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ews.donga.com/3/all/20150414/70686323/1
<신문에는 2000자로 제한되어 있어 짧습니다. 아래 원래 쓴 글은 약간 더 깁니다. >
클래식 특공대장 함신익 지휘자
(2015.4.13.) 동아일보 동아광장 - 길게 쓴 원본
“내가 무식해서 뭘 알아야지-”
주위 친구에게 함께 콘서트를 가자고 하면 대부 분은 이처럼 클라식 음악은 어려워서 함부로 근접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중학교만 나왔어도 독일의 3B가 바흐 베토벤 브람스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베토벤의 3대 교향곡이 영웅교향곡, 전원교향곡, 합창교향곡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사실 이 정도 아는 것은 무식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식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학창시절 음악 시간에 시험을 보기 위하여 머리로만 음악을 배웠지 실제 음악을 즐길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혹 라디오에서 명곡 감상이라는 시간이 있어 들어보려면 알지 못하는 외국어처럼 생소하기만 하였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라디오, 텔레비전, 스마트폰 등 음악을 들으려고 한다면 기회가 얼마든지 넘쳐나고 있지만 말이다.
이렇게 스스로를 무식하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뛰어든 사람이 지휘자 함신익이다. 그는 클라식 음악을 생음악으로 들어본 기회가 없던 사람들에게 클라식을 즐길 기회를 제공하기 위하여 전국 방방곡곡을 누빌 예정이라고 한다. 그가 창단한 심포니 S.O.N.G(Symphony Orchestra for the Next Generation)의 첫 무대는 소록도였다고 한다. 무대가 없는 지역을 위하여 트럭을 개조하여 이동 무대를 만든 것이다. 말하자면 붕어빵 장사처럼 기동력을 가진 클라식 특공대이다.
함신익은 서울 삼양동 달동네 작은 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건국대 졸업 후 달랑 미국 돈 200달라를 들고 미국에 가서 식당 웨이터 트럭 운전 등 온갖 험한 일을 하며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1960-70년대 젊은이라면 이렇게 해서라도 미국에 갈 기회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 사치였다. 이만큼 나라가 어려웠다.
“가난이 나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이런 고백은 어려운 시절 역경을 이겨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더구나 미국 예일대 교수인 그가 귀국 대전교향악단 지휘자로서 성공을 거두고 KBS 지휘자로 서울에 입성하였지만 그의 삶은 녹녹치 않았다. 단원 평가 문제 등의 문제로 갈등을 겪다가 사임을 하는 아픔도 겪었다. 이러한 역경과 고난을 겪었기에 그가 클래식 특공대를 조직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누가 이처럼 몸을 던져 교향악 음악을 전하려고 나선 사람이 있었던가?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이동 오케스트라 연주가 가능하도록 2억원 넘는 5.5t 트럭 이동 무대를 노루그룹 한영재 회장이 나서서 마련해주었고 연습실도 무료로 빌렸다고 한다. 그리고 앞으로 3년간 전국 순회공연을 열 수 있는 재원도 지원받았다고 한다.
우선 단원은 30명을 선발하였다고 한다. 사실 사립 교향악단에서 30명을 거느리면서 살림을 하기란 정말 지난한 일이다. 한양대 교수였던 K교수는 교향악단을 운영하면서 엄청 고생을 하였다. 평생 음악만 하던 분이 무리수를 쓰다가 교수 채용 비리로 곤욕을 치르고 세상을 떠났다. 이만큼 사설 교향악단 운영이란 어려운 일이다.
젊은 음악도라면 연주 실적을 쌓아 어디 취직하는데 도움이 되려고 음악회를 많이 연다. 이들은 실적을 쌓아야 하기 때문에 수준 높은 음악으로 프로그람을 짜기 마련이다. 또 직업 교향악단은 평론가들의 “수준 높은 연주였다”라는 평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기량이 요구되는 대곡을 연주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클라식 특공대가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해결책은 우리나라 오페라계의 실패에서 답을 얻을 수 있다. 서양 오페라는 귀족 계급의 고상한 취미 활동이었다. 귀족들은 경제적으로 넉넉했고 상당한 문화에 대한 소양도 있고 시간도 많았다. 그들은 생업을 위한 일은 하지 않고 즐기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오페라는 바로 이러한 귀족 또는 귀족 생활에 합류하고 싶은 일반 서민을 대상으로 하면서 발달한 예술이다.
그러나 한국 오페라는 관객의 수요 욕구로 시작한 것이 아니고 초기 일본 유학 출신 성악가들이 오페라를 하고 싶은 욕망에서 시작되었다. 지금도 오페라단은 푸치니 오페라를 이탈리아 원어로 공연하는 것을 자랑한다. 이것은 “우리 오페라는 이만큼 수준 높은 오페라를 하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인 듯싶다. 원어 연주는 도무지 청중에 대한 배려는 없고 연주자의 입장만 고려한 연주회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거기다가 호호 프로그램을 만들고 몇 천원씩 받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필요한 정보를 간결하게 넣어 비용을 줄일 생각은 왜 안하는지. 오페라 출연자 중에는 이 오페라 출연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프로그램이라도 호화롭게 만들어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음직하다. 그러나 이런 자세로 오페라단을 운영하면 필패할 수밖에 없다.
음악사를 보면 일반 청중의 음악 욕구가 늘어나면서 음악 시장은 확장되어 왔다. 그런데 현대음악은 청중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표현 욕구를 담으려는 실험만 거듭해 왔다. 결과적으로 현대음악은 난해해졌고 청중은 대중음악 쪽으로 몰려갔다. 그래서 현대음악 연주장에는 청중은 없고 현대음악을 작곡하여 실적 쌓으려는 작곡가만 남아 있는 형색이다. 이러한 청중 부재의 상황은 사실 작곡계가 자초한 것이다.
클라식 특공대가 성공하려면 청중이 듣고 싶어 하는 음악을 연주를 해야 하고, 이런 작품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함신익 지휘자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삶을 살아왔다. 이제 관조의 경지에서 클라식을 듣고 싶어하는 청중에게 음악을 공급하려는 마음으로 클라식 특공대장으로 나선 것으로 보인다. 함신익 지휘자의 성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