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빙점] 2. 창(窓)
요코가 깨어난 지 일주일쯤 지난 토요일 오후였다.
요코의 방문 앞에 서 있던 게이조와 나쓰에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요코의 방에 들어가기가 몹시 망설여졌다. 지금 두 사람은 요코에게 친부모가 누구라는 것을 알려줄 참이었다. 그것은 루리코를 죽인 범인이 자기 아버지라고 믿고 있는 요코에게는 분명 기쁜 소식일 것이다. 그래도 웬일인지 두 사람은 마음이 무거웠다.
요코는 미음으로 시작하여 묽은 죽, 된 죽으로 서서히 식사를 조절하여 오늘부터는 질게 지은 밥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으며, 엊그제부터는 혼자 화장실에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대로 세원리 지나면 점점 원기는 횝족하겠지만 그것만으로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요코의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 아무래도 부모에 대해 알려 줘야 할 것 같았다.
게이조는 나쓰에에게 눈짓을 했다. 먼저 들어가라는 신호였다. 나쓰에는 고개를 옆으로 저으면서 한발자국 뒤로 물어섰다.
‘요코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려고 하는데도 어째서 이렇게 마음이 무거울까?’
하고 게이조는 생각해 보았다. 그 이유는 요코에게 사죄해야 할 일을 충분히 사죄할 수 있을지 어떨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마하려는 사실을 감수성이 예민한 요코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짐작하기 어려운 불안 때문이기도 했다.
게이조는 가벼운 헛기침을 하고 나서 미닫이를 살며시 열었다. 요코의 머리맡에 앉아서 주간지를 보고 있던 중년의 간호사가 당황하여 책을 내려놓았다. 2.3일 전부터 교대한 간호사였다.
“좀 어때요, 경과는?”
게이조는 특별히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이렇게 묻고 나서 났에와 함께 간호사 곁에 앉았다. 요코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열이 약간 있어요.”
간호사가 체온 기록표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음, 37도 5분이라. 열이 조금 있군. 두렵니(피곤하냐, 몸이 괴롭냐는 뜻), 요코?”
게이조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나쓰에가 귓속말로 뭐라고 하자 간호사는 방에서 나갔다. 게이조는 손을 뻗어 요코의 손목을 잡았다. 그렇게 큰일을 겪었는데도 요코의 손은 하루가 다르게 포동포동해지고 있었다. 피부에도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 몸처럼 마음도 회복돼 주었으면 좋으련만 하고 게이조는 맥박을 짚으면서 4칸짜리 다다미방을 휘 둘러보았다.
커피 색깔의 옷장과 장식장이 놓여 있고, 나무로 된 책장이 책상 옆에 묵직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책장에는 세계 미술 전집이 가지런히 꽂혀 있고, 장식장 위에는 커다란 가가미지시 인형이 상자 속에 든 채로 장식되어 있었다.
“맥박은 정상이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마도 행복한 여고생의 방으로 보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게이조는 요코의 손을 이불 속에 살며시 넣어주었다.
식사에서 대소변 시중에 이르기까지 나쓰에는 마치 하녀처럼 요코를 돌보았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애처로울 정도였다. 나쓰에는 언제나 요코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이 눈을 내리뜨고 있었다. 나쓰에가 보기에는 요코 쪽에서도 자신을 외면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녀는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지금도 나쓰에는 게이조의 그늘에 숨기라도 하듯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요코, 저기.......”
게이조는 말을 꺼내려다가 망설였다. 요코는 조용히 게이조를 바라보았다. 지금 요코의 눈에는 지난날의 그 반짝이던 광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깊은 호수와도 같은, 우수에 가득 찬 조용한 눈빛이었다.
게이조는 자신도 모르게 나쓰에를 돌아보며 말했다.
“요코, 아버지와 어머니를 용서해 주겠니?”
한순간 요코는 미심쩍은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잠시 후 조용히 대답했다.
“아녜요! 나쁜 건 저예요. 걱정을 끼쳐 드려서.”
“아냐, 나쁜 건 나다. 요코, 아버진 말이야, 옛날에 어머니를 미워한 적이 있었어.....부끄러운 얘기지만 어떻게 해서든 어머니를 불행하게 만들겠다며 저주하는 마음을 품은 적이 있었단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요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루리코를 죽인 범인의 딸을 네 어머니에게 키우게 하려고 다카기 아저씨에게 부탁했던 거야. 아버지도 어머니도 널 그 범인의 딸인 줄로만 알고 데려왔었단다.”
‘딸린 줄로만 알고?’
요코의 표정이 갑자기 달라졌다.
“하지만 요코의 친부모님은 살인범이 아니었어. 바로 이 분들이란다.”
요코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게이조가 넘겨주는 사진에 눈을 주었다. 게이조와 나쓰에는 그런 요코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요코는 눈을 크게 떴다.
“봐라, 요코, 여기 신문에 나와 있는 사이시라는 남자와는 전혀 다르지?”
게이조는 신문에서 오려 낸 사진을 호주머니에서 꺼내 요코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요코에게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사진이었다. 나쓰에가 전에 이 사진이 실린 신문과 게이조의 낡은 일기장을 요코에게 들이대며 범인의 자식이라며 매도했던 것이다.
요코는 한참 동안 눈도 깜박이지 않고 두 사진을 비교해 보았다.
“요코, 미안하다. 너하고 꼭 닮았지? 이분이 어머니였는데......”
나쓰에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요코로서는 쉽게 믿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두분은 지금 날 위로하려고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날 많이 닮은 이 여성이 사이시와의 사이에서 날 낳았는지도 몰라.’
요코는 이렇게 생각했다.
요코의 표정에는 게이조와 나쓰에가 기대했던 기븜이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무리도 아니었다.
반쯤 광란 상태에 있던 나쓰에가 게이조의 낡은 일기장과 사이시의 사진이 실린 신문을 들이대며 범인의 자식이라고 소피치던 그 저주스런 말들이 요코의 가슴속에 깊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요코에게는 이미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느닷없이 나카가와 미쓰오와 미쓰이 게이코가 자신의 친부모라니, 요코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요코는 자신과 꼭 닮은 사진 속의 여성이 어머니라는 것은 믿을 수 있어도 그녀와 나란히 서 있는 젊은 남성이 아버지라고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전에 요코는 기타하라 구니오가 그의 여동생과 팔ㄹ짱을 끼고 포를러 가로수 아래를 걸어가고 있는 사진을 보고 애인 사이로 오해한 적이 있었다. 지금 사진에서 보고 있는 두 남녀도 어쩌면 남매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는 어디까지나 사이시 쓰치오일 것 같았다.
요코는 한참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이윽고 말없이 그것을 게이조에게 돌려주었다.
“요코, 알겠니? 이 사람들이 네 친부모님이야.”
아무런 감동도 떠오르지 않는 요코의 표정을 보며 게이조는 불안한 듯이 말했다. 사이시의 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요코가 크게 기뻐하리라고 상상하고 있었던 만큼 게이조는 일말의 초조감을 느꼈다.
게이조는 나쓰에를 돌아보고 난 뒤 시선을 다시 요코에게 돌렸다. 빨간색과 크림색이 섞인 이불을 가슴께까지 덮은 요코는 햇빛이 비치는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처마 밑에 1미터 정도나 되는 고드름이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요코, 화가 난 모양이구나. 살인범의 딸도 아닌데 그런 억울한 누명을 써서....”
자살하려고까지 한 요코에게 이 소식은 오히려 화만 나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이조는 힘없이 팔짱을 끼었다.
“화가 난 게 아니에요.”
요코는 여전히 창문 쪽으로 시선을 둔 채 조용히 말했다.
“근데요.......제가 의심이 많은 걸까요? 이 두 분이 제 부모라는 증거가 없잖아요. 증거가 없는 것은 이제 저로서는 믿을 수 없어요.”
요코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가슴에 스며드는 듯한 쓸쓸한 미소였다.
“하긴 그럴 테지. 하지만 이 여자분이 요코의 어머니라는 건 믿을 수 있겠지?”
“닮았기 때문에요? 아버지......화내지 마세요. 제가 순진하지 못한지도 모르겠지만, 닮았다는 것만으로 믿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어머니보다 이모를 닮거나 사촌 언니를 닮는 경우도 있잖아요?”
“하지만 요코, 이분들은 분명 네 아버지와 어머니야.”
나쓰에의 말에 요코의 눈이 웃는 듯이 보였다.
게이조는 요코가 믿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처음 데려올 때 요코가 사이시의 자식이라고 한 다카기의 말을 게이조는 철석같이 믿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이 사람들이 요코의 친부모라고 한 다카기의 말을 믿었을 뿐이다. 요코가 사이시의 자식이 아닌 것처럼 이번에도 다른 사람의 자식일지도 모른다.
게이조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의심하자면 끝이 없었다. 도오루조차도 자기 자식이라는 확증이 없다. 세상의 모든 남자들은 자기 자식이라는 확증을 갖지 못한 채 아내가 낳은 아이를 자기 자식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식들도 의심하지 않고 부모를 자기 부모라고 믿으며 살고 있다. 생각해보면 인간 관계라는 것이 상당히 모호한 바탕 위에 성립되고 있다는 사실에 게이조는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 이분을 만나 보셨어요?”
요코는 그 흰 목을 귀엽게 구부리고 게이조를 바라보았다.
“아니, 만나 보지는 못했다.”
“이 두 분은 부부 사이인가요?”
게이조는 순간 대답할 말이 막혔으나,
“이 남자는 상당한 수재였지......아마 이학부였을걸. 아버지가 다니던 홋카이도 대학 몇 해 후배야.”
하고 질문과는 다른 대답을 했다.
“부부 사이냐구요?”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요코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아니...., 그게 말이다. 이 미쓰이 게이코라는 요코의 어머니에게는......전쟁에 나간 남편이 있었어. 그녀는 남편의 출정 중에 삿포로의 친정에 돌아가 있었지. 그 친정집에 아는 사람의 아들이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이 나카가와 미쓰오 씨였단다.”
눈 한번 깜박거리지 않고 게이조의 얼굴을 보고 있던 요코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럼 이 사람들은 전쟁에 나간 사람을 배신한 거군요, 아버지?”
“아니, 배신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게이조는 변명할 말을 찾았다.
“저......, 그건 말이지. 남자와 여자는 사랑을 자식을 낳는 것이 진정한 인간적인 모습이야.”
“...........”
“요코는 멋진 사랑 속에 태어난 아이야.”
게이조는 겨드랑 밑에 땀이 배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 괜찮아요. 이젠 됐어요. 요코가 배신자들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요코는 조용히 얼굴을 돌리고는 창 밖에 매달린 굵은 고드름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