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길/최하림
많은 길을 걸어 고향집 마루에 오른다
귀에 익은 어머님 말씀은 들리지 않고
공기는 썰렁하고 뒤꼍에서는 치운 바람이 돈다
나는 마루에 벌렁 드러눕는다 이내 그런
내가 눈물겨워진다 종내는 이렇게 홀로
누울 수밖에 없다는 말 때문이
아니라 마룻바닥에 감도는 처연한 고요
때문이다. 아침내 나는 고요에 이르렀구나
한 달도 나무들도 오늘 내 고요를
결코 풀어주지는 못하리라
<시 읽기> 집으로 가는 길/최하림
고향이란 아시다시피, 집 떠나 객지로 나선 자식들에 의해 비로소 간절해지는 이름이다. 그곳은 많은 길을 걷고서야 당도할 수 있는 곳이며, ‘마루’가 있는 곳이며, 무엇보다 모든 온기의 근원인 ‘어머님’이 계시는 곳이다.
한데 어머님 음성 안 계시니 ‘썰렁’하고 ‘치울’(‘추운’이 아니라!) 수밖에. 심술 난 아이처럼 “마루에 벌렁 드러눕는” 것으로 짐짓 허탈감을 가려보나, “이내 그런/내가 눈물겨워진다.” 그 눈물겨움이 “종내는 이렇게 홀로/누울 수밖에 없다는 말 때문이/아니라”고 적고 있지만, 어찌 무관하기만 하리오. 이렇게 여기까지 읽었는데, 그런데 그 뒤가 심상치 않다.
나는 벌떡 일어나 몸을 바로하고, 뒷부분의 ‘고요’ 대목을 다시 읽는다. 이 “처연한 고요”라니! 고향 노래의 감상성을 넘어 이 차갑고 투명한 감각에까지 나아간 시적 총명의 예가 우리 시사 속에 몇이나 되겠는가. 저 없음으로서 있는, 깊은 허무인 듯 아득한 평화인, 차가운 듯 맑은, 순한 듯 공포스런, 친근한 듯 이물스러운 저 무엇을 이만큼 온전히 받들고 있기라니.
익숙한 향수이 시로 읽으려던 내 통속적 독법은 여기에 이르러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 고요의 이 기이한 중성성은 다른 차원을 열고 있는 것이다. (얼음과 드라이아이스가 다른 것처럼). 이러한 ‘고요의 발견’과 더불어 이 시의 은밀한 맛과 기품은 “치운”과 “홀로/누울 수밖에 없다는 말”(‘것’이 아니라!)과 “한 달”이라는 말들의 미묘한 쓰임새 속에 숨어 있다. 그 말들을 어찌 맞이할지는 읽는 이 각자의 몫일 터이다.
―김사인, 『시를 어루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