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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발가락이 그립다☆]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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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락이 그립다]
이진숙 시집 / 시인동네시인선 070 / 문학의 전당(2017.01.10) / 값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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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락이 그립다
이진숙
몇십 년이나 묵은 추위가
오늘도 발끝에 스물거린다
병든 실업자 아버지가
아랫목을 다 큰 딸에게 양보하고
윗목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릴 때
딸은 그저 춥다는 생각뿐
어쩌다 차가운 발가락이 발에 스칠 때
그 차가움에
짜증 섞인 미소만 우물거렸을 뿐
그날이 차고 슬프다
그 차가운 발가락
오늘 내 발끝에 머무는데
그날이 오늘에야 아프다
문
이진숙
문은 역사다
열면 보이고 닫으면 보이지 않는
저 너머를 가리키는 시간의 손짓이다
그러나 또한 역사 너머 어디쯤의 무한지대이다
때로는 어둡고 때로는 환하기도 하지만
늘 저절로 닫혀버리는 수의적隨意的인 움직임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문은 열어야 문이다
두들겨 보기도 하고 외쳐 보기도 하고
열리지 않는 문에 매달려 좌절하기도 해야 하는 것t이다
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찾아온 것이 무엇이었는지
본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 무엇인지
아리송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에헴 하고 헛기침하며 안방을 스치면
안에서 슬며시 미소 짓는
자아비와 지어미처럼
문이 있으되 없는
역사의 무문은 어느 어름에 있는 것인가
손톱
이진숙
내가 물어뜯을 수 있는 것은
손톱뿐이다
네가 미워 너에게서 탈출한다 해도
너는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내가
너를 깊이 사랑한다 해도
허물어진 가슴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너와 나의 가슴을 후비던
짙은 후회마저도
슬슬 자리를 피해 달아나고
우리가 물어뜯는 수 있는 것은
손톱뿐이다
아픔조차 사라진 시대를 깨물 수 있는 건
아픔뿐이다
다행이다
이진숙
강원도에는
칠십년도 훨씬 전에 시집가 살고 있는
어릴 적 친구가 있고
쑥대 우거진 앞마당에서
넘실거리는 바다를 꿈꾸는
마음 어린 친구가도 있고
늙어가는 제자들과 라프마니노프를 들으며
갈대숲처럼 버석거리는
세상을 험담하는 어리숙한 선생도 있어
시집간 친구의 남편이 궁금하고 그 아들이 궁금하거나
마당에서 뱀이 나올까 전전긍긍한다는
친구의 쑥대 우거진 앞마당이 궁금하거나
어리숙한 우리들의 선생 안부가 궁금할 때……
그렇게 떠오르는 얼굴 몇 있다는 것
그렇게 만만한 사람들 품고 있는 곳 잇다는 것
참 다행이다
커피 한 잔
이진숙
기다렸던 건
손수건이나 찾아 눈물 닦아주는
그런 손길 같은 건 아니었다
삶의 반란 따위
송두리째 삼켜버리는
무언의 공간,
악마구리처럼 손을 내미는
그런 어둠과의 대결도 아니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 한 잔에
다시 너를 향한
한 조각 미움이라도 담아보려는
미련 같은 건
더더욱 아니었다
미열의 이마를 짚으며
쓸쓸히 너의 발길걸음에 귀를 묻던
창백한 오후
추억을 덮어둘
따스한 적막을
기다리고 싶은 것뿐이다
술병 몇 개
이진숙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돌아와
가슴 저미는
거친 풀밭에
몇 마리 오리가 가을을
품을 때
저만치
풀섶에 나뒹구는
의로움 몇 개
아름다운 슬픔을 꿈꾸는
붉은 입술에는
불타는 물의 그림자 어른거리고
서글픈 사랑을 꿈꾸는
푸른 눈동자에는
불타면서 젖고
젖으면서 타오르는
너와 나의 그림자 어른거리고
저만치
깨어져 쏟아지는
폭풍의 시간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돌아와
가슴 저미는
거침 풀밭에
몇 방울의 외로움이 계절을
적실 때
지칭개*
이진숙
짓찧어져야 하는 운명이다
흐르는 피를 멈추게 하고
멍울져 흐르는 짙푸른 고뇌
섬섬히 어루만져준다
그러니 보랏빛 꽃 피울 수밖에 없다
가을 들어 하늘 푸르면
몸 하얗게 먼지처럼 가벼워져
홀씨 되어 날아갈 수밖에 없다
내 어머니의 이름
*상처에 찧어 바른다 하여 ‘짓찡개’로 부리다 지칭개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물레나물*
이진숙
곱든고개 넘어
바람개비처럼 돌아 원삼 가는 길
고라니도 지나고 노루도 쉬어가는
곱든고개
열두 번번이나 돌고 돌아
곱다시 숨어 있는
물레나물 한 송이
아무리 견뎌보아도 견딜 수 없는
삶의 물래 잣기에 지쳐
곱든고개 언덕에 숨어버린
물레나물
한 송이
* 다섯 개의 꽃잎이 모두 한쪽 방향으로 굽어 바람개비 모양을 이루며 노란 색으로 꽃을 피운다
손님
이진숙
담장 너머로
미소 흩뿌리던 찔레덩굴이었다가
마루 끝에 드리운
누군가의 비단 옷고름이었다가
이슬비에 젖어 숨 멈춘
토방 위 댓돌
쨍쨍한 햇살에 속 다 내어주고
수심을 말리던 하얀 신발이었다가
두런두런 쏟아져 나오는
장지문 너머
아득한 오후를
서늘한 바람 한 자락으로
몰고 가버린
하루아침에
이진숙
호박꽃이 노랗다고
두런거리다가
고추알이 붉어진다고
덤벙거리다가
가을이 갔다
흙이 얼었다
쥐꼬리망초
이진숙
쥐꼬리망초에 바람 스친다
망할 놈의 망초란 이름은 왜 붙었나
갓난아기 새끼손톱보다 작은 몸 흔들며
보랏빛 시름 날리고 있다
하늘보다 멀리 날고 싶다 구시렁대면서
쥐꼬리망초에 나비가 앉았다
열 배나 백 배나 커다란 부전나비
쥐꼬리만큼만 쉬었다 간다
망초도 서러운데 쥐꼬리망초
하늘 보며 하늘처럼 아득해지고 있다
물속 같이 깊은 사랑
할 수 있다 중얼대면서
* 쥐의 꼬리를 닮았다 하여 ‘쥐꼬리망초’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말이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꽃이 보일 장도로 작고 앙증맞은 보라색 꽃을 피운다.
고추잠자리
이진숙
하늘가 맴돌며
오래된 청동 거을 같은
이야기 하나 빚고 있구나
바람 개인 오후
돌부리에 넘어져 바라보던
웅덩이 속 작은 하늘
그 하늘에 떠 있던
낮닭같이
생채기 난 꽃잎의 무릎을
어루만지고 있구나
눈 내리는 저녁 창가에
이진숙
천지에
눈보라 가득하여
오가는 이 없이
곳곳에서 문 닫아 거는
마음 가난한 이들
아득히 저문 밤
소식은
눈송이처럼 분분히 날고
나설 때마다 두렵고
돌아올 땐 또 인연 무거워
고단했던 내 어깨의 서글픔
자근자근
가슴을 눌러올 때에
사무치던 설움
저물녘의 설움만큼만
등불로 밝히고
커튼을 여미는
눈 내리는 저녁 창문이 붉다
척추관협착증
이진숙
지하철 바닥에 껌처럼 붙어 앉아
빈자리를 곁눈질하는 사이
체면 따위는
검은 안경의 노인이 가리키는
지팡이 내비게이션 너머로 날아갔다
자리를 양보하려는 몇몇의 연민에
부끄러움으로 이를 물어도
동전 몇 개 적선한 것으로 위로받을 수는 없다
마음이 다니는 길이란 것이
늘 그런 것이어서
아픔인 듯 그리움인 듯
통로를 막기 시작하면
부끄러움이 다닐 길도 아름다움이 다닐 길도
모두 한 가지
통증으로 정리해버린다
갓난아이가 모든 물상을 입으로 가져가 감별하듯
아픔으로 모든 것을 분별해야 하는
통증의 시대
우리들의 관이 자꾸 막히고 있다
가을 엽서
이진숙
새벽 속으로
별들이 떨어진다
억만년 전의 퇴적암처럼
지난밤의 어둠이
스러져가는 별들 위에 몸을 부빈다
계절의 토담 위에 가슴을 묻고
잎을 떨군 나무들이 시간을 불살라
매운 연기 피워 올리는
수줍은 마을의 반란을 비켜본다
아침 햇살 속의 그대는
깨달음처럼 더디고 슬프게 다가오는가
눈 시리게 밝혀 가슴으로 적은
지난밤의 연서는
바람 속으로 날려 보낸다
하얗게 비워버린 편지지 한 장
단풍잎 하나로
지그시 눌러놓는다
나는 눈물이 그립다
이진숙
메말라 가는 오후의 안구에
눈물을 넣는다
단비가 흙을 적시듯
촉촉한 눈빛은 잠시
또다시
나는 눈물이 그립다
눈물이 나를 놓아주지 않던
서러운 날들을 원망했지만
애증이 나를 놓아주지 않던
안타까운 날들을
뿌리치려 울부짖었지만
이제는 눈물마저 그리워
인공 눈물을 낳는
오후의 흙밭에
푸른 먼지가 인다
몽유夢遊
이진숙
똘
깍
똘
깍
수학여행을 떠난 뒤
빈 교실
학생 한 명
선생 한 명
오후의 적막 위에
내려 쌓이는
시간의 신음 소리
소녀, 시간에 젖다
이진숙
까맣게 빛나는
툇마루 끝
울리는
낙숫물 소리
소리의 그늘 위에
발가락 음정으로
빗방울 따라가 보네
적막으로 춤을 추는
채송화 꽃잎 사이
스며드는
서늘한 깨우침
순결한 한낮의 문을 두드리던
그때
묻지 않았다
이진숙
칸트를 만나러
새벽을 더듬어 바퀴를 굴린다
아니 정확하게는
물풀이 넘실거리는 금학천
돌다리 무렵
무리를 지어 오는 칸트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칸트는
어미 오리와
궁싯궁싯 뒤를 따르는 새끼 오리들에게
시간을 철저하게 지키는 대가로
내가 붙여준 이름이다
뒤뚱거리며 그들이 가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한 바퀴쯤의 오차도 없이
돌다리 어름에 나타났다가
자전거도로를 가로질러 어디론가 사라지는
그들 또한
나의 바퀴가 멈추는 곳이 어디인지
묻지 않았다
잘 참았다
이진숙
욕설과 분노와
솟구치는 욕망의 고름덩어리로
엉겨 붙은 교실
차라리 한 대 쥐어 패는 것이 나을 것 같은
아픔 마음
참 잘 참았다
오늘도
비밀번호
이진숙
생각 없이 문 두드리다
소스라쳐 놀란다
내가 나에게 비밀이 있었다니
그리고 그 비밀을 내가 모른다니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문 밖에서 서성이다
나를 잃어버리는 일이
늘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쓸쓸히 발걸음을 돌리며
중얼거린다
나의 숲이 너무 고요할 뿐이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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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어떠한 시도 영원할 수는 없다고 한다.
어느 날은 찢어진 청바지처럼 다가왔다가 어느 날은 노란 레인코트로 다가올지 모른다. 영원을 꿈꾸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또한 영원을 사랑하기에 모든 순간이 아름다운 것은 아닐까?
아파트 숲에 하나 둘 불빛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끝까지 남은 몇 개의 반짝임이 변함이 없다. 아침 햇살과 조우할 때까지 그냥 견딜 모양이다. 나도 견뎌볼 생각이다.
2017년 1월
이진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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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 詩集 [※발가락이 그립다※]
[ 해설 ] -
영원의 찰나, 찰나의 영원
윤의섭 시인 ․ 대전대 교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시간은 미래로부터 과거로 흘러간다고 흔히 생각한다. 그 방향성은 불가역적인 것이고, 이를 두고 선형적 시간관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 중 어느 부분을 더 많이 생각하고, 또 우리 현실에 있어서 어느 시간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제각각의 경험치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실 우리는 현재를 더 많이 생각한다. 과거는 가끔 기억으로만 떠오르고 기록을 뒤적일 때, 그리고 인과적 사안이 발생했을 때 거들떠보게 되는 시간대이며 미래는 예측으로, 계획으로 역시 가끔 생각해보는 시간대이다. 그런데 현재는 늘 우리 눈앞에 존재하고 가장 치열하게 견뎌내고 있는, 몸으로 느끼는 시간대이다. 따지고 보면 순수한 현재라는 것은 거의 존재 불가능하다. 지금, 이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현재는 과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드문트 후설 같은 현상학자는 현재에서 과거로 시간이 흘러가는 사이에 현재의 잔영이, 예를 들면 혜성의 꼬리처럼 남게 되고, 또 미래에 대한 기대가 현재 시점에서 이루어지면서 미래가 현재로 유입되는데, 이때 현재에 어떤 틈처럼 벌어지는 의식 속에서의 확장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이를 ‘지평’이라고 한다. 현재 지평은 이렇게 현재의 시간대가 넓혀져, 시간의 흐름에 저해 받지 않고 존재하는, 의식의 순간적인 지속 상태를 의미한다. 어떻게 보면 ‘지평’은 영원한 시간이 현재라는 순간에 ‘찰나’로 집결하였다가 다시 끊임없이 지속되는 ‘영원’의 상태로 유지되는 것을 일컫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진숙 시인의 시집『발가락이 그립다』에서 ‘영원으로의 지향성’을 포착하기란 쉽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시간의식이 직접적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집의 시편들은 현재의 시간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시인은 현재를 영원의 지평으로 유지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시인이 보여주는 세계관은 요란스럽지도 않고, 거창하지도 않다. 시인의 세계관은 ‘아프지만’ 살아있는 현재가 아름답다는 전언을 들려준다. 현재는 찰나지만 영원한 찰나로서의 현재라는 점을 통각으로 느끼게 한다. 그 현재를 시인은 ‘문’으로 상징하여 보여준다.
문은 역사다
열면 보이고 닫으면 보이지 않는
저 너머를 가리키는 시간의 손짓이다
그러나 또한 역사 너머 어디쯤의 무한지대다
때로는 어둡고 때로는 환하기도 하지만
늘 저절로 닫혀버리는 수의적隨意的인 움직임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문은 열어야 문이다
두들겨 보기도 하고 외쳐 보기도 하고
열리지 않는 문에 매달려 좌절하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찾아온 것이 무엇이었는지
본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 무엇인지
아리송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에험 하고 헛기침하며 안방을 스치면
안에서 슬며시 미소 짓는
지아비와 지어미처럼
문이 있으되 없는
역사의 문은 어느 어름에 있는 것인가
-「문」전문
시에서 ‘역사의 문’이란 “저 너머를 가리키는 시간의 손짓”이며, “문이 있으되 없는”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역사라고 하면 흔히 과거를 떠올리지만, 현재 역시 역사의 일부이다. 시에서는 “또한 역사 너머 어디쯤의 무한지대”라고 말한다. 이렇게 볼 때 문이 있으며 없는 역사 너머의 무한지대는 현재 시간대에서 확장되어 영원으로 펼쳐진 ‘지평의 시간’을 의미한다. 그 ‘문의 시간 속’에서는 “헛기침하며 안방을 스치면/안에서 슬며시 미소 짓는/지아비와 지어미”가 산다. 그것이 분명하게 무엇인지 “아리송"하지만 그 문의 시간 속에는 미소 짓는 반가운 얼굴, 시인의 모습일 수도 있고 누구나의 모습일 수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공간이 있다. 이렇게 시인은 문을 열고 현재를 고여 놓았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현재의 현실은 어떠한 상황인가. 시인은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존재인가. 몇 편의 시를 통해 시인은 현재 속에 거주하는 자신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또 그것을 담담히 풀어내고 있다.
지하철 바닥에 껌처럼 붙어 앉아
빈자리를 곁눈질하는 사이
체면 따위는
검은 안경의 노인이 가리키는
지팡이 내비게이션 너머로 날아갔다
자리를 양보하려는 몇몇의 연민에
부끄러움으로 이를 물어도
동전 몇 개 적선한 것으로 위로받을 수는 없다
마음이 다니는 길이란 것이
늘 그런 것이어서
아픔인 듯 그리움인 듯
통로를 막기 시작하면
부끄러움이 다닐 길도 아름다움이 다닐 길도
모두 한 가기
통증으로 정리해버린다
갓난아기가 모든 물상을 입으로 가져가 감별하듯
아픔으로 모든 것을 분별해야 하는
통증의 시대
우리들의 관이 자꾸 막히고 있다
-「척추관협착증」전문
시이은 지금 “척추관협착증”으로 아프다. 그래서 지하철 통로를 막고 앉아 있다. 양보하는 자리를 부끄러워 마다하고 싶지만, “통증”으로 “관”이 막히는 현실을 깨닫게 된다. 시인은 “아픔으로 모든 것을 분별해야 하는/통증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 문장이 얼마나 절절하고 아름다운지, 시인은 그런 생생한 현재의 시를 쓰고 있다. 아픈 시인은 “깊어가는 아픔릏/보듬어 차가운 바람으로” 불고 있는 “시간”(「너의 바람이 부는 길목으로」)속에 서 있고, 엄마가 많이 아프고 “내가 많이 아프다”(「아프다」)고 느끼며 “떡갈나무 숲속 떡갈나무처럼/그냥 거기 있고 싶”(「벌레 연가戀歌」)어 한다. 그러나 시인은 현재의 현실에 낙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시인은 “눈물마저 그리워/인공 눈물을 넣는” 현실을 이야기하면서도 역설적으로 ‘눈물을 그리워한다.’ 시인은 이 현재를 잊어버려야 할 것이나, 부정적인 것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인이 껴안고 가야 하는 현실이다.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려는 태도에는 분명 낙관주의가 깔려 있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문’을 떠올린다.
차마 닫지 못한 문틈 사이로
이제 막 잠이 깬
피로疲勞의
나지막한 칭얼거림을 따라
천년을 기다리기라도 한듯
볼이 부은 태양이
황망히 떠오른다
양파를 다지던 푸르른 힘줄이
햇살의 등 너머로 사라지는 것이 보인다
두려움으로 열지 못하던 문을
슬그머니 기울여본다
아무리 물 속에 밀어 넣으려 해도
잠기지 않는 풍선처럼
솟구치기만 하는 내 사랑의
해후
살그머니 다가오고 있는 것일까
조그맣게 열어둔
햇살의 틈 사이로
-「틈」전문
“문틈”으로 “태양이/황망히 떠오른다”. “두려움으로 열지 못하던 문”이었다. 그런데 시인은 “슬그머니” 문을 열고 “사랑”과도 같이 “햇살”이 “문틈”으로 들어오는 풍경을 펼쳐놓고 있다. 현재라는 시간의 “틈”이 벌어지는 순간이다. 이 “틈”으로 시인은 아름다운 현실의 시간을 몰아넣는다. 이제 시간은 공간화되어 즐거움을 주는 현재가 된다. 찰나의 순간이 영원으로 펼쳐지는 순간이다.
시인이 웃음과 농弄의 풍경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은, 아픈 현재를 거부하지 않고, 대신 그 상태 그대로 영원히 지속되어도 좋으리라는 낙관적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견자見者의 눈에는 모든 삶의 부침과 즐거움과 슬픔과 아픔이 하나로 어우러져 해학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엉금엉금 언덕을 기어오르는
저 은빛의 줄기들은
할미
자네 것이네
자네 질빵은 강하고 튼튼해야 하네
할미는 다 살았느니
죽으면 썩어질 몸
아껴 뭐 하겠나
어서 지게 끈을 추스르게나
가느다랗게 빛나는 저 초록 줄기들은
사위
자네 것이네
자네 질빵은 가느다랗고 여린 것이라야 하네
짐일랑은 조금만 지소
여차 하면 지게 끈이 끊어져버릴 테니
바라보기도 아까운 내 사위
사위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지게 끈을 어루 만질 뿐
할미는 속 아픈 울음만 삼킬 뿐
-「할미 질빵 사위질빵」전문
농사꾼들의 우스운 사연을 담고 있는 식물 이름을 소재로 하여 시인은 알 만한 사람은 미소를 짓게 하는 시를 선사한다. 또 “아무리 참나물이 아니라고 외쳐도/참나물이라고 불러서”“퍼렇게 멍든/파드득 나물”(「파드득 나물」) 이야기, “오, 이렇게 달 수가”(「달수」)하고 외쳐서 “달수”라는 이름을 짓게 되었다는 이야기, “한 조각 아편이라도 들어 있을까”(「개앙귀비」) 오해하지 말라는 “개양귀비”이야기, 이름도 쥐꼬리망초인데 “망할 놈의 망초라는 이름은 왜 붙었나”(「쥐꼬리망초」)하고 원망하는 “쥐꼬리망초”이야기 등은 시인이 갖고 있는 해학미를 풍요롭게 보여준다.
현재적 삶에 대한 시인의 이러한 의식은 간단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시인은 아프고, 그러나 직시하고, 받아들이고, 그러면서 해학을 발현하고 있지만, 이러한 현재를 영원으로 존속시키는 “문”을 얻기까지는 상당히 복잡한 경로를 거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 경로의 심연에는 ‘고독’이 놓여 있다.
맨발로 겨울 속을 뛰어나와도
붙잡아 줄 이 하나 없는
상념의 시간을 다스릴 수 없는 것이
아프다는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 없는 이층 찻집에서
홀로 거리를 내려다보면서
굳은 결심이라도 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수 없는 것이
아프다는 것이다
새로 열두 시 찻집 문을 닫을 즈음
사람들 속에 섞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누군가의 전화번호를 뒤적거리고 있는 나의 손가락이
아프다는 것이다
슬픈 음악이 흐르고 흘러도
그 노래따라 부른 지 너무 오래되었다는 사실에
괴롭지도 슬프지도 않음을 이해해버린다는 것이
아프다는 것이다
새로 열두 시 찻집 문을 닫을 즈음
내일이 와도 내일은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
그것이 아프다는 것이다
-「새로 열두 시 찻집 문을 닫을 즈음」전문
시인은 육체적으로만 아픈 것이 아니다. 혼자라는 현실을 깨달았을 때도 아프다. “내일이 와도 내일은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절망적이지만 그럼에도 현실로 나서야 한다는 것, 그것은 한 존재의 고독을 부추긴다. “홀로 거리를 내려다보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수 없는” 그 미약함을 시인은 아프도록 느낀다. 고독에 대한 저항은 고독이 강할수록 실패에 가까워진다. 어쩌면 그 고독은 스스로 “사람들 속에 섞이고 싶지 않다”며 고의적으로 만들어낸 것이어서 더욱 자괴감이 드는 아픔일지도 모른다. 고독을 넘어서는 자세는 자신을 철저히 고독의 영역에 묶어두는 것이라는 듯, 시인은 이제 “괴롭지도 슬프지도 않음을 이해”하고 다만 아파할 뿐이다. 버려진 술병을 보고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돌아와
가슴 저미는
거친 풀밭에
몇 마리 오리가 가을을
품을 때
저만치
풀섶에 나뒹구는
외로움 몇 개
아름다운 슬픔을 꿈꾸는
붉은 입술에는
불타는 물의 그림자 어른거리고
서글픈 사랑을 꿈꾸는
푸른 눈동자에는
불타면서 젖고
젖으면서 타오르는
너와 나의 그림자 어른거리고
저만치
깨어져 쏟아지는
폭풍의 시간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돌아와
가슴 저미는
거친 풀밭에
몇 방울의 외로움이 계절을
적실 때
-「술병 몇 개」전문
라고 말한 것도 시인이 외로움, 고독에 파묻힌 심정과 맞닿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만치/풀섶에 나 뒹구는/외로움 몇 개”에는 시인도 포함된다. “술병”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폭풍의 시간”은 그러한 고독 속에서 깨어져 쏟아진다. 시인은 더 나아가 “추억을 덮어둘/따스한 적막을/기다리고 싶”(「커피 한 잔」)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고독은 가까이 둘 만한 것일지는 몰라도 오래 갖고 있을 만한 것은 아니다. 고독을 깨뜨리고 부숴버려야 할 “시간”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렇게 고독을 깨버리는 순간 시인은 현재를 끌어안은 채 영원으로 나아갈 수 있는 문을 갖는다. 그런데 고독은 어떻게 깨졌는가.
유리창은 거울이 아니다
유리창 앞에서는
마주 서지 말아야 한다
다 알면서
다 알면서 서로를 비출 수 없다
때로는 수증기 몇 방울로
때로는 조각난 어둠으로
서로를 덮어버리면서
2월 찬바람에 덜컹이는
슬픔 한 방울 삼키고 만다
유리창은 내 마음이 아니다
네 마음도 아니다
우리가 마주설 때에
나는 내가 아니고 너도 네가 아니다
우리 서로
마주 서지는 말아야 한다
서로 다 들여다보면서
서로를 비출 수 없다
때로는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때로는 거친 어깨로
서로의 체온을 탐해보지만
결국 부딪칠 수밖에 없다
부딪쳐 깨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들의 투명한 사랑은
-「유리창」부분
“내 마음”도 아니고 “네 마음”도 아닌, 다시 말해 현실을 사는 ‘나’와 상반된 입장에 있는 또 다른 ‘나’가 유리창 속에 있다. 유리창은 거울이 아니어서 서로를 보여주고 그러니 “다 알면서 서로를 비출 수 없다.” 유리창 앞에서 ‘나’와 또 다른 ‘나’인 ‘나’는 마주 서지 말아야 한다. 서로는 “부딪쳐 깨어질 수밖에 없다” 시인은 ‘내’가 쫓아내야 할 ‘내 현재적 삶의 아픔, 고독’등등은 부딪쳐 깨어지고, 서로 “마주 서지” 않는 상태가 되길 바란다. 자아 내부에서 벌어지는 자신과의 맞섬에서 시인은 투명한 문으로서의 “유리창”을 부숴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열고 닫을 수 있는 문, 통과할 수 있는 문, 무한지대로서의 지평이 펼쳐진 영원한 현재의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재적 시간에 시인은 미래와 과거를 끌어들이며 시간 지평의 외연을 넓힌다.
그 미래는
언제부터인가
냉동실에 넣어둔 얼음덩어리들을 꺼내어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따뜻한 손가락 사이로
쉼 없이 녹아내려 물이 되어 흐르는
그것들은
다시금 냉장고에 밀어 넣는 수밖에 없다
해 저문 저녁 누군가의 창가를 맴돌다
돌아와서는
녹았다가는 다시 얼어붙고
얼었다가는 다시 녹아
어두운 냉동실과
따뜻한 손가락 사이를 오가며
허무의 공간을 뒤척이고 있는
존재의 술렁거림
나는 진정 몰랐다
와그르르 쏟아지던 시간들을 따라
함께 허물어지면서 생각의 그림자들
모든 것 벗어던진 채
푸르른 해동을 꿈꾸는 얼음덩이들의
뜨거운 숨결을
나는 진정 몰랐다
-「나는 진정 몰랐다」부분
라는 이 시에서처럼 “나는 진정 몰랐”지만 부지불식간에 다가온다. 그 미래는 “시간들을 따라/(……)/푸르른 해동을 꿈꾸는 얼음덩이들의/뜨거운 숨결”을 가진 미래, 즉 “해동”을 꿈꾸는 미래이며 곧 다가올 현재이기도 하다. 또한 과거는
몇 십 년이나 묵은 추위가
오늘도 발끝에 스물거린다
병든 실업자 아버지가
아랫목을 다 큰 딸에게 양보하고
윗목에서 발가락을 꼼지락 거릴 때
딸은 그저 춥다는 생각뿐
어쩌다 차가운 발가락이 발에 스칠 때
그 차가움에
짜증 섞인 미소만 우물거렸을 뿐
그날이 차고 슬프다
그 차가운 발가락
오늘 내 발 끝에 머무는데
그날이 오늘에야 아프다
-「발가락이 그립다」전문
라며 통각으로 살아난다. 현재에 생생한 감각으로 남겨진 과거인 것이다.
시간의 지평에 과거와 미래를 끌어들이며 현재라는 찰나의 영원을 펼쳐낸 시인은 지금 “아픔조차 사라진 시대를 깨물 수 있는 건/아픔뿐이다”(「손톱」)라면서 용납과 순응의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그러다 길이 막혀 되돌아서야 할지 모르지만, 현재라는 시간, 이 영원한 시간은 고요할 뿐, 그리하여 평온할 뿐, 시인은 고요의 현재를 산다. 그 시간 속에는 아픈 몸, 아픈 삶도 있지만, 그것을 껴안고 살고자 하니 바라보이는 웃음기 가득한 풍경도 펼쳐져 있다. 우리는 이 시집을 통해 삶이라는 찰나가 영원이 되는 모습을 목도한다. 다만 문득 시인은 너무 고요하여 ‘나’를 잃어버릴 때가 있는 것이다. 그때마다 시인은 또 하나의 문 앞에 다시 서서도 발길을 돌린다. 현재가 영원하니까, 지금은 영원히 “고요”하니까, 라고 자위하면서 아직은 그 문을 열 수 있는 비밀번호를 생각해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래 시에 나오는 새로 놓인 저 문을 시인이 앞으로 열지, 열지 않을 것인지는 다음 시집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 없이 문 두드리다
소스라쳐 놀란다
내가 나에게 비밀이 있었다니
그리고 그 비밀을 내가 모른다니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문 밖에서 서성이다
나를 잃어버리는 일이
늘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쓸쓸히 발걸음을 돌리며
중얼거린다
나의 숲이 너무 고요할 뿐이라고
-「비밀번호」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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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낯선 섬에 당도한 듯 설렘과 두려움이 느껴진다. 아마 두려움의 크기가 더 클 것이다. 왠지 모를 체기와 거친 호흡으로 힘겨웠던 지나간 시간들의 적막과 쓸쓸함을 되새기고 싶지는 않다. 아름다운 초원의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는 환상을 품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보물섬의 암호라도 풀듯 한 걸음 한 걸음 새로운 여정을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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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숙 시인∥
∙ 전북 진안에서 태어나 1993년『문학사상』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는『원숭이는 날마다 나무에서 떨어진다』『판다를 위하여』가 있다.
∙ 이진숙 시인의 이번 시집 『발가락이 그립다』는 현재를 영원의 지평으로 유지시키고자 하는 어떤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시인이 보여주는 세계관은 요란스럽지도 않고 거창하지도 않지만, 그것은 ‘아프지만’ 살아있는 현재가 아름답다는 전언을 들려준다. 그는 현재는 찰나지만 영원한 찰나로서의 현재라는 점을 시편 곳곳에서 통각으로 느끼게 해준다. 그 현재를 시인은 문을 열고 고여 놓은 것이다. 현재적 삶에 대한 시인의 이러한 의식은 그러나 간단하게 형성된 것이 아니다. 아프고, 그러나 직시하고, 받아들이고, 그러면서 해학을 발현하는 그 복잡한 경로의 심연에는 영원으로 가는 문인 ‘고독’이 놓여 있다. 시간의 지평에 과거와 미래를 끌어들이며, 현재라는 찰나의 영원을 펼쳐내고 있는 이 시집을 통해 우리는 삶이라는 찰나가 영원이 되는 모습을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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