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2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3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4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 보냈다. 5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6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8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9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10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죄의 용서를 받고 이제는 자립 하여라.
논어의 자한편에 공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여공학, 미가여적도; 가여적도, 미가여립; 가여립, 미가여권’(可與共學, 未可與適道; 可與適道, 未可與立; 可與立, 未可與權)입니다.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함께 정도(正道)로 나아갈 수는 없으며; 함께 정도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함께 자립할 수는 없으며; 함께 자립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함께 일의 경중(輕重)을 헤아리어 행동할 수는 없다.>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한문 공부를 하면서도 그 뜻을 새기는데 가장 어려운 말씀 중 하나였습니다.
학자들은 이 말의 뜻을 다시 이렇게 해설하고 있습니다. ‘함께 공부하는 것(共學) 보다는, 정도로 나아가는 것(正道), 자립하는 것(立), 일의 경중을 헤아리어 행동하는 것(權)은 점점 어려워지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일의 경중을 헤아리어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은 중용(中庸)의 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논어의 이 말씀이 오늘 복음과 어찌 그렇게도 일치하는지 신기할 뿐입니다.
1.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려고 예수님께서 얘기하시는 집에 모여들었습니다. 문안으로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들은 공부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데 정신이 팔려 밖에서 중풍을 앓고 있는 사람을 그 집안으로 들어가려는 수선거림과 ‘길 좀 열어 주십시오.’하는 호소 따위는 들리지도 않습니다. 들것에 중풍환자를 싣고 예수님께 가려는 사람들도 조심스러워서 감히 큰 소리도 내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어 몇 번 소리 질렀지만 사람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습니다. 함께 공부하기는 쉽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학교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교회에서 함께 공부하고 삽니다.
2. 같이 공부하여도 제자들 모두 정도(正道)로 갈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도 생기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고, 속을 썩이는 제자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에서처럼 들것을 들고 정문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지붕에 올라가 먼지를 피워가면서 지붕을 벗겨내는 것도 정도는 아닙니다. 길을 비켜주고, 예수님께 주의를 환기시켜 드릴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제나 정도(正道)에 대하여 말씀하셨지만 지금 정도로 행동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무리 지붕이 벗겨내기 쉽게 만들어졌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기 쉽다고 하더라도 중풍 병자를 지붕 위로 끌고 올라가기는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중풍 병자를 도우려는 지인들의 노력은 눈물겹지만 함께 공부하면서 정도를 밟고 있는 사람은 정말 드믑니다.
3. 중풍병자는 자립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혼자 걷지도 못하고, 스스로 행동하는데 많은 제약을 받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많이 배운 사람들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자립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꼭 중풍 병자와 같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자립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의지와 정신과 육체적으로 자립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혼자서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 산다고 자립하였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 같이 공부하고, 정도를 걷는다고 하더라도 자립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라고 은총으로 병의 치유를 받고서야 비로소 자립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립(自立)하라고 말씀하십니다.
4. 일의 경중은 권(權)으로 표현합니다. 권(權)은 ‘저울질하는 것’입니다.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시는 것보다 죄를 용서하는 것이 먼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죄를 용서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경중(輕重)으로 당신의 권한을 설명하십니다. 당신은 세상의 모든 죄를 저울질 하실 수 있는 권한을 받았으며, 또 그 권한으로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저울질해서 올바르게 판단해서 하느님의 뜻과 오차 없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느님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지금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일의 경중을 가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회의원들도 그렇고, 정부의 인사들도 그렇습니다. 일의 경중을 가린다는 것은 주님의 은총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 언제나 제 위주의 사고방식으로 제멋대로 살았던 삶을 반성합니다. 제가 당신의 말씀과 가르치심을 받았으나 정도를 걷지 못하고, 자립하지 못하고, 경중을 가리지 못하였사오나 당신의 자비로 용서하여 주소서. 용기를 주시어 자립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경중을 가리시는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