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감별사
윤성택
우울 무렵 전망대에 올라 도시를 내려다본다
사각 케이지 속에서 각기 빛나는 불빛,
철제 닭장에 갇힌 병아리들 같다
슬픔에도 암수가 있다
내 안에서 밖으로 나간 슬픔이 암컷,
밖에서 내 안으로 들어온 슬픔이 수컷이다
암컷은 세상의 산란용이고
수컷은 내 안의 폐기용이다
둥근달이 전깃불처럼 켜졌으므로
감별대에 올려진 것처럼 아뜩해졌다
슬픔은 내게 어떤 쓸모가 있을까
믹서기로 갈 듯 분쇄시켜야 할지
슬픔을 낳고 낳아 기쁨의 유통을 도와야 할지
감별의 밤,
바람이 머리카락을 헤쳐 비비고
달빛이 정수리의 돌기를 들여다본다
검은 상자 너머
부숭부숭한 노랑이
유리창마다 연약하게 번지고 있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 슬픈 사람은 슬픈 것만을 바라보고, 기쁜 사람은 기쁜 것만을 바라본다. 이 고정관념은 심리적인 편견으로 고착되고, 그의 사고방식은 좀처럼 변하지 않게 된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욕하고, 가난한 자들은 부자들을 욕한다. 적과 동지, 한국인과 일본인, 공산주의 대 자본주의의 이념 대립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고정관념에 불과하며, 이 대결과 투쟁방식은 사생결단식의 싸움으로 이어지게 된다.
슬픔은 그의 꿈과 희망이 좌절된 것을 말하지만, 슬픈 사람은 그 모든 것을 슬픔으로 색칠해 놓게 된다. 해 뜰 무렵이나 해 질 무렵은 일상의 시간대를 말하지만, 윤성택 시인의 [슬픔 감별사]의 ‘우울 무렵’은 우울(슬픔)의 시간대를 말한다. 슬픔이 찾아오는 시간대도 없고, 우울이 찾아오는 시간대도 없다. 기쁨이 찾아오는 시간대도 없고, 외로움이 찾아오는 시간대도 없다. 왜냐하면 슬픔과 우울과 기쁨과 외로움은 심리적인 감정의 상태를 말하며, 이 심리적인 감정들은 예고 없이 불쑥 찾아와 우리 인간들의 존재의 근거를 흔들어 놓고 떠나 가기 때문이다. 아마도 윤성택 시인에게는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가장 우울하고 슬픈 시간대일는지도 모른다. 그 외롭고 슬픈 ‘우울 무렵’에 전망대에 올라가 도시를 바라보면 “사각 케이지 속에서 각기 빛나는 불빛이/ 철제 닭장에 갇힌 병아리들”과도 같아 보인다. 자연의 터전에서 뛰어놀며 어미닭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철제 닭장에 갇힌 병아리들에게 그 어떠한 꿈과 희망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태어남 자체가 죄가 되고 천형의 형벌이 된 운명, 시시때때로 전방위적인 감시와 통제 속에 산란계가 되거나 우리 인간들의 먹잇감이 되어야만 하는 병아리들의 운명, 이 운명은 모든 생명체들의 운명과도 똑같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꿈도 없고, 희망도 없고, 탈출구도 없다. 오직 있다면 슬픔의 암수가 되어 슬픔을 낳고, 슬픔을 기르며, 슬픔 속에서 죽어가는 길 뿐이다. 내 안에서 밖으로 나간 슬픔은 암컷이 되어야 하니까 끊임없이 슬픔을 낳아야 하고, 밖에서 내 안으로 들어온 슬픔은 수컷이 되어야 하니까, 오직 내 안에서 폐기처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 몸은 슬픔의 암수가 들고 나는 플랫폼이며, 나는 슬픔을 낳고(살려주고), 슬픔을 폐기처분하는 슬픔의 감별사에 지나지 않는다. “둥근달이 전깃불처럼 켜졌으므로/ 감별대에 올려진 것처럼 아뜩해졌다”는 것은 공포 자체이며, 이 인간망나니와도 같은 천역을 통해서 슬픔을 “믹서기로 갈 듯 분쇄시켜야 할지/ 슬픔을 낳고 낳아 기쁨의 유통을 도와야 할지”를 감별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슬픔은 과연 내게 어떤 쓸모가 있는 것일까? 슬픔을 참고 견디면 모든 슬픔이 사라지고, 그 어떤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 그런 행복한 날들이 과연 오기는 온단 말일까?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부모형제를 잃어버린 슬픔, 그토록 소망했던 대서사시인의 꿈을 이루지 못한 슬픔, 너무나도 때 이르게 처자식을 잃어버린 슬픔, 전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그 바보같은 짓 때문에 치를 떨어야 하는 슬픔, 그토록 믿고 사랑했던 친구로부터 배신을 당한 슬픔, 너무나도 뜻밖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중증 장애인으로 살아야만 하는 슬픔, 오직 돈만을 아는 고용주로부터 ‘고비용--저효율의 대상’으로 낙인을 찍힌 슬픔 등, 이 세상의 슬픔은 너무나도 많고, 대부분의 우리 인간들은 이 슬픔의 우주 속에서 비명횡사를 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쁨은 짧고, 슬픔은 영원하다. 행복은 손에 잡힐 듯 손에 잡히지 않고, 불행은 우리 인간들을 슬픔의 우주 속으로 둥둥 띄워 보낸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헤쳐 비비고/ 달빛이 정수리의 돌기를 들여다” 보는 밤, “검은 상자 너머”, 즉, ‘철제 닭장 너머’ “부숭부숭한 노랑이/ 유리창마다 연약하게 번지고 있다.” 부숭부숭한 노랑은 창백한 달빛이 되고, 이 창백한 달빛은 철제 닭장에 갇힌 병아리가 된다.
윤성택 시인의 [슬픔 감별사]는 회의주의자의 시이자 허무주의자의 시라고 할 수가 있다. 그는 ‘슬픔의 감별사’를 자처하면서도 슬픔의 생산성과 기쁨을 부정하고,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의 삶을 “철제 닭장에 갇힌 병아리들”의 삶으로만 이해한다. 따라서, 오히려, 거꾸로, 그의 회의주의와 허무주의가 마주쳐 슬픔의 생산성과 그 슬픔의 주인공을 너무나도 슬프고 아름답게 창출해낸다.
슬픔에도 암수가 있다. 내 안에서 밖으로 나간 슬픔은 암컷이고, 밖에서 내 안으로 들어온 슬픔은 수컷이다. “암컷은 세상의 산란용이고/ 수컷은 내 안의 폐기용이다”라는 이 아름답고 뛰어난 시구들은 그의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의 승리라고 할 수가 있다.
대부분의 생명체들은 자기 수명을 다 살지 못하고 비명횡사를 하게 된다. 풀의 씨앗, 나무의 씨앗, 거북이와 악어의 새끼들이 그렇고, 호랑이와 사자와 코끼리와 개미의 새끼들도 그렇다. 예전에는 우리 인간들도 예외가 아니었지만, 오늘날의 우리 문화인들은 너무나도 오래 사는 반자연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슬픔은 꿈과 희망이 없어지고, 삶에의 의지가 무너진 것을 말한다.
이 세상이 지옥이고, 우리 인간들의 삶은 이 지옥 속의 형벌에 지나지 않는다.
슬픔의 바다, 슬픔의 우주----, 그 어떤 구원의 손길도 끊긴 우울 무렵----, 이 우울이 슬픔을 낳고, 이 슬픔이 ‘슬픔의 감별사’에게 오히려, 거꾸로, 너무나도 아름답고 슬픈 존재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자연과학은 최고급의 명품을 만들고, 인문과학은 전인류를 감동시킨다. 스티브 잡스는 전인류의 마음을 사로잡는 명품(애플 iPhone)을 창출해냈다.
독서, 철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전인류를 감동시키지 못한다.
나는 최고급의 낙천주의 사상을 창출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