 놀아나던 불교계의 타락은 극에 달했습니다. 나라 안의 심장부까지 파고드는 전운으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수시로 국경을 넘어 쳐들어 오는 여진족과 홍건족을 막아내기도 버거웠으며 아랫녘에는 끈질긴 왜구의 침입으로 수많은 백성들의 인명과 재산이 탈취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이런 현실을 바라본 정도전은 더 이상 고려 왕조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으며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길로 북방에 주둔하고 있던 이성계를 찾아가 그의 측근이 되었습니다. 일찌기 이성계의 됨됨이를 보아온 정도전은 이성계가 장수로서의 용맹성과 기개도 있었지만 전략에도 뛰어난 지략가로 삼도 도순찰사로 있을때는 전라도 지방에서 극성을 부리던 왜구들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하였으며 왜구들의 전의를 상실하게 만든 결정적 황산전투에서 대승을 거둬 '황산대첩'을 이룬 장수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지러운 나라를 힘있게 평정하고 나라 안팎으로 밀려오는 불순 세력들을 일거에 물리치는데 이성계와 같은 파워 넘치는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정도전의 생각은 이에 이성계로 하여금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명분론으로 끈질기게 설득하면서 이성계로 하여금 새로운 나라의 건국과 권좌를 향한 야망을 품게한 계기를 만들어 준 것입니다.
1388년 음력 5월, 요동 정벌군을 이끌고 있던 이성계는 좌군 도통사 '조민수'와 함께 위화도에서 요동 정벌을 포기하고 군사를 되돌려 개경을 향했습니다. '최 영' 장군은 부랴부랴 진압군을 이끌며 이성계의 반란군과 일전을 벌였지만 숫적으로 우세한 이성계의 군사에 상대가 되지는 못했으며 결국 정국을 장악한 이성계는 정도전과 함께 고려의 우왕을 폐위시키고 창왕을 보위에 앉혔습니다. 하지만 창왕 역시 적통이 의심된다하여 폐위시키고 다시 공양왕을 보위에 올렸고 허수아비 공양왕을 보위에 세운 이성계와 정도전은 섭정을 통해 그들이 꿈꿔온 조선을 건국하는 준비작업을 착실히 하였습니다. 드디어 이성계와 정도전은 1392년 조선을 건국하였는데 1394년에 먼저 도읍지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궁을 지어 정도전이 '경복궁'이라 직접 명명하였습니다. 또한 정도전은 경복궁의 문이나 전각 등의 이름을 자기가 정하고 한양을 중심으로한 성벽을 쌓는 등 도읍지로서의 면모를 갖추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정도전은 나아가 혁명공약인 '편민사목'을 발표하고 조선의 전반적인 정책과 문물제도를 정비하였으며 사실상 정도전 자신의 운명을 마감하는 원인이 된 군권을 장악하려는 시도로 특권층이 소유하고있던 사병을 해체시켜 새로 설치한 삼군부에 조선 군사로 편입시켰습니다.
이런 급격한 일방적인 변화로 정도전의 급진적인 개혁성향에 대한 반감을 품은 세력들이 늘어나게 되었고 이런 타협이 않되는 정도전식 개혁은 결국 자신의 죽음으로까지 몰고가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입니다. 정도전의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개혁정책으로 위기의식을 느낀 이방원은 자신이 차지하려는 왕권야욕에 부담이 생기게 되자 부친 이성계의 수족노릇을 하고있는 정도전을 제거하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방원은 가뜩이나 자신을 배제한 세자책봉 문제와 한양으로의 천도, 공신을 책정하는 문제까지 사사건건 아버지 이성계와 그를 따르는 정도전이 자신과 마찰을 일으키고 이견을 보이니 그런 정도전이 곱게 보일리 만무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자신의 왕권야욕을 위한 세력을 지켜주는 사병들을 모두 해체한다니 이방원은 발끈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는 정도전을 죽이겠다는 결심을 하게된 결정적인 원인이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방원은 1398년 자신의 부친인 이성계가 와병중인 틈을타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비롯한 개국공신들은 물론 자신의 이복형제인 세자 '방석'과 '방번'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했으며 이방원의 잔인한 만행과 왕권을 두고 다투는 아들들의 이러한 작태에 회의를 느낀 이성계는 보위를 둘째아들 '방과'에게 물려주고 함경도 함흥으로 훌쩍 떠나버렸습니다.
정도전 자신의 죽음까지 이르게한 그의 성격은 초반에는 관료생활에 장애가 되기도 하였지만 그로인한 낙향이나 유배생활로 백성들과 어울릴 기회가 많아짐으로 자연스럽게 일반 서민들의 애환이나 생활상을 상세하게 파악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후에 그의 정책 가운데는 백성들을 위한 위민의식이 담긴 토지개혁을 단행하는 중심이 되었고 과거 중국의 법을 그대로 모방하거나 관습법에 의해 법이 집행되는 모순됨을 찾아 조선의 체질에 맞는 새로운 법률집인 '경국대전(성종 때 완성)'을 만드는 기초작업을 시작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정도전의 이러한 업적은 역적의 오명을 뒤집어 쓴 채 그대로 덮어 버려져 5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조선시대 말기인 '고종' 때 와서야 경복궁을 증건을 하려던 '흥선 대원군'의 필요에 의해 겨우 복권 되었습니다.
세계의 역사는 인류의 발전과정과 함께 그 영욕을 같이 해 왔는데 그 속성은 우리나라의 역사라고 다를바 없습니다. 다른 연대의 우리나라 역사도 그렇지만 특히 조선의 건국과정이나 이후 조선왕조 500년사를 통해보면 왕권을 향한 다툼과 권력의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당파간의 마찰을 많이 찾아볼 수가 있는데 그런 부분이 묵은지가 역사에 관심을 갖게된 바탕이 되기도 합니다. 과거 묵은지가 교육신문사 재직시절, 친분이 있었던 '조선왕조 500년'의 드라마 극작가인 고 '신봉승'님과 묵은지가 나눴던 역사 이야기에는 밤을 새워 들어도 물리지 않을 정도로 흥미가 진진했으며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강릉사범학교 출신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한 고인은 작가로서 역사에 대한 나름대로의 소신이 있었습니다. 고인은 지난 2016년 안타깝게도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