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업 구조조정의 비밀을 찾아서
정부가 조선업계 구조조정을 추진 중인 가운데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선박이 건조 중이다.ⓒ양지웅 기자
정부가 칼자루를 쥔 ‘조선업 구조조정’이 속전속결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정부가 업종별 구조조정 방안을 발표한 지 한 달 만에 대우조선해양과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등 조선 3사는 인력과 생산시설 감축을 골자로 하는 자구책을 내놓고 있습니다.
동시에 조선업 구조조정 추진 과정에 대한 비판 여론도 거세지고 있습니다. 세계 경기침체의 영향일 뿐 한국 조선업 자체의 위기가 아니라는 분석과 함께 대우조선해양의 위기를 조선업 전체의 위기로 확대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정부가 앞장서 조선사들에 구조조정안 마련을 강요하는 상황이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추진하려는 정부의 꼼수라는 비판도 제기됩니다.
세계 1위의 대한민국 조선업이 진짜 위기일까요? 경제 전문가들과 노동계 발표 자료 등을 통해 조선업 구조조정의 본질을 살펴보겠습니다
세계 1위·흑자 조선업이 위기?
최근 발표된 조선사별 수주잔량과 2분기 실적 예상치 발표에서 한국 조선사들의 결과가 나쁘지 않습니다.
영국 조선·해운 분석기관 클락슨 리서치의 5월 발표에 따르면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114척,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82척,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92척, 현대삼호중공업 영암조선소 81척 등 한국 조선소들이 수주 잔량 부문에서 세계 1위부터 4위까지를 싹쓸이했습니다.
금융정보업체 와이즈에프엔에 따르면 올해 2분기 우리나라 조선업의 영업이익 예상치가 2826억원입니다. 이는 작년 같은 기간 533억원의 영업손실에서 흑자 전환한 수치입니다.
정부가 조선업계 구조조정을 추진 중인 가운데 울산 현대중공업의 선박 건조 장비들이 보이고 있다.ⓒ양지웅 기자
현재 조선업 위기가 세계 경기 침체로 인한 일시적인 위기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조선업 리포트를 작성해온 박무현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한국 조선업 위기를 ‘무리한 해양 플랜트 산업 진출로 인한 유동성 위기’라고 보고, 섣부른 구조조정은 세계 1위 조선업의 영광을 경쟁국인 중국과 일본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나을 것이라고 우려합니다.
이와 함께 업계에서는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 관리하는 대우조선해양의 위기를 전체 조선업의 위기로 확대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제기됩니다.
조선 3사의 총체적 위기?
진짜 조선 3사들이 위기일까요? 일각에서는 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현대중공업으로 대표되는 조선 3사 위기가 아니라 대우조선의 위기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작년 조선 3사의 적자 총액과 올해 1분기 실적을 보면 대우조선의 문제가 명확해집니다. 조선 3사가 낸 총 적자 5조9000억원 가운데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의 적자 규모는 각각 1조5000억원대인 것에 반해서 대우조선은 총 2조9000억원 적자를 냈습니다. 조선 3사의 총 적자 중 절반을 대우조선이 낸 것입니다.
올해 1분기 실적을 살펴보면 현대중공업은 3252억원, 삼성중공업은 61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흑자 전환했지만, 대우조선은 263억원의 적자를 냈습니다.
재무건전성 판단의 주요 지표인 부채비율도 지난해 말 기준 현대중공업이 220%, 삼성중공업이 309%인 반면, 대우조선은 7308%입니다.
대우조선해양은 1998년 대우그룹이 해체하면서 6600억원의 공적 자금을 지원받았고, 2001년 KDB산업은행의 출자전환 등으로 공적자금 2조9000억원을 투입, 작년에는 4조2000억원을 지원하는 등 약 7조원 규모의 혈세를 투입한 기업입니다.
전문가들은 대우조선의 위기를 한국 조선 3사 전체의 위기로 확대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이 적자 규모와 부채비율 등에서 대우조선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데도 조선업종이라는 이유로 구조조정 수술대에 오르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같은 잣대로 인력과 설비 등의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실제 한국 조선업에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옵니다.
‘정규직 없애기’가 구조조정 목표?
생산설비를 최소화하고, 정규직을 없애면 위기의 조선업이 살아날까요? 전문가들은 조선업이 이미 수차례 구조조정을 겪었고, 충분히 노동시장 유연화가 이뤄졌다고 설명합니다.
박종식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은 연구논문을 통해 “2009년 세계금융위기 이후로 한국 조선산업은 설비를 많이 줄였고, 더 이상 설비를 줄일 필요성은 크게 없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중국·일본과 경쟁 상황에서 무리하게 설비를 감축·통폐합하는 과정은 장기적으로 한국의 조선사들이 경쟁에서 뒤처지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황우찬 조선업종노조연대 공동대표는 우리나라 조선업 노동시장이 하청직원, ‘물량팀’(일용직 노동자) 등으로 충분히 유연화됐다고 말합니다. A 조선사의 노동자가 5만명이라고 한다면, 이 중 정규직이 1만명, 사내하청 2만명, ‘물량팀’이라고 불리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2만명 정도라는 것입니다. 숙련 기술직 노동자들의 존재 여부가 경쟁력인 만큼 정규직을 대거 구조조정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정규직을 비정규직화하는 과정에서 조선사들의 경쟁력이 더 퇴보한다는 게 황 대표의 설명입니다.
현장에서는 설비·인력 감축이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나서서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하는 상황이 정부의 노동시장 구조개혁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는 얘기도 나옵니다.
금속노조와 조선노동조합연대가 서울 중구 세종로 금융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조선업종 구조조정에 대한 공동입장을 발표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총선 직후 정부 주도 구조조정 의도는?
왜 하필 조선업 구조조정 발표 시기가 총선 직후일까요? 왜 구조조정을 주도하는 주체가 정부와 금융권일까요?
조선업 구조조정에 대한 논의는 지난 4월 총선 이후 가속화됐습니다. ‘산업은행·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의 자본 확충’을 언급하며 조선사 구조조정의 중요성을 강조한 지 한 달 만에 조선 3사들은 앞다퉈 인력·설비 감축 등의 자구책을 내놓았습니다. 업계에서는 주채권은행들이 조선3사 등의 자구안을 바탕으로 구조조정 방향을 결정하면 다음 달 초부터 본격적인 조선업 구조조정이 시작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위기상황을 대비한 ‘선제적 구조조정’치고는 너무 빠른 속도입니다.
노동계는 “지난 2000년대 중후반부터 조선업 위기를 대비해 정부와 기업, 노조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정부와 기업이 귀를 막았다”고 토로합니다. 호황기에 천문학적인 성과급을 챙겨가던 경영진과 국책은행들이 위기에 직면해서는 설비 감축과 노동자 해고로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이들은 또 정부주도의 획일적인 구조조정 추진과, 이 과정에서 금융권의 목소리가 주로 반영되는 것이 큰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금융권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이 장기적으로 세계 최고의 조선사들의 경쟁력을 퇴보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반대하는 노동자들ⓒ김철수 기자
조선업 구조조정은 ‘노동개혁’ 신호탄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 귀빈식당에서 열힌 조선-해운업 구조조정관련 당정협의에 새누리당 김광림 정책위의장과 임종룡 금융위원장등이 참석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정의철 기자
일각에서는 조선업 구조조정이 박근혜 정부의 노동시장 구조개혁의 시작이라고 전망합니다. 조선업 구조조정을 시작으로 향후 건설, 철강, 석유화학 등 직종의 구조조정이 본격화될 것이라 예상이 나옵니다.
지난 4월 정부 발표를 종합하면 기업·산업별 구조조정은 크게 세 트랙으로 추진됩니다. ‘경기민감 업종’과 ‘공급과잉 업종’, ‘신용위험 기업’ 등으로 구분해 산업이나 기업 상황에 맞는 구조조정을 한다는 계획입니다. 대출 규모 500억원 이상 대기업 2000여곳의 평가 결과가 공개되는 7월을 전후해 채권은행들은 주채무기업에 구조조정을 압박할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업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불기 시작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기업구조조정촉진법과 기업활력제고법 등 구조조정을 위한 법률체계가 정비된 만큼 정부와 채권단은 ‘사즉생’의 각오로 구조조정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공언한 바 있습니다. 정부가 사활을 걸고 추진하는 기업 구조조정은 이 시대를 사는 노동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