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노벨상 수상자 가와바다 야스나리는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설국이었다”고 첫 문장에서 썼다.소설 ‘설국’의 이 문장이 오늘 한계령에 도착했다. 이 지역 해안가에 올 들어 첫눈이 내려 신세계를 연출한 오후 한계령 정상으로 향하는 오색터널을 지나자 설국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해안가와 강도와 표현이 한층 깊은 눈 이었다.오르막길을 오르면서 눈은 점점 더 강해졌다. 차창으로 보이는 산과 나무는 하얀색뿐이었다. 무엇을 구분하는 것은 의미없는 분별이었고 보이는 것은 눈이 전부였다.나무가지 위에 외줄타기로 덮인 눈조차 그랬다.
굽이굽이 도는 맛이 한계령 올라가기의 맛이라면 맛이다. 내심 걱정했던 길 상태는 넘 좋았다.제설과 푸근한 날씨로 습설이 속히 녹은 측면도 있다.사다리 타듯 한계령 정상으로 가는길, 흘림골이 건너 보이는 곳에는 사진가들이 진을 치고 렌즈를 쭉 내밀고 있다.하나의 색으로 단일화된 눈 풍경을 어떻게 솜씨있게 뽑아낸다는 건지, 괜한 걱정을 하다가 금방 취소했다.야 좋다 멋지다를 몇 번 더 외치다 보니 정상에 도착한다.
많은 차들이 서 있다. 설경은 분명 구경거리다. 그런데 이럴때는 어떻게 눈을 봐야 제대로 직시하는건지 도무지 답이 없는 상황이다. 멋지고 기분 좋은데 행동요령이 안 나온다. 휴대폰을 그냥 들이대 보지만 여의치 않다.천국의 모습이 이런건가. 분별이 없고 하나 된 너와 내가 하나인 세상의 모습이다. 그 잘난 나무도 바위도 다 몸을 감췄다.높낮이도 무효다. 고봉도 협곡도 다 실종상태,한계령에서 보면 위세를 떨치던 7형제봉도 어딘지 볼 수 없다.
가녀린 나뭇가지가 솜방망이처럼 서 있다고 했더니 ‘녹각같다’고 수정해준다. 그 표현 말고는 다른 언어는 모두 얼어붙는 상황이다. 아 설국은 그냥 하얀세상 이구나를 실감한다.
한계령의 설경은 평등하고 그래서 더 평화롭다.누구나 똑같이 바라보고 즐길수 있는 상황에 차별은 없다 누가 더 사진을 잘 찍는다는 자랑도 시시하다. 그냥 눈사람이 되고 풍경이 되는 한계령에서 ‘저 산은 내게 내려와라’하는 노랫말이 귓전을 스쳤다. 그리고 우리는 한계령 천국에서 내려와 지상에 도착해 허기를 채우러 급히 식당으로 향했다. 멋있다가 맜있다로 순간 바뀌었다. 배가 부르니 좋다는 후렴이 이어졌다.
글:김형자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