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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하 20장 12-13절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승리를 맛보라5-기도 후에 응답을 기다리는 사람들
오늘 기도를 통한 승리에 대한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전하기 전에 남북전쟁 때 한 병사가 쓴 기도에 대한 시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무엇이나 얻을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했으나
나는 약한 몸으로 태어나 겸손히 복종하는 것을 배웠노라.
큰 일을 하기 위하여 건강을 요구하였더니
도리어 몸에 병을 주어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노라.
부자가 되어 행복하기를 원했으나
나는 가난한 자가 되므로 오히려 믿음으로 부요하게 되었노라.
한번 세도를 부려 만인의 찬사를 받기 원했으나
나는 세력 없는 자 되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노라.
삶을 즐기기 위해 온갖 좋은 것을 다 바랐지만
하나님은 내게 생명을 주사 온갖 것을 다 즐길 수 있게 되었고,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은 하나도 받지 못하였으나
은연중 나는 희망찬 것을 다 얻었나니
나는 부족하지만
내가 간구하지 않았던 더 좋은 것으로 다 응답되었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한 후에 응답을 기다리는 것도 포함합니다. 그러니끼 믿음의 사람은 믿음으로 기도하고 응답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기다립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신 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날의 사람들은 기다림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기대하던 때에 응답하시기 보다는 하나님이 응답하시길 원하시는 때에 역사하십니다. 그 응답의 때가 어떤 사람에게는 기도하자마자 이루어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정말로 더디게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약속하신 자신의 자녀들에게는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그 자신의 자녀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셨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써 기도 응답에 대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기도에 대한 약속을 말씀하시면서 악한 자라도 자신의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아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천부께서 너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겠느냐고 물으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예수님도 역시 시행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요한복음 14장 13-14절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그리고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어떤 기도는 구한대로 응답이 되지만 어떤 기도는 남북 전쟁중에 한 병사가 기도문을 썼던 것처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응답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이 체험한 기도응답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여호사밧도 역시 세 개 나라가 연합하여 자신과 자신의 나라를 공격하는 긴박한 위기상황에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여러분들이 앞에서 들으신 것처럼 그는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에 대하여,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그리고 조상들과 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또 암몬과 모압과 에돔과 유다와 옛적에 있었던 일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전쟁에 대하여 하나님께 아뢰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여호사밧은 하나님께 묻습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6절에서는 하나님을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여”라고 기도를 시작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 하나님이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우리의 하나님이여”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옛적에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던 믿음의 조상들처럼 수많은 교회의 역사 속에 있는 믿음의 조상들도 역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만나주셨고 그들과 함께 동행하시면서 그들의 삶에 승리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믿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만족시키시는 기쁨을 가지고 역사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여”라고 기도했다면 그것은 옛날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이여”라고 한다면 ‘지금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기록된 과거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은 믿지만, 오늘도 살아계셔서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은 잘 믿지 못합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우리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 혹은 우리의 하나님으로 고백하지는 못합니다. 입과 마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세우셨고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를 몰아내면서 모든 것을 빼앗으려고 하는 저들을 징벌하지 않으십니까?”하고 묻고 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들 가운데서는 ‘예수님께서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저 사람들을 징벌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지?’하면서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사밧은 그들이 자신들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고 있다고 아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징벌하지 않으시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 자신들의 무능력함을 고백합니다.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그런데 여러분들이 역대하 17장 12-19절을 보면 여호사밧이 자기 수하로 둔 군대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여호사밧이 점점 강대하여 유다에 견고한 요새와 국고성을 건축하고 유다 여러 성에 공사를 많이 하고 또 예루살렘에 크게 용맹스러운 군사를 두었으니 군사의 수효가 그들의 족속대로 이러하니라 유다에 속한 천부장 중에는 아드나가 으뜸이 되어 큰 용사 삼십만 명을 거느렸고 그 다음은 지휘관 여호하난이니 이십팔만 명을 거느렸고 그 다음은 시그리의 아들 아마시야니 그는 자기를 여호와께 즐거이 드린 자라 큰 용사 이십만 명을 거느렸고 베냐민에 속한 자 중에 큰 용사 엘리아다는 활과 방패를 잡은 자 이십만 명을 거느렸고 그 다음은 여호사밧이라 싸움을 준비한 자 십팔만 명을 거느렸으니 이는 다 왕을 모시는 자요 이 외에 또 온 유다 견고한 성읍들에 왕이 군사를 두었더라”
여호사밧은 전쟁을 할 수 있는 용맹한 군사 116만 명과 자신의 수하에 많은 군사를 두고 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어떤 적이 와도 한 번 싸워볼만 하지 않을까요? 그가 세운 군인들의 인원은 결코 작은 인원이 아닙니다. 그렇게 많은 군사를 둔 여호사밧이 하나님 앞에서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 큰 군사들을 뒀다 뭐해 데리고 나가서 싸워 이겨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여호사밧이 엄살을 피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여호사밧은 전쟁의 승패가 사람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뭔가 새로운 사역을 할 때 가장 신경쓰는 부분이 돈인 것 같습니다. 돈이 없으면 무슨 일을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돈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계획을 세워도 예산이 얼마인가 부터 계산하고 계획을 잡습니다. 돈으로 해결을 볼려고 하는 것입니다. 돈 때문에 어떤 일을 하는 것에 대하여 찬성하기도 하고 반대하기도 합니다.
물론 돈은 필요합니다. 많이 필요할 수도 있고 적게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느냐입니다. 반드시 그것이 해야할 일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돈을 모으게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 돈이 반드시 교회 성도들만을 통해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돈이 있는 사람들의 것을 감동시키셔서 기쁨으로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십니다.
그렇게 기쁨으로 드리는 사람이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일 수도 있고, 또는 교회 밖에 있는 교회 성도들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드린 헌금을 가지고 하나님 자신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의 역사는 돈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돈은 그저 도구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믿음과 헌신을 보십니다. 그 헌신 속에 헌금도 있고 시간도 있고 절제도 있고 열정도 있습니다.
교회는 돈이 없어서 무엇인가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서 무슨 일을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승리하는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리고 그에 반응한 여러분들의 믿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들의 믿음은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하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이런 사람들의 간증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으셔서 만나주시고, 그리고 함께 동행하시시면서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역시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다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도 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무엇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마음 자세가 필요합니다.
욥기 23장 12절을 보면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시는 욥은 고통 중에서 친구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여러분들도 역시 욥처럼 “내가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느냐고 물어보면 “시간이 없어서요”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을 시간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성경 읽는 시간을 가장 뒤에 두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침에 일찌감치 일어나서 성경을 펼치고 읽는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 가운데 날마다 충만할 것입니다. 시편 119편을 쓴 시인은 148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만일 여러분들이 이 시인의 마음 자세를 갖는다면 인생을 정말 행복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하루를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이 있을까요? 시편 143편 8절을 보면 아침에 하루를 맡기는 기도를 하나님께 하는데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여러분 하나님께 “오늘 하루를 저와 함께 동행해 주십시오”하면서 기도하십니까?
저는 매일 아침마다 강단으로 올라가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저녁에 강단으로 올라가서 감사의 시간을 갖습니다. 아침마다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와서 집에 와서 성경을 펼칩니다. 전부터 읽던 곳에 이어서 계속해서 읽습니다. 옆에는 반드시 수첩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깨우쳐주시는 말씀을 단 하나라도 그냥 흘려보내기 싫어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마다는 아니지만 자주 저에게 성경을 통해 그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내 중심적인 사고를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법을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때는 저의 마음이 참으로 기쁨으로 가득한 가운데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하루종일 저를 떠나지 않습니다.
어떤 말씀은 일주일 동안 머물기도 하고, 또 어떤 말씀은 한 달 이상 머물기도 합니다. 또 어떤 말씀은 일평생 동안 함께 하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이 저로 하여금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배워가며 따르도록 인도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죄가 전혀 없는 사람으로 바뀐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 역시 나약한 사람이며 하루 동안에 일어나는 예측하지 못한 일들 가운데서 긴장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성질이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일이 많지는 않지만 어쩌다 한 번은 일어납니다. 그러면 저도 깜짝 놀라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그리고는 생각합니다. “아 내가 이것밖에 안되는 사람이었구나!”
그렇다고 해서 저를 온전한 사람이라거나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주십시오. 다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가장 행복하고 가장 의미있는 삶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은 그것을 저의 삶 속에서 입증하셨습니다.
제가 알바를 합니다. 하루에 다섯 시간을 하는데 타는 월급은 한 달에 겨우 80-100만원 정도를 받습니다. 그런데 저와 함께 일하는 저보다 더 먼저 회사에 다녔고, 좋은 직급을 가지고 있으며, 더 많은 월급을 받고 있는 분들이 행복하지 못하고 기뻐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지만 저와 한 장소에서 일하는 한 분에게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월급을 조금 받으면서도 이렇게 기쁨데 왜 사람들은 저보다 많은 월급을 받으면서도 기뻐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그랬더니 가만히 듣고만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 또다른 분에게 이야기 했더니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그건 이 목사나 그렇지 다른 사람은 안그래”하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이 있습니까? 못하면 못했지 더 나은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루 동안에 제게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도록 허락해주셨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다만 이 기쁨과 감사를 모든 사람이 함께 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의 소원을 갖습니다. 그러려면 아침에 하나님을 만나 하루를 인도하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을 열어놓고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기도해야 합니다.
CCM 복음 성가 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기도하면
귀를 기울이시고
내 기도를 들어주신다네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주시고
나의 발을 반석위에 세우시사
나를 튼튼히 하셨네
주를 의지하고
교만하지 않으며
거짓에 치우치지 아니하면
복이 있으리라
새 노래로 부르자, 랄라라
하나님께 올릴 찬송 찬송을
새 노래로 부르자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기도하면
귀를 기울이시고
내 기도를 들어주신다네
여호와 나의 주는
크신 권능의 구주시라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 건지시리라
인자와 진리로
사랑하여주시니
주를 찾는 자마다
주로 항상 즐거워하리라
새 노래로 부르자, 랄라라
하나님께 올릴 찬송 찬송을
새 노래로 부르자
하나님의 사랑을
새 노래로 부르자, 랄라라
하나님께 올릴 찬송 찬송을
날마다 새 노래가 어디서 나옵니까? 하나님과의 새로운 만남을 통해 나옵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알아갈 때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자신의 뜻을 가르치셔서 하루하루를 주님과 동행할 때 여러분들의 마음은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교인들이 이것을 놓칩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얼마나 자신의 자녀들과 함께 동행하시길 원하시는 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저 먹고 살려고 일하고 하나님보다는 하나님이 맡기신 사역에 더 치중하면서 달려가다 보니 지쳐 있습니다. 하나님이 항상 함께 계신 줄 알았는데 보니까 하나님이 없이 혼자 달려간 느낌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영적인 곤고함에 빠지게 됩니다. 그때부터 신앙은 침몰합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서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혼자 기도하고 혼자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기도하고 함께 기다리고 있습니다. 13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유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아내와 자녀와 어린이와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서 함께 금식하면서 기도하자고 했더니 모든 사람들이 나왔는데 남자들 뿐 아니라 아내들과 자녀들과 어린이들이 함께 나와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들 앞에서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 앞에서 고백합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한 나라의 왕이 자기의 무능력함을 고백하면서 백성들 앞에서 그것도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우리는 그들을 대적할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나이다”하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강력한 왕을 원합니다. 강력한 왕이 자신들을 이끌어 주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정작 강력해야 할 왕이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거기 서 있다면 “야 우리 왕은 최고야!”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얼마나 못났으면 하나님만 바라본다고 그래 그 많은 군사들을 이끌고 싸워보기나 하지 그래”하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오늘날 같이 하나님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대 속에서 “우리 모여 기도하자”고 대통령이 말한다면 국민들이 뭐라고 할까요? 교회의 목사가 모여 기도하자고 해도 모이지 않는 이 시대에 나라의 대통령이 기도하자고 하면 모여 기도하겠습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진짜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신다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기도가 자신들을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지도력과 무기와 외교술이 나라를 지켜줄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정말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대통령이 있다면 나라가 평안할까요? 역사적으로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전쟁광이었습니다. 우리 나라 세종대왕이 다른 나라 학자들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는 이유는 진정으로 백성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왕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왕들은 백성들의 손에 칼과 창을 들게 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총과 전쟁무기를 백성들의 손에 들려주고 목숨걸고 싸우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원하는 강력한 지도력을 가지고 있는 왕들은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고가면서 다른 나라를 정복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강력한 지도력을 가지셨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온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자신은 죽고 백성들은 살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백성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셨던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항상 그리고 영원토록 찬송합시다.
여호사밧은 백성들에게 자신이 강하다는 인상을 심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드러냈습니다. 그러면서 주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런 여호사밧을 하나님은 구원해주셨습니다. 주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옆에 나라인 이스라엘왕과 사돈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면서 기도하고 간구한 여호사밧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사밧과 유다에 승리를 주심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보이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신뢰하시면서 기도하십시오. 기도했으면 믿고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응답을 기대하십시오. 하나님이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들이 드린 기도에 응답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여러분들이 처한 어려움과 위기를 잘 극복하고 승리하도록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기도응답의 복이 여러분이 살아가는 일생동안 경험되어지길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