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베니아 피란에서 버스를 타고 코페르에서 환승해 포스토이나에 가다!
2022년 5월 5일 아침에 피란 Piran 에서 버스를 타고 코페르 로 가는데.... 피란은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스테만 건너편에 이등변삼각형 모양으로 돌출된 반도로 남부는 크로아티아와
국경을 접하고 북부 해상은 이탈리아와 접하는데 염전이 있어 소금 교역으로 번영을 누렸습니다.
13~18세기에는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았으며 구시가지는 돌이 깔린 골목과
역사적 건축물이 해안선과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합니다.
우리는 5월 4일 코페르에서 이졸라를 거쳐 휴양도시 피란에 도착해 호텔에 배낭을 넣고는 해양박물관
Pomorski Muzej 에 들러 베네치아공화국 지배아래 항구도시로 발전해온 해양사를 보았습니다.
그러고는 타르티니예브광장 Tartinijev Trg. 에 도착해 피란 출신으로 18세기에 바이얼니스트
로 활약한 바로크 음악의 작곡가인 주세페 타르티니의 동상 을 구경하고는......
언덕을 올라 1344년에 세워졌다는 오래된 성 유리야교회 Cerkev Sv. Jurija 를 구경했습니다.
버스는 계속 달려서 어제 우리가 내려서 항구를 구경한 요트의 마스트가 숲을 이루었던
도시 이졸라 Izola 를 지나는데..... 이졸라 라는 말은 “섬” 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이니 과거에는 바다에 떠 있는 섬이었는데 로마인들이 최초로 도시를 건설했다고 합니다.
중세시대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 를 받았고 16세기에 오스트리아의 외항이던 트리에스테가
주요 항구로 성장하자 이졸라는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19세기에는 성벽을 무느뜨렸고
그 돌들을 섬을 매립하는데 쓰서 육지와 연결되었으며 해변 리조트는 여름 휴가의 명소 라고 합니다.
구시가지에는 베네치아풍의 성 마브라 교회 같은 역사유적과 또 이 도시에는 증기기관차
등 다양한 기차들을 전시하는 파렌자나 철도 박물관이 있다는 말을
떠올리는 사이에 버스는 동쪽으로로 계속 달려서 15분 후에 코페르 Koper 에 내립니다.
코페르 는 아드리아해의 북동쪽 이스트라반도가 내륙과 맞닿는 위치에 있는 도시로 과거에는
본토와는 해협으로 가로막혀 있었으며..... 1278년 이후 500년 이상
베네치아 공화국 지배를 받았으나 1797년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영토로 편입되었습니다.
제1차세계대전때는 이탈리아 영토가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때는 유고슬라비아 영토가 되었으며
1991년에 독립해 슬로베니아의 유일한 상업항으로 무역기지가 되었는데, 1825년 부터
해협 매립 이 시작되었고 과거 섬이었던 구시가지에는 티토광장에는 집정관 궁전과
성모승천 대성당이 있는데 200개 계단을 올라 54미터 종탑 에 서면 코페르 시내가 한눈에 보입니다.
여기 코페르 시외버스터미널 바로 뒤편에는 기차역 이지만 사무실이나 매표소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데, 버스표를 파는 건물로 들어가니 여기 다른 부스에서 기차시간표를
게시하고는 표를 파는데.... 배차 간격이 너무 길어 미리 시간을 알지 못하면 타기는 어렵습니다.
이제 버스표를 끊어야 하는데 도중에 포스토이나 Postojna 에서 내려 구경을 하고
갈지 아니면 슬로베니아의 수도인 루블라냐 로 바로 가야할지.... 잠시 망설입니다.
여행은 선택이라고 했으니..... 결국에는 류블라냐에서 충분한 관광 을 위해 아깝지만
포스토이나는 포기 하고 1인당 4.8유로에 표를 끊어서 10시 50분 버스에 오릅니다.
10시 50분에 코페르를 출발한 버스는 왼쪽으로 해변을 끼고 동쪽으로 달리다가 이내
내륙으로 들어가서는.... 여러번 선후 산을 넘는데 가히 산맥 이라고 부를만 합니다.
그러고는 이내 기차역이 있는 큰 정류소에 도착해 잠시 쉰 다은에 다시 동쪽으로 달리는데..... 여기
초원풍경 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사운드 오브 뮤직 에 나오는 알프스 자락 오스트리아 를 떠올립니다.
푸른 초원과 오래된 나무며 예쁜 꽃나무와 고풍스러운 옛 주택들이며 교회등 카메라
를 들이대기만 하면 모두 풍경사진 이 되는 지역이라 마음마저 편해지는데
이 아름다운 풍경속에 시골 교회 를 보니.... 문득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가 떠오릅니다.
“사랑하는 오귀스틴, 크리스마스이브 를 오랫동안 기억할거요. 밤 10시, 독일군이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을때
얼마나 놀랐던지! 프랑스인들이 국가를 부르자 다음에 독일인들이 그들의 국가를 부르고 만세를 외쳤소.
프랑스 병사들은 출정가를 불러 응답했소. 전선에서 남자 수천명이 노래를 부르니 마치 동화 같은 분위기였소.”
“도대체 왜 우린 싸우고 있는거요?”
전선 곳곳에서 유사한 일이 일어났다. 이프르(Ypres)시 근처에서는 독일군과 영국군이 고작 수십미터의
무인 지대 (no man’s land) 를 사이에 두고 대치 중이었다. 밤이 되자 먼저 독일군이 노래를 불렀다.
영국군도 자기들 노래를 했고, 곧 독일군 측에서 잠시 사격을 멈추고 중간 휴식 시간 을 두자고
소리질렀다. 영국군내 전직 테너와 바리톤 가수가 흉벽 위에 올라가서 열창했고 양측 모두 따라 불렀다.
이런 일이 있은후에 독일군 두 명이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에든버러에서 온 분 있소?”, “나요!”
“프린스 스트리트에 있는 이발소 아시오?” 놀랍게도 스코틀랜드 병사는 바로 그 이발소
근처에서 살았었고, 독일 병사들은 전쟁 전에 그곳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이 무슨 기이한 인연 인가.
남쪽 전선에 자리 잡은 독일군 바이에른 17연대는 전나무를 구해 와 크리스마스 트리 를 만들고
촛불로 장식했다. 프랑스에서는 아직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드는 관습이 없었던 터라,
프랑스 병사들은 처음 이 이상한 물체에 총을 쐈지만 곧 그 의미를 이해했다. 곧이어
카를 뮐레그 라는 이름의 독일 병사가 과감하게 철조망을 넘어 무인 지대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의 오른손에는 총 대신 전나무 가지 가 들려 있었다. 그는 정답게 인사하고 큰 소리로 ‘즈와이외
노엘 (Joyeux Noël· 프랑스어로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외쳤다. 프랑스 병사 한 명이 마법에
홀린 듯 그에게 다가가 악수를 건넸다. 곧 양측 수백 병사가 무인 지대로 나와 서로 인사를 나눴다.
1차 대전이 발발한 1914년의 크리스마스 무렵 독일군 병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단체 사진을 찍었다. 당시
전선 곳곳에서 독일군 병사들이 적군인 영국·프랑스 병사들과 담배·초콜릿 등을 교환하며 어울렸다.
도처에서 이런 초현실적인 일 이 일어났다. 서로 담배를 권했고, 초콜릿과 술을 교환 했다.
영국군의 쇠고기 보급품과 독일의 맥주에 대해 서로 칭찬했다. 일부 병사는 기념품을
교환하기도 했다. 주로 단추나 모자였지만, 심지어 서로 훈장을 바꿔 가진 사람들 도 있다.
영국군의 기관총 사수 한명은 이발사였는데, 독일 병사 하나의 머리가 너무 긴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머리를
다듬어 주었다. 전장 한가운데에서 만난 양측 병사들은 “도대체 왜 우리가 여기에서 서로 싸우고
있는거요?” 하고 물었다. 마지막으로 모두 올드랭사인 을 부르고 헤어졌다. 한 영국군 병사는 이렇게 기록했다.
“몇시간전 까지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을 만나 악수 하다니 믿을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프랑스 병사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헤어지기 전에 마치 오랜 친구 가 그런 것처럼 기념품을 교환했다. 한 명은 자기
주소를 적어주며 전쟁 끝나면 만나자고 말했다. 이런 사람들 끼리라면 전쟁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병사의 기록대로 “만일 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봤다면 거짓말이라고 했을 것이다.”
이 시기까지는 군인들의 사진기 휴대를 금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군과 영국군이 찍은 사진 수천장 이 남아 있어서 이때 일어난 기적 같은 일을 증언한다.
심지어 적군끼리 무인 지대에서 축구 경기 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 1915년 1월1일 치 ‘타임스’ 지는 영국 병사들
과 독일 병사들 간 축구 경기가 벌어졌다고 보도했다. 후일 로버트 그레이브스 (Robert Graves) 라는 문인
이 더 멋지게 각색해서, 정정당당하게 실력을 겨룬 끝에 영국 팀이 독일 팀에 3대2 로 승리했다는 소설을 썼다.
전선에서 축구를 했다는 것은 사실일까, 아니면 허구에 불과할까? 일부 연구자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우선 수많은 포탄이 터져 울퉁불퉁해진 땅에서 축구 경기를 할 여건이 못 되었으며, 제대로 된
공도 없었으니, 기껏해야 ‘깡통 차기’ 수준의 놀이를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지만 당시 많은
사람이 고향에 보낸 편지에서 축구 경기 이야기 를 하는 것을 보면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이와 같은 ‘비공식 휴전’ 상태를 경험한 사람은 대략 10만명 에 이른다. 어떤 곳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지나 새해
첫날 아침까지 휴전 상태가 이어졌다. 이런 특이한 사건에 대해 영국 신문들은 크게 보도했지만,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보도를 금지 했고, 병사들에게도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프랑스 병사들은 개인 서한에서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라면서 자기들이 겪은 일을 상세하게 전하곤 했다.
사실 군 지휘부로 보면 이 사태는 경악 을 금치 못할 일이었다. 전쟁 상황에서 적을 죽이는 것이
의무 이거늘, 멋대로 무기를 내려놓고 적군과 내통 하면 어찌 한단 말인가. 실제로 서로
다정한 대화를 나누었던 군인들은 상대방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싶은 마음이 스러진 것 같았다.
심지어 독일군 측에서 “내일 우리 장군이 시찰 나오는데 영국 병사들 잘 숨어 있기 바란다” 하고 소리쳐
주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루이 베르타 라는 프랑스 병사는 “오랫동안 비슷한 고통과 위험을 경험한
사람들 사이에서 돌연 어떤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작용해 인간 본성을 일깨운 것 아닐까” 하고
자기 수첩에 적었다. 바로 그 점이 문제다. 사랑해서는 안 되고 증오를 키워서 서로 싸우고 죽여야 마땅하다.
당시 참전한 젊은 시절의 아돌프 히틀러 도 병사들이 제멋대로 휴전행위를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군 지휘부는 즉각 사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프랑스군은 비공식 휴전 행사가 일어난
지역에 강력한 포격 을 퍼부으라고 지시하고, 그런 일을 벌인 부대는 훨씬 험한 곳으로
보내 버렸다. 아직 정신 못 차리고 무기 내리고 다가오는 적병이 있으면 장교가 냉혹하게 사살 했다.
이런저런 옛날 일을 생각하는 새에도 우리가 탄 버스는 계속 달려서 드디어 큰 도시에 도착하니
바로 종유 동굴 로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관광지인 바로 그 포스토이나 Postojna 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