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관, 유식은 대승이 아니다
중관, 유식이 대승이 아니라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다.
용수나 무착, 세친은 대승 경전을 몰랐고, 중생구제가 먼저, 함께 성불이라는 보살사상의 신봉자도 아니다. 그들은 남방가사를 걸치고 초기경전을 연구하고 탁발하며 살아간 비구들이다.
대승불교가 중관, 유식 철학을 자기들의 base로 삼았기 때문에 대승으로 분류되지만, 정작, 중관 유식의 저자들은 대승불교의 경전이나 보살사상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실천한 사람들이 아니고, 초기경전을 연구하고 해석한 사람들이다.
거기에 대한 연구 논문이 있어서 소개하겠다.
-중관-
용수(나가르주나)의 중관은 대승경전의 문맥을 근거로 삼은 것이 아니고, 초기경전(니까야)에 대한 충실한 주석이다.
용수가 중관의 근거로 삼았던 경전은 상윳따니까야 깟짜나곳따 경(S12.15)이다.
“깟짜야나여, 세상(형성된 세상,saṅkhāra-loka)은 두 가지에 의지해 있나니, 그것은 있다는 견해(有, 존재함) 와 없다는 견해(無, 존재하지 않음)이다.
세상의 일어남(集)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해 없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소멸(滅)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해 있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는 견해와 없다는 견해는 양극단이다. 여래는 양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중간(中)에서 법을 설한다.
무명을 조건으로 행이 일어나고, 행을 조건으로 식이 일어나고….노사우비고뇌가 일어난다.
무명이 소멸하면 행이 소멸하고, 행이 소멸하면 식이 소멸하고… 노사우비고뇌가 소멸한다.(S12.15)”
부파불교에서 ‘무아인데 뭐가 윤회하느냐’를 주제로 많은 학파가 생겨났는데, 용수는 그 둘을 합침으로 간단하게 해결했다.
“윤회는 있지만 윤회하는 자는 없다. 단지 연기(조건따라 일어나고 사라짐)라는 과정만 있을 뿐이다. 연기의 주체는 공(空)이다.”
거기서 공=연기=중도가 탄생한 것이다.
대승불교도들이 중관 철학을 가져다 쓴 이유는 대승의 보살사상은 끝없는 윤회를 계속하면서 중생구제를 해야 하는데, 윤회를 계속하는 근거 철학이 필요했던 것이다.
-유식-
무착(아상가)와 세친(바수반두)의 유식은 초기불교의 식과 명색의 상호 의존 관계, 수행 중에 일어나는 인지 과정을 정밀하게 분석한 불교 심리학이다.
유식은 설일체유부나 경량부의 아비달마 철학과의 논쟁에서 자연스럽게 발달한 인식론적 주장이다.
-논문-
데이비드 깔루파하나(스리랑카 출신 불교학자, 하와이 대학 교수)
Nāgārjuna: The Philosophy of the Middle Way (SUNY Press)
용수의 중관 철학은 초기경전인 깟짜야나곳따 경에 기반한 연기법의 재확립이며, 대승의 종파적 독점물로 볼 수 없다.
A.K. Warder(영국 출신 불교학자. 토론토 대학 교수)
Indian Buddhism
용수나 세친 같은 철학자들의 핵심 논서와 대승 신앙 운동의 스펙트럼이 일치하지 않는다.
Dan Lusthaus(미국 출신 신유식학의 권위자, UCLA등 미국 여러 대학에서 교수 또는 연구원으로 재직)
Buddhist Phenomenology: A Philosophical Investigation of Yogācāra Buddhism
유식은 초기불교의 현상학적 인식론의 연장선상이다.
중관 철학과 유식 학자들은 비구들이며, 대승불교도들은 탑신앙을 하던 재가자들이다.
대승불교 경전의 주인공들이 모두 재가자라는 사실이 그 근거이다.
대승경전은 작자미상이지만, 중관 유식 학자들은 자신의 논문에 떳떳하게 자신의 이름을 명시했다.
중관과 유식 학자들은 대승 경전이나 보살 사상의 신봉자들이 아니다. 그들의 저서에 대승경전이나 보살 사상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중관과 유식은 부파불교의 한 학파라고 보아야지 대승이라고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