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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람의 깊이 원문보기 글쓴이: 박철영
해체된 시의 경계와 현실 인식
오현정 시집 《라데츠키의 팔짱을 끼고》중심으로
박철영(시인, 평론가)
오현정은 스스로 유목적인 사유를 통해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모험의 시인임을 자칭한다. 그녀의 시에는 신들린 마법처럼 강한 신기神氣가 서려 있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대상으로 다가오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일방향적 인식을 과감히 거부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시 세계는 과거라는 시간 속에 잊힌 유적을 찾아가는 여행으로 나타난다. 시간의 풍화 속에서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한 것들을 발견하는 혜안은 문학적인 장점이 되었다. 그것은 사물로 대변되는 세계를 단순하게 보지 않고, 시간을 거슬러 그 당시로 몰입해가는 고고학적 탐험 인식에서 가능하다. 특히 세기를 넘어온 유적을 대하는 순간 전율하는 흥분을 절제하려 하지만, 과잉된 사유는 시에 대한 열정으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풍화를 견딘 시간과 정신적 충동을 최대한 끌어내 상상력을 시적으로 시도한다.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범람처럼 다가오는 세계와 대면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삶과 비유되는 공감을 견지하려 한다. 그 시간 속에 멈춰버렸거나 은폐된 사유의 물상들에서 정신적 공명을 끌어내는 노력은 당연한 것이다. 오현정의 시 세계는 우리가 살지 못했던 영역까지 시의 사유 안에서 무한 확장되고 불멸의 사후와 현실 긍정으로 활성화한다. 시를 통해 시의 근본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기에 앞서 시는 어디를 지향해야 하는 가를 묻게 된다. 매번 던지는 질문이 구차할 수 있지만, 매일 아침이면 아침밥을 찾아 먹듯 이상할 바가 아니다. 시대가 바뀌면 시의 근본도 바뀌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도 거듭하게 된다. 흔히들 유행에 따르지 않고 전혀 새로운 모험을 감행하는 부류에 오현정 시인도 응당 포함해야 한다. 과거라는 시간 여행에서 접하게 된 세계를 시인은 통찰을 통해 낯설지 않은 거울 속처럼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게 한다. 오현정 시인은 미래나 과거의 시간을 현실 못지않게 소중히 여기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 지금껏 답습해온 보편적인 ‘다움’보다는 ‘낯 섬’을 선호하는 탈 경계 인식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인식은 대결 의지보다는 인간적 공감이라는 유대에서 근거하고 통어한다. 시인은 폐허의 한 부분만으로 유물적遺物的 사유를 마감하지 않고 감춰진 전부를 복원하여 현대인들의 인식과 접목하려 한다. 더 나아가 시를 통해 지나간 불행이나 음모를 들추지 않고 많은 긍정의 환영을 유추하려 대상에게 다가가며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따라서 패배보다는 긍정적인 희망과 기쁨을 더한 사랑까지도 섭렵하는 시적 아우라를 잘 보여준다. 오현정의 시를 살펴보기 전에는 그것마저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 맞닥뜨린 현실에서 까맣게 지워진 시의 또 다른 영역과의 만남은 경외스러운 의식儀式이기 때문이다.
와디럼 사막부터 사귀어야지/ 심장이 더 무뎌지기 전에// 숯불로 달궈놓은 사막 의 구덩이에 세 시간을 견디면/ 곧 떨어질 것 같은 버섯바위도 제집을 짓는다// 그냥 내버려 뒤 수맥 찾아가게/ 모래보다 먼저 달리는 바람도 가게 놔둬// 바위 산의 와디는 내가 살아온 하루하루/ 따라붙다 멀어지는 베두인 지프차도 손가락 질하지 마/ 제 꼬리 밟고 맴도는 여우는 가지 위에 앉고/ 외로운 너구리는 바람 타고 굴을 뚫는다// 귀에서 뇌까지 너 아닌 나에게 불 지피는 불꽃/ 렛잇비, 렛 잇비 사막별은 혀를 굴린다// 비틀즈의 해체를 모궁은 예감했다/ 나를 당기던 너, 나에게 끌리던 나/ 원소에서 또 다른 원소로 윤회를 거듭하는 바람과 빛이다 // 너를 가장 닮은 와디럼은 사람들이 양고기를 뜯는 동안 울었다/ 뻑뻑한 모래 의 눈이 붉다 못해/ 지나가는 안녕을 맴도는 형광으로 춤추다/ 돌아가는 뒷자락 에 스러지는 불씨의 결 하나를 지핀다// 그냥 내버려 둬, 그냥 내벼려 둬/ 가슴 별은 달무리 삼키며/ 또, 너를 당긴다// 화성으로 가기 위해 와디 하나 긋는다/ 심실을 머금은 모래입술이 이슬을 깊숙이 빨아들인다/ 풀의 태동 소리, 너 있는 별에도 오아시스가 터지겠다
-<화성에 가기 전에> 전문
‘화성에 가기 전’이라는 시제만 보더라도 도통 가늠할 수 없게 엉뚱하거나 그도 아니라면 스케일이 큰 시인임을 알 수 있다. ‘화성’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곳에 있다. 확장적인 사유는 인간 생존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근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근원인 장소를 통해 시인은 한정된 삶의 영역을 벗어나는 빌미를 찾아낸다. 지금껏 보지 못한 세계에서 시인은 두려움보다 새로운 것에 대한 흥분을 즐기는 듯하다. 자신에 대한 방어나 긴장보다는 적극적으로 부딪치려는 탐험 의지가 내성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서 되레 잃어버린 “너 아닌 나”를 찾아가는 기회를 모색한다. 우리는 험난한 곳을 가기 전 비슷한 환경에서 전지훈련이라는 것을 한다. <화성을 가기 전에> 시인은 ‘와디럼’사막을 찾아가며 비슷한 환경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우주 속 ‘화성’을 떠올린다. 화성을 찍은 사진은 말라버린 공간에 불규칙하게 솟은 붉은 사막과 굵게 패인 계곡으로 기억된다. 그런 근거를 통해 화성을 찾아가려면 요르단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와디럼 사막부터 사귀어야지/ 심장이 더 무뎌지기 전에”라며 플랜을 실행한다. 시인은 ‘와디럼’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며 서서히 적응해간다. “세 시간”을 견뎌야 하는 한낮의 뜨거운 태양을 피하는 방법과 그런 환경에서 “버섯바위”가 적응에 성공하는 생존 비법까지 알아간다. 생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수맥”은 바람에 묻어온 냄새를 통해 위치까지도 가늠할 줄 안다. 탐험처럼 이곳 저곳을 찾아다닌 하루가 바위산에 그어진 ‘와디’라는 흔적으로 남았다. ‘와디’라는 황량한 계곡을 떠나지 못한 베두인을 보며 시인은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한다.
따라서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는 현실보다 먼 피안까지 보고 있다. 우주적 사고思考의 이동은 지구라는 태고의 시간을 거슬러 가야만 가능하다. 그럴 준비는 충분히 끝났고, 실행에 옮겨졌다. ‘와디럼’ 사막은 우리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현존하는 미지의 세계이자 피안의 세계로 설정된다. 그 자체가 붉어 대 자연이 빚은 신성한 대상으로 자리매김한다. 시인은 그곳을 통해 인간의 생멸까지 예감할 수 있다. 생명체라면 필연적으로 생성과 소멸을 맞이하듯 존 레논의 “렛잇비, 렛잇비 사막별은 혀를 굴린다// 비틀즈의 해체를 모궁은 예감했다”는 시인이다. 하지만, 시인이 말하는 ‘렛잇비’와 ‘해체’가 갖는 상관관계는 아직 모호하여 그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 그럴 때는 독자의 추정을 요구하는 몫으로 남겨야 한다. 우리가 아는 ‘와디럼’ 사막은 인간이 마지막을 견디다 찾아가는 피안의 사후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비로소 시인이 알고 있는 동양적 “원소에서 또 다른 원소로 윤회를 거듭하는 바람과 빛”을 상상한다. 살아있는 것도 윤회의 한 순간이라면 모래입술에 묻은 이슬조차 하찮게 여길 수 없다. 오아시스라는 것도 어차피‘풀’뿌리 아래에 있을 것이다. 낯선 사막을 따라 찾아가는 시인에게는 모든 것이 경외 그 자체다. 현존하는 사막 너머에는 또 다른 ‘불멸이나 영원’이라는 대상이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 이름엔 뱀의 머리가 된 독수리가 앉아 있어요/ 긴 혓바닥은 해를 깨워 칭얼대 는 파라오에게 두 눈과 귀를 한껏 열게 하죠/ 포도주에 뱀독을 약간 넣어 물려도 죽지 않게 그를 지키고/ 왕의 안식을 궁리하다 단잠에 빠진 그를 영원처럼 품어 주었죠// 덜컥대는 좁은 야간 침대기차를 타고 밤새 내 이름의 상형문자를 풀어 온 당신/ 람세스 2세와 마주선 나를 읽고 그의 입술을 문댄 검지를 내 입속에 넣 어주었죠/ 순간 채도가 살아나는 나의 두 팔과 도끼와 집게와 그릇을 봐요/ 바라 만 보던 거리가 이제 포개졌어요/ 내 손가락은 종달새로 빵을 구워요/ 람세스 2 세는 나를 태양신의 아내 하토르와 나란히 올리고 싶었나 봐요/ 왕가의 계곡 중 에서도 가장 음부에 내 무덤을 숨기고/ 사람들의 숨결과 스마트폰의 광채를 피해 오래오래 내 모습을 지켜주었죠/ 아직 다 풀지 못한 비밀은 당신이 구워본 에이 슈 발리디 빵 속에 채우세요// 두 눈동자에 새겨진 사하라 사막의 신기루처럼/ 불을 먹고 불춤을 추는 베두인의 허리로/ 맨발로 홍해에 돛을 펼치는 펠루카의 휘날리는 머리카락에/ 터번을 쓰고 히브리 노예의 피땀이 쌓은 피라미드의 테러 에서 살아남은 돌/ 바로 당신이에요, 바람이 돌 귀퉁이 밀면 스핑크스가 당장 날 아올 거예요/ 돌아가는 길에 카이로 시장 골목길에 있는 엘 피샤이 카페에 들르 세요/ 소설가 나기브 마푸즈가 시간의 창고에서 당신을 만나러 올 거예요/ 그에 게 물담배를 권하고 아부심벨의 왕비 네페르타리에게 못 다한 질문을 이어가세요 / 아마 한 하릴리 시장의 미로를 빠져나오기 전에 코란을 새긴 패널을 사라고 할 거예요/ 모스크의 아잔이 울리면 사랑의 신 하토르가 된 나를 생각하며 가슴에 양팔을 얹어요// 신은 인간이 만든 걸작품, 유일한 목숨에 영생을 불어 넣는 당 신 안에서 함께 숨 쉬고/ 당신은 고양된 이 기쁨을 산등성이 잇는 들의 입김으로 전하며 우리는 불멸의 길을 가요/ 이집션이 ‘꼬리’라 부르는 당신, 참 멀리서 나를 만나러 와서 정말 반가웠어요/ 슈크란*, 오래 기다린 사람이 진솔한 친구가 된다지요/ 뱀과 독수리가 들을 수 없는 당신 이름을 알고 싶어요, 나의 오아시스
-<네페르타리> 전문
시인의 눈빛보다 마음은 쉽게 마법에 빠져든다. <네페르타리>는 람세스 2세의 왕비가 된 뒤 총애를 받아 사후 거대한 무덤에 묻히게 된다. 그런 ‘네페르타리’ 왕비는 무덤 속에 묻혀 살아서처럼 존엄을 훼손하지 않도록 “내 이름엔 뱀의 머리가 된 독수리가 앉아” 지킨다. 하지만 알고 보면 뱀은 벽사辟邪의 의미보다는 주술적인 의미가 더 크다 하겠다. “긴 혓바닥은 해를 깨워 칭얼대는 파라오에게 두 눈과 귀를 열게”하여 ‘파라오’의 사랑을 끝없이 독차지하려는 수단임을 알게 된다. 그 유혹의 방법은 다양하다. 그중 “포도주에 뱀독을 약간 넣어 물려도 죽지 않게 그를 지키고/ 왕의 안식을 궁리하다 단잠에 빠진 그를 영원처럼 품어 주었”을 거라는 여성적인 상상을 이어간다. 덜컥대는 야간 침대 열차를 타고 가는 동안 “밤새 내 이름의 상형문자를 풀어온 당신”이 곧 자신임을 알게 된다. 기가 막힌 자아의 완전한 복귀이자 환생이다. 한 순간에 전생을 확인한 시인은 “람세스 2세와 마주 선 나를 읽고 그의 입술을 문댄 검지를 내 입속에 넣어”보며 꿈이 아님을 확인한다. 그런 것이 현실이 되어 상형으로 가득한 벽화가 실물처럼 살아나 활기가 돈다. 벽화 속 주인공으로 변신한 오현정 시인은 세기를 뛰어넘어 과거의 시간 여행을 계속한다. 왕가의 계곡에서도 가장 은밀한 곳에 위치한 ‘네페르타리’의 무덤은 사후의 궁전이다. 사후도 현생과 마찬가지로 살아생전처럼 왕비는 람세스 2세 만을 위한 ‘에이슈 발리디’빵을 굽는다.
그런 순간에도 무덤을 지키는 베두인은 절대적인 파라오를 위해 끝없이 희생(봉사)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 당시처럼 시인은 몸소 펠루카를 타고 나일강을 건넜다. 그중 살아남은 일부를 상상한다. “터번을 쓰고 히브리 노예의 피땀이 쌓은 피라미드의 테러에서 살아남은 돌/ 바로 당신이에요, 바람이 돌 귀퉁이 밀면 스핑크스가 당장 날아올 거예요”라며 평생 노예로 살며 왕비의 무덤을 쌓기 위해 돌을 다듬다 죽어간 사람까지도 기억해낸다. 고통의 역사를 소설화한 소설가‘나기브 마푸즈’가 쓴 ‘알슐라시야’를 통해 생생한 기억을 더듬었을 것이다. 옛 이집트의 왕정, 영국의 식민주의, 현대 이집트 등을 상기하며 소설가 ‘나기브 마푸즈’가 빈번하게 드나들었다는 “카이로의 시장 골목길에 있는 엘 피샤이 카페”를 찾아간다. 둥근 첨탑이 솟은 모스크에서 아잔이 사람들에게 번져올 때쯤 구원을 기도할 회개를 늦출 수 없다.
<네페르타리>는 4연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 연은 무덤 속 파라오의 왕비가 살아생전 치열했던 사랑과 쟁취 과정을 말하고 있다. 둘째 연은 왕비가 생전에 람세스와의 삶을 상상하며 사랑은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순종으로 가능함을 말해준다. 절대적인 권능을 가진 파라오도 결국 사랑이라는 명제 앞에서 인간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절대 불변의 법칙임을 알 수 있다. 태양신의 아내 하토르를 상상하며 아내이자 왕비인 ‘네페르타리’를 사랑했을 람세스 2세를 만나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세 번째 연은 당시의 사회상을 유추해볼 수 있다. 신이 통치한 이집트에서 파라오를 떠받든 사람들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기에 외면할 수 없다. 드디어 시인의 마법이 풀리면서 현실적인 자각까지 이르게 된다. 네 번째는 이집션을 통해 만남과 이별에 대한 인간적 아쉬움을 전하고 있다. 신神의 통치 시대에 살고 있던 이집션들을 떠올린다. 인간이 갈구하는 영혼 불멸을 얻기 위해 고통으로 몰아넣은 신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연민케 한다. 시인은 이집트 여행을 통해 오아시스가 생명수인 것처럼 자신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성찰의 기회를 얻었다.
허기진 사유를 시적 상상력으로 채웠다 해도 배고픔은 만만치 않을 때이다. <상쾌한 브런치>는 아무래도 사막보다는 물리적 거리 이동을 통해 “통통 튀는 아침을 느긋하게, 안개 거친 보정동 카페거리”를 찾아가 친구와 같이 하는 것이 제격일 것이다. 그래서 한 끼니도 이국적인 ‘브런치’라고 말했을 것이다. 식사 시간도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르다. ‘신찬神饌’으로 올라온 싱싱한 유기농 야채는 당연하다. 신들을 대신하여 수행한 십자군 전쟁 때 이슬람을 능멸하려 먹었다는 초승달 모양의 ‘크루아상’과 유럽 문명의 아메리카 상륙으로 유래된 ‘토르티야 피자 한쪽’을 제례식으로 올렸다. 인간적이지 않는 이 모든 행위는 신을 위한 의례儀禮 형식으로 수행해야 한다. 상상은 이미 현실 경계를 벗어나 신들의 내밀한 내면까지 훔쳐보게 된다. 이시스가 절대 그렇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토록 사랑했던 오시리스를 대신해 “오전과 오후 사이를 부담스럽지 않은 낱알로 흐르는 시간 그대와 나 브런치로 만나면/ 이시스 여신이 트랜스젠더와 이피스를 옆자리에 앉혀놓고”이성적 유혹에 약할 수밖에 없을 때 “할喝로 울부짖었을까?” 라며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적 동정을 보인다. 유일한 사랑을 위해 ‘이시스’는 그 유혹을 이겨냈지만, ‘이피스’는 ‘이안테의 젖무덤’에 무너지며 기어이 사랑을 고백하고 만다. 신화를 통해 보여주는 자아의 공감 인식은 그 위력이 대단한 것이어서 신들도 극복할 수 없었음을 본다. 신의 모습을 빌어 인간으로 귀환한 시인은 절제된 자아를 무한 방출하고 있다. 브런치를 함부로 즐겨서는 안 될 일이다. 극복을 떠나 그만한 상상력을 봇물처럼 담아낼 수 있어야만 식탁에 앉을 수 있다.
이제는 식탁에서 일어서야 할 시간이다. 시인은 감각으로 다가오는 시적 세계의 외연을 따라나선다. 사랑은 영원한 것이기에 동서양이 다를 수 없다. 그 속에 시가 있다고 믿어 <고령가야 트레킹>을 나섰다. “여린 봄 햇살을 머리에 이고 순장 묘를 따라 갔더니/ 누천년 잠긴 우툴두툴한 자물쇠에 낀 쇳녹,/ 그녀의 옥문은 적신 능을 디디고 황홀한 순간이 모로 누웠다”며 발성을 시작한다. 그렇게 발성한 모음들이 얹혀 “옆자리 뽀얀 속살 켜는 가야금 열두 현이 잊었던 옛사랑”을 찾아가 망설임 없이 “어느 왕녀 옆에서 채 썩지 않은 사내”까지 불러냈다. “불두화 피우러 고령에 왔다”며 ‘불두화’를 빌미로 인간적 욕망을 순정으로 부조하고 있다. 객관적 상관물인 ‘불두화’나 ‘순장 묘’는 과정의 아픈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그 영혼들을 치유해줘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하고 환기한다. 대상에 대한 천착은 오현정 시인의 것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그러면서도 “언젠간 새로운 길이 시작된다는 걸, 흥얼대며”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시선을 오래 동안 멈춰야 할 때가 발생한다.
가쁜 숨을 몰아 돌에 영원을 찍어 누른다/ 가없이 더 높은 존재 당신을 모신다/ 적과 싸워야 하는 나날 물과 불, 굵은 옥수수 알갱이가 목숨을 이어주고/ 돌덩이 옮겨 성을 쌓다 당신께 맨발의 아이 하나 주십사 기도한다// 잉카의 신은 하늘이 요 태양이다/ 해발 3,800미터에서도 뜀박질하는 내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은 /불멸의 심장과 콘들의 날개와 돌의 눈물이다/ 천둥 번개도 흔들지 못하는 방어 벽을 쌓는 것은/ 썩지 않는 창고에 저장하는 내일이다// 소금빛으로 익은 아내는 약초 캐는 눈 깊은 농사꾼/ 안데스 산맥을 따라 태초에 바다였을 고산 영봉에 숨 어 있는 산호다/신을 경외하고 악을 물리쳐 사람답게 살아남고자/ 흐르는 짜디짠 산물을 가두고 걸러 천연의 맛을 내는 여인이다// 잉카는 돌과 소금, 옥수수를 바람에 말리고, 저미는 분노는 살에 새겨/ 코카콜라도 녹일 수 없는 신비한 단맛 톡 쏘는 노란 액체를 낳았다/ 먼 바람 냄새다, 모래 냄새다/ 이별의 틈을 메우는 12각 돌쌓기 하는 아버지의 땀 냄새다
-<잉카콜라와 차랑고> 부분
오현정의 시는 타자의 유물로 남아있는 풍경 속에서 소중한 자아를 발견해가는 시의 전형이다. 그것도 지금껏 살아온 환경과는 전혀 다른 물리적인 공간에서 초월한 상상력을 필연처럼 전환해간다. 몇 세기의 문명이 파괴되어 남은 것은 곰팡이 핀 석조물뿐이지만, 찬란했던 시대의 영광과 권위의 흔적은 예사롭지 않다. 시적인 단서는 그뿐만이 아니라 그곳에서 아직도 살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통해 정서적 거리를 단숨에 메워간다. 지구상에서 가장 길다는 남미의 안데스 산맥을 중심으로 잉카 문명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찬란한 문명의 성채는 외부의 힘에 의해 무섭도록 빨리 사라져 버렸다. 그 폭력적 만행을 상상하며 “가쁜 숨을 몰아 돌에 영원을 찍어 누른다”라고 전율한다. 그러나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가없이 더 높은 존재 당신”을 만나게 된다. “잉카의 신은 하늘이요 태양”임을 알 수 있다. 잉카인의 의식에서 통치자는 이집트와 달리 스스로 태양(파라오)이 될 수 없어 신의 계시에 따라야 한다. “돌덩이 옮겨 성을 쌓다 당신께 맨발의 아이 하나 주십사”하고 간절한 기도로 신이 점지해준 아들을 얻어 신탁으로 통치를 하였지만, 스페인의 침입을 예견하는 신탁은 받지 못한 듯하다. 인간과 인간의 싸움 이전 결국은 신들의 싸움에서 패배한 잉카인의 자존심 속에는 <잉카콜라와 차랑고>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여행을 통해 시인은 기존의 정서를 고집하지 않는다. 매번 새롭게 출발하는 시적 상상력은 놀라울 정도여서 지루하지 않다. 그곳에는 시인이 섬기는 시詩가 사람들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잉카 문명도 마찬가지로 태양의 아들이 통치하는 나라였기에 신의 왕국이었다. 그런 신의 나라에 거침없이 들어갈 수 있던 것도 알고 보면 타자(대상)에 대한 애정과 충동에서 출발한다. 시인은 독특한 노란색 ‘잉카콜라’를 마시며 “불멸의 심장과 콘들의 날개와 돌의 눈물”로 켜는 ‘차랑고’라는 현악기의 구성진 노랫소리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그 노래에는 외부의 어떤 힘에도 굴복하지 않는 성채를 굳건히 하는 것과 소멸하지 않는 잉카인의 내일을 기약하는 다짐을 담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잉카콜라’는 그냥 시커멓게 물들인 아메리카 스타일의 콜라가 아니다. 잉카인의 절실한 의지가 담긴 “잉카는 돌과 소금, 옥수수를 바람에 말리고, 저미는 분노는 살에 새겨/ 코카콜라도 녹일 수 없는 신비한 단맛 톡 쏘는 노란 액체”를 만들어냈다고 믿는다. 이어 “이별의 틈을 메우는 12각 돌쌓기”는 그들만의 비밀스런 신비이자 ‘아버지의 땀’이 이룬 유흔이다. 차랑고 노랫소리는 계속 이어지고, “돌산의 현을 타고 차랑차랑 차랑고 소리 애잔해/ 리마로 가서 엉덩이가 탱탱한 처녀를 맞으면”이내 “붉은 망토를 걸치고 입꼬리를 올린 채 신랑에게 오는 잉카의 젖가슴”에서 시적 잉여는 절정에 다다른다. 결국 인간(인류)이 갖는 보편적 정서는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다. 하지만, 그런 확인은 이제 순간이면 가능하다.
그 해법을 시인은 <증강현실에 들다>를 통해 말해준다. 공상 과학에서 가능한 일이 현실에서 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우선“뭘 망설여요// 내 안으로 들어오세요// 입구에서 체험 용지를 들고/ 거기 그려진 것 중에서 내키는 곳에 맘껏 색칠하세요// 이제 스마트폰을 꺼내 나의 앱을 다운 받으세요”라며 시인이 말하는 대로 따라 하면 된다. 지금껏 시인은 찾아가는 여행을 통해 시의 세계를 탐색해왔다. 이제부턴‘증강현실’이라는“게임 모드 버튼”만 누르면 만사가 오케이다. 현실과 가상 이미지가 한 공간에서 실현되는‘증강현실’에 시인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근두근 발굴단>도 그런 관점에서 쓴 시다. ‘아이디’만 있으면 가능한 인터넷 속 “모르는 사람 블로그의 오늘이 우리 집 대문을 두드릴까/ 이륙할 때 의자 팔걸이를 꽉 잡는다”며‘발굴단’일원으로 합류한다. 시인은 “히어리나무 끝에 앉은 바람이 세 근 네 근이다”라며 자신을‘히어리’에 빗대고 있다. ‘히어리’는 지리산 근경에 서식하는 수종이다. 그렇다고 연약한 감성을 자극하는 ‘히어리’는 아니다. 지리산을 벗어나려는 강한 호기심을 상징하는 ‘히어리’ 임을 알아야 한다. 시인은 지리산을 진작 벗어나버렸다. 이미 “지중해와 홍해, 이름 부르면 지퍼 채운 말 넘실넘실 온몸으로 울어댈까/ 갈 곳과 닿을 곳을 모르는 것처럼 심해心海 산호 찾아// 발굴단은 고대와 현대”를 넘나들고 있다. 시인의 시 세계는 단순히 욕망과 충동이 아니다. 서정시라는 관습적 시 쓰기에서 변화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다. 그런 방편으로 대상에 대한 확장을 서슴지 않고 강한 의지 행위를 보여준다. 시집 속에는 낯선 시어가 많이 나온다. <서귀포를 3D로 굽는다>도 마찬가지다. ‘가시리’라는 마을에서 서귀포를 생각한다. “삼킨 파도”와 “잊고 산 사람”을 출력하고 “동굴 속 어둠도 일어서 4·3평화공원에서 그 이름을 찾”아 낸다. 영원히 잊혀 질 수 없는 제주의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학살을 상기하고 있다. 시인은 감춰진 무덤 속을 들추듯 아픈 상처를 외면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의 상처가 곧 우리의 상처이기 때문이다. 상처를 함께 치유하려는 시의식이 곧 문학의 근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류 태동 이래 슬픔을 내포하지 않는 삶이 어디 있을까마는, 죽음을 두고 마냥 슬퍼할 일은 아니라고 위로를 건넨다. 다 만 방법이 색다를 뿐이다. 그런 면에서 <라데츠키의 팔짱을 끼고>는 시인만의 개성을 잘 보여주는 일례라 하겠다. 장례식장을 다녀오면서 인간의 내면에 숙명宿命한 죽음과 수반한 상처를 생각한다. 그 상처는 죽음에 대한 또 다른 재활 의지를 다지려는 결기로 작용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신화 속 시지프스의 일상과 다르지 않다. 길가에 떨어진 은행 알을 통해 생명과 죽음은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닥 슬플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지프스처럼 그 순간을 당연한 희망으로 반전하려 할 때 요한스트라우스의 경쾌하고 힘찬 느낌의 ‘라데츠키 행진곡’이 생각났을 것이다. “영혼은 3막 3장 다음 붙임줄을 해독하는 행진”처럼 죽음으로 떠나보내는 사람들에게 누구나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그런 상처를 시적 감성으로 치유를 시도한다. “남은 신명을 어쩌지 못해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처럼 외치다/ 못다 부른 노래 지휘봉에 실어 영광과 희망의 나라로 피아니시시모ppp를 타고 포르티시시모fff”의 격렬한 리듬을 생각한다. 죽음에 대한 공감을 희망으로 치환하려는 지점에서 “다시 만날 땐 너의 웃음보따리가 더 커야 해”라며 시의 공명으로 수렴점을 찾아낸다. 다가오는 대상을 시적으로 사물화 하지 않고 사회인식으로 공감하는 모습에서 은유를 넘어 미끄러지듯 환유로 치환한다. 문학이 닿을 수 없는 미지의 공간도 언젠가는 문학 안으로 편입될 때 지금과 다른 시학으로 현현할 것이다. 오현정 시인의 문학 자장 안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그중 시대 인식에 대한 통시적 가치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런 요소까지 내포한 시는 건강한 시이고 지속적으로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한 시임을 단언한다. 시의 표현 방법은 시인의 개성이다. 개성이란 것은 기존의 시 쓰기 유형을 초월하려는 노력으로 볼 때, 오현정 시인은 꾸준히 변신을 추구하고 있다. 그래서 지속적인 변화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