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산 서릉 설사면 일부
나는 단순함, 꾸밈없는 느낌, 그리고 야생의 삶이 주는 장점들을 갖고 싶었고, 인공적인 습관
과 편견, 문명의 단점들을 내게서 없애고 싶었으며 (……) 서부 야생의 고독과 장대함의 한복
판에서 인간 본성과 진정한 관심사에 대해 더 정확한 시각을 갖고 싶었다. 고통이 주는 즐거
움, 그리고 위험의 진기함을 경험할 수 있는 눈의 계절이 나는 더 좋았다.
―― 에스트윅 에반스, 『1818년 겨울과 봄에 했던 서부의 주와 지방을 지나는 6,400킬로미
터의 도보여행』(존 크라카우어, 『야생 속으로』에서 재인용)
▶ 산행일시 : 2020년 3월 1일(일), 흐림, 안개
▶ 산행인원 : 6명
▶ 산행시간 : 10시간
▶ 산행거리 : GPS 도상 12.3km
▶ 갈 때 : 청량리역에서 KTX 타고 진부에 가서, 택시 타고 마평리 마평3교 앞에서 내림
▶ 올 때 : 대화리 던지골 마을에서 대화 택시 불러서 타고 평창에 와서, KTX 타고 상봉
에 옴
▶ 구간별 시간
06 : 22 - 청량리역 KTX 출발(진부 07 : 45 도착)
08 : 10 ~ 08 : 12 - 마평리(馬坪里) 마평3교 앞, 산행준비, 산행시작
08 : 47 - 간벌지대 벗어나 휴식
09 : 40 - 임도
10 : 26 - △1,039.6m봉
11 : 14 - 안부, 휴식
12 : 50 ~ 13 : 57 - 잠두산(蠶頭山, △1,244.1m)
14 : 37 - ┣자 갈림길 안부
15 : 36 - 백석산(白石山, △1,364.8m)
16 : 30 - 1,360m봉 우회
16 : 40 - 마량치, ┣자 갈림길, 오른쪽은 던지골로 가는 길, 던지골로 감
17 : 42 - 골짜기
17 : 50 - 임도
18 : 12 - 던지골 마을, 산행종료
18 : 30 - 평창역, 18시 59분발 상봉 가는 KTX 탐
20 : 08 - 상봉, 저녁, 해산
1-1. 산행지도(잠두산, 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 1/25,000)
1-2. 산행지도(백석산, 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 1/25,000)
▶ 잠두산(蠶頭山, △1,244.1m)
당일 산행으로 산을 좀 더 많이 타려면 산에 최대한 아침 일찍 접근하는 게 관건이다. 문제
는 교통수단이다. 근래 캐이 님이 개발한 주로 산간 역을 경유하는 강릉행 KTX의 이용은 상
당히 주목할 만하다. 오늘 산행지인 진부의 경우, 동서울에서 06시 40분발 첫 버스를 타면
2시간 10분 걸려 진부에 도착한다. 청량리에서 진부를 경유하는 06시 22분발 첫 KTX를 이
용하면 불과 1시간 23분 걸려 진부에 도착한다.
진부까지 요금은 버스의 경우 13,100원, KTX는 15,200원(일요일 첫 열차를 주초에 예약하
여 25% 할인받은 가격이다)이다. 버스보다 더 이른 출발시간을 감안하며 KTX가 1시간 5분
이나 빨리 진부에 도착한다. 아울러 그 시간만큼 산을 더 많이 탈 수 있다. 분초를 다투는 산
꾼에게 아침 1시간은 매우 크다.
진부역 07시 45분 도착. 화장실 다녀오고 미리 스패츠 매는 등 서둘러 산행 준비하고 역사
앞에 줄지어 대기하고 있는 택시 2대에 3명씩 분승하여 마평리 마평3교로 간다. 마평3교는
오대천의 유장한 물줄기를 내려다보는 청심대(淸心臺)를 돌아들어 자우실 입구의 지천에 놓
인 다리다. 허름하다. 마평리는 물론 진부 전역이 안개가 자욱하다. 햇볕이 난들 쉬 사라질
안개가 아니다.
잠두산은 당일로는 흔히 백석산과 연계하여 오른다. 일반산악회는 그 들머리로 모릿재 고개
마루나 자우실 또는 자각정 계곡을 잡고, 날머리는 백적산 넘어 마랑치에서 던지골이나, 마
랑치골로 잡는데, 우리는 ‘배우고 나서는 잊어버리라는 위기정석’처럼 일반등로와는 달리 미
답이자 미지인 가급적 긴 능선을 잡는다.
마평3교를 건너자마자 가파른 생사면을 치고 오르려 했으나 느긋이 왼쪽 사면을 돌아 오르
는 임도의 유혹을 못 이겨 임도를 따라간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얼음으로 말갛게 코팅 포장
한 임도에 미끄러져 넘어질 뻔하다 임도 가장자리의 눈밭을 골라 딛는다. 임도는 이내 눈길
이다. 한 피치 올라 땀난다. 그예 바람부리 님은 반팔차림 한다.
임도는 오른쪽 산모롱이로 가고 우리는 엷은 능선 붙들어 눈밭 고라니가 러셀한 자국을 쫓는
다. 이어 잡목 숲을 뚫는다. 안면 블로킹과 더킹, 풋워크가 번거로웠으나 이런 잡목 숲이 오
히려 나았다. 도리 없이 간벌지대에 들어서고 간벌한 나뭇가지를 아무렇게나 늘어놓아 걷기
가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사면의 눈밭을 골라 돌아 오르기를 반복한다. “눈 내린 들판을 걸
어갈 때/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말라(踏雪野中去/不須胡亂行)”라는 서산대사의 경계가 내 걸
음을 더욱 어렵게 한다.
자작나무 숲을 지난다. 이렇듯 겨울 눈밭에서 선 자작나무가 퍽 아름답게 보이지만 한편으로
는 흰 수피가 마치 흰 종아리를 들어낸 것처럼 보여 안쓰럽기도 하다. 최창균의 시 ‘자작나무
여자’가 생각나서다.
그의 슬픔이 걷는다
슬픔이 아주 긴 종아리의 그,
먼 계곡에서 물 길어 올리는지
저물녘 자작나무숲
더욱더 하얘진 종아리 걸어가고 걸어온다
(……)
2. 잠두산 들머리, 마평3교 앞
3. 자작나무숲. 종일 안개가 걷히지 않았다
4. 산자락 도는 임도 오르는 중
5. 간벌지대 끝나고 가파른 오르막이 수그러든 틈을 타서 휴식한다
6. 잠두산 주릉 아래 임도, 바람부리 님
7. 잠두산 주릉을 향하여
8. 수렴에 가린 백석산
9. 잠두산 정상 주변
10. 멀리는 등용봉(절구봉)
11. 멀리 가운데는 괴밭산
간벌지대에 벗어나고 가파른 오르막이 잠시 수그러든 틈을 타서 휴식한다. 걷기를 멈추고 휴
식할 때는 한기를 느낀다. 바람은 없어도 대기는 차갑다. 나뭇가지에는 상고대 눈꽃이 움트
려한다. 고도를 높일수록 눈은 점점 깊어진다. 발목 덮는 눈이다. 습설이다. 발을 딛고 빼내
기를 반복하다보니 적잖이 힘이 들기 마련이다. 한 발자국으로 여러 사람이 간다.
산허리 도는 임도에 올라선다. 휴식한다. 이 임도를 따라 산허리 돌고 돌면 잠두산을 좀 더
수월하게 오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당연히 일로직등 한다. △1,039.4m봉. 잠두산 북동릉
끄트머리에 있는 준봉이다. 좁다란 공터에 키 큰 나무숲이 둘러 조망은 무망이다. 삼각점은
깊은 눈 속 ╋자 방위표시만 발굴한다. 삼각점은 등급에 따라 ╋자 방위표시를 새긴 화강암
의 크기를 달리하는데 여기는 4등 삼각점의 크기이다.
이제는 오르내림이 적지만 잡목 숲이 거칠다. 일본 산악계의 선구자로 불리는 오시마 료키치
(大島亮吉, 1899~1927)가 『山, 硏究와 隨想』에서 말한 “눈은 사람이 만든 길보다 훨씬 걷
기 편할 때가 있으며 끝없는 넓이를 가진 길이다”는 반은 맞다. 설원이라면 막 누비기 좋겠지
만 휘둘려 생눈물 쏟는 이런 잡목 숲에서는 된 고역이다.
좌우사면 아래로 임도가 가까운 안부에 내려서고 휴식한다. 냉탁주로 마른 목 추긴다. 잡목
숲은 그쳤다. 설원을 오른다. 능선 마루금은 눈이 잔뜩 몰려 있어 자주 사면으로 비켜간다.
아사비 님이 오르다 말고 웬 설동을 파는가 했더니 덕순이를 찾는 중이다. 기껏 발목을 넘는
눈이지만 다져져서 그러니 온전한 눈밭은 훨씬 깊다.
그 눈 속에서 덕순이의 행적을 쫓기란 결코 쉽지 않다. 실토하건데 나는 두어 번 건화핀 꽂은
채 잡목을 감고 다소곳한 덕순이를 언뜻 보았으나 그 행적을 쫓지 않았을 뿐더러 내색하지도
않았다. 내더러 당장 쫓으라고 종용할 것이고 그러면 내 먼저 죽어날 것이므로. 1,000.6m봉
을 대깍 넘고, 길고 끝없는 넓이의 설원을 간다. 건너편 백석산을 가린 수렴을 걷으려고 부지
런히 발걸음해보지만 헛수고다.
잠두산 정상 바로 아래 평평하고 양광 가득한 설원에 점심자리 편다. 즐거운 산상오찬이다.
오리훈제 굽고, 주꾸미볶은밥 볶고, 넙죽이 오뎅 삶고, 느타리버섯 라면 끓인다. 반주는 매산
덕순이주, 화악 덕순이주, 노박덩굴주다. 이러니 오찬이 금방 1시간이 넘을 수밖에. 먹고 마
시며 가가대소하려고 잠두산에 온 것 같다.
잠두산 정상은 좁은 공터다. 사방 잡목 숲 가려 조망도 별로 좋지 않다. 조망은 잠두산 정상
에서 남쪽 능선의 마루금 따라 30m쯤 가다 잡목 숲 잠깐 헤치고 서쪽의 절벽 위에 다가가면
시원스레 트인다. 흐린 날씨와 안개라도 괴밭산을 위시한 가경을 다 가릴 수는 없다. 교대로
들여다본다. 얼근하게 부른 배 어르며 백석산을 향한다. 설원이 계속된다.
12. 멀리 가운데는 괴밭산, 앞은 백적산 서릉
13. 멀리는 괴밭산 서릉, 그 앞은 백적산 서릉
14. 백석산 가는 길
15. 백석산 가는 길
16. 잠두산, 멀리서 보면 누에가 머리를 쳐든 모습이다. 그 뒤 왼쪽은 백적산
17. 앞이 백석산
18. 가운데가 던지골
19. 잠두산
▶ 백석산(白石山, △1,364.8m)
인적은 아무 데도 없다. 기왕의 길은 흔적 남기지 않고 눈 속에 묻혔다. 설원 누빈다.
1,208.0m봉 넘고 눈길 지쳐 바닥 친 안부는 ┫자 갈림길이다. 백석산 품에 든다. 아사비 님
이 비로소 모일간지 ‘강×남자’임을 커밍아웃하는 오르막이다. 오늘 눈길 러셀의 하이라이트
구간이다. 가파른 오르막 곳곳이 무릎이 넘도록 깊다. 더구나 습설이다. 눈 속에 박힌 발은
물론 스틱도 빼내기가 힘들다. 이런 눈길 러셀을 아사비 님이 도맡는다. 나와 캐이 님은 카메
라 들어 경점일 만한 조망처는 다 들른다.
백석산 정상. 너른 헬기장이 오늘은 눈부신 눈밭이다. 날은 아까보다 더 궂어졌다. 조망은 잠
두산 쪽으로 약간 트인다. 백석산 정상 조금 못가서 서쪽으로 뻗은 능선이 장릉이다. 숙제다.
오늘 거기를 가기에는 무리다. 생각으로는 주왕산, 청옥산, 삿갓봉 넘어 남병산에 이르고 싶
지만 다 놓아버린다. 가장 빠른 하산을 도모한다. 던지골이다.
던지골로 내리는 마량치가 여기일까 골골을 살피며 간다. 여러 표지기가 안내한다고 했다.
백석산을 한 차례 뚝 떨어져 내렸다가 오르는 1,360m봉이 까다로운가 보다. 도중에서 여러
표지기들이 왼쪽 사면을 우회하도록 안내한다. 길게 돌아 다시 능선 마루금을 잡아 내린다.
안부. 마량치다. 지도에는 1,313.3m봉 직전 안부다. 표지기 두 장과 ‘대화방향’ 표지판이 안
내한다.
하산! 산행 내내 은근히 맘 졸였던 내리막이다. 아이젠 단단히 맸다. 급전직하 설벽이다. 그
러나 설벽이기에 다행이다. 맨 땅이 얼었다면 아주 고약했으리라. 눈이 깊어 걸음걸음 제동
이 잘 된다. 비탈진 사면을 트래버스 하여 1,360m봉 서릉을 올라서야 한다. 설벽을 트래버스
할 때는 만약에 추락하여 내 걸릴 나무를 보아두기는 하지만 오름이 저리다.
제법 큰 돌탑을 지난다. 인적이라 무척 반갑다. 이 위쪽에 지금은 폐사된 영암사라는 절집이
있다는데 들를 겨를이 없다. 어두워지기 전에 이 험로를 빠져나가야 한다. 영암사는 100여
년 전 산삼을 캐기 위해 지은 산막이 사찰로 변하여 여승 한 분이 머물렀다고 한다. 엷은 지
능선을 돌고 돈다. 까닥하면 골로 간다. 등로인지 분별하기 어려운 데는 여러 의견을 모아서
정한다.
1,360m봉 서릉을 가까스로 붙는다. 바윗길 섞인 능선 마루금 내리막도 만만하지 않다. 그래
서일까? 눈길에 누군가 오다가 뒤돌아선 발자국이 선명하다. 한 사람이다. 아마 오늘 오전 때
이다. 갑자기 길이 확 풀렸다. 줄달음하여 내린다. 가파른 내리막에는 고정 밧줄이 매인 데도
나온다. 여태 힘준 눈(眼) 푼다. 갈지자 연속해서 그리며 산죽 숲을 내리고 계곡에 다다른다.
계류 따라 내린다. 이윽고 콘크리트 포장한 임도와 만난다. 이정표에 던지골 0.2km다. 대화
택시 불러 던지골로 오게 한다. 던지골이 그냥 골이 아니다. 가로등 불 밝히고 굴뚝에 저녁연
기 오르는 두메산골마을이다. 개 짖는 소리조차 반갑다. 택시가 때마침 도착하고 곧바로 평
창역을 향한다. 거기 화장실에서 땀에 전 낯 씻고 옷 갈아입고, 상봉 맛집에서 뒤풀이할 것이다.
20. 백석산 정상에서
21. 잠두산과 백적산
22. 백석산 정상에서, 아사비 님
23. 가운데가 잠두산, 앞은 백석산 서릉
24. 백석산 서릉 설사면
25. 1,360m봉. 이 너머가 던지골로 내리는 마량치다
26. 주왕산, 눈밭은 벌목지대다
27. 던지골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