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도의 달밤(1)
남창을 통해 휘영청 밝은 달빛이 나를 못 견디게 한다. 참새의 눈알 같은 하늘에 달빛이 가득 차면 “러셀”의 행복한 기록도 나는 읽을 수 없는 책이 된다. 부름이 가까워져 달이 숨겼던 자태를 빛내기 시작하면 이불을 뒤집어쓰고도 잠 못 드는 것이 나의 성벽이다.
방금 비가 내릴 듯 구름이 달은 가로 막아 그믐같이 어두운 밤에도 그 두꺼운 구름 한쪽 끝으로 달빛이 세어 나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이기도 하다. 이런 습성이 언재부터인지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일이라 천성으로 돌려 버린다.
서릿발이 싸늘한 겨울밤이면 방 안에서 창을 통해 달을 쳐다본다. 늦게 귀가하는 주정꾼을 비쳐주는 고마운 달이 하얗게 웃고 있다. 봄철의 달 밝은 밤이면 이유 없이 들뜬 감정으로 밤거리를 실컷 헤매고 나서야 꿈 많은 잠을 이루기도 하지만, 지금처럼 오곡이 들 한복판에서 가을이 무르익는 계절엔 도저히 방안에만 앉아있을 수가 없다.
나는 훌훌히 집을 나선다. 밝다 못해 푸르도록 희맑은 달빛에 비스듬한 그림자를 옆으로 밟으며 송도 쪽 해안을 걷는다. 이글이글 불타는 가로등이 이열종대로 늘어섰다. 조롱조롱 불 밝힌 황홀한 도심지의 전선에 걸린 달은 애수를 불러일으킨다. 가로등 불빛에 존재의 의미를 빼앗긴 달빛은 어쩌면 생이별의 눈물인양 애처롭기만 하다. 아마도 아상(李箱)이 이런 달을 가리켜
“이태백과 함께 죽었어야할 달”이라고 단정을 내렸을 깨다.
그러나 해안선에 흐르는 달은 그렇지만은 않다. 영도 뒷산이 주춤주춤 남쪽으로 뻗어 병풍처럼 펼쳐진 배경위에 솟은 달은 황금빛으로 밝기만 하다. 연한 갈색의 바다물이 맑은 달의 웃음을 소복이 담고 촐랑촐랑 춤을 춘다. 파도에 쓸린 물결이 제마다 달을 업고 남실거리니 바다는 온통 금빛으로 가득하다.
물에 잠긴 달을 낯익혀 보면서 산곡을 굽어가는 ‘아스팔트’ 길을 따르면 달은 나를 송도로 안내한다. 이렇게 고요하고 티끌만큼도 잡념이 없는 밤이면 먼 곳의 것이 가까워오고 옛것이 또한 새로워진다.
부산생활을 고역처럼 합숙소 싸늘한 냉돌에서 겨울만을 보내고 서울로 발령이 나니 새 각시 친정 가듯 좋아라고 떠나버린 ‘오’ 형의 생각이 떠오른다. 이 달 밝은 밤의 송도를 꼭 같이 한번 걷지 못함이 불평처럼 떠오른다. 이런 상념에 잠기며 걷다보니 길은 다시 동남쪽으로 틀어진다. 시선이 바다 위 멀리에 떨어졌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금빛 바다가 은빛으로 변했다.
해상월경(海上月景)어느 듯 미범장(美帆莊)이란 커다란 요정 간판을 왼쪽으로 시원한 공기에 우선 한번 취해야 한다. 창파만경(滄波萬頃)넘실거리는 파도를 타고 남해 멀리서 불어온 티 없는 바람에 ‘휴우⋯’심호흡을 한다.
“아! 시원한 송도의 바람”
시정(詩情)이 동할 듯한 느낌으로 산 고개에 발을 멈추면 연연한 바람이 송도의 서곡(序曲)을 실고 온다. 송도의 서곡은 천천한 곡이다. 나의 이렇듯 메마른 감정을 들뜨게 하려는지? 연이은 삼박자다. 소매통이 좁은 양복저고리에 팔짱을 끼고 산책하는 서서한 발걸음과 음률이 맞을 듯도 한 삼박이건만 왜 걸음이 어색해지는지⋯
정차장(停車場)에서 돌 층층계를 내려서니 x군 장교구락부와 마주 한 곳에 교회가 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교회 종이’ 냉랭하게 울린다. 이에 뒤질세라 구락부의 ‘밴드’도 쿵작쿵작 울려 퍼진다.
내세를 바라본 회개의 종소리, 육신의 현실에 취한 향락의 북소리. 나의 귀에는 이 두 음이 함께 들린다. 이 이질(異質)의 음이 함께 들린다는 것은 이것도 저것도 충분히 이해치 못하는 탓일 깨다. 그렇다 나라는 오직 하나를 세우지 못하고 방황하기 때문이다. 대범하게 씩 웃어버릴 수 없는 심정에서 나는 다시 우울의 향락을 되씹으며, 또 한번 달을 쳐다본다.
교회의 첨탑을 비치는 달빛과 호텔 특별실의 유리창에 부딪는 달빛이 아무래도 다를 것만 같다.
구두 밑창에 모래알이 아삭아삭 으스러지는 돌계단을 내려서서 발목이 폭폭 빠지는 모래사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줄지은 물결이 한 일자로 길게 늘어져 달을 업고 솔솔 기어오다가 모래에 찰싹 부딪는다. 그러면 달은 잔인하게도 산산이 흩어져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그 다음 또 그 다음 달이 와서 부딪는다. 자연의 역사는 이렇게 지속되는가. 대자연 앞에서면 무한히 작은 나를 느낄 수 있다. 물결에 스쳐 굴러가는 모래알 같은 존재 사회의 한자리를 메웠다가 물거품처럼 사라지면 또 다른 부속품으로 그 자리가 메워지고 또 한번 달이 부딪는다. 물거품이 사르르 자자진다.
이것이 불경(佛經)에서 말하는 부증불감(不增不減)이란 말인가. 과연 인간이란 허무한 것인가? 돌아다보는 것도 아득히 먼 옛날 같이 그 끝이 가물가물하고 군데군데 고을 안개가 끼어서 자세치 않은 기억을 더듬는 인생황혼기의 회상은 좋은 추억일는지 모르겠으나, 짤막한 인생 뒤돌아 봤자 걸어온 자취마다 고인 눈물까지 빤히 들어다 보일 삼십대의 회상이란 아름다운 추억일 수가 없다. 보다 중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구상이 아니겠는가? 모래사장에 부딪히는 긴 치마폭 물결을 또 한번 바라본다.
한결 같이 제자리를 드나드는 물결은 앞뒤에서 울리는 새 장구 소리에 맞추어 한번쯤 신나게 출렁거려 볼만도 하건만 밤마다 듣는 그런 소리엔 흥미도 없다는 듯 높은 차원의 리듬에 맞추는지 제대로 출렁일 뿐이다. 물결은 물결대로 나는 나대로 서쪽 해안으로 발걸음을 옮기고자 불쑥 내민 암석 앞 ‘·콘크리트’ 길에 올라서니 바위의 그림자는 쪽 곧은 직선인데 물 안에 잠긴 그림자는 ‘퍼머넌트 웨이브’곱게 매만져진 곡선 한 쌍이 옆을 지나간다. 나는 그만 나도 모르게 적막한 고적감이 질투같이 떠오른다.
걷던 길을 멈췄다. 바위 등에 허리를 기대고 또 한번 달을 쳐다본다.
달은 이런 나를 질책하는지 흰 구름 한 송이가 달을 가리려 한다. 들뜨려는 심정을 바로잡으며 검푸른 수평선으로 시선을 돌리고 무아(無我)의 상태가 되려고 애쓰고 있을 때 심금을 울리는 음악이 있다. 다정하고도 부드럽게, 구락부의 밴드가 다시 시작한 것 같다. 유혹 같은 홍등 애교 같은 청등 그 곡속에는 정봉(情峰)같은 것이 있어 그 봉을 넘는지 순간순간 끊어졌다가 쿵 작하고 울린다.
고독한 산책객을 위해 겸손하거나 차분한 사색의 영력을 침범치 않는다는 배려는 있을 수 없는 송도다. 나는 청각뿐만 아니라 입맛마저 변하는 신경질이 치밀어 걷던 길을 획 돌아섰다. 총총히 ‘아스팔트’길에 올랐을 때 서곡은 끝나고 ‘템포’를 빨리한 어쩌면 태초의 바다처럼 가릴 줄 모르는 노골적인 곳이다. 뒤통수에서 비치는 달 그늘에 머리를 밟고 밟고 잡음이 안 들리는 고갯길을 넘는다. 삶이란 제 마다의 생활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생명의 요소인 피를 팔아 배움을 찾는 고학생,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농민, 정력을 쏟을 곳이 없어 헤매는 실업 군상, 나는 한 달에 사만여원의 생활비를 몽땅 쓰고, 송도의 신바람은 그렇고⋯
태양처럼 열을 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이 민족의 흠집을 샅샅이 내려다보니 달을 쳐다보기가 부끄럽다. 통금시간이 지난 뒤의 달은 무었을 더 자세히 보려는지 점점 더 밝아진다.
1957년 10월
상업은행 천일지에 실었든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