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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 올라갈 쌔(행3:1-10)-2022.10.9
성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물론 성전도 보이는 성전이 있고, 보이지 않는 성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성전이 세워지는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두시기 위함입니다.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건축하시면서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함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두시고 계신 성전이지요. 창조주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당신의 처소로 만드신 거예요. 그래서 이사야서66장1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한 처소가 어디랴”.
물론 이 말씀은 하나님이 어느 특정한 공간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라 온 우주에 편재하시는 하나님임을 강조하는 말이지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식적 믿음생활을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가 되고,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온 우주의 주인이신데 굳이 너희가 특정한 장소를 구별하여 하나님의 집을 지을 필요가 있냐는 말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이 안식할 처소를 마련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당시 이스라엘의 신앙은 하나님보다는 하나님과 관계되는 것에 더 집중했던 것이지요.
다시 말해 내적 경건보다는 외적인 경건함을 그들 믿음의 표지로 여겼던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외적인 경건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이른바 율법적인 믿음을 책망하신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성전이라는 특별한 공간을 만들어 놓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쩌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더욱 깊이 체험하기 위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른바 하나님에 대한 집중도를 높이기 위함이라는 것이지요. 인간은 너무 크면 못 봅니다. 반대로 너무 작아도 보지 못하지요. 다시 말해 너무 크면 그 가치를 잘 모릅니다. 그리고 너무 넓고 많아도 그 가치를 잘 모르지요.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산소가 풍족한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산소가 얼마나 소중한지 잘 모릅니다. 산소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고 당연한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막상 산소가 부족한 공간에 들어가서 호흡의 곤란함을 체험하면 산소가 얼마나 고마운지를 실감하게 되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크고 많으면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그 가치를 잘 모르는 거예요. 대부분의 인간은 다 그럴 것입니다. 온 우주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성전의 가치를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제한적인 공간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면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기가 훨씬 더 쉬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성전을 지어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는 본질적인 뜻은 구별하시려는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 중심의 삶, 즉 성전중심의 삶을 살기 위함이지요. 그래서 성전은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두신 곳이에요(신12:11).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라는 말입니다(신14:23, 15:20, 16:2, 16:11, 18:6 등).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성전에 두고 계십니다. 당신의 이름이 있는 곳에 하나님은 당신의 눈과 마음을 항상 거기에 두고 계십니다(왕하9:3, 대하7:16). 그래서 성전은 하나님의 관심이 집중된 곳이요, 하나님의 마음이 집중된 곳입니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이지요(출20:24).
한마디로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의 생명과 같은 것이지요. 물론 보이는 성전보다는 보이지 않는 우리 마음의 성전이 훨씬 더 중요하겠지요. 마음의 성전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처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성전, 마음의 성전이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보이는 성전도 중요하지요. 성전은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두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영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영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두말할 것 없거니와 육체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영육간의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쪽만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육체적으로만 하나님의 영광을 돌려드릴 수도 없고, 영적으로만 하나님의 영광을 돌려드릴 수도 없는 것이지요. 영육간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은 올라가는 곳입니다. 물론 성전이 높은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올라간다는 개념으로 사용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의미는 영적인 경건을 강조하기 위한 거룩함의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사2:3).
그러면 우리가 성전에 올라가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성전에 올라가는 근본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구약성도들은 당연히 제사와 절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어쩌면 성전의 가장 핵심적인 기능은 제사와 절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성도들은 성전 기도를 드리기 위해 올라야 했습니다. 물론 또 다른 목적을 위해 성전으로 올라가는 사람들도 있었겠지요. 그것은 마치 오늘날 우리가 예배당을 찾는 이유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전을 찾아 올라가는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성전에 올라가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한 부류는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갑니다. 물론 베드로와 요한이지요. 그들은 정한 시간에 기도하러 올라간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와 그를 도와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올라갑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출석한 것이지요. 아마도 비가오나 눈이 오나 올라가는 열심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당장 그들의 생계가 달린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전을 올라가는 사람들의 목적이 다른 것입니다.
(1) 기도하러 올라가는 베드로와 요한
당신은 성전에 왜 올라가십니까? 노골적으로 묻겠습니다. 당신은 왜 교회에 가십니까? 대부분 예배하러 올라갈 것입니다. 혹은 기도하러 올라가겠지요. 아니면 다른 목적을 갖고 올라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교회에 가는 목적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이른바 성전에 올라가는 근본적인 목적이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복잡한 이야기할 것 없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올라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예배가 될 수도 있고, 기도나 전도 등 다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체의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성도들이 교회에 출석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예배드리기 위함일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영적인 행위 중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교회가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우선적인 행위이거든요. 마치 구약 제사가 성전에서 드리는 가장 우선적인 행위였듯이 오늘날 예배는 교회에서 드려지는 가장 중요하고 영광스런 행위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를 찾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아무도 그 일에 대해 시비를 걸 수 없습니다. 성전의 주된 업무가 제사이듯이 예배당의 가장 으뜸 된 행위가 예배라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하기 위해 성전을 출입하기도 합니다. 같은 의미에서 기도하러 예배당을 출입할 수 있는 것이지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당에 기도하기 위해 찾아갑니다. 물론 기도는 아무 곳에나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으시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가는 것은 경건한 믿음입니다. 이른바 주님이 피 흘리고 세워주신 교회에 기도하러 올라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성전이든 예배당이든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두신 곳에 당신의 눈과 마음을 집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이나 교회는 기도하기 가장 좋은 곳입니다. 이보다 더 기도하기 좋은 장소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러 성전을 올라간다거나 예배당에 출입하는 것은 거룩한 행위요, 경건한 습관입니다. 이런 습관은 가질수록 좋습니다. 물론 습관적으로 올라가는 것은 좋지 않지요. 종교적인 습관으로 성전을 올라간다거나 혹은 예배당에 출입하는 것은 영적으로 무감각하게 만들어 버리거든요. 한마디로 영적인 신선함이 없이 그저 무덤덤한 종교인으로 전락시켜 버리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래도 올라가지 않는 것보다 올라가는 것이 더 좋습니다. 언젠가 그도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베드로와 요한을 보십시오. 그들에게는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성전은 유대인의 성전입니다. 당시 구약으로부터 유지되어온 성전이 존재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당시 성전을 출입하는 데는 성전의 본래 고유한 기능을 수행키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비록 예수를 믿지만 성전을 중심으로 그들의 신앙을 지켜나가는데 어떤 불편한 마음이나 생각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들은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을지라도 성전보다 경건한 장소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물론 신학적으로 보면 당시 유대인의 성전은 예수님과는 상관없는 처소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일등공신역할을 한 사람들이지요. 그러므로 그들의 성전에서 예수님의 이름이나 영광은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장소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성전을 율법적인 시각에서 이해했겠지만, 예수를 믿는 제자들은 성전을 복음으로 접근하고 이해했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장소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율법의 제도하에 세워진 성전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복음으로 수용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지요. 율법과 복음의 차이는 여러 가지나 그중에 하나는 이것입니다. 율법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수용하지 못하지만, 복음은 율법을 충분히 이해하고 수용합니다. 그것이 율법과 복음의 궁극적인 차이입니다. 사실 성전은 유대교인들이 출입하기 좋은 곳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인이지만 유대교인은 아닙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불편한 마음을 가질수 있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당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을 기도처로 삼아 올라가는 것에 대해 상당한 부담감을 가질 수 있었으리라는 합리적인 추론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유대교인들은 성전 출입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겼을 테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베드로와 요한 같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뭔가 좀 개운치 않는 부담감을 가졌을지 모른다는 말이지요.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들은 주님을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제자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유대교인들이 출입하는 성전을 자기들이 출입하는 것에 대해 꺼림직하게 생각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만의 생각일까요?
물론 그들은 당시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아닙니다. 어쩌면 그들은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나고 안디옥에서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별칭을 받게 된 후에 공식적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시 유대교인들의 눈에 비치는 그들은 단지 나사렛 예수를 믿는 신흥 종교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테지요. 그만큼 당시 그리스도교의 존재감은 미미했던 것이지요. 그리스도교는 이제 막 태동하는 신흥종교로밖에는 안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그들만의 기도처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만의 기도처는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유대교의 전통에 의해 설립된 성전을 그들의 기도처로 사용했던 것이지요. 아직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엄격하게 구별된 것은 아니었을 테니까요. 물론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베드로와 요한은 자기들과 동일한 유대인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간 것입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지요. 만일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굳이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성전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아는 자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를 아는 자는 성전을 아는 자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그 어디나 성전임을 믿는 자입니다. 그들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어디든지 성전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지요.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책망함을 들어보십시오(고전3:16). 베드로와 요한은 분명히 그들이 성전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유대 율법주의 전통에 의해 세워진 성전이라도 당당하게 기도하러 올라간 것입니다.
(2) 구걸하러 올라가는 앉은뱅이
성전에 올라가는 또 한 부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입니다. 그는 날마다 성전미문으로 출근하는 사람입니다. 나이는 사십대입니다(4:22). 그는 자기 스스로는 성전 문에 올라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올라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최소 몇 사람은 필요했을 것입니다. 최소 한두 명은 말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들이 그와 어떤 관계인지 모릅니다. 그들이 가족인지 친족인지 그들의 정보에 대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를 돕는 사람들이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을 날마다 돕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별한 사랑과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하지요. 한두번 정도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주기적으로 돕는다는 것은 보통의 관계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앉은뱅이와 함께 경제적인 이익을 공유하는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들 모두가 다 성전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이른바 제사에는 관심 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이에요. 그들에게 성전은 단지 그들의 생계를 책임져주는 일터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루라도 그곳으로 나가지 않으면 당장 생계가 걱정되었을 테니까요. 그러므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직업적으로 나가야 했을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앉아 있는 곳은 성전미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동서남북으로 문이 있었습니다. 동쪽으로 1개, 서쪽으로 4개, 남쪽으로 2개, 북쪽으로 1개의 문이 있었는데 미문은 남쪽에 위치하여 주로 평민들이 출입하는 문이었다고 합니다.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아름다운 문이라는 미문으로 불리어졌다는 말입니다. 그곳은 출입하는 자가 많아서 구걸하기에도 좋은 장소였던 것이지요. 때문에 날마다 성전미문으로 출근하는 앉은뱅이를 모르는 자들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미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그 모습은 너무나 친숙한 광경으로 받아 드렸을 것입니다. 앉은뱅이나 출입하는 사람들 모두 다 무감각했을 것입니다. 그냥 운수좋은 날에는 몇 푼의 수입이 있었을 것이지만 대부분 그날이 그날이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도 앉은뱅이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 일밖에는 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어쩌면 어떤 운수 좋은 날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문제는 목적이 다르면 관심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성전이지만 올라가는 사람들의 목적이 다르면 관심사도 다른 것입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성전을 출입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관심사가 다르다는 것이지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을 올라가는 목적은 기도입니다. 하나님과 정한 시간에 교제하기 위함이지요. 그러므로 자동적으로 그들의 관심은 앉으나 서나 하나님 생각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시선은 오직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앉은뱅이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누군가로부터 던져주는 한 푼의 동전입니다. 그래서 시선이 사람들에게 맞추어져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앉은뱅이는 사람들의 발걸음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였을는지 모릅니다. 성전을 올라가던 사람들 중에 누군가 자기 앞에서 발걸음을 멈출 때면 앉은뱅이는 엄청난 기대감으로 설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던져주는 동전소리보다는 소리 없이 넣어주는 더 큰 지폐의 기대치에 신경이 더욱 발달되었을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그것이 바로 앉은뱅이의 그날의 수입이요, 관심사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안타까운 것은 앉은뱅이의 관심사는 오직 그날에 들어오는 돈이 전부였을 것입니다. 오직 그의 소망은 돈이었던 것이지요. 그는 남들처럼 일어나 걷고 싶다는 창조적인 생각은 잊어 버린지 오랠 것입니다. 물론 그에게도 처음에는 그런 소망이 있었을 테지요. 그리고 나름대로 치료도 해보고 자기가 믿는 신께 간구도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런 꿈들을 물거품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에게 일어설 수 있다는 소망은 잊어버린 지 오래되었을 테지요. 그냥 하루하루 던져주는 몇 푼의 동전수입이 그의 유일한 소망이요, 희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울고 웃고를 반복했을 것입니다.
앉은뱅이는 율법의 한계를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주는 반면교사와 같습니다. 율법은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지요. 당연히 앉은뱅이는 자기 힘으로 성전으로 올라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절대 성전에 구걸하러 올라갈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는 율법의 한계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앉은뱅이의 본질적인 문제는 한 푼의 동전이 아닙니다. 그가 정상적인 사람처럼 일어서는 것이겠지요. 그의 근본적인 문제를 치료하고 해결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율법은 자기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성전 입구에서 머물지 말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라
율법이 자기 한계를 극복하려면 반드시 복음을 만나야 합니다. 복음을 만나지 못하면 율법은 한계에 부딪힙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물론 때로는 율법도 자기만족을 주기도 하지요. 일종의 성취감과 포만감을 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앉은뱅이도 그날그날의 수입에 따라 성취감을 갖기도 하고 굉장한 포만감을 누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금방 그런 성취감이나 포만감은 사라지고 맙니다. 그것은 잠시 그들의 목마름을 해갈시켜주는 청량제 같이 보였을지라도 다시 그들을 목마르게 하는 소금물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는 다시 그의 목마름을 축여줄 또 다른 사람을 기다리고 찾아야 했던 것이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 어떤 사람이 그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의 소원을 이루어줄 수 있겠습니까? 혹시 누군가 그의 삶을 책임져 줄 정도의 후원자를 만났을지라도 앉은뱅이 된 그의 삶을 치료해 줄 수 있겠습니까? 미안하지만 없습니다. 앉은뱅이가 날마다 성전미문으로 출근하여 구걸한다고 할지라도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가 자기 운명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전입구에서 머물지 말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보이는 성전 안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아니지요. 성전 안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영적인 성전을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내안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모시고 영접하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이지요. 내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지배하고 다스리시고 통치하신다는 말이지요. 한마디로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비록 육체 가운데 살지라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갈2:20).
한마디로 삶의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 바뀌면 이제까지 나를 지배하던 세상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이지요. 비록 나가진 재물 없을지라도 자유합니다. 비록 앉은뱅이의 신분으로 살지라도 자유합니다. 왜냐면 율법은 사망의 법이요, 복음은 살리는 법이거든요.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왜냐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시기 때문입니다(롬8:2).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으면 죄에서 자유, 사망에서 자유,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죄와 사망과 율법은 서로서로 얽혀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같은 집에 사는 식구들인 셈이지요. 죄를 죄 되게 하는 것은 율법입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율법은 정죄하는 기능을 하거든요. 정죄는 죄를 정하는 것이지요. 또한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율법으로 인하여 정죄를 받은 죄는 값이 있습니다. 죄가 지불해야 할 죗값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이 세 가지는 서로서로 물려 있는 거예요. 한 가지라도 없으면 기능을 못하는 셈이지요. 죄 때문에 율법이 존재하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에서 우리를 동시에 해방시켜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이 세 가지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주는 것이지요. 이른바 복음을 믿으면 죄에서 자유하고, 사망에서 자유하며, 율법에서 자유 한다는 것입니다. 자유 한다는 것은 매었던 사슬에서 끊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죄에서 자유하고, 율법에서 자유하며, 죽음에서 자유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것이지요. 그것이 복음이 주는 혜택입니다. 복음의 혜택을 받아들이면 아무 것도 염려할 것 없고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사실 성전미문의 앉은뱅이는 영육이 매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육체의 질고가 문제가 아니라 영혼이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영육이 치유 받는 것입니다. 그 치료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의 필요를 알았습니다. 지금 당장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한두 푼의 동전이 아니라 육체와 함께 영혼이 치료를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지요. 한마디로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의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현실 너머의 세계를 바라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눈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그들에게 가진 것은 없었습니다. 때문에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지금은 없지만 나중에 올라올 때는 조금이라도 도와줄 생각을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앉은뱅이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앉은뱅이를 향해 자기를 보라고 주문합니다. 순간 앉은뱅이는 기대이상의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긴장과 흥분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구걸하면서 자기를 바라보라고 말한 사람을 만나 본적이 없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앉은뱅이를 금방 실망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자기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한순간에 날려버리는 말이었을는지 모릅니다. 베드로가 외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것입니다. 앉은뱅이는 은과 금은 내게 없다는 말을 듣는 순간 이들도 별 볼 일이 없는 사람들이구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순간 극도의 실망감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말도 역시 앉은뱅이를 실망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리가 앉은뱅이의 운명을 바꾸는 소리입니다. 앉은뱅이의 운명을 변화시키는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복음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에게 너무나 간단한 복음을 소개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름 예수는 복음의 전부입니다. 그들은 앉은뱅이에게 기도하자고 주문하지 않았습니다. 아니면 복음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지도 않았습니다. 혹은 복음을 믿느냐고 추궁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신앙고백도 시키지 않았습니다. 자기들 안에 있는 복음을 앉은뱅이에게 소개한 것입니다. 그들이 전한 복음은 하나도 복잡하지 않았고,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너무나 자연스럽게 전해주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 안에 복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있는 자는 삶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어떤 형식을 갖추지 아니하고 어떤 것을 바라지도 아니하며 그들 안에 있는 복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격식이나 어떤 조건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을 너무 장황하게 설명하고 가르치려 합니다. 때로는 복음을 위한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아니면 자기들도 믿지 않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듣는 사람도 불편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때문에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복음이 역사할 수 있는 환경이나 분위기를 오히려 방해하는 셈이지요. 솔직히 그런 일들은 우리가 자주 경험하는 일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복음과 함께 복음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령한 후에 거침없이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상당히 무례한 행동으로밖에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번도 일어서 본적이 없는 앉은뱅이에게 감히 이런 무례한 행동을 하다니요? 그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하려구요? 가끔씩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주변에서 무례하다는 지적과 핀잔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최소한 그들의 눈에 비친 전도자들의 모습은 충분히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자기들안에 감추어진 복음의 능력을 믿었던 것입니다.
분명히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실 것을 믿는 믿음이지요. 그 믿음의 확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행동을 했다면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복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했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앉은뱅이에게서 복음이 역사하실 것을 믿었던 것이지요. 이른바 복음의 능력을, 믿음의 역사를 믿었던 거예요. 그들이 믿었던 것처럼 앉은뱅이는 그들의 행동에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소리를 치면서 저항하지도 않았습니다. 마치 준비된 자처럼 자연스럽게 받아 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그 영혼을 고치시기로 준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이른바 복음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해 놓으신 것이지요. 그는 즉시 발과 발목이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지금까지 성전입구에 있던 앉은뱅이가 성전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아마 평생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세월동안 날마다 성전에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성전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은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성전은 그냥 자기 밥벌이를 위한 생계의 현장이라고만 생각했을 테니까요. 그는 매일 성전으로 출근하면서도 정작 성전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당을 출입하면서 예배당에 출입하는 이유를 모른 체 수많은 세월을 허비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나름대로의 예배당 출입하는 경력은 쌓여질 테지요.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왜 예배당을 출입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아무 목적도 모른 체 예배당을 출입하는 사람들이나 성전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는 앉은뱅이가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날도 종교적인 습성 때문에 혹은 습관 때문에 예배당을 출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혹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예배당을 출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러면 당신은 여전히 성전입구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영적 앉은뱅이인지 모릅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육신의 앉은뱅이만 앉은뱅이가 아닙니다. 영적인 앉은뱅이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 부지기수로 많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전히 교회를 출입하면서도 예수를 만나지 못한 영혼들이 많습니다. 예수에 대해 어떤 관심도 갖지 못한 영혼들도 많습니다. 이른바 예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당 안팎에 수없이 많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들의 믿음을 다시 한번 점검하는 계기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성전입구에서 머물지 말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십시다. 예수 그리스도 주변에서 서성거리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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