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국토의 중심 경기도 경기도는 분명 한반도의 한복판이다. 적어도 통일신라 이후로는 그렇다. 국토의 중심에 위치했다는 지정학적인 측면이 주된 까닭이다. 후삼국시대 이후 궁예나 양길 등 경기도를 중심으로 숱한 인물들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이런 역사를 떠안고 지정학적인 측면과 함께 인문학적인 측면에서도 좁은 강토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인물들을 배출시켜 온 고장 역시 경기도다. 특히 조선시대로 들어서면서부터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필두로 당시의 통치 이데올로기인 유학을 연구하고 발전·계승시킨 기호학파(畿湖學派)들의 산실로 우뚝 서게 된다. 조광조를 통해 실패한 개혁을 경험해야 했지만, 사대부로 대변되는 역시 많은 학자들이 정치의 중심에서 이 나라를 좌지우지해왔다. 조선 중기까지 이같은 역사를 간직한 경기도는 근세로 들어 오면서 말 그대로 질곡의 역사의 현장, 그 자체였다. 조선 후기 개혁 군주였던 정조대왕이 서울을 옮기기 위해 화성 천도를 기획하고 화성을 축조하면서, 기전(畿甸)지방으로도 불리는 경기도는 이미 숱한 격변의 현장을 묵묵히 지켜 봐야만 했다. 이런 가운데 연암(蓮庵) 박지원(朴趾源) 등 중국을 자주 왕래했던 관료들을 중심으로 17세기 후반부터 흔히 ‘북학파’로 통칭된 실용학문의 흐름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으로 대표되는 실학사상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실학사상은 이 강산에 ‘근대화’란 개념의 새싹을 틔웠다. 17~18세기 이 강토를 풍미했던 실학사상은 갈수록 쇠약해지고 있던 정권에 나름대로 가능성을 제시했고 명분과 원칙이란 굴레에 갇혀 있던, 고루했던 유학이란 통치 이데올로기에도 실용주의가 접목돼 보다 진취적인 방향으로의 발전이 이어졌다. 물론 이같은 흐름의 중심에는 경기도 출신 사대부와 관료, 학자 등이 있었다.
◇ 근·현대 격변의 현장의 경기인 조선 후기로 접어 들면서 일본을 위시한 서구 열강들의 한반도 침략 기도는 갈수록 노골화됐고 중·일전쟁과 노·일전쟁 등을 거치면서 마침내 일본은 우리 국토를 유린하기에 이른다. 이런 가운데 경기도 출신 유학자 최익현 등 이 땅의 지식인들은 의병을 규합, 일제 침략에 맞서 길고도 긴 저항에 들어 간다. 이같은 저항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서재필과 이승만을 비롯한 일련의 지식인들은 서구 문물 도입과 개화 등을 통한 부국강병으로 맞섰고 안중근과 김좌진 등은 북간도와 연해주 등으로 진출, 무력항쟁을 기도했다. 일본이 20세기 초반인 1910년 조선을 합병하자 이같은 움직임은 가시화됐고 미침내 1919년 3·1운동을 통해 전 세계에 일본의 만행을 알리기에 이른다. 이런 가운데 경기도를 위시한 이 땅의 젊은이들은 중국 상하이(上海) 등지에 거점을 마련하고 본격적인 독립 쟁취에 나선다. 40여년동안 이어진 독립운동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여러 갈래 정파로 나뉘어져 진행됐다. 20대 초반 독립을 위해 조국을 떠났던 이들은 광복을 맞기까지 청춘을 바쳐야만 했다. 물론 상해임시정부로 대표되는 독립운동단체에는 백범(白凡) 김구(金九) 등이 중심이었지만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와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등 경기도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활동도 두드러졌다. 이들은 해방후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져 펼쳐진 정국에서도 특정 이념이나 정파에 치우치지 않고 남과 북이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끝내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이들의 간절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조국은 두동강났고 이어 민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이 땅을 피로 물들인 뒤 반세기동안 분단이 고착화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 이들에 대한 매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 종전 이후 남녘은 자유당의 독재에 맞선 이 땅에서의 최초의 시민혁명인 4·19를 통해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엿보였으나 5·16 쿠데타를 거치면서 군사독재가 시작됐다. 20여년에 걸친 암울한 시기는 경제발전이란 긍정적인 결실도 거두긴 했으나 숱한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이후 집권한 또 다른 군사정권은 결국 광주민주화운동을 불렀고 이후 6·10 민중항쟁이란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 민주화를 맞게된다.쉴 줄 모르고 달려 온 역사는 어느덧 21세기에 접어 들었다. 근·현대를 아우르는 격동의 현장에는 숱한 경기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제대로 매겨지지 않고 있다. 아직도 우리의 역사는 중앙 위주로 쓰여지고 있기 때문일까. 그래서 이들에 대한 매김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 사진설명> 아래에서 위로 제2차 의병투쟁 당시 의병들의 모습, 8·15 해방, 우익진영의 신탁통치 반대 데모, 6·25 한국전쟁(서울시가로 들어오는 북한군), 4·19의거
격동기를 헤쳐간 京畿人/몽양(夢陽) 여운형 |
완전한 독립 꿈꾸던 ‘민족주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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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자기의 주장만을 고집하여 독선배타적으로 임한다면 민족통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며, 이 기회를 놓치면 우리 역사 위에 천추의 한을 남기는 일이 됩니다”
광복 이후 혼미정국에서 한평생을 조국의 완전한 독립에 바쳤던 숱한 애국지사들이 좌·우익 갈등 속에서 쓰러져 갔다. 카이젤 수염이 꽤 잘 어울렸던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1886~1947)도 그랬다. 좌·우익 갈등을 아울러 완전한 독립을 시도했던, 순결했던 그의 민족혼은 그러나 좌파로 굴절돼 반세기를 흘러야 했다. 어쩌면 해방정국에서 그의 행적은 이념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아니었을까. 그의 생가터를 찾으러 나선 날은 다행스럽게도 햇살이 제법 따뜻했다.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양평에서 서울로 쭉 뻗은 6번국도를 달리다 중앙선 신원역 못미쳐 철교 밑으로 5분 남짓 오르자 야트막한 언덕이 나왔다. 가로 70㎝ 세로 30㎝ 남짓한 주춧돌이 이곳에 300여평 규모의 반듯한 한옥 건물이 있었음을 희미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의 생가는 한국전쟁 와중에 폭격으로 파괴됐다) 이곳에 서니 남한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수백년 된 향나무와 은사시나무 등이 촘촘하게 들어선 작은 숲도 앙증맞았다. 100년 전인 20세기 초반에도 한 소년이 이 언덕에 서 부국강병의 이상을 품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 봤을 터이다.
그는 격동의 20세기를 기독교운동으로 문을 열었다.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는 흔히 묘한 골짜기란 뜻의 묘곡(妙谷)리로 불린다. 기묘한 지명만큼이나 산세나 지세도 수상스럽다. 부용산과 두물머리(행정지명 양수리)가 지척이고 중부지방의 준령인 용문산이 남동쪽에 우뚝 서있는 형세다. 이때문일까. 이곳에는 일찍부터 서학인 기독교가 들어 왔고 몽양도 사대부 가문의 장손이면서도 어릴 때부터 기독교에 입문했다. 22살 나던 해, 그는 당시로선 획기적인 일을 벌인다. 부친이 별세하자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집안의 하인들에게 토지를 모두 나눠 준 것이다. 반세기동안 이어졌던 치열했던 그의 독립운동은 1947년 7월19일 두발의 총소리와 함께 종지부를 찍는다.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였다. 조국의 완전한 독립도 지켜 보지 못한 채 말이다. 아직도 대놓고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에게 덧씌워진 ‘좌파’라는 멍에가 아직도 말끔하게 씻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전에도 몽양은 늘 이같은 논란의 한복판에 있었다. 물론 독립운동 초기 공산당과 협조하기도 했고 공산당으로부터 이용도 당했다. 처음 고려공산당에 참가한 건 1921년이었다. 당시 레닌은 그에게 “조선은 이전에는 문화가 발달했지만 현재는 민도(民度)가 낮기 때문에 당장 공산주의를 실행하는 건 잘못이고 우선 민족주의를 실행하는 편이 낫다”고 강조했다. 레닌은 임정에 60만루블 규모 독립운동자금 지원을 결정했으나 이동휘가 레닌으로부터 받기로 한 자금을 둘러싸고 잡음이 발생하자, 몽양은 “원래 임정에게 갈 돈인데 이동휘 중심의 상해파 공산당에만 쓰이는 건 옳지 않다”며 임정을 두둔한다. 5년 후에는 국민당에도 입당한다. 독립을 위해선 중국과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선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 모든 형태의 독립운동을 펼쳤지만 기독교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유물론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폭력혁명에도 분명 반대했다. 광복 후 이데올로기 갈등 이전에 먼저 겨레가 한데 뭉치는 게 중요하다는 신념으로 좌·우합작에 매진했다. 그가 암살되지 않았다면 이 나라가 좌익과 우익으로 갈려 두동강나진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역시 위험한 가정이긴 하지만…. 독립에 대한 열기가 잠시 주춤할 때는 신문사 통신원, 상해 동팡(東方)대학 영어강사, 푸단(復旦)대학 명예교수 등으로도 활동했다.몽양은 지난해야 겨우 독립유공자로 서훈이 추서됐다. 하지만 그가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생가터에는 아직도 잡초만 무성할뿐이다. 생가터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한강에는 하루종일 물안개가 잔뜩 끼어 있다. 이같은 안타까움에 시위라도 하듯….
■연보(年譜) 1886년 5월25일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에서 출생 1907년 기독교학교인 광동학교 설립 1908년 부친 탈상 후 집안 노비들 해방 1917년 중국 南京 金陵대 영문과 수료 1918년 국내 잠입, 이승훈에게 국제정세 전파 1919년 2·8독립선언과 3·1운동 관여 1919년 일본국회에서 독립당위성 강조 1921년 상해파 고려공산당 참가 1925년 손문 권유로 중국국민당 입당 1926년 국민당군 무한 점령 祝辭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 취임 1934년 조선체육회장 추대 1935년 충무공 이순신 묘소 재건 1936년 일장기말소 조선중앙일보 폐간 1937년 일본 패망을 언명 1940년 창씨개명에 반대 1942년 일경에 체포돼 투옥 1943년 집행유예로 출옥 1945년 조선인민당 결성 1946년 임시정부수립문제 논의 위해 평양방문 1947년 근로인민당 창당 위원장 추대 1947년 7월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저격당해 서거
◇ 몽양에 대한 재조명 4題 ● 잘못 알려져 있는 일장기 말소사건 흔히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은 동아일보의 주도로 이뤄진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은 몽양이 1933년부터 사장으로 재직하던 조선중앙일보가 먼저다. 1936년 8월9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쾌거를 거뒀다. 그는 손 선수의 우승사진이 실린 주간지 ‘아사히스포츠’를 입수하자 일장기를 지운 채 8월13일자로 그 사진을 내보냈다.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는 12일이 지난 8월25일이었다. 일장기 말소사건 이후 그는 “맨날 코오군 반자이(皇軍萬歲) 기사나 쓸 바에야 차제에 폐간하는 것이 낫다”며 자진 폐간하고 사장 자리도 내놓는다.● ‘몽양국회’ 일본 국회에서의 연설 일본은 3·1운동이 일어나자 몽양을 일본으로 초청, 회유하려고 했다. 1919년이었다. 몽양은 일본국회에서 “조선은 건국 이래 자주로 다스렸고 자주로 발전했다. 동양 문화에 공헌이 많은 것도 자주성이 풍부한 까닭이다. 조선은 세계 문화에 공헌해 자자손손 행복을 영속하기 위해 독립을 주장한다”며 조선의 독립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속수 무책이었다. 일본의 식민지 관계 장관이 몽양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일본 정부는 몽양을 자질을 높게 평가, “중국과 일본의 조화를 위해 일할 생각이 없는가”라고 묻기도 했다. 일본인들은 이 사건을 ‘몽양국회’라고 기록하고 있다. ● 충무공 이순신 묘소 단장 몽양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출한 충무공 이순신을 닮고 싶었고, 그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도 충무공이었다. 모든 생애동안 충무공의 애국혼을 실천했다. 훼손된 충무공 묘소를 처음 단장한 이가 바로 몽양이었다. 그것도 일제의 서슬이 시퍼렀던 1935년이었으니 그의 조국애는 당당하기만 하다. 같은해 봄 조선중앙일보 사장 재직시 황폐한 묘소의 토역작업을 말끔하게 마치고 나무를 심었고 서예가인 이각경의 글씨로 송덕비를 세웠다. 충무공의 나라사랑의 정신과 멸사봉공 위업을 기리고 후손들을 위로했다.● 장철균 양평 여운형선생 기념사업회장 인터뷰 “‘왜 그런 일을 하느냐’며 등을 돌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장철균 양평 몽양 여운형선생 기념사업회장(72)은 지난 2000년부터 추진한 몽양에 대한 건국훈장 추서 서명운동의 어려움을 이처럼 털어 놨다. 몽양이 걸어왔던 역정만큼이나 평탄하지 않았던 일정이었다. 그는 몽양이 좌익으로만 인식되고 있는 현실을 통감하고 서명운동에 뛰어 들었다. 장 회장은 “이기형옹(89·원로시인)과 몽양 선생의 7촌 조카이자 생가 인근에서 살고 있는 여학구씨(72), 김유택 양평문화원장(76), 김강윤 양평군 문화정책연구관(48) 등의 도움이 컸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도 건립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
첫댓글 회사가 파업 중인 뒤숭숭한 상황이지만 사오모님들께 올릴 글은 올려야 하겠기에 이렇게 올립니다...몽양 여운형 선생님을 먼저 소개합니다..아직도 몽양 선생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기 때문입니다...걍 편하게 읽어 주시고 고견들도 올려 주시길 기대합니다...
소수의 지식인이 Opinion leader가 될 수는 없지만 시대적 상황이나 배경에서 방향을 제시하는데
큰 몫을 하신 분으로 기억합니다.
정의에 대한 갈구, 사실을 사실대로 규명해서 조명하는 것은 역사를 바르게 해석해야할 우리들의 몫이겠지요.
올바른 역사의식이 시대의 어지러움을 정시(正視)하고 일관된 관점을 확인하는데 일조하니까요.
그리고 역사의 서술과 교육이 지배담론에 주박되어 과거의 이단과 도전자, 전복자들을 무시하거나 획일적인 도식에 뜯어 맞추는 것 또한 간과해서는 안되겠지요.
존재와 관계의 끊임없는 자기성숙은 올바른 역사관에서 나오니까요...
허향님. 잘 보았습니다.
김선생님 졸고를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몽양 선생님은 김선생님의 말씀대로 '소수의 지식인이 Opinion leader가 될 수는 없지만 시대적 상황이나 배경에서 방향을 제시하는데 큰 몫을 하신' 분이십니다...
앞으로도 몽양 선생에 대한 조명이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파업 중인데도 이 같이 좋은 글을 올려 주신 허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데올로기로 인한 분단에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몽양선생의 행적을 학문적으로 연구한 조영건 경남대 교수는 2007년 몽양선생의 60주기를 맞아 [몽양과 6.15정신]이라 제목으로 몽양이 미군정의 38선 월경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비밀리에 5차례 방북한 일화를 소개하고 좌우합작에 대한 몽양의 신념에서 통일의 방안을 모색했다고 발표한 것을 저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몽양의 역사적 경험과 그의 발자취를 통하여 남북관계가 대립에서 상생으로 진일보 하는 계기가 되길 저는 정말 학수고대 하고 소원합니다. 해서 선생에 대한 재평가는 반드시 이뤄져야 합니다.
포청천님의 고견에 저도 한표...
아직도 대한민국은 일제 강점기 치욕의 역사를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 20세기 들어와 식민시대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국가는 부그럽지만, 대한민국 밖에 없습니다...
친일만 꺼내면 좌익으로, 심지어는 빨갱이로 몰고 가는 게 지금까지의 대부분의 위정자들이 아니었습니까?(물론 일부 정권은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정치 캠페인을 통해 친일역사 청산을 추진했지만...)
친일 역사 청산만 들고 나오면, 경제가 어떠느니 하면서 말도 되지 않는 논리로 국민들을 현혹해왔습니다...
이크 오늘도 제가 본의 아니게 흥분했습니다...
포청천님 다시 한번 고견 감사합니다...
저도 역사에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만 잘못된 역사는 누구의 탓일까요...같은 동네에 사는 형(CF감독)과 만나면 잘못된 역사에 대해 술 한잔 기울이며 밤새 얘기를 한답니다. 할 말은 많지만 제가 흥분할까봐서..ㅎㅎ.. 허향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코다신님 잘못된 역사는 우리 모두의 탓입니다. 우리 스스로 깨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얘기가 있잖습니까? 좋은 사람이 나쁜 사람을 물리쳐야 한다는...또 어른이 되어 배운 事必歸正...역사는 그냥 사실 그대로만 쓰면 됩니다. 근데 자꾸만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합리화시키다 보니 팩트 자체가 삐뚫어지고 왜곡되고 뭐 그러는 거지요...
코다신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작은 땅덩어리 대한민국....사연많은 질곡의 세월들이 흐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랜 식민지 통치를 끝내고 이제 독립국가의 길로 가리라고 희망에 부풀었던 국민들에게 또 다시 외국에 의한 통치가 시작되는 신탁통치는 굴욕적인 것이었지요. 근데 그 당시 신탁통치를 전국적인 반대를 분명히 했던 것과는 달리 좌익은 신탁통치를 찬성으로 방향으로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고 하는데....좌익과 우익이 그 때부터 좀 어떻게 삐거덕 거린 것이 아닌가요? 우린 반공이데올르기로 인해 권력자와 생각만 달라도 좌익으로 빨갱이로 몰아세워 사형시키고...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생목숨들이 죽어 갔는지...억울하게 죽은 가족들의 삶의 보상은 무엇
그린님 다녀 가셨네요...근데 저는 해방 이전 일제강점기 일본에 충성하고 일본인 못지 않게 조선을 탄압했던 민족 반역자들에 대한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음을 지적했습니다. 친일역사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던만큼 해방 이후 좌우 충돌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으로 보상할 것이며....친일 청산의 문제로 토론을 벌인적이 있었는데 전 박정희 대통령도 친일에 해당 되더라구요. 친일을 한 사람이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어 통치를 했으니....근데 이런 문제를 덧글로 달면 잡혀가지 않을까요? ㅎㅎ 낼은 수시 시험 때문에 학교 휴강이라 좀 늦게 자는 통에 ^^
아 네 그린님. 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습니다. 고 박 대통령이 경제발전에 상당히 기여했고 대통령 치고는 비교적 청렴했다고 하지만, 김재규에 의해 저격당하기 전까지의 정치적 역정은 배반의 연속이었습니다. 민족 배반(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 편입 후 졸업, 일본 관동군 정보장교로 숱한 독립운동 투사들 체포 구금 및 고문), 정치 배반(해방후 남로당 핵심당원에서 동료들 배반후 자신만 목숨을 건짐), 배우자 배반(이혼 4번)...암튼 고 박 대통령에 대해선 할 말이 제법 많습니다...그린님은 "전 박정희 대통령도 친일에 해당 되더라구요"라고 표현하셨지만, 고 박 대통령은 핵심 친일행위자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문제는 아무리 경제 발전을 이끈 대통령이라고 하지만, 과거의 행적에 대해선 객관적으로 옳고 그름을 평가해야 하는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죠. 고 박 대통령의 반민족행위를 거론하면(분명 사실인데도) 좌파로 몰리는 게 엄연한 현실입니다. 고 박 대통령도 해방 이후 정국에선 좌파(남로당 핵심 간부)였는데도 위정자들은 정치적인 궤변을 들이대면서 민족주의 진영이나 진정한 보수 진영을 좌파로 매도하고 잇습니다...
오늘은 이쯤에서 그치겠습니다.
그린님 읽어주시고 고견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희 학교 교수님들은 박정희 대통령 말만 나오면 지나친 알르레기를 일으키십니다. 경제발전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떤 명분을 위한 자신의 비합리적인 것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고.그 당시는 대다수 국민들이 농업에 종사했고 그들은 너무나 배가 고픈 상태였기에 그 허기진 배를 채워준 자가 박정희 대통령이기에 정치에 대해 문외한 사람들은 그저 박정희 대통령을 구세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고..무엇보다 사회적 시스템이 그렇게 만든 것 같습니다. 근데 우선 드러난 것은 경제발전이지만 이것은 경제면이고 정치면서는 자신의 말에 대적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희생을 시켰습니까. 그것을 지식층에서는 알지만 일반
민중들은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포청천 님 말씀대로 우리나라에는 진정한 보수가 없다고 합니다. 정권이 바뀌고 나니 힘겹게 일구어온 민주화는 더 후퇴되고 있으며 말과 언론을 통제하고 있으니....사실 저도 예전에는 정치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문외 했지만 사회학을 전공하게 되면서 조금 눈을 뜨게 된 것 같습니다. 교수님들이 말씀이 사람들이 정치에 무관심 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을 하시더라구요. 정치인들도 신뢰하지 않을 뿐더러....우리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의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이런 글을 올려 주시니 학교의 연장선상에서 배우기도 하고 고맙습니다.
그린 예비 교수님이 계신 대학의 교수님들께선 참 균형 잡힌 역사관을 갖고 계시는 분들이시군요...
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선 잘 한 점과 잘못한 점을 구분해 사실 그대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제발전을 이끌었다는 점을 제외하고 쿠데타로 군부독재를 유발한 점 등은 분명 올곧게 평가를 내려야 한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놀라운 것은 울 교수님들이 말씀하시는 것과 허향 님에게 말씀하시는 부분이 정말 너무나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울 교수님들과 대면하시면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잘한것과 못한 것을 분명히 구분해서 평가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쿠데타로 군부독재를 일으킨것 부터 잘못 되었다는 것이지요. 근데 보편적인 일반시민들은 고픈 배를 채워주었기에 박정희 대통령을 높게 평가하지요. 암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거의 반반 정도가 엇갈리는 것 같더라구요. 학력과 계층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다는다는 것이기도 하고요.제가 소속해 있는 모 단체에도 박대통령에 대한 평가
긍정적으로 하고 있거든요. 그 당시 우리 국민들은 배가 너무 고팠고 그 고픈 배를 채워 준 사람이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것이죠.굶어 죽을 판이었는데..배를 채우고 나서야 정치가 눈에 보이지 배가 고파서 죽을 판인데 무슨 정치가 눈에 보이냐는 논리를 펴더라구요. 어쩌면 그들의 주장이 모두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부분이 아닌 전체적인 틀로 접근을 해야 하는데..그것이 일차원적인 굶주림과 연관이 되었으니..그리고 저는 박대통령이 한 번 이혼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혼을 그렇게 많이 한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정확하게 알지못해서 저의 주장을 온전하게 관철시킬 수 없는 사안이라...저는 배우는 입장에서.
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객관적으로 잘한 부분과 못한 부분으로 나눠야 하긴 하는데...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의견들도 있더군요...
위 댓글들을 보면서 저는 아직은 희망을 바라봅니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훌륭한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청산의 역사는 단 한 차례도 없었던 것을 기억할 때에 지금의 좌우 정치적 대립은 필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을 하면 좌우가 아니라 진보와 수구의 대립이지요. 이승만 독재에 의해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그래서 친일파들이 목숨을 구걸받아 다시 정계에 진출하면서 이에 보응하는 활동(소위 좌익척결 등)을 하면서 오늘날에 이른 것입니다. 프랑스 드골대통령의 나치청산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독일이 자신의 잘 못 된 역사를 처절하게 반성하면서 학창시절 참으로 많은 개탄을 한 시절이 있었는데 우리나라는 언제나
포청천님 고견에 한표 꾸욱...프랑스의 나치 청산의 역사와 독일이 2차대전에서 저지른 만행을 반성하는 대목을 보면서 이 나라가 과연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경제적으로 돈 몇푼 더 만지는 그런 좁은 의미의 졸부들의 선진국(예를 들어 일본)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적으로 수준이 높은 그런 선진국이 되기 위해선 우리가 넘어야 할 산들이 아직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역사청산을 제대로 해 볼 수 있을 것인지 요즘 정치권의 행태를 보면 정말 울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래서 우리 아이들에게 철저한 역사의식을 함양시키며 어릴 때부터 잘잘 못을 분명하게 따져 주었습니다. 너도 잘 못 했고, 너도 잘 못 했고 하는 양비론 식의 교육이 이 나라를 망친다는 제 개인적 신념 때문이지요. 따라서 대한민국에는 진정한 보수가 없지요. 무슨 보수가 비리에 취약하고, 성남 비행장을 틀어가며 제2의 롯데빌딩을 허가(진보정권에서는 극구 반대했다가)한답니까? 우리나라의 보수는 김구, 안중근, 윤봉길, 안창호 선생 등만이 계셨을 뿐 지금은 단 한 사람도 보수는 없습니다. 기득권자들만 있을 뿐이지.
포청천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보수와 진보가 뒤바뀌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짝퉁 보수와 짝퉁 진보가 진짜 보수와 진보인양 행세하고 있습니다. 보수는 Conservative, 즉 옛 것이나 전통을 지키다는 뜻을 담은 영어 단어의 번역어이고, 진보도 Progressive, 즉 옛 것이나 전통 보다는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뜻을 담은 영어 단어의 번역어입니다. 독립을 쟁취하고 친일행위를 처단하는 건 바로 보수의 몫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보수는 민족주의이어야 하고 백범 선생 등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이 그 범주에 속하시죠...
근데 가증스럽게도 대한민국에선 친일파들이 보수의 탈을 뒤집어 쓴 채 자신들의 부끄러운 행적을 감추고, 군사독재와 반민주화에 앞장 섰습니다. 그들은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진정한 보수를 진보, 더 나아가서는 좌파로 몰아 가는 해괴한 망동도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또 선거때마다 자신이 진정한 보수라고 자처하고 나오는 정치세력들도 가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보수의 '보(保)'자의 뜻도 모르는 후안무치한...몽양 선생을 생각하면서 이제 대한민국도 진정한 보수와 진정한 진보가 바로 서야 한다고 감히 주장합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포청천님 제 형편 없는 졸고 읽어주시고 고견 주셔서 고맙습니다...
허향님 드디어 올리셨네요. 소중한 작업을 하셨습니다. 제가 예전에 쓴 몽양 선생님에 대한 글로 고마움의 마음을 담습니다.
올려주신 사진의 여학구 선생님 김강윤 문화정책 연구원 등 낯익은 얼굴들을 대하니 반갑습니다. 한때 몽양 선생님의 비서일을 보셨던
이기형 시인님은 아흔이 넘으신 연세에도 몽양 선생님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셔서 글로도 활동을 하고 계시지요.
아 네 몇년전 (2006년) 그분들을 찾아 뵈었을 때도 그 열정이 남다르셨던 분들이셨는데. 지금도 건강하신지...제가 바쁘다는 이유로 전화도 자주 못드려서...
암튼 들꽃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