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의 생애(6)
유비의 최후
도원종언
효정에서 꺾이고
마안산에서 대파당해 이릉대전에서 패한 유비는 222년 8월,
백제성에 주둔하고 얼마 가지 않아 병에 걸린다.
관우와 장비의 죽음과
형주 상실, 이릉 전투 패배 등 잇따른 악재로 인한
홧 병이란 설이 있다.
유비가 죽기 전,
"짐이 처음에는 병이 다만 하리(下痢,이질)였는데 그 뒤 잡다한
병으로 옮겨 거의 스스로 구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라는 것을
언급하는데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일으켰는데 원수를 갚기는커녕
일생일대의 대패를 당한 정신적인 충격이 컸던 게 아닐까.
손권이 유비가 백제성에 있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선주전에 '손권이 선주가 백제(白帝)에 머문다는 것을 듣고 심히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했다. 선주가 이를 허락하고 태중대부 종위(宗瑋)를 보내 보명(報命, 답례)했다.'는 기록이 있다.
유비가 오를 다시 치려고 했던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이에 촉오 관계는 두 나라의 어쩔 수 없이 각자의 사정 때문에 다시 화평의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촉한은 이릉 대전 이후 내부적으로 여력이 없었고 손오는 곧바로 이어진 위의 침공을 막기에도 버거웠다.
유비는
위나라 군대가 대거 출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육손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적군은 지금 벌써 강릉에 있소.
이에 대응하기 위해 짐은 다시 동쪽으로 갈 것인데,
장군은 이에 동의하오?'
그러자 육손은,
'단지 걱정되는 것은, 폐하의 군대는 방금 패배하여 상처가 아직 치유되지 않았으며, 양국의 화친 관계를 구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지금은 스스로 보충해야 하지 병력을 궁핍하게 할 틈은 없습니다. 만일 십분 헤아리지 않고 다시 뒤엎어지는 상황 속에서 생존자들을 멀리 파견하여 오게 한다면, 목숨을 보존하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답했다.
오록
이 서신에서 적이 명확히 위군으로 명시되고 있으므로, 이는 딱히 조비의 남정을 틈탄 유비의 공격 의도를 나타낸다기보다는 이제 막 이릉대전 후 화친으로 서로의 관계가 재정립되는 시기에 유비가 지원 의사를 밝힘으로서 재정립된 양자간 관계를 명확히 하려는 외교적 수사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라면 이어지는 육손의 거절까지가, 양자가 서로 예상한 수순에 가까울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유비 휘하에서 이릉대전에 참전했거나 후방에 있던 유비의 몇몇 장수들과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장수들은 남아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릉대전 후에도 유비의 인척인 오반이나 유비가 처음으로 쓰고 유능하다고 칭찬한 상총, 이릉 당시 별독이었던 보광, 요화 등은 살아남아 고위직에 올랐고 조운, 진도, 위연 등 남아있던 유비의 측근 숙장들이나 역시 유비의 인척이자 숙장인 오의는 제갈량 정권 하에서도 군부의 고위직을 유지했다.[102]
또한 유비의 핵심 정예병들은 그 와중에도 상당수가 살았을 확률이 높은데 제갈량은 제갈근에게 보낸 편지에서 백제성(영안)에 주둔한 '진도가 영솔하는 군사는 선제(유비)의 군사들 중에서도 백이로써 촉나라의 정예부대'라고 쓰고 있다.
이들을 유비의 측근인 진도가 지휘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군주 직속 수행원의 개념으로서, 지도자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할 것을 맹세한 자들로 구성된 전사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외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조운의 강주병이나 위나라와 맞서 북부를 지키는 군사를 비롯한 각 지방의 병사들도 남아 있었다.
223년 4월, 유비는 백제성에서 붕어했으니 그때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유비는 후사를 승상 제갈량과 상서령 이엄에게 부탁하는데 그로 인해 이엄은 유비 사후 제갈량에 이어 정권의 2인자에 가까운 역할을 하게 된다.
사실상 유비에게 권한을 이양 받은 제갈량도 같은 탁고대신이지만 이엄이 큰 실수를 하여 북벌을 망치자 촉한 전 조정을 동원하기 전까지는 그가 대놓고 욕심을 부려도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였다.
유비는 죽기 전에 권한을 분배했고 아들과 제갈량, 이엄으로 권력을 분립시켰다. 군권은 이엄이 가졌는데 그는 중도호가 되었고 통내외군사로서 영안에 남아 주둔했다. 유비는 자신의 병사들을 조운에게 맡긴 상황에서, 죽으면서 이엄에게 전체 군권을 맡겼던 셈.
하지만 이엄에게 무조건 맡겼다보긴 뭐한데 이엄이 비록 중도호/통내외군사로 조운보다 위에 있으나, 영안은 유비의 패잔병과 조운이 가진 강주의 남은 병사들이 주둔했다. 이는 오정벌에 나선 군대 (유비가 거느린 촉의 총 병권) 중 온전한 후방 병력은 온전히 조운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유비 붕어 직후엔 조운이 중호군에 정남장군, 영창정후로 임명되면서 이엄과 조운의 역할이 분배된다. 제갈량이 북벌할 때 이엄은 조운이 한중으로 이동하자 강주로 옮기고 이엄이 있던 영안에는 호군 진도를 남겨서 이엄에게 통솔하도록 했다.
어쨌거나 제갈량의 남중 정벌과 기산 정벌 이후 제갈량은 조운을 데리고 다니며 군권은 제갈량에게 이동했고 이엄은 북벌을 앞두고 후방을 맡기기 위해 동쪽으로 영안, 북쪽으로는 성도, 한수(가맹), 부, 한중까지 이를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인 강주로 이동시켰을 정도로 제갈량의 신임을 받았다.
또 수송 역할을 담당하는데 이는 유비가 싸울 땐 제갈량이 담당하였고 이엄이 면직된 뒤엔 제갈량의 후계자인 동윤이 맡은 매우 중차대한 책무였다. 또한 이엄전을 보면 제갈량이 기산에 출정하자 승상부의 일까지 맡았다고 하는데 이는 내정의 총책임자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유비의 탁고대신이라는 입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볼 수 있는 예다.
일세를 풍미한 영웅답게 유언도 유명하다.
제갈량에게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승상의 재능이 조비의 열 배에 달하니 필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끝내 대사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오. 만약 내 아들이 보좌할 만하면 보좌하시고, 만일 그 아이가 그만한 재능이 있지 않다면 승상이 스스로 취하도록 하시오."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신이 감히 고굉지력
(股肱之力, 신하로서의 헌신)을 다하고 충정지절(忠貞之節,
충정의 절개)에 힘쓸 것이니, 죽기로 계속할 것입니다."
손성은 이에 대해서 유선과 제갈량이 다른뜻이 없어서 그렇지 탁고를 뭐 이렇게 남기느냐면서 합당하지 않은 말이라 비판했지만 호삼성은 예로부터 탁고를 맡긴 군주 중에 소열제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반면 같은 황제인 청의 강희제는 "유비의 말은 겉보기와 다른 이유가 있다"라고 평한 것으로 보아 유비의 해당 유언에는 다른 의미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죽기 전 유선에게
"착한 일을 작다고
아니하면 안되고, 악한 일은 작다고
하면 안된다.
"(勿以善小而不爲 勿以惡小而爲之)[103]라는
말을 남겼다.
삼국지 선주전에 분명히 있는 기록이고, 소학과 명심보감, 자치통감에 인용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문장이다. 이다음에 덧붙여서 말한
"오직 어질고 덕이 있어야 다른 사람을 따르게 할 수 있다. 네 아비는 덕이 부족하니 나를 본받지 말아라."
도 조조의 유언과 대비되어 나름대로 유명한 말이다.
유비의 무덤
유비의 혜릉은 지금의 청두 무후사 정전 서쪽에 있다. 223년 4월 영안궁(永安宮)에서 병사한 뒤, 5월에 청두로 옮기고 8월에 혜릉에 매장하였다. 유선은 자신의 생모이자 유비의 부인 감부인과 합장케 했고 후일 태황태후가 된 목황후도 사후 합장되었다.
원추형의 능묘는 작은 구렁처럼 보이고, 수목이 울창하고 잔디가 푸르러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짙다. 능묘는 가림벽과 난간문, 묘지로 향하는 길, 침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림벽은 길이 10m, 높이 5m이며, 한가운데 마름모꼴의 석각이 새겨져 있다.
위쪽에는 구슬을 희롱하는 한 쌍의 용이 새겨져 있고, 네 귀퉁이에는 박쥐가 새겨져 있다. 난간문은 너비 12m, 안길이 7m이며, 3칸의 한가운데 '한소열릉(漢昭烈陵)'이라고 적힌 현판이 높이 걸려 있다.[104] 하지만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유비보다 제갈량의 공을 높이 보아, 다들 무후사라고 불렀고 아무도 혜릉이라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102] 특히 조운의 경우 중호군에 올라 황실금군의 통솔권과 군대의 임명권을 쥐었는데 이를 보면 유비의 황실측근 세력은 이릉대전 후에도 제갈량 정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03] 하작은 '주역 계사하전(系辭下傳) 에서 이르길 "선이 쌓이지 않으면 명성을 올리기엔 부족하고, 악이 쌓이지 않으면 죽기엔 부족하다. 소인은 작은 선은 무익하다며 행하지 않고, 작은 악은 해가 되지 않는다며 물리치지 않기에, 악이 쌓여 바로잡을 수 없고, 죄가 커져 벗어날 수 없다"인데, 소열제가 이를 경계로 삼았으니, 즉 독서를 매우 즐기지 않은 게 젊은 시절이었지만, 그 후에는 즉 책의 중요함을 알게 된 것이다.' 라고 평가하였다.
[104] 한소열의 혜릉의 위치에 대해선 명리학에 능하고 풍수를 볼 줄 알았던 명나라의 공신 유기에 대한 전설이 있는데, 이 부분은 해당 문서 참고.
[출처] 유비의 생애(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