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30일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선생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마르코. 10,46ㄴ-52)
"Master,
I want to see." Jesus told him,
"Go your way;
your faith has saved you.".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자연이라는 놀라운 업적을 남기시고 사람의 모든 생각을 다 알고 계시는 창조주이시다. 자연 안에 주님의 영광이 가득 차 있어 그분의 업적에서 아름답고 찬란함을 느끼게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예리코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길에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의 눈을 뜨게 해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벨기에 출신의 작가 마테를링크의 『파랑새』라는 동화극이 있습니다. 주인공 틸틸과 미틸 남매가 파랑새를 찾아 긴 여행을 떠납니다. 그러나 끝내 파랑새를 찾지 못하고 실망한 채로 집에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한 두 남매는 깜짝 놀랍니다. 왜냐하면 집에 있던 새를 다시 보니, 그 새가 바로 파랑새였던 것입니다. 이 남매가 키우던 새가 본디 파랑새가 아니었는데, 긴 여행을 다녀오는 동안 파랑새로 바뀌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처음부터 파랑새였습니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이 키우던 새가 파랑새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곧 그들의 여행이 자신들의 새를 ‘다시 보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눈먼 거지를 고쳐 주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셨을 때에, 그는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자신의 삶과 주위의 사람들에 대하여 제대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자신의 삶 속에서 기쁨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긍정적인 부분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면 이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삶 속에 기쁨이 전혀 없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부분들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눈먼 이가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위에 널려 있는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라고 합니다. 언제나 행운만을 좇다 보니, 늘 곁에 있는 행복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참된 눈뜸
-황태종 신부-
사람들은 소경이 눈을 뜬 사실에 놀라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소경은 눈을 뜬 사실보다, 예수님이 자신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 곧 그분이 기다리던 메시아임을 깨친 것이 그에게 더 중요하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게 된 것보다 그 세상이 하느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인 것처럼 말이다.
소경은 눈을 뜨게 되는 ‘단순한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깨치는 ‘구원’을 얻었다. 곧 참된 진리를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말했을 때, 눈뜬 소경은 오히려 예수님을 따랐던 것이다. 눈을 뜨고 있어도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면서도 대자연이 창조주 하느님의 영광으로 그토록 아름답게 빛을 내고 있는 것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은 사실 ‘눈뜬 소경’들이다. 참된 세계의 아름다움을 두 눈 멀쩡히 뜨고도 보지 못하는 이런 ‘눈뜬 소경’들은 찬연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창조주 하느님의 광채를 파괴하여 소위 ‘돈’이라는 것을 얻으려 한다. 아! 어쩌란 말이냐! 이 구차한 인생들을 ….
꽃거지
-양승국신부-
수난과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던 예수님께서 예리코를 지나가십니다.
예리코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위치한 작은 도시였습니다. 헤로데는 온난한 기후의 이 도시를 유흥과 환락의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예리코에는 부자들의 호화주택들이 즐비했고 그들을 위한 극장과 경마장, 수영장 등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보로 약 30분정도 걸리는 예리코 시내를 거쳐 가셨습니다. 당시 예리코는 과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순례객들이 지나다니던 길목이었습니다. 거지들 입장에서 볼 때 예리코는 물좋고 목좋은 자리였던 것입니다.
한 눈먼 거지가 예리코 대로변에 앉아서 순례자들을 향해 구걸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바르티매오였습니다.
통상 복음서에 거지의 이름까지 명기하는 법이 없는데 복음사가들이 바르티매오의 이름을 명확히 기록하고 있는 것을 봐서 그는 당시 거지 중의 유명한 거지였습니다. 특별히 잘 나서 돈벌이를 잘해서 유명한 것이 아니라 불쌍하기로 유명했던 거지였습니다.
요즘도 그러하겠지만 당시 거지에도 등급이 있었습니다. 우선 건강해야지 기동력이나 상황판단력을 보유해 ‘고객 확보’도 잘 할 수 있고 수입도 많이 올려 시쳇말로 ‘꽃거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르티매오는 우선 시각장애우였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다보니 여러모로 불리했고 다른 건강한 거지에 비해 우선 경쟁력이 떨어졌습니다. 그저 ‘착한 고객’의 동정심과 자비심에만 의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재수 좋으면 한푼 벌어 한끼 때우고 그렇지 않은 날은 쫄쫄 굶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이렇게 바르티매오는 당시 거지 중의 상거지 가장 등급이 낮은 거지였습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뒹굴던 바르티매오였습니다. 삶의 가장 막장, 극단적 처지까지 몰린 그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상황 극복이 안 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절대자 하느님, 크신 자비의 하느님 손길만이 자신을 구하실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바르티매오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메시아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기적같이 삶이 환해지는 은총을 체험합니다.
바르티매오의 인생 역전은 그냥 주어진 것이 절대로 아니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바르티매오의 마음은 새 삶을 향한 절박함, 간절함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런 그였기에 체면도 뒷전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있는 힘을 다해 예수님께 자비를 청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자비와 능력만을 신뢰하며 주변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뿐만 아닙니다. “그를 불러오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바르티매오는 입고 있던 겉옷을 던져버리고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다른 사람들 눈으로 보면 꼬질꼬질한 냄새가 풍기는 변변치 않은 겉옷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르티매오 입장에서 보면 거의 전재산, 아니 분신같은 겉옷이었습니다. 노숙할 때 때로 추위도 막아주고 때로 이불역할도 하던 소중한 삶의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바르티매오는 새로운 가치관이자 새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나아가기 위해 과거의 옷을 과감하게 벗어던진 것입니다. 큰 것을 얻기 위해서는 크게 버려야 함을 바르티매오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바르티매오에게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바르티매오는 평생에 걸쳐 준비해왔던 대답을 큰 목소리로 외칩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바르티매오의 믿음에 예수님께서는 기적으로 응답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매오에게 육체의 빛, 세상의 빛만을 되돌려주신 것이 아니라 더 가치 있는 빛, 초자연적인 빛, 영적인 빛을 부여하십니다.
그리고 보십시오. 은총의 놀라운 빛을 선물로 받은 바르티매오는 곧바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 길을 나섭니다.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세운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몽고의 칭기즈칸입니다. 그는 이러한 유명한 말을 남겼지요.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배운 게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칭기즈칸은 어떤 순간에도 ‘~에도 불구하고’라는 논리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에도 불구하고’라는 논리를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논리만이 우리를 행복과 성공으로 유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에도 불구하고’라는 논리보다는 ‘~때문에’라는 논리를 더 선호합니다. 즉, 다른 것에 책임을 전가하는 무책임한 행동을 우리는 너무 많이 즐깁니다.
특히 어렵고 힘든 고통의 순간에서 과연 어떤 논리를 펼치고 있는 지를 유심히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 라고 말하는 순간 내 자신을 불행으로 유도할 것입니다. 반대로 어렵고 힘든 고통의 순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어느 순간 행복과 성공이 내 곁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에도 불구하고’라는 논리의 몇 가지 예를 적어 봅니다.
- 남이 약속을 지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화를 내지 않고) 행복을 선택하겠다.
- 남이 거짓말을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화를 내지 않고) 행복을 선택하겠다.
- 남이 나를 비방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화를 내지 않고) 행복을 선택하겠다.
- 남이 나를 배신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화를 내지 않고) 행복을 선택하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을 인정받은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 역시 ‘~ 때문에’ 보다는 ‘~에도 불구하고’라는 마음가짐을 가졌음을 발견힙니다. 그는 예수님 소식을 듣고서 무척이나 만나고 싶었었지요. 그리고 예수님만 있다면 자신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께서 자기 앞을 지나신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말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소리쳐 외칩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날 수 없도록 만드는 이유들은 참 많았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눈, 자신을 데리고 갈 사람이 없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과 예수님의 간격을 허용하지 않는 군중 역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수 없다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더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님께 구원을 청했고, 그 결과 그가 가장 원했던 것을 얻게 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르티매오가 들었던 이 말을 우리 역시 듣고자 한다면, ‘~에도 불구하고’라는 마음가짐을 가슴 속 깊이 품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음만이 나를 구원할 것입니다.
사랑은 서로 어루만지면서 변합니다. 어루만져서 경직되고 냉혹했던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안젤름 그륀).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양승국신부-
<옷을 벗읍시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던지고 일어선 바르티매오의 행동을 묵상해봅니다.
눈먼 거지로 노숙을 밥 먹듯이 해야 되는 바르티매오에게 외투는 목숨과도 같이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 비록 때에 젖어 꼬장꼬장 볼품없는 외투였겠지만 바르티매오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때로 쌀쌀한 바람도 막아주고, 때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도 막아주고, 때로 이불도 되어주고, 때로 수건도 되어주고...
그런데 오늘 예수님 앞에 서기 위해 바르티매오는 자신의 소장품 No 1인 외투를 벗어버립니다.
우리도 가끔씩 외투를 벗을 때가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아마도 굳은 일을 할 때이겠지요. 힘쓰는 일을 할 때일 것입니다. 큰 구덩이를 하나 파려고 할 때, 입고 있던 고급 바바리코트를 입고 삽질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수십 명이 먹을 육개장을 끓이는데, 값진 모피코트를 입고 일을 시작하지는 않겠습니다. 적어도 윗도리는 벗어 한쪽에 걸어두고 일을 시작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겉옷을 벗은 적이 있습니다. 바로 수난 전날 세족례를 거행하기 전입니다. 겉옷을 벗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신 다음 허리를 굽혀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주셨습니다.
겉옷을 벗는다는 것은 가장 낮은 자세로 서겠다는 표시입니다. 윗옷을 벗는 것은 철저한 겸손의 표시입니다. 종이 되겠다는 표현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르티매오란 눈먼 거지 역시 예수님께 나아가면서 옷을 벗는데, 이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겠다는 표시입니다. 아직도 남아있는 체면, 알량한 자존심까지도 다 던져버리겠다는 표현입니다. 그간의 슬프고 서글펐던 과거, 끔찍하고 혹독했던 지난날을 모두 등 뒤로 내던지고 예수님과 함께 새롭게 출발하겠다는 표시로 그는 입고 있던 옷을 던져버렸습니다.
외투를 벗으며 바르티매오는 살아있어도 진정으로 살아있지 못했던 지난날도 멀리 던져버렸습니다. 시각장애우란 이유 하나로 철저하게도 소외되어 당시 사회의 변두리 가장 끝에서 서성대야만했던 서러움의 날들도 던져버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향한 미움과 적개심도 모두 던져버렸습니다.
오늘 이 아침 새롭게 예수님께로 나아가야하는 우리 역시 다시 한 번 우리가 입고 있는 겉옷을 벗어던져버리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덧씌워진 위선과 부풀림, 겉꾸밈과 체면을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홀가분하게 그분 앞에 서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우리의 환부, 우리의 문제, 우리 고통의 근원을 정확하게 진단하시고, 바르티매오에 그러셨던 것처럼 새 삶, 새로운 눈, 새 인생을 선물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향한 희망
- 신대원 신부-
주님께서 눈먼 거지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고 말입니다. 그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대답합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요? 일가친척들을 볼 수 있고, 친구들을 볼 수 있으며, 하늘과 땅을 볼 수 있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온갖 것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그는 눈이 멀었기 때문에 볼 수 없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얻어 누릴 수도 없는 거지가 되어 살아갑니다. 그렇게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그에게 주님께서 다가가시어 다정하게 말을 건네십니다. 그러고는 눈먼 거지의 청원을 기꺼이 들어주십니다. 비록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그였지만, 그래도 주님을 향한 믿음의 열정만은 잃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향한 희망만은 간직하였던 것이지요. 그 결과 주님을 만났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 있는 우리는 지금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주님을 향한 믿음이나 희망을 저버리고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보잘것없는 외침
- 이은명 수사-
올해 들어서 본 뉴스 가운데 지난해의 새로운 사회적 이슈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이 기사에서 2010년 한 해 동안 직장인들이 가장 공감한 유행어가 ‘BMW족’ 이었습니다. 저한테는 생소한 단어였는데, 생각해 보니 ‘나도 여기에 해당되는구나.’ 했습니다. ‘BMW족’이란 버스 (bus) 나 자전거 (bicycle) 를 이용하거나 지하철(metro) 을 타거나 걸어서 (walking) 출퇴근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물론 조금 다른 내용도 포함하고 있지만 급변하는 현시대에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도 참으로 다양한 시각에서 여러 모양으로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외출할 때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합니다. 물론 걷는 것도 좋아하고요. 사실 서울에서 버스나 지하철만큼 약속시간을 제대로 지킬 수 있는 교통수단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많이 느끼는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자리에 앉은 대다수 사람이 눈을 감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나름대로 음악을 듣거나 잠을 청하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주변에 벽을 쌓고 보고 듣지 않으려고 스스로 귀머거리가 되고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되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즘에는 신체적 장애 때문이 아니라 마음의 장애로 앞을 못보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마모되고 삐걱거리는 나의 마음을 한 번 더 손을 봐 달라고 주님께 청해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냥 지나칠 수 있었던 보잘것없는 외침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 ! 저한테 들려오는 작은 외침들을 귀담아듣고 볼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해주십시오.
완전을 이루는 너와 나
-김찬선신부-
“만물은 서로 마주하여 짝을 이루고 있으니 그분께서는 어느 것도 불완전하게 만들지 않으셨다. 하나는 다른 하나의 좋은 점을 돋보이게 하니 누가 그분의 영광을 보면서 싫증을 느끼겠는가?”
만물은 서로 마주하여 짝을 이루고 있으니 하느님께서는 어느 것도 불완전하게 만들지 않으셨다는 말씀이 사무치게 마음에 스밉니다.
마치 부부가 혼자로서는 완전하지 않으나 둘이 하나 됨으로서 완전을 이룬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저도 저로서는 완전하지 않으나 불완전한 또 다른 형제로 인해 완전을 이루게 된다는 말씀이고요.
사랑으로 완전을 이룬다는 얘기고, 불완전한 우리들이 사랑으로 합쳐 하느님을 이룬다는 말씀도 되고요.
사랑이 참으로 소중해지고, 못난 형제가 참으로 소중해지네요.
그 못난 형제가 우리를 완전하게 할 뿐 아니라 그 못난 형제가 나의 좋은 점을 돋보이게 한다네요.
이제 못난 내가 우리로서 완전하도록 너에게 봉헌되고 나의 못남이 너의 좋은 점을 돋보이게 하도록 약점을 자랑하면 되겠네요.
아, 사랑스런 나의 못남. 아, 사랑스런 너의 못남. 아, 완전을 이루는 나의 못남. 아, 완전을 이루는 너의 못남.
이렇게 만드신 사랑의 우리의 주님!
어제 우리 성당에서 신부님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 모임으로 각자의 생활반성 및 이 사회 문제에 대해 신부님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부분들을 이야기하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신부님들이 함께 대화를 나눈다는 점이 가장 큰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이 모임에는 사제 서품을 받은 지 35년이 되신 분부터 이제 갓 서품을 받은 신부들까지 함께 하기에 더욱 더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원로 신부님께서 담배를 끊으셨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평생을 담배와 함께 하신 분이었고, 워낙 골초였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 신부님이 담배를 끊으리라고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혹시 어디 편찮으신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연세 드신 분들이 담배 끊을 때면 어딘가 편찮으셔서 병원에서 담배를 못 피게 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유는 건강에 있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에 스페인의 산티에고로 도보순례를 다녀오셨다고 합니다. 한 달이 넘는 시간동안 걷는 엄청난 순례의 길이지요. 따라서 짐을 줄여야 하는데, 문득 담배 짐이라도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곧바로 담배를 끊었다고 하십니다.
담배를 끊은 이유치고는 너무나 어이없었습니다. 건강 때문도 아니었고, 다른 사람들의 권유도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짐 될까봐’ 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평생 태우신 담배를 단칼에 끊어버리시는 신부님의 결단이 놀라왔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예수님께 나아가는 이유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만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많은 이들이 특별한 이유를 찾으면서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문제만 해결되면……. 돈 좀 어느 정도 벌어 놓으면……. 성당에서 보기 싫은 사람만 없어지면…….’ 등등의 이유로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주저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 나아갈 때 방해되는 다른 이유들을 과감하게 끊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를 보십시오. 그는 나자렛 예수님이라는 소리만 듣고 곧바로 외치기 시작하지요.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만이 자기를 살릴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어도 굴하지 않고 지금 곧바로 큰 소리로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바로 상상도 못했던 기적의 체험이지요. 바로 평생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눈을 떠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지요.
특별한 이유를 들어서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주님께서는 곧바로 나아가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때 주님의 따뜻한 목소리를 들으며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흔들리지 않고 기도하기
-조명준 신부-
바르티매오라는 거지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예수님께 매일 기도하겠다고 결심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생각만으로 그칩니다. 아마도 우리 내면 안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니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남편과 아이들 내보낸 후 기도해야지’,
‘설거지 끝내고 할까?’, 하루 중에는 ‘나 참, 집안이 왜 이렇게 어지러운 거야!’, ‘아차, 깜빡했네. 은행 다녀와야 하는데’, 저녁에는 ‘드라마 볼 시간이네’,
‘잠자기 전에 꼭 해야지’ 하며 미루다 보면 기도할 시간을 놓칩니다.
그러나 바르티매오는 많은 이의 꾸짖음에 굴하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
예수님께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우리도 매일의 삶 속에서 기도하지 못하도록 자신을 잡아끄는 속삭임을
뒤로하고 주님을 소리높여 부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여라, 기도하여라, 많이 기도하여라
-이상각 신부-
어머니들은 자녀에게 지치지 않고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고 말하며 또 언제라도 그 말을 되풀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그만큼 자녀에게 중요하며, 일반적으로 열심히 공부한 사람에게 윤택한 미래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자녀에게 끊임없이 공부하라고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성모님의 교육 방법 또한 그렇게 반복하는 것이다. 성모님은 발현하시는 모든 곳에서 지치지 않고 “기도하여라, 기도하여라, 많이 기도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으며 또 언제라도 그 말씀을 되풀이할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성모님은 우리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이다.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께 마음을 여는 것이고, 기도에 바치는 시간을 많이 가질수록 우리의 삶이 거룩하게 변화될 수 있음을 성모님은 잘 알고 계신다.
기도는 바르티매오처럼 신뢰심을 가지고 끈기 있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비로소 열매를 맺는 것이다. 성모님은 우리도 바르티매오처럼 끈기 있게 기도하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기도하여라, 기도하여라.’라는 반복적인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끈기 있는 기도 생활로 초대하시는 것이다.
소경 바르티매오의 간절한 외침 - 신은근 신부-
다윗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소경 바르티매오는 이렇게 외친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그의 외침이 얼마나 애절한 것인지 우리는 모른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세상,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장님의 심정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보이지 않는 순간은 답답하다. 그것을 영원히 지속하며 살아야 하는 그의 운명은 분명 십자가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아프고 무거운 십자가였다.
바로 그 사람,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분의 능력에 희망을 가진다. 혹시 그분이라면 눈을 뜨게 해주실지도 몰라, 그는 희망을 믿음으로 바꾸며 애절하게 매달렸다. 그리곤 마침내 그분의 음성을 들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지난 세월 자신을 가두었던 어둠이 이 한 말씀으로 걷히다니, 눈을 뜬 그는 평생 이 말씀을 심장에 새기며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께 바라면 무엇이든 이루어질 수 있다고.
바르티매오의 이 감동에 우리도 동참해야 한다. 그의 놀람과 느낌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에게 내려졌던 은총이 얼마나 위대하고 따뜻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우리에겐 애절한 무엇이 없는지.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그 무엇이 없는지. 아무리 애를 써도 풀리지 않는 그 어떤 것이 없는지. 있다면 우리도 바르티매오의 심정이 되어 예수님께 나아가야 한다. 주님의 자비를 기억하며 희망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 이것이 복음의 교훈이다. 우리는 소경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경일 수 있다.
왜 믿음의 길을 가야 하는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모를 때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바르티매오처럼 청해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 보게 하여 주십시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복받는 행위라고 너무 쉽게 판단한다. 기도하는 것도 복을 얻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잘 믿으면 고통도 재앙도 없어질 것이라 여긴다. 물론 우리가 청하는 것에는 이러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데 있지 복을 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어떤 길로 걷기를 원하시는지 그 뜻을 찾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매일이 비슷한 생활이더라도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 고통과 시련이 오더라도 주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축복이 오고 기쁨이 넘치더라도 그것 역시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며 감사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신앙이다. 우리는 이런 자세로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한다.
주님 보게 하여 주십시오. 무엇을 보게 해달라는 것인가.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 아니겠는가. 그래야 바르티매오처럼 변신할 수 있다. 다윗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바르티매오는 이 단순한 기도를 수없이 반복했다.
삶이 무미건조하고 신앙생활이 권태롭다면 우리도 이 기도를 반복해야 한다. 단순한 기도가 힘있는 기도다. 그분 앞에서 복잡해질 이유는 없다. 소경 바르티매오는 기도의 단순함과 믿음의 끈기로써 눈을 뜬 사람이다. 우리도 그 은총을 청하며 이 계절을 보내자....................◆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 조광호 신부-
중국 당대의 시인, 두보(杜甫)는 "봄은, 보는데 또 지나가나니"라고 노래했지만 시간의 흐름은 물과 같아 그 경계를 가늠할 틈도 없이 그 누구도 막아 낼 수 없는 무상한 변화 속에 우리를 서게 하는가 보다.
며칠 전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서울 근교 어느 산을 올랐다. 성미 급한 나무들은 이미 붉은 빛을 띄우고 있었지만, 그 무성했던 나뭇잎들은 청정한 바람결에 더욱 더 푸른빛으로 마지막 녹색의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 '빛 보다 더 밝은 그늘' 아래를 걷다 보니 어느덧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매연으로 뒤덮인 도시, 거대한 괴물처럼 누워있는 그 도시의 잿빛 하늘 위에서 이름 모를 별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나는 잠시 가던 길을 멍추고 명멸해 가는 그 별빛에 시선을 모았다. 태양의 주위를 끊임없이 돌고 있는 이 작고 아름다운 떠돌이 별, 지구 위에서 지금 나는 그 어느 은하계의 혹성으로부터 수십억 광년을 달려온 저 별빛을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살아 있음이 기적같이 느껴졌다. 무한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나에게 달려온 저 빛과 만남, 나의 이 순간적인 만남은 저 별빛이 전달된 시간과 공간에 비교한다면 차라리 무(無)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무한한 빛이신 그분 앞에서 인간정신은 '어둠'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한 토마스 머튼의 고백은 하느님 앞에서 발가벗은 인간의 자기실존에 대한 '깨달음'이 아닐 수 없다. '무'로써 표현할 수 있는 '어둠'이라는 낱말보다 더 적절하게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의 자기실존을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을 것이다. 살아 계시고 끊임없이 창조하시는 야훼 하느님은 '나자렛 예수'라는 구체적 인물을 만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 예수와의 만남을 통하여 믿음을 고백했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모두 하느님 앞에서의 자기실존에 대한 어둠의 체험 즉 무의 체험을 통해서 신앙의 극치에 이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역사상 예수를 직접 만났던 사람들, 그들도 예외 없이 자기 실존에 대한 이 깨달음을 통하여 형언할 수 없는 은혜의 순간을 맞이했고, 그들의 이 어둠의 체험은 빛으로 충만 되었고, 깊고 깊은 밤은 낮이 되었고 믿음은 더 큰 깨달음으로 이어져 예수와 함께 「예수의 길」을 걷는다. 세리였던 마태오가 그렇고, 창녀였던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렇고 예리고의 맹인거지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가 그렇지 아니한가.
우주의 신비를 벗겨내는 인간의 위대함을 얘기하지만 지금까지 그 누구도 스스로 자기 육안으로 직접 자기 얼굴을 본 사람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거울과 같은 반사매체를 통해서 자기 얼굴을 본다. 인간의 외적 조건이 이러하다면 하물며 인간의 내면세계는 말할 것도 없이, 사람은 누구나 '만남'을 통해서만 자기의 모습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한 눈으로서 '거리'를 측정할 수 없듯이 우리의 내면 세계의 눈도 결국 '마음의 눈'과 또 다른 '믿음의 눈'을 지닐 때만이 자기의 실존의 위치를 바로 알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영혼의 눈'으로 '나자렛 예수와의 만남'이 이루어진 그 대표적 믿음의 세계를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소개되는 예리고 소경의 치유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
권세 있는 자들과 많이 배운 사람들, 소위 내노라 하는 사람들이 붐비던 고도 예리고의 거리를 바람에 날리는 쓰레기처럼 그들의 발치에서 구걸하던 맹인거지, 바르티매오. 그에게도 예외 없이 '나자렛 예수의 소문'은 들려 왔을 것이다. "너희들 모두가 한 형제이니 서로 사랑하라는 것"과 "하늘나라가 가난한 자들의 것"이라는 이야기를 그도 듣고 있었을 것이다.
뭇 사람들의 멸시와 학대를 통하여 오는 고난과 고통의 의미를, 어두운 절망의 골짜기를 거쳐오면서도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끝없는 희망의 불씨를 간직하며 살아 왔을 것이다. 이제 그의 내면의 불씨에 '나자렛 예수'라는 이름으로 하여 뜨거운 불길이 솟아나게 된 것이다. 살아 생전에 그를 만나 그의 따뜻한 목소리와 그의 손을 잡아 보고 싶은, 그 만남의 원의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다. 그는 온갖 주위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린 채 나자렛 예수를 향해 돌진했다.
『"그를 막지 말라...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합니까?"(49절)하고 마침내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선생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51절) 하고 그가 말하자 예수께서는 "가시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했습니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는 다시 보게 되었고 예수를 따라 길을 나섰다.』(51-52절)고 마르코 사가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나자렛 예수를 향해 "다윗의 아들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47절)라고 한 그의 외침은 위험 천만한 것이었다. 이것은 나자렛 예수가 곧 「메시아」라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을 지배하던 로마인들과 유대인 지도자들, 그들을 의식하던 모든 군중을 당황하게 만든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소리치며 달려갔고, 자기의 육신을 마지막으로 지켜 주는 '겉옷을 내동댕이치고 예수를 향해 벌떡 일어나 갔다'(50절)고 한다.
맹인거지 '바르티매오'는 예수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였으니 그는 태생 소경이 아니었을 것이다. 세상살이에서 언젠가 눈먼 사람이 된 것을 임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원의는 단순히 육체적인 눈이 열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와의 만남, 그 필사적인 결의는 마침내 그의 눈을 뜨게 했고 나자렛 예수 안에서 메시아를 볼 수 있는 제2의 눈인 영혼의 눈뜸으로 깨달음에 이른 것이라 할 것이다.
불길 속에 녹아드는 흰 눈송이처럼 흔적도 없이 자신의 실존이 무로 돌아가듯, 예수 그리스도와의 합일을 그는 이루어 낸 것이다. 빛을 향한 열망, 그것은 '노력하는 한 인간은 괴로워한다.'는 파우스트적 절망을 뛰어넘어 '노력하는 것이 곧 깨달음'이라는 불가적(佛家的) 태도에 더 가까운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불을 발견 해 낸 최초의 인류가 그 캄캄한 밤에 최초의 불씨를 당겨 황홀하고 흥분된 설렘으로 언 몸을 녹였듯이 추위가 몰려오는 이 계절, 우리도 예리고의 맹인거지와 같은 '영혼의 불'을 당겨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황량한 겨울벌판 같은 이 세상살이에서 우리도 예수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길을 떠난 바르티매오와 같이 뜨거운 사랑의 불길로 자신을 소진시켜 이 캄캄한 밤을 밝히고, 생명과 부활의 아침을 앞당겨야 되지 않을까................◆
“나의 장애가 주님을 갈망하고 의지하는 도구가 될 때 그것은 축복의 원천이 됩니다”
-홍성만 신부-
오늘 복음에서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의 행동은 우리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자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으나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칩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시자,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입니다.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갑니다.
언제부터인가 눈먼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날이 갈수록 ‘그분이라면 나의 닫힌 이 눈을 [....]’ 하면서 강한 희망을 갖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의 행동이 이를 증면합니다. ‘나자렛 사람 에수님’이라는 소리를 듣자 이내 외치고, 소리를 지르고, 외투를 벗어 던지고 달려가는 그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눈이 멀었다는 장애는 바르티매오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한이야기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따라서 강한 희망을 갖게 되고, 이 희망은 확신으로 이어집니다. 마침내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눈이 열립니다. 장애는 하느님의 나라를 직접 체험하는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작고 큰 나름대로의 신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장애가 주님을 더 깊이 갈망하고 희망하는 도구가 될 때, 그것은 대단한 가치를 발휘하게 됩니다.
나의 약점이, 나의 장애가, 주님께 의지하고 희망하는 근거가 될 때, 그 약점과 장애는 축복의 원천이 됩니다.
주님께 의지하고 맡겨야 할, 내가 가지고 있는 약점과 장애는 무엇인가?
나의 약점과 장애가 축복으로 이어질 수 있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겉옷을 벗다
-김귀웅 신부-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한 비행사 린드버그는 말년에 한적한 시골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젊은 시절을 함께했던 그 비행기가 몹시 보고 싶어 비행기를 기증한 박물관장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박물관장은 그를 위해 특별히 다시 비행기를 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몇십 년 만에 다시 비행기에 오른 린드버그는 감격에 벅차 소감을 묻는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비행기라고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도계도·유량계도, 기타 어떤 안전장치 하나도 없는 그저 엔진과 프로펠러, 그리고 몸을 실을 의자가 전부인 탈 것에 불과하군요. 어떻게 이것을 탈 생각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린드버그가 그 초라한 비행기로 대서양을 횡단하게 한 것은 훌륭한 비행기도, 어떤 안전장치도 아니었습니다. 하늘을 나는 데 필요한 장치 이외의 것은 모두 떼어내고 최대한 가볍게 만든 비행기, 먹을 것조차도 싣지 않은 비행기였기에 그런 초유의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편안한 땅을 박차고 오르게 했던 젊은 도전정신이 그를 위대한 인간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살다 보면 나를 감싸고 있는 안전장치들이 점점 많아짐을 자주 느끼곤 합니다. 수입이 확실하게 보장되는 안전한 직장을 놓아버리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징계를 받을까 두려워 느끼는 대로가 아니라 듣기 좋은 소리로 돌려 말하곤 합니다. 예년에도 이렇게 했으니 올해도 그냥 그렇게 하자고 합니다. 안락한 소파에서 일어서게 만드는 부탁에 짜증을 내는 일도 많습니다.
자신을 부른다는 소리에 소경은 겉옷을 벗어버리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겉옷은 그동안 소경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었던 은인이었습니다. 소경에게 겉옷은 모래바람을 막아주고 따뜻한 잠자리를 보장해 주었던, 그래서 가장 귀중하게 지니고 다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초라한 보금자리를 박차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갔기에 눈을 뜨고 그분을 따라 나설 수 있었습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양승국 신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목숨이 붙어있었지만, 호흡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사실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너무나도 끔찍했던 여행길, 길고도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느라 그의 영혼과 정신은 죽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에게 제대로 된 사람 대접해주는 사람 한 명 없었습니다. 어디가나 천덕꾸러기요 애물단지였습니다. 사람들은 대놓고 그를 향해 손가락질했습니다. 평생에 걸친 그의 삶은 모욕과 멸시, 천대와 비아냥거림으로 가득했습니다.
이렇게 바르티매오는 존재하지만 존재를 부정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바르티매오를 예수님께서 부르십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구걸을 위해 하루 온종일 길가에 앉아있어도 관심 가져주는 이가 단 한명도 없었는데, 기껏해야 동전 한 닢 깡통 속에 던져주는 것이 다였는데, 예수님께서 바르티매오를 가까이 부르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자상하게 이것 저 것 물어봐주십니다. 측은지심 가득한 음성으로 이름은 몇 가지를 물어보겠죠? 이름이 뭐냐? 언제부터 이렇게 됐냐? 사는 곳은 어디냐?
어쩌면 오늘은 바르티매오 인생에 있어 최고의 날입니다. 그에게 있어 시각장애, 그로 인한 굶주림은 큰 고통이었지만, 사실 더 큰 고통이 있었는데, 그것은 지독한 소외감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이방인이었습니다. 그 어디에도 끼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정말 그리웠습니다. 자신의 한탄을 들어줄 그 누군가가 정말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그런 역할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바르티매오가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제대로 된 사람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대화다운 대화까지 해 본 것입니다.
더욱 감지덕지한 일이 또 한 가지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대접해주고, 대화 나눠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인데, 바라는 바가 뭐냐고 또 물으십니다.
너무나 기뻤던 바르티매오는 지체 없이 소원을 아룁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참으로 자상하신 예수님의 실체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오늘 복음입니다. 단순한 병의 치유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바르티매오 안에 내재되어있던 인간 본래의 존엄성, 가치를 함께 복원시켜주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선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단순한 병의 치유를 훨씬 넘어 존재함으로 인해 겪게 되는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선포하십니다. 육체의 해방뿐만 아니라 영혼의 해방을 선언하십니다. 일회적인 치유가 아니라 영속적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이제 바르티매오는 단순히 육체적 시력만 회복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를 뵈올 수 있는 영적인 시력도 동시에 얻게 된 것입니다.
구원, 구원, 구원
-장재봉 신부-
마르코가 전하는 복음은 왠지 가슴에 닿는 강도가 다릅니다. 마르코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음에도 복음서를 집필한 것이 한 이유이고 또 마르코에게 이 모든 사실을 일러 준 사람이 베드로 사도였음을 짐작하게 되는 것이 뺄 수 없는 이유이지요.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해주는 베드로의 많은 허점들은 결국 베드로 사도의 고백이었음을 알 수 있는 까닭입니다. 허하고 돼먹지 않고 엉망인 우리들을 위해서 이렇게 큰 희망의 증거를 주신 것이라 믿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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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여 먹고 살아가는 거지가 눈까지 멀었으니 인생이 말할 수 없이 고달팠을 것이 짐작됩니다. 그럼에도 초라한 행색을 넘어 그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믿었던 믿음의 사람이었음에 주목해 봅니다. 믿음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시는 그분께 ‘설마’라고 의심하고 ‘그렇게까지는’이라고 생각하는 일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주신 구원을 믿지 못하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택함 받고 그리스도인으로의 사명을 안다하면서도 왔다 갔다 세상을 기웃거리는 까닭이라 짚어봅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믿는다면 예리코를 떠나기 위해 나선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망설임 없이 외칠 것이고 의심치 않고 소원을 말씀드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없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일, 틀림없는 다윗의 자손임을 알아차리는 일, 그분의 자비에 용기를 내어 일어나는 일이야말로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는 일임을 배웁니다. 선택된 겨레 거룩한 사제단 거룩한 민족이며 그분의 소유인 우리는 세상의 이방인입니다. 세상의 나그네입니다. 이방인이며 나그네인 우리가 세상에 머물러 세상의 것에 집착하는 일은 나아가는 걸음을 더디게 할뿐입니다. 세상의 것들에 눈이 멀었던 우리들이 바르티매오처럼 눈을 뜨게 되기를 원합니다. 가졌던 세상의 것들을 몽땅 벗어던지는 용기의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벌떡 일어나 주님을 향하는 오늘이기를 소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바른 처신과 그리스도인의 착한 행실을 세상에 보여주는 우리 모두이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빛이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구원의 빛입니다.
새벽을 열며
어제는 사제 모임이 있어서 인천의 어느 본당에 갔었습니다. 그리고 모임 후, 식사를 맛있게 하고 그 신부님의 방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 신부님께서 음악을 틀어주시는 거에요. 사실 그 방에 있는 음악시스템은 스피커도 엄청 큰 것이 무척 고가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음악에 관심이 있으시던 신부님들께서 소리를 듣더니만 이런 저런 좋은 평가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소리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판단할 수가 없더군요. 그냥 저의 귀에는 소리가 좋다면서 볼륨을 높이데 시끄러운 소음 정도로만 느껴지더군요. 그냥 컴퓨터로 들어도 소리의 차이를 잘 못 느끼겠던데, 비싼 장비를 통해서 음악을 크게 듣는 그 신부님들이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모든 음악을 컴퓨터를 통해서만 듣는 저의 경우와 음악을 좋아하시는 신부님의 차이는 이렇게 장비의 구비에 있어서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곰곰이 생각해보니, 제가 좋아하는 것에는 아낌없는 투자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즉, 저의 경우는 컴퓨터에 관련된 장비에 관해서는 무리를 해서라도 구입했던 경우가 많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 음악 시스템에 관심 없는 제가 비싼 장비를 구입하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컴퓨터에 관심 없는 사람들도 저의 모습을 보고서 잘 이해를 하지 못하겠지요. 이처럼 자신의 관심사에는 아낌없는 투자를 하는 것, 그리고 끊임없는 관심을 가지고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취미 생활을 넘어서 주님께 대해서는 얼마나 끊임없는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주님 앞에 나아가기 위한 노력들을 얼마나 하고 있는가 라는 반성을 하게 되네요. 세상의 것에는 그렇게 무리를 하면서도, 정작 더 큰 무리를 해서라도 나아가야 할 주님한테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는 앞 못 보는 맹인, 바르티매오라는 신심 깊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신체적으로 눈이 멀었지만 마음의 눈은 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알아 뵙고는 다른 사람이 말려도 굴하지 않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사실 다른 사람들이 꾸짖을 정도로 이 바르티매오가 한 행동은 어쩌면 예의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생각에 예의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아도 굴하지 않고 주님께 매달렸던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다른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주님께만 시선을 집중했기에, 그는 자신이 원하던 눈을 뜰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주님께 얼마나 매달리고 있는지요? 세상의 것에는 필사적으로 매달리면서 주님의 것에는 대충대충 해버리는 어리석음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늘 묻습니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그런데 세상 것을 바라보다가 그런 질문조차 듣지 못해서 아무런 응답을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주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바르티매오처럼 주님께 철저히 매달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시기 위해서 매일 천사 한 사람씩을 보내주신답니다. 오늘의 천사가 누군지를 찾아봅시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천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 아시죠?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정복례 수녀-
◆예리고의 소경은 예수의 일행이 지나가자 소리를 지른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모든 죄인에게 항상 연민의 정을 느끼시는 예수께서 그냥 지나치실 리가 없다. 소리소리 지르며 예수께 자비를 청하는 것을 보며 예수님은 그 소경의 믿음을 보셨다. 예수께서 그에게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 소경은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하시며 그 소경의 강한 믿음을 강조하신다. 그리고 그는 눈을 뜨게 되자 곧 예수님을 따르게 된다. 예수께서 오늘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신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나는 예리고의 소경과는 정반대의 대답을 할 것이다. 그는 눈을 뜨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나는 “예수님, 저를 당신에게 영원히 눈멀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할 것이다. ‘눈멀다!’라는 표현은 혼기를 앞둔 자녀를 가진 부모님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다. 온갖 정성을 다 들여, 요즘 말로 공주처럼 키웠는데 신랑감이라고 데리고 온 청년이 아무리 봐도 눈에 차지 않을 때 딸에게 하는 말이다. “너, 눈이 멀었구나! 그 청년이 어디가 좋다고 그러니?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구나.” 그렇다. 부모님의 눈으로는 딸아이가 왜 그렇게도 못난 청년에게 눈이 멀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부모님은 또한 그들의 부모님으로부터 그런 소리를 듣지 않았을까? ‘눈이 멀다’라는 표현은 참으로 재미있는 말이다. 한번 눈이 멀었으면 영원히 멀어야 행복할 것이다. 어느 한때 눈이 멀어서 반했던 그 사람이 세월의 흐름과 함께 진면목을 드러낼 때, 그리고 본인이 세상에 대해 눈을 뜨게 될 때 그 사람에 대해서 실망과 환멸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 윗 세대에서는 그래도 인내라는 굴레를 기꺼이 받아들여 상대방을 운명으로 여기며 살았지만 우리 동생들 세대는 그것을 더이상 운명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인생관의 차이라고나 할까? 그러니 한번 눈이 멀었으면 영원히 멀든가, 아니면 처음부터 밝은 눈으로 있는 그대로를 직시할 줄 알든가 둘 중 하나라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결코 행복할 수 없으리라. “하오니 나의 예수님, 나는 당신께 반한 여종입니다. 내 눈이 밝았다면 처음부터 나의 선택은 옳은 것이었겠고, 혹여 내 눈이 멀었다면 그래도 좋습니다. 당신에게 눈멀게 해주십시오! 내 영혼은 이대로 영원히 당신 앞에서 춤출 것입니다”.
소경의 믿음과 치유 -조욱현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 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소경 바르티매오라는 걸인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을 전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12세 이상 된 남자는 모두 예루살렘으로 간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그들은 랍비들에게서 강연도 들으면서 교육을 받기도 했었다.
바르티매오라는 소경은 예리고의 북쪽 문 곁에 있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것을 알게되었을 때에, 그는 소리를 지른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 그러나 군중에게는 그 소리가 방해 가 되었기 때문에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바르티매오는 거기에 굴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 의 행렬을 멈추게 하였다. 그리고 예수께 인도되고 치유를 받는다.
이 소경의 자세와 군중들의 자세를 우리가 비교해볼 수 있다. 먼저 군중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지만, 주님께 대한 믿음은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예수께 서 하시는 놀라운 기적 때문에 자신들도 그러한 광경을 보고 또 기회가 되면 그러한 체험을 할 수 있기 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데 동의하지 않았던가 ? 그렇기 때문에 이웃의 아픔은 안중에도 없다. 그렇기에 소경이 떠드는 것 이 그들에게 방해가 되었고 그를 조용히 하라고 꾸짖는 것이다.
그러나 소경 은 달랐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막연한 감상적인 소원이 아니고, 필사적인 결단과 행동의 부르짖음 이었다. 그리고 그는 즉시 달려가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갈 때 발에 걸리는 겉 옷까지 벗어버렸다.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 이 소경은 이러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치 유를 받았으며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이렇게 예수님께 믿음을 갖는 사람만이 용감히 신앙을 고백할 수 있으며, 그분을 따라나서는 제자가 될 수 있다.
우리도 이제는 그분께 대한 믿음을 가 지고 그분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냥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주일에 미사를 봉헌하지 않으 면 죄가 된다니까 성당에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복음 말 씀을 실천하면서 신앙을 더 깊이 하고 그분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그래서 그분을 닮을 수 있는 삶이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 주 님께 신앙을 청하며, 진정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이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를 보게 해 주시도록 기도하자. 소경과 같은 우리의 신앙의 삶이 치유를 받아 더욱 그리스도를 잘 따르는 삶이 되도록 기도하자.
나의 눈이 어떤 이기적인 눈꺼풀로 씌워져 나의 가장 사랑하는 나의 가족 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여 사랑하지 못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하면서 항상 준비된 마음으로, 맑은 눈으 로 나의 이웃을 바라볼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
-김종규 신부 -
오늘 복음에서는 앞을 못 보는 이가 예수님의 도움으로 인해 비로소 세상의 빛을 찾게 되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눈이 멀었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수 없고 구걸을 통해서 겨우 연명하는 처지였습니다. 그에게 매일의 시간은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앞을 못 보는 자신의 처지뿐만 아니라, 세상 다른 이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멸시 당하는 자신의 모습에 더 맘 아파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예수님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 분 앞에서는 어떤 죄인도, 어떤 병자도 소외당하지 않을뿐더러, 예수라는 분은 늘 사랑으로, 위로로 항상 껴안아 주시는 따뜻한 분이심을 듣게 되었습니다. ‘한 번쯤 그 분을 만날 수 있으면 나도 간절히 청해보리라’ 그 순간 눈먼 거지에게 작은 희망과 설레임이 피어납니다.
여는 때처럼 그는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합니다. 그때 멀리서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군중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에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소리를 지르는 순간 그 자신도 놀랬을 것입니다. 그 자신은 죄인이고 버림받은 사람이기에 늘 의기소침해 있는 데,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그렇게 용기내어 크게 소리를 지르는 그 자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다른 사람들이 소리지르는 그를 말립니다. “좀 조용하시오”
그러나 그는 더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은 그를 당신 곁으로 가까이 불어 오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큰 부르짖음을 들으셔서 그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의 간절한 마음을, 당신께 향하는 강한 그 영혼의 소리를 들으셨기 때문에 그를 당신 곁으로 데려오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물으십니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질문을 그에게 던지신 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청이 무엇인지 모르셨기에 물으신 것이 아니라, 진정 그 자신이 원하는 진실을 이야기하도록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얼만큼 무엇을 간절히 원하는 지를... 그리고 얼만큼 자신의 청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지를... 스스로 말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는 간곡하면서도 큰 목소리로 말합니다.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이에 예수님은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말씀하시자, 그는 눈을 뜨게 됩니다. 그는 세상 사물을 바라보는 육체적인 눈만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믿음의 눈을, 희망의 눈을, 기쁨의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세상을 불신하고 절망하는 이가 아니라, 이제는 희망과 믿음을 전하는 이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눈 먼 이를 치유하신 기적은 진실로 간절한 믿음 안에서 청한다면 어떤 것이라도 들어 허락해 주시는 예수님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 청하는 눈 먼 그의 용기, 그리고 그 영혼의 진실한 고백, 그리고 강한 믿음들 이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치유 기적이 이루어질 수 있는 큰 동기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나아가 오늘 치유 기적은 우리 모두에게 육체적인 눈이 아니라, 세상의 참과 그름을 올바르게 바라 볼 수 있는 진리의 눈, 신앙의 눈 또한 뜰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로 청하고 노력하라는 말씀으로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린 눈을 뜨고 있으나 눈이 먼 이들입니다. 세상의 눈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참 깨달음 얻고, 참 빛을 바라볼 수 있는 이로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굳은 믿음을 가지고 간절하고 진실하게 주님께 청해야 겠지요.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아멘.
나자렛 예수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여러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소리 질렀다.(마르 10, 47-48)
대부분의 사람은 볼 줄도 알고 들을 줄도 알며, 그런 능력이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도 압니다. 할 수 있음을 안다는 것이 사람을 동물과 구별짓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고 듣는 감각기능이 고장을 일으키면 사람은 의기소침하게 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평탄치 못한 인생을 살게될 것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사물을 보고 듣는 외적인 감각기관 외에도 보고들은 것을 감지하는 내적인 기관이 있는데, 이 기관을 우리는 마음이라 부릅니다. 사람의 마음은 보고들은 것을 근거로 움직이지만, 보거나 듣지 않고도 작용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마음 또한 눈과 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눈은 앞에 있는 것만 볼뿐, 뒤에 있는 것은 볼 수 없으며, 귀는 소리나는 것만 들을 뿐 소리나지 않는 것, 즉 침묵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은 외적인 눈이 보지 못하는 것도 보며, 마음의 귀는 소리나지 않는 것도 듣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실재가 그런데, 아무도 하느님을 사람의 외적인 눈이나 귀로 보거나 들은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과 귀는 하느님의 실재를 보고, 침묵 가운데 울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실재에로 마음의 문을 열게되면 인생의 행복을 보고, 들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리고의 소경 바르티매오의 치유사화를 들려주는데, 이 기적이 공생활 중 사람에게 베푼 예수님의 마지막 기적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경의 치유기적은 공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것도 복음서 전체의 구조에서 같은 자리인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마태 20,29-34; 마르 10,46-52; 루가 18,35-43) 그렇다면 예리고 소경의 치유는 단순한 치유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더 이상 기적을 행하지 않으실 것이며, 만약 행하신다면 그것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질 기적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마지막 공식적 기적으로서의 소경 치유기적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기적에 앞서, 즉 예수께서 예리고에 당도하기 전에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복음마다 다소 차이는 있으나, 공통된 내용, 그것은 바로 "수난에 대한 세 번째 예고"와 "추종의 의미와 섬김의 자세"입니다. 마태오와 마르코복음은 "수난에 대한 세 번째 예고"에 이어 즉각 "추종과 섬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제자들의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사실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루가복음에는 "수난에 대한 세 번째 예고" 다음에 오늘 복음인 예리고 소경의 치유사화를 배치하는데, 루가가 "추종과 섬김"의 언급을 다루지 않은 이유는 예고의 끝 부분에 마태오와 마르코에 없는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도 조금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 말씀의 뜻이 그들에게는 가리워 져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지 못하였던 것이다"(루가 18,34) 라는 말을 덧붙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소경은 자신이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보게 해 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소리는 보이지 않는 암흑을 향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무관심하다못해 조용히 하라고 윽박지르기까지 하였으나, 그는 나자렛 예수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바르티매오는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고 있었던 것이고, 예수께서는 그가 이미 믿음의 눈으로 보고 있던 것을 실제로 보게 해 주셨을 뿐입니다.(52절) 그러나 제자들은 두 눈을 뜨고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자의 본질적인 부분인 수난과 죽음, 추종과 섬김은 눈을 가지고도 보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난 기적과 권위, 자리와 보상만 보려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에 비하여 예리고의 소경은 장님의 처지에서 예수님의 본질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의 앞서간 대목을 보면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예고에도 불구하고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 나라에서 오른편과 왼편 자리에 앉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사실은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들이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스승은 머지않아 만신창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인데도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바르티매오는 믿음의 눈을 가졌을 뿐 아니라, 침묵하지 않는 마음의 소리 또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소리가 바로 기도입니다. 외적인 눈과 귀에 많이 의존하는 사람은 그만큼 마음의 눈과 귀의 기능이 떨어집니다. 오늘 광명을 찾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루살렘에 함께 입성하게 될 바르티매오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예수님의 마지막 일을 목격하고 증언할 진정한 "보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참된 기적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고 믿겠다는 사람들은 보통 볼 수도 없을 뿐더러 보고도 믿지 않을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보기 위해서는 먼저 믿어야 할 것입니다.
-단순한기쁨(엠파스불로그)-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