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돌석(申乭石, 1878년 11월 3일 ~ 1908년 음력 11월 18일)은 구한말의 의병장이다.
초기 의병 운동이 주로 무인이 아닌 문인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평민 출신이었던 그는 최초의 평민 의병장으로 유명하다.
경상북도 영덕의 평범한 농가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신태호(申泰浩)이며, 신태을(申泰乙)이라고도 한다.
[1]
신돌석은 1878년 11월 3일
경북 영해군 남면 복평리(현재 영덕군 축산면 부곡리)에서 신석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돌석이 태어난 영해는 이필제 난의 중심지였다.
1870년부터 약 1년동안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이 난은
삼남민란 이후 최대의 반봉건 농민운동이었다. 따라서 이곳은 농민들의 반봉건 의식이
유독히 드높은 고장이었기 때문에 신돌석은 태어나면서부터
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신돌석의 가문은 고려시대에는 개국공신인 신숭겸의 후예로서 입신출세하였지만,
조선시대에는 중인신분으로 하락하여 대대로 영해부의 아전 노릇을 하는 형편이었다.
더욱이 신돌석 대에 와서는 평민신분으로까지 전락하였다고 하니,
반봉건 의식이 남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하여 신돌석이 태어난 시기는 개항 직후 외세의 침탈이 고조되었던 시기였고,
또 성장하던 시기는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일제가 혈안이 되어 가던 시기였으므로
반봉건의식과 함께 반일 민족의식을 가지게 된 것 같다.
[2] 설화적 요소가 있는 신돌석 장군의 이야기
신돌석은 평범한 농가에서 태어난 농사꾼이었지만 고래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천서(天書)를 얻게 되어 비범한 장수로 비약적인 변모를 하게 된다.
그는 힘이 세어서 놋화로를 우그러뜨리고 바위를 공깃돌처럼 받았다 한다.
뜀뛰기를 잘하여 큰 나무나 고을의 객사를 뛰어넘기도 하였으므로
날아다닌다는 말도 들었다고 한다. 평소에도 못마땅한 일이 있으면 그대로 두지 않아,
부랑자나 도둑을 굴복시키고, 미친 개를 잡아 던지고, 호랑이도 퇴치하였다 한다.
이러한 삽화는 모두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장수의 모습인데,
그것이 신돌석에게서 다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왜군과의 싸움을 두고서도 다채로운 이야기가 있다.
신돌석은 형세가 불리하여 죽을 고비가 몇 번이나 있었어도 번개같이 탈출하였다 하고,
어느 날은 손에 탄환을 맞았어도 물러서지 않고 적을 넘어뜨렸다고 하였다.
피를 흘리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총을 쏘아도 죽지 않는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왜군은 신돌석을 잡아오면 상을 주겠다는 술책을 써서,
결국 신돌석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하며,
그 이야기가 특히 자세하게 전해지고 있다.
범인은 장군의 이종사촌이라고도 하고 외사촌이라고도 하는 친척 집에 들러
잠시 몸을 쉬려는데, 그 사람이 나쁜 마음을 품고 독주를 먹여 잠들게 하고서
신돌석의 목을 쳐서 왜군에게 가져갔다고 한다.
그러나 왜군은 신돌석을 산 채로 잡아야 상을 준다 하였고,
배신자는 배신의 대가도 받지 못하였다 한다.
[3] 의병을 일으키다.
을미사변으로 전국적으로 의병 운동이 일어날 때
19세의 나이에 영덕에서 처음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경상북도 동해안 지방을 차례로 점령하는 큰 전과를 올렸고,
이에 경북 출신으로 경기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김하락 부대에
안동의 유시연과 함께 합세하였다.
그러나 김하락의 의병 연합 부대가 영덕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하여
김하락이 중상을 입고 투신 자살하면서 그의 의병대도 해산되었다.
[항일 의병 전쟁의 전개 ]
1) 시작 : 을미의병(1895)→ 을미사변, 단발령→ 위정 척사사상을 가진 유생들이 주도
(2) 의병 항전의 확대 : 을사 조약 체결→ 민종식, 최익현, 신돌석(평민 출신)
(3) 의병 전쟁의 전개 : 정미의병(1907), 종 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4) 일본군의 남한 대토벌 작전(1909) - 도와 연해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항전
신돌석은 1905년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 이후 동생 신우경과 함께 재차 의병을 일으켰다.
울진군에서 일본 선박을 여러척 격침시키고 강원도 동해안 일대, 경상북도 내륙 지방,
원주 등 강원 내륙 지방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이때부터 그는 '태백산 호랑이'로 불릴만큼
신출귀몰한 전공으로 이름을 날렸고 여러 구전 전설들도 만들어졌다.
이강년의 의병대와 순흥(영주시)을 공격하는 연합 작전을 시도하는 등
계속되는 전과를 올리면서 경북 일대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부상하여,
이인영의 연합 의병 13도 창의군이 결성되었을 때도 영남 지방을 담당하는
교남창의대장에 선임되는 등 양반 출신의 유학자 의병대장들도
그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할 정도의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4] 즉음
1908년부터는 유시연의 부대와 연계하면서 주로 유격전 위주로 의병 항쟁을 펼치다가,
그해 겨울 영덕의 눌곡(訥谷)에서 암살되었다. 그를 살해한 사람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은 살해범이 김상렬(金相列) 삼형제라는 것이다.
[1] 신돌석에게 걸려 있던 거액의 현상금을 노린 김상렬이 형제인
김상태(金相泰), 김상호(金相浩)와 함께 그에게 술을 먹인 뒤 도끼로 살해하였으며,
이들은 신돌석의 부하였으며 외사촌 또는 이종사촌들로 가까운 친척이었다는 설이다.
살해범의 이름이 김도윤, 김도룡(또는 김도용) 형제라는 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