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의 소프트뱅크 대표.hwp
손 마사요시, 孫正義
'비전의 힘'을 믿는 승부사 출생195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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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기 꿈조차 마음껏 꿀 수 없던 자이니치
승부사의 '인생 50년 계획'
허풍이라 비웃음 사던 꿈을 현실로
"5년 후 매출은 100억(엔), 10년 뒤 500억(엔)을 돌파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1조, 2조 단위로 끌어올리고자 합니다."
1981년 일본 큐슈 후쿠오카의 허름한 목조건물 사무실. 스물네 살 청년이 사과궤짝을 연단 삼아 직원들 앞에 섰다. 직원이라고 해 봤자 아르바이트생을 합쳐 고작 세 명뿐이었다. 젊은 사장의 맹랑한 연설을 듣고 있자니 직원들도 기가 막혔던지 이내 회사를 떠나버렸다.
빌 게이츠가 인정한 '승부사(risk taker)', 손정의(孫正義, 일본명 손 마사요시, 1957년~ ) 소프트뱅크 회장이 창업할 당시의 일화다. 출발은 초라했으나 젊은 사장의 야망은 컸다. 그때 손정의의 연설은 '허풍'으로 여겨진 게 당연했지만, 30년이 지난 2011년 3월말 소프트뱅크는 자회사 117개, 투자회사 73개, 순매출 2조 7,000억 엔의 거함이 되었다. 허풍을 실현시킨 것이다.
손정의는 일본 내 손꼽히는 갑부이기도 하다. 그의 재산 목록 1호는 소프트뱅크의 지분 21%다. 「포브스」에 따르면 2012년 초 그의 재산은 72억 달러로 평가되었다. 유니클로의 야나이 다다시(柳井正)에 이어 일본 두 번째 부자다.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에도 60위로 이름을 올렸다.
꿈조차 마음껏 꿀 수 없던 자이니치
어릴 적 야스모토 마사요시(安本正義)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불린 손정의에게 있어 '자이니치(재일조선인)'라는 뿌리는 드러내고 싶지 않은 콤플렉스였다. 그는 1957년 8월 일본 큐슈 사가 현의 한인 밀집지역 무허가 판자촌에서 태어났다. 대구가 고향인 할아버지 손종경은 열여덟 살에 탄광 노동자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아버지 손삼헌도 중학생 때부터 돈벌이에 나서야 할 만큼 가정 형편은 팍팍했다.
그러나 어린 손정의가 마음껏 꿈을 펼치기에 가난보다 더 큰 걸림돌이 있었다. 일본 사회에서 차별 받는 재일 한인 3세라는 사실이다. 그가 어릴 적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을 포기한 것도 한국 국적 때문이었다. 실의에 찬 손정의는 귀화시켜 달라고 부모를 졸랐지만, 그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선생님도 훌륭한 직업이지만, 너는 다른 쪽에 소질이 있는 것 같구나"라고 다독였다.
손정의의 부모는 교육열이 매우 높았다. 또 가난을 떨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부친은 밀조주를 만들어 팔 정도로 안 해본 일이 없었고, 파친코 사업 등으로 돈을 벌기도 했다. 손정의가 중학교에 입학하자 가족들은 대도시 후쿠오카로 이사해 그를 명문고 진학률이 높기로 유명한 조난중학교에 전학시켰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해 명문 구루메대학 부설고등학교에 입학한 손정의는 일찌감치 인생의 승부수를 던진다. 1학년 때 버클리대학으로 4주간 어학연수를 다녀온 그는, 돌연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자유분방하고 개방적인 미국 사회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다. 인생의 롤모델 사카모토 료마각주1) 도 이때 만났다. 에도 막부 말기의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를 주인공으로 한 시바 료타로(司馬遼太朗)의 장편소설 『료마가 간다(竜馬がゆく)』를 정독하며, 영웅 료마처럼 큰 포부를 펼치기 위해 비즈니스의 세계에 승부를 걸기로 결심했다.
미국 유학을 다녀와서 '야스모토'라는 일본식 성 대신에 한국식 성 '손'씨를 고수했던 손정의는 1990년 일본에 귀화했다. 귀화 이유를 "한국 국적으로는 여권 발급이 번거롭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국적은 바꿨지만 한국식 이름은 지켰다. 일본 정부가 '손 씨 성을 가진 일본인이 없다'는 이유로 귀화하려면 성부터 바꾸라고 요구했으나, 미국 유학 때 만나 결혼한 일본인 부인 오노 마사미(大野優美)를 먼저 손 씨로 개명시키면서까지 한국식 성을 지켰다.
승부사의 '인생 50년 계획'
그가 미국에서 고교 과정을 3주 만에 마친 이야기도 유명하다. 6개월 어학코스를 거쳐 샌프란시스코 교외의 세라몬테고 10학년(고교 1학년)으로 편입한 그는, 월반을 거듭하더니 3주 만에 고교 졸업 검정고시에 도전했다. 막상 검정고시 기회가 주어지자, 크나큰 문제를 깨닫게 된다. 시험문제를 풀기에 그의 영어 실력이 한참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손정의는 시험감독관에게 "영어 실력을 보는 게 아니지 않냐"며 일영사전 사용과 시험시간 연장 허락을 받아냈다.
홀리네임스칼리지를 다니다가 1977년 버클리대학교 경제학부 3학년에 편입한 때가 만 열아홉이다. 이때 청년 손정의는 '인생 50년 계획'을 세웠다. "20대에 사업을 일으키고 이름을 떨친다. 30대에 적어도 1,000억 엔의 자금을 모은다. 40대에는 일생일대의 승부를 건다. 즉, 큰 사업을 일으킨다. 50대에 사업에서 큰 성공을 이룬다. 60대에 후계자에게 사업을 물려준다." 놀랍게도 이후의 그의 삶은 이 계획에서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되어 왔다.
버클리대학 재학 시절 손정의는 우연히 과학잡지 『파퓰러 일렉트로닉스』에서 본 인텔 마이크로프로세서 확대 사진에 마음을 빼앗겨 IT 세계에 입문하게 된다. 이때 고안한 전자음성번역기를 샤프에 팔고 받은 1억 엔을 종자돈으로 해서, 소프트웨어회사 유니손월드를 설립했다. 그리고 당시 일본에서 선풍적 인기를 끈 '인베이더' 오락기를 미국에 수입해 6개월 만에 1억 엔 넘는 이익을 내기도 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일본으로 돌아온 손정의는 1981년 9월, 자본금 1,000만 엔으로 소프트뱅크를 세웠다. 때마침 전자오락과 PC 붐이 일면서 회사는 파죽지세로 성장했다. 1년 만에 사원 30명에 매출 20억 엔, 창업 2년 후인 1983년에는 사원 125명에 매출 45억 엔의 회사로 성장했다.
2011년 일본 경상손익 흑자 주요 기업 (2012년 3월 기준 / 단위 : 엔, 괄호 안은 증감률)
소프트뱅크는 2011년 대지진과 엔고 영향 속에서도 전년도에 비해 10% 늘어난 5,736억 엔(약 8조 700억 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 자료 : 「니혼게이자이」
보수적인 일본 재계가 손정의에게 보내는 평가는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M&A를 통해 끊임없이 사업을 확장하는 그를 두고 '사업다운 사업은 하지 않으면서 기업사냥을 하는 도박꾼', '거품을 일으키는 사나이'라고 비난했다. 무리한 사업 확장에 소프트뱅크의 몰락을 점치는 사람들까지 나왔다.
실제 그는 1990년대 중반부터 M&A를 통해 사세를 급성장시켰다. 1994년 기업공개를 하며 모집한 자금이 M&A에 필요한 실탄이 되었다. 세계 최대 컴퓨터전시회사인 컴덱스의 운영권을 인수했고, 창립 1년에 불과한 신생기업 야후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 세계 최대 컴퓨터출판사 지프데이비스 출판 부문도 인수했다. 기업공개를 한지 불과 1년 반 만에 당시 소프트뱅크 매출의 다섯 배 규모(31억 달러)의 글로벌 빅딜을 성사시켰다.
밑바닥까지 추락한 적도 있다. 1983년 만성간염 진단을 받고 원격경영을 하며 3년간 투병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회사는 10억 엔 빚더미에 올라있었다. 2000년 닷컴버블 붕괴 때 소프트뱅크의 주가도 100분의 1로 꺼졌다.
하지만 몇 차례 고비를 넘기며 소프트뱅크는 번창했다. 2000년대 들어서 소프트뱅크는 PC소프트웨어와 출판에서 통신으로 승부처를 옮겼다. 2001년 개시한 일본 최초의 초고속인터넷사업 야후BB는 '파라솔부대'로 불리는 공격적인 판촉 활동으로 1년 만에 100만, 2년 만에 300만 가입자를 확보했다. 2006년에는 만년 꼴찌 통신 업체 보다폰재팬(현 소프트뱅크모바일)을 일본 M&A 사상 최대금액(2조 엔)을 주고 사들이며 이동통신 시장에 진출했다. 이후 일본 최대이통사 NTT도코모를 제치고 아이폰 출시 경쟁에서 선점하며 이동통신 시장에도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아이폰 3GS 발표회에서의 손정의
손정의는 2005년 스티브 잡스에게 아이팟에 전화 기능을 추가한 제품을 만들 것을 제안하며, 그런 제품이 나온다면 일본에서 자신이 판매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잡스는 "그 전에 휴대폰 사업 라이선스부터 따두라"고 화답했다. 2007년 아이폰이 세상에 나오자, 손정의는 일본 내 아이폰 3GS 판매 독점권을 갖는다.
허풍이라 비웃음 사던 꿈을 현실로
인생 50년 계획에 따르면 손정의는 후계구도를 그리는 단계에 서있다. 창업 30주년인 2010년 6월 발표한 '신(新) 30년 비전'은 더욱 원대한 포부를 담았다. 30년 후 시가총액 200조 엔, 계열사 5,000개를 거느리는 세계 톱 10 기업이 되겠다는 구상이다. 현재 시가총액보다 100배나 큰 기업집단을 만든다는 것이다. '손정의 2.0(후계자)'을 키우기 위해 소프트뱅크 아카데미아도 개교했다.
정체되어 있는 듯한 일본 사회에서 그의 행보와 언행은 파격적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를 고까운 시선으로 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이후 이재민 지원 성금으로 100억 엔을 기부한 것조차도 장삿속으로 치부하는 사람도 있다. 손정의는 트위터 등을 통해 원자력발전에 의존적인 일본의 에너지정책을 비판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아, 일본 최대 경제단체 게이단렌(經團連)과 정면으로 충돌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론 150만 명 넘는 트위터 팔로어를 몰고 다니는 걸 보면, 그의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상당한 것 같다.
손정의의 신 30년 비전 역시 30년 전 비웃음을 사면서도 당당하게 선언했던 창업포부 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거창하다. 그래서 한바탕 꿈으로 끝날지 아니면 새로운 소프트뱅크 성공 신화가 전개될지 가늠조차 어렵다. 그러나 '인터넷이 마음의 고향이라고 말하는 사나이' 손정의가 인생을 걸고 있는 '디지털 정보혁명'은 계속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