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우리를 바꾸어놓아도 하고 싶은 말은 '사랑해'
LANY - If this is the last time
집사람이 살던 함백에 가 봤습니다
여기저기 둘러보며 아내를 추억하였습니다
함백에 대한 소식을 알려드립니다
어떤 곳이었는지
조동8리는 석탄 개발로 형성된 탄광 마을이다.
안경다리라는 단어 자체가 마을을 의미한다.
영월∼정선 함백 간 함백선 철도는 1957년 3월 개통했다.
정선지역 최초의 철도다.
함백탄광에서 생산한 석탄 수송을 위해서였다.
함백선 철도 건설에는 육군지원단도 파견됐다.
석탄 수송이 국가 과제일 정도로 중요했기 때문이다.
함백탄전은 일본강점기인 1940년 발견됐으나,
본격 생산은 함백선이 개통되고 대한석탄공사 함백광업소가 문을 연 이후다.
함백광업소는 1957년 6월 문을 열었다.
함백선 개통 이후 3개월 만이다.
철도가 들어오자 사람도 따라 들어왔다.
미국 국제협조처 자금원조로 1963년 조동6리 새골에 탄광 사택 500가구가 건립됐다.
연립주택 건축으로 조동리와 방제리는 '함백'(咸白)이란 이름으로 전국에 알려졌다.
탄광 개발로 신동읍 인구는 1976년 2만4천699명까지 늘었다.
오경호 전(前) 조동8리 이장은
"함백광업소 직원이 많을 때 2천 명에 달했고,
함백광업소 앞마을인 안경다리에는 5천 명 넘게 살았다"라며
"지금은 약 100명만 남았다"라고 말했다.
신동읍 인구는 석탄산업 사양화와 이농 현상으로 1980년대 중반부터 감소했다.
함백광업소도 1993년 10월 문을 닫았다.
현재 신동읍 인구는 3,400명
“3,400명 사는 읍에 출생아 4명뿐” …
이중 조동리와 방제리, 즉 함백 인구는 1천850명이다(2016년)
안경다리를 지나 조금 올라가면 이런 작은 공원이 나온다
1979년 4월 14일 오전 7시 55분께 자미갱 입구에서 광차에 있던 화약이 폭발하여 26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38명이 다쳤습니다. 이 입석앞에서 물을 마시며 잠시 쉬었다 갑니다. 이들의 자녀들이 이 곳에 와서 자기의 아버지를 추억하겠지요.
‘검은 진주’ 석탄은 60∼70년대 강원도민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준 보물단지나 다름 없었다.
새벽에도 불야성을 이룰 정도였다.
지금 함백은 쓸쓸하다
1993년 함백광업소가 폐광된 후 그 기능을 잃어버려 장기간 방치되었던
함백역사(驛舍) 역시 2006년 철거되었다.
하지만 지난 40여 년간 석탄산업의 흥망 세월을 함께 했던 함백역사가 역사 속으로,
추억 속으로만 사라짐을 안타까워하는 지역 주민들의 청원으로 2008년 복원되었다.
역사의 한자리를 다시 차지하게 된 함백역, 역사와 철길을 바라보며 번성했던 그 시절을 상상해 본다.
정선군 신동읍 주민인 나흥주(전 강원도학교운영위원회 총연합회장)씨는
"지역 고교생들 조차 문화·소비 생활을 더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도시로 졸업과 동시에 떠나고,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특히 보육 및 교육 시설, 산부인과가 감소하면, 지방에서 아이 키우기가 더 어려워져
저출산이 심화하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함백은 그렇고, 4만명이 붕괴된 태백의 앞날은 어떨지
우리나라 인구정책
1940년 ~ 1950년
해방 당시 한반도의 인구는 약 2,500만 명이었으며, 과거 약 50년간의 인구증가율은
연 1-2% 수준으로, 인구현상은 전형적인 후진국형에 속하여 고출산, 고사망을 보였다.
1945년 ~ 1960년
해방 후 15년간 즉, 1945-1960년의 한반도 인구는 더 이상 반도 전체의 인구를 논하기 어려웠고,
특히 민족적 차원을 제외하고는 남한의 인구에 한하여 거론하게 되었다.
1960년 한국의 인구는 약 2,500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1955-1960년의 인구증가율에 주목해야 할 사실은 해방 후 젊은 연령층의 유입과
6․25 전쟁 이후의 결혼 및 출생붐(베이비 붐)의 영향을 받아 인구증가율이 매우 높아졌다는 것이다.
물론 새로운 의약품의 보급으로 사망률이 급격히 낮아졌지만 6․25 전쟁으로 인한 인명손실에도 불구하고,
1945-1960년의 인구 폭증현상은 영·유아의 사망률 감소와 함께 전통적인 높은 수준의 출산율에 기인한다.
그러나 해방 후의 교육열과 남자의 군복무 등으로 인해 그에 따른 초혼연령의 상승이 있었고,
극히 한정된 계층에서 이루어졌지만 인공유산이 실시되었으며, 피임보급운동이 시작되었다.
한국의 가족계획사업이 정부정책으로 채택되기 이전에는 가족계획운동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졌다.
일제시대에는 외국선교사들이 선교활동과 병행하여 가족계획을 보급하였고,
특히 1954년에 내한한 미국인 선교사 워스(George C. Worth, 한국명 오천혜)는
모자보건을 바탕으로 한 가족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가족계획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한국인에 의한 가족계획운동은 1957년 전라북도에 위치한 농촌위생연구소에서
처음으로 가족계획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가족계획사업이 공식적으로 거론되기는
1959년 보건사회부의 모자보건위원회가 모자보건과 인구대책을 위해 가족계획사업을
국가시책으로 채택할 것을 보건사회부장관에게 건의한 것이 첫 시도라고 볼 수 있다.
1960년~1970년대 : 3 · 3 · 35 운동 등 산아제한에 사활
온 국민이 가난에 허덕이던 1960년대 정부는 산아제한 정책에 사활을 걸었다.
“많이 낳아 고생 말고, 적게 낳아 잘 키우자”라는 구호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외쳤고
“3 · 3 · 35 운동”도 벌였다. 3명 자녀를 3년 터울로 낳고, 35세까지 단산하자는 뜻이다.
정부는 ‘아이 적게 낳기 운동’에 전력을 쏟았다.
당시 보건소나 ‘가족계획 지도원’에서는 무료로 불임시술을 해주기까지 했다.
1970년대에도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은 계속됐다. 자녀를 적게 낳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시 우리 사회에는 남아선호 사상이 뿌리 깊게 박혀 있어서 아들을 낳기 위해 출산을 계속하는 사례들이 많았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대응으로 나온 표어가 “딸 ·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였다.
또 여기에는 한 가정에서 두 자녀를 낳아 키우는 것이
‘표준모델’이 되는 ‘4인 가족’에 대한 암묵적인 메시지가 강하게 담겨 있었다.
4인 가족이 ‘정상 가족’으로 간주되는 ‘두 자녀 가정’ 정착 노력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태백중학교 학생들이 건강검진하러 왔답니다. 학급수 3학급. 학생수 42명. 교원수 10명 학생들이 놓고 간 가방을 보니 초들때 들고, 메고 다녔던 책가방이 생각납니다
1980년대: 두 자녀에서 한 자녀로, 남아선호는 더욱 강화
1980년대에는 두 자녀에서 한 자녀로 변화됐다.
그만큼 인구 증가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긴박함이 강했던 것이다.
특히 이 시기 표어에서는 남아선호 사상에 대한 반대 메시지가 강하게 표현되고 있다.
“하나 낳아 젊게 살고 좁은 땅 넓게 살자”,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사랑으로 낳은 자식, 아들딸로 판단 말자” 등이다.
1983년 출산율이 인구대체율(여성 1명이 평균 2.1명의 아이를 낳으면 현 수준의 인구가 계속 유지될 수 있다는 의미)
수준인 2.1명 이하로 떨어졌다. 우리나라 출산정책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1970년대 말~1980년대 초반 오일쇼크 등의 영향과 정부의 적극적 산아제한 정책이 맞물려 초래된 결과였다.
하지만 정부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출산율 하락이 일시적인 현상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더욱 강력히 산아제한 정책을 실시했다.
그 결과 출산율은 점점 더 떨어졌다. 이 시기 출산율은 줄었으나
우리 사회의 남아선호 사상은 매우 강력해 당시 출생 성비 불균형은 매우 심각했고
남아 출생 성비는 1990년 116.5까지 올랐다.
Mascagni(마스카니)~Gli aranci olezzano(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1990~2000년대: 정책 방향 급선회, 많이 낳아 잘 기르자
정부는 1989년 피임사업을 중단하고 사실상 산아제한 정책을 중단했다.
정부는 1996년 인구정책의 목표를 ‘산아제한’에서 ‘자질 향상’으로 변경했다.
인구의 질적 향상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뜻이었다.
“아이가 미래입니다”,
“아기의 울음소리, 미래의 희망소리”,
“가가호호 둘셋 출산 하하호호 희망한국”,
“허전한 한 자녀, 흐뭇한 두 자녀, 든든한 세 자녀” 등의
표어를 통하여 적극적인 출산장려 정책으로 급선회했다.
1.5명 내외에서 머물던 출산율은 극적으로 떨어져 급기야 2005년 1.08명의 최저수준으로 떨어졌다.
저출산 시대에 대한 위기의식이 급속하게 고조되면서 출산정책은
“아빠, 혼자는 싫어요. 엄마, 저도 동생을 갖고 싶어요”,
“자녀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형제입니다” 등 많이 낳아 잘 기르자는 메시지로 전환됐다.
1970년대에는 산아제한을 외치는 가족계획 표어가 유독 많이 나왔다.
‘둘도 많다’며 ‘하나만 낳자’라고 외치던 가족계획의 절정기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 사회는 사회 재생산을 걱정하는 현실에 와 있다.
최근 TV에서는 한 자녀 가정을 대상으로 동생 낳아주기 캠페인이 등장했다.
동생을 낳아줘서 함께 커 가며 함께 배우는 평생의 단짝을 만들어 주자는
‘아이 좋아 둘이 좋아’ 캠페인이다.
홍승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가족 · 다문화센터장
참 이렇게 세상이 바뀌다니 놀랍고 우습습니다
1970년대 군대 갔다 오고 직장생활 할 때인데
예비군 훈련장에 가면 으례히 가족계획관계자가 와서 강의하였습니다
이때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충주에서 청주까지 가서 수술하고 왔답니다
마누라한테 한 소리 들었지요
영원한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 Dean Lewis - How Do I Say Goodbye [
가정의 달이니 부모님이 보고 싶습니다...
첫댓글
함백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이었구요
장문의 글과 사진 수고하셨습니다.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