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21세기 자연의학 연구소
 
 
 
 

친구 카페

 
 
카페 게시글
..........쉬어 가는 곳 스크랩 간송 전형필
큰 바위 얼굴 추천 0 조회 27 12.02.29 14:0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간송 전형필

- 한국 문화재 수집가  

- 1906 서울~1962. 1 서울.  본관은 정선(廷善). 자는 천뢰(天賚), 호는 간송(澗松)·지산(芝山)·취설재(翠雪齋). 

보성 중학교 교주(校主)로 교장을 역임하였다.
오세창의 지도로 문화재를 수집하였으며, 그의 개인 박물관인 간송 미술관에는 《훈민정음》 원본을 비롯하여 10여 점의 국보가 있다.
학력 : 어의동 공립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 - 휘문고 -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과
경력 : 1938년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보화각 설립 , 1954년 문화재 보존위원
수상 : 1996년 문화관광부선정11월의문화인물 ,  1964년 문화훈장국민장

 

1906년 7월 29일 종로4가 112번지 아흔아홉칸 전 대감댁에서 고고성이 울렸다.

아흔아홉 칸 한집에는 대문만 따로 내어 지내는 배오개(종로4가의 옛이름)에서 가장 큰 상권을 가지고 있는 76세의 형 전창엽과

무과에 급제해 종2품 가선대부까지 지낸 69세의 아우 전창렬 두형제가 살고있는 집이다.

사실 막 태어난 전형필은 형인 전창엽의 손자다. 전창엽은 영기와 명기 두 아들을 두었다.

동생 창렬이 후사를 보지 못하자 작은아들 명기를 양자로 보냈다. 그런데 양자로 간 명기에게도 후사가 없었다. 게다가 큰아들 영기도 아들 하나 보고는 끝이었다.

영기의 장남 형설이 열다섯 살일때 형필이 태어나자 "아들을 주셨으니 손자도 주셔야겠습니다, 형님" 하는말에

전창엽은 그러겠다 약속이 되어 있었으므로, 형필은 태어나자마자 작은아버지(실제)이자 당숙(서류상) 전명기의 양자가 되었다

 

1921년 휘문고보에 들어가서는 학업이외에 예체능에도 관심을 보이며 휘문고 4학년때에는 야구부주장을 맡아 일본 원정 경기에 오사카고를 대파하기도 했다. 

1926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나와 1929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학과를 졸업한 이후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일본에 의해 문화재가 반출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오세창·고희동·김돈희·안종원·김용진·이도영·이상범·노수현 등과 함께 미술품과 문화재의 수집·보존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특히 오세창의 고서화에 대한 감식안에 힘입어 1932년경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여 고서화와 골동품을 수집했다.

 

1934년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개설하여 본격적으로 서화작품과 조선자기·고려청자 등 골동품과 문화재를 수집하는 한편,

1938년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華閣)을 북단장 내에 개설하여 서화뿐만 아니라 석탑·석불·불도 등의 문화재를 수집·보존하는 데 힘썼다.

그의 수장품은 대부분 국보 및 보물급의 문화재로 김정희·정선·신윤복·심사정·김홍도·장승업 등의 회화작품과 서예 및 자기류·불상·석불·서적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42년 훈민정음 원본을 찾아내고, 간송미술관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1940년대에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육영사업에 힘썼고, 1945년에는 1년간 보성중학교 교장을 맡기도했다. 

8·15해방 후 문화재보존위원으로 고적 보존에 주력했으며 1960년 김상기·김원룡·최순우·진홍섭·황수영 등과 함께 고고미술동인회를 결성하고

동인지 〈고고미술 考古美術〉 발간에 참여했다.


1962년 1월 26일 향년 57세에 신장병으로 세상을 떠나시여 많은 사람들을 슬프게 하셨으나  간송 전형필 선생님은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 가슴속에 살아 항상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1962년 대한민국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1966년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되었으며, 북단장에는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가 설립되어 미술사를 연구하고 있다. 간송미술관은 한국의 국보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미술관 중의 하나이다. 그와 관련되어, 안동에서 2,000원이란 큰 돈을 주고 산 훈민정음 원본에 관한 일화와 존 개츠비의 소장품인 고려청자의 수집에 대한 일화는 유명하다.

 

2.간송 전형필이 다시 찾은 문화유산 이야기... 청자와백자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文梅甁) 고려시대(13세기중기),국보 제98호, 높이41.7cm

고려 매병(梅甁)은 중국 송(宋)나라 매병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12세기경에 이르러서는 고려만의 풍만하면서도 유연한 선의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이러한 고려 매병의 양식은 이 작품에서 세련미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높이 42.1㎝, 입지름 6.2㎝, 밑지름 17㎝의 크기의 매병의 아가리는 작고 낮으며 밖으로 살짝 벌어져 있다. 어깨는 넓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가리 아랫부분에는 꽃무늬를 둘렀으며 굽 위로는 연꽃무늬를 둘렀다. 몸통 전면에는 구름과 학을 새겨 넣었는데,

흑백상감한 원 안에는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학과 구름무늬를, 원 밖에는 아래쪽을 향해 내려가는 학과 구름무늬를 새겼다.

 

학의 진행방향을 다르게 표현한 것은 도자기 표면이라는 일정한 제약을 넘어 사방으로 공간을 확산시켜 짜여진 구획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추구한 듯하다.

이같은 표현상의 변화 추구와 함께 문양처리의 능숙함에서 고려 도자기의 우수함과 고려인의 창의력을 엿볼 수 있다.

1935년===================================

도굴꾼들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과 대몽항쟁 때 임시도읍이었던 강화도에서 주로 봄가을에 고려청자를 도굴했다.

그들은 마을에 구전되는 이야기나 총독부에서 발행한 고적답사 자료를 통해 도굴할 고분을 물색하거나 수백년이 흐르는 동안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봉분이 없어진 채 길이나 논밭이 된 고분을 찾아내기도 했다. 개성과 광화도의 고려 고분은 신라 고분들과 달리 내부에 돌을 덮지 않아서

탐침봉과 삽만으로도 쉽게 도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손을 타지 않은 것이 거의 없었다.

일본인 전문 도굴꾼 야마모토가 탐침봉을 찌른 무덤도 고려 고분이었다.

아버지 최충헌의 뒤를 이어 무신정권의 기반을 굳건히 하며 권세를 누렸던 최우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곳으로 강화도 고려산 부근이었다.

야마모토가 그 무덤에서 꺼낸 도자기는 모두 여덟 점이었다. 그중 학이 구름 속을 나는 그림이 새겨진 도자기는 어둠 속에서도 쉽게 눈에 띄었다.

 

며칠후, 야마모토가 충무로의 고려청자 거간 스즈키 다케오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당시 기와집 한 채 값이었던 천원에 넘긴다.

스즈키는 이틀 만에 다른 거간에게 1,500원 받고 넘겼고 그 거간은 대구에 사는 수집가로 치과의사인 신창재에게 4천 원에 넘겼다.

기와집 네 채 값을 지불한 신창재는 의사일 뿐 갑부는 아니었다. 청자가 탐나 선뜻 거금을 투자했지만 이후 재정 압박으로 다른 골동품을 사들일 수가 없었다.

결국 일본인 골동품상 마에다 시아이치를 찾아가 6천원에 받고 넘겨준다. 감탄을 연발하며 청자 매병을 바라보던 마에다는 '천학매병'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실제 도자기에 새겨진 학은 69마리였지만 매병을 빙빙 돌리면 천 마리의 학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천학매병에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건 골동품상이 아니라 조선총독부였다.

그때 막 경복궁 안에 박물관을 지은 터라 명품으로 위세를 떨쳐보려고 총독부가 1만원을 제시했으나 마에다는 거절했다.

1만원에도 팔지 않았다는 소문이 퍼지자 마에다의 집은 장안의 골동품상들로 넘쳐났다.

전형필의 단골 거간인 신보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마에다가 부르는 값은 당시 청자 거래에서 유례가 없는 고가 2만원이었다.

그러니 누구도 선뜻 사겠다고 나서지 못했고 마에다는 천학매병의 사진을 찍어 유명 골동품상들에게 돌렸다. 신보는 사진을 전형필에게 건넸다.

흑백사진이지만 매병의 완벽한 곡선과 구름 사이로 날아가는 수십 마리 학의 모습은 또렸했다.

전형필은 신보에게 주선을 요청했고 전형필을 만난 마에다는 이제 막 서른을 넘겼을까 싶은 조선청년이 이만원이란 값을 치를 베짱이 있겠느냐는 듯

내심 비웃지만 전형필은 한푼도 깎지 않고 곧바로 현금 가방을 들고와 2만원을 건네주는 모습에 주선을 했던 신보도 마에다도 놀랄 뿐이였다.

이틀 후 마에다의 집에 일본에서 경성으로 온 골동품상 1세대인 장인 아마이케가 찾아와 천학매병을 일본에 수집가 무라카미가 사겠다고 하지만

그때는 이미 한발 늦었다는 걸 알게 된다.

마에다의 장인은 전형필에게 웃돈을 더 줄테니 되팔라 하지만 전형필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끝내 설득하지 못하자 일본에서 수집가 무라카미가 직접와서 간송이 치른 값의 두 배를 줄테니 양보해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햇지만

전형필은"선생께서 천학매병보다 더 좋은 청자를 저에게 주신다면, 그 대가는 시세대로 드리는 동시에, 천학매병은 제가 치른 값에 드리겠습니다" 라는

말로 정중하게 거절한다. 무라카미는 전형필에게 앞으로 '조선 제일의 수장가'가 되라고 덕담을 하고 어쩔 수 없이 포기한다.

광복후(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68호로 지정된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은 이렇게 조선땅에 남았다.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 조선시대/ 국보 제294호, 높이 42.3m

조선시대 백자들은 대개 단순한 형태와 문양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다채로운 색채의 사용을 절제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높이 42.3㎝, 아가리 지름 4.1㎝, 밑 지름 13.3㎝인 이 병처럼 하나의 작품에 붉은색 안료인 진사, 검은색 안료인 철사,

푸른색 안료인 청화를 함께 곁들여 장식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형태는 가늘고 긴 목에 풍만한 몸통과 약간 낮은 굽을 하고 있다. 굽은 선을 그은 듯이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으며, 아가리는 그대로 끊어내어

날카로운 맛이 있다. 18세기 전반경의 백자 병은 아가리 끝이 밖으로 살짝 벌어지거나 말린 것이 많은 것에 비해 드물게 보이는 모양이다.

 

병의 앞뒤 면에는 국화와 난초를 그렸으며, 벌과 나비들이 노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무늬는 돋을무늬로 난초는 청화, 국화는 진사, 국화줄기와 잎은 철사, 벌과 나비는 철사 또는 진사로 채색하였다.

 

이 병은 같은 종류의 조선 백자 중 큰 편에 속하며 유약의 질, 형태의 적절한 비례감, 세련된 문양표현으로 보아

18세기 전반경 경기도 광주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1936년 =========================================

경기도 팔당에서 할아버지는 민물낚시를 해서 할머니는 봄이되면 나물을 캐고 가을에는 참기름을 짜서 팔아 생활에 보태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할머니는 인근 야산에서 나물을 캐다가 땅속에 박힌 채 살짝 고개를 내민 흰색 병을 발견했다.

호미로 살살 흙을 걷어냈더니 참기름을 담기에 안성맞춤인 목이 긴 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의 흙을 좀 더 걷어내자 비슷한 병이 무더기로 나왔는데 더러는 깨진 것도 있었지만 온전한 병도 수두룩했다.

그곳이 바로 팔당 부근에 있던 조선시대 분원(왕실용 도자기를 굽던 곳)가마터였지만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할머니는

병이 필요할 때마다 그곳에 가서 목이 긴 병을 주워다 요긴하게 썼다.

할머니는 가을에 직접 짠 기름을 그 목이 긴 흰 병에 담아 민물고기를 사가는 중간상인에게 1원씩 받고 팔았다.

광주리 행상 개성댁도 잉어 몇 마리와 함께 참기름을 한 병 샀다. 개성댁은 일본인 단골손님 집의 안주인에게 5원(참기름값4원에 병값1원)을 받았다.

일본인 안주인은 골동품 상점을 하고 있는 남편 무라노에게 범상치 않은 참기름 병을 보여주었다.

그당시 백자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출토지를 모르는 도자는 전부 개성 부근에서 나왔다고 했고

광주리행상 개성댁이 들고온 물건이라 자연스럽게 "개성백자"로 불리게 됐다.

 

며칠후 무라노는 이 백자를 다른 골동품상에게 60원을 받고 넘겼다.

또 얼마후 스미이 다쓰오라는 수집가에게 600원에 팔렸다는 소식이 들려와 무라노는 혼자 속앓이를 했다고 한다.

1932년 스미이가 일본으로 귀국하기 전에 자신의 수장품 180점을 경성 구락부 경매에 출품하면서 함께 내놨고,

그 경매에서 모리 고이치 라는 수집가에게 3천원 에 낙찰 되었다.

 

성에서 손꼽히는 고미술품 수장가이면서 조선저축은행의 은행장이였던 모리 고이치가 1936년 세상을 떠나자

경성미술구락부(1922년 일본상인들이 미술품을 사고 팔기 위해 창립한 경매회사) 사장이였던 사사키가 유족들에게 모리 고이치의제안으로

추모모임을 겸한 특별 전시 경매를 통해 유품 200점을 전시와 함께 경매를 통해 처분하기로 한다.

모리고이치 유품 경매 주최자 중 한명이 된 신보는 도록을 만들기 위해 촬영한 사진 200장을 들고 명동의 일식집에서 전형필을 만나

응찰할 작품을 고르던 중 전형필이 그 '개성백자'사진을 유심히 보게된다.

 

『들에 핀 들국화 위로 나비가 난다. 외로움이 깊어서 이토록 흰색인가, 늦가을 바람이 그리워 노란색인가, 화려하고 싶어 분홍색인가.

들국화가 나비를 불렀는가, 나비가 들국화의 아름다움을 찾아오는가. 초충도의 화폭도 이렇게 아름답지는 않으리라.

함초롬히 솟아오른 난 이파리, 가을바람에 흩날리는가, 쓸쓸함을 이기지 못해 산그늘에 얼굴 감추고 눈물 흘리는가,

들국화 향기가 허공에 흩날린다.』

 

1936년 11월 22일 최저 경매가는 6천원 이였으나 "예상가 6천원"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500원을 시작으로 해서 1천원.. 3천원..5천원..8천원.. 9천원.. 결국 1만5천원에 간송 전형필에게 낙찰되었다.

광복후 보물 제 241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제294호로 재지정되어 지금까지 간송미술관에 수장되어 있다.

 

1937년 =========================================

일본 도쿄에 영국인 변호사 존 개스비라는 사람이 있었다.

30년 동안 도쿄에 살았던 그는 이름난 고려자기 수집가이기도 했다.

그는 일본에서 구할 수 있는 것만을 손에 넣는 것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가끔 경성뿐 아니라 부산이나 광주까지 와서 골동품상을 돌아다니며 좋은 물건을 사 가곤 했다.

전형필도 청자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면서 개스비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전형필은 개스비가 결국은 영국으로 돌아갈 것이고 가기 전에 수장품을 정리하리라 생각해서

개스비가 거래하는 일본 골동품상에게 주선을 요청해놓고 세월을 낚는 강태공처럼 개스비가 영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1936년 2월 26일 일본에서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고 이후 중국전쟁을 준비하는 등 일본의 상황을 불안하게 여겨

일본에 있던 서양사람들 중에 본국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개스비도 그런 사람중에 한명으로 수장품을 일괄처분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전형필은 공주의 논 1만 마지기를 처분해서 존 개스비의 고려청자 20여 점을 인수하는데

당시 시세로는 경성의 번듯한 기와집 400채를 구입할 수 있는 돈이었다. 요즘 서울 시내 아파트 가격으로 환산하면 최소 1,200억원이다.

당시 구입한 고려자기 중 7점은 광복 후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었다.  

1.청자기린형 향로(국보 제65호)
2.청자상감 연지원앙문 정병(국보 제66호)
3.청자 오리형 연적(국보 제74호)

4.청자 원숭이형 연적(국보 제270호)
5.백자 박산향로(보물 제238호)
6.청사 상감 포도동자문 매병(보물 제286호)
7.청자 상감 모란당초문모자합 (보물 제349호)

 

 [백자박산향료]

개성 부근의 고려 시대 무덤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백자 향로로 높이 8.5㎝, 지름 8.1㎝이다.

 

몸체는 전체적으로 둥근 형태로 뚜껑 부분과 향을 피우는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휘어진 토끼 꼬리 모양의 다리 3개가 부착되어 있다.

산을 겹쳐 놓은 모양을 한 반구형 뚜껑의 정상에는 다각형의 큰 구멍이 있으며, 그 밑에 다시 돌아가면서 7개의 구멍을 배치하여 이를 통하여 연기가 발산되도록 하였다.

 

유약은 청백색의 백자 유약을 두껍게 발랐으며, 투명하고 광택이 난다.

이 향로는 12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국적과 가마터를 가늠하기가 매우 어렵다.

형태는 중국 한나라 때 신선들이 살고 있다는 상상속의 산인 박산을 형상화 한 박산향로를 단순화·양식화시킨 것이다.

이 향로와 같이 둥근 형태을 이룬 몸체에 뚜껑의 윗면에 구멍을 내는 양식은, 송나라 때 백자 향로 중에 더러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점들로 보아 이 향로는 12세기 고려 백자와 중국 남송 전기의 청백자 성격이 복합적으로 반영된 작품으로 보인다.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靑磁象嵌柳竹蓮蘆鴛鴦文淨甁)

고려 전기의 청자 정병으로 높이 37.0㎝, 밑지름 8.9㎝의 크기이다.

원래 정병은 불교에서 모든 악을 씻어 버리는 의식에서 사용하던 용기의 하나로 중국을 거쳐 전해진 서방(西方) 양식이었으나,

고려에 와서 가장 세련되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 작품은 이러한 유물 중에서도 뛰어난 걸작으로 청아한 담록색 계통의 비취색 유약에 백토(白土) 상감만으로 새겨진 버드나무와 갈대,

연꽃, 원앙새 1쌍을 회화적으로 배치해 놓고 있다. 병 목에는 앞뒤 양면에 모란꽃을 하나씩 상감했다.

물을 따르는 부리는 8각으로 기품있게 만들어 병 목 위에 수직으로 세워 놓았다.

물을 넣는 아가리는 둥근 어깨 한쪽에 아담하게 붙어 있는데, 원래 뚜껑이 있었으나 없어진 상태이다.

 

대체로 초기의 상감청자는 유약이나 바탕흙이 매우 정선되어 있고, 청아한 비취색 유약이 세련미를 보여주는 것이 특색인데,

이러한 바탕 위에 상감무늬가 곁들여졌던 만큼 한층 더 장식 효과를 높일 수 있었다.

이 정병 또한 이러한 초기 상감청자의 하나로 매우 정제되고 세련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청자오리형연적 

오리 모양으로 만든 고려시대의 청자 연적으로 높이 8㎝, 너비 12.5㎝의 크기이다.

 

물위에 뜬 오리가 연꽃줄기를 물고 있으며 연잎과 봉오리는 오리의 등에 자연스럽게 붙어있다.

오리의 등 가운데 붙어있는 연잎에는 안으로 뚫은 구멍이 있어 물을 넣도록 되어있고, 연꽃 봉오리 모양의 작은 마개를 꽂아서 덮고 있다.

물을 따르는 부리는 오리 주둥이 오른편에 붙어 있는데, 이 부리가 연줄기에 달린 봉오리 끝으로 통했으리라 짐작되지만,

지금은 그 부분이 부서져 있어 원형을 확실히 알 수 없다.

 

이 연적은 오리의 깃털까지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정교한 기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알맞은 크기와 세련된 조각기법,

그리고 비색(翡色)의 은은함을 통해 고려 귀족 사회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다.

 

===================1938년============================================

전형필은 개스비의 명품 청자를 인수한 후에도, 경성 미술구락부 경매를 통해, 그리고 이순황과 신보를 통해 서화 전적과 도자기를 계속 구입했다.

뱍물관 내부 공사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이탈리아에서 대리석을 수입해 계단을 올렸고, 진열실 바닥에는 쪽나무 판자를 이어 깔았다.

진열장도 최고급으로 주문했다.

1938년 8월 중순, 지붕 공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미술관인 보화각의 상량식(건물을 지을 때 대들보를 올리는 행사)을 치렀다.

상량식이 끝난 후 전형필은 북단장 거실에서 스승 오세창, 오세창을 만나게 해준 휘문고보 스승 고희동, 민족과 역사에 눈을 뜨게 해준 외종형 박종화,

한남서림을 운영하는 전속거간 이순황, 꾸준하게 교분을 나눠온 화가 이상범, 노수현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상량식을 미치고 한달 후 4년에 걸친 공사 끝에 마침내 박물관이 완공되었다. 우리 민족문화의 보물창고이자 현재 간송미술관 건물이다.

오세창이 '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집'이라는 의미에서 '보화각'이라는 이름을 지었고, 주춧돌에도 글을 남겨주었다.

이렇게 조선 최초의 사설 박물관이 문을 열었어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는 단 한 줄의 기사도 실리지 않았다.

3월부터 중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을 폐지했고, 4월에는 전시 또는 전쟁에 준하는 사변의 경우 인적.물적 자원을 통제하고 운용한다는

"국가 총동원법"을 만들어 조선인 강제 징용과 징집 준비를 시작하는 상황이었으니,

찬란한 문화유산을 감상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는 개인 박물관에 허가를 내줄 리 없었다.

아무도 올 수 없는 박물관이었지만 간송은 '서화 골동에 미친 사람'이고 수집에 재산을 탕진한다는 비웃음을 받으면서도 광복이 되는 날까지 수집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모으다 해방을 못 본다고 해도 아이들 대에서는 해방이 되겠지. 그래, 길게보자.

나는 열심히 보아 지키고, 훗날 좋은 시절이 오면 너희들이 세상에 알려라.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을, 조선백자의 단아함을,

신라와 고려 석탑의 당당함을, 학문이 깊어 아름다운 활자로 책을 만들어냈음을, 진경산수로 조국의 산천을 그려낸 겸재 정선이 있었음을,

꽃과 나비를 사랑한 심사정이 있었음을, 추사 김정희와 같은 명필이 있었음을, 우리의 문화와 역사가 결코 초라하지 않았음을....

내가 알리지 못하면 너희들이 알려라. 앞으로도 계속 모으고 지킬 테니,

내가 왜 조선의 역사와 문화의 흔적들을 미친 듯이 모았는지 너희들의 세상에서라도 알려다오." 하는 마음으로 그 시대를 살았다.

그리고 1962년 1월 26일 돌아가셨다. 1997년 10월 간송미술관 소장 국보 제70호인 훈민정음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간송미술관은 매년 5월 10월 중순경 2주정도 무료개방을 하고 있다.

 

참고서적:간송전형필/김영사/이충렬지음

               간송선생님이 다시 찾은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샘터/한상남글/최완수 감수

 

사진출처: 문화재청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