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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word should be said about wholesome feelings versus unwholesome feelings, because one and the same feeling can be wholesome at one time and unwholesome at another. For example, there are two kinds of happiness - wholesome happiness and unwholesome happiness.
이 부분에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유익한 감정과 해로운 감정을 서로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감정이 어떤 때는 유익한 것이 될 수 있고, 또 어떤 때는 해로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행복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즉, 유익한 행복과 해로운 행복이 그것이죠.
One is happy not only when one does something wholesome; one can also be happy while doing something unwholesome. One needs to distinguish between happiness associated with wholesome kamma, and happiness associated with unwholesome kamma.
우리는 뭔가 유익한 일을 할 때만 행복한 게 아니라, 뭔가 해로운 일을 하는 중에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익한 업과 결합된 행복과 해로운 업과 결합된 행복 간에 구별을 해야만 합니다.
Both are associated with happiness, and so one feels happy. However, the happiness associated with doing wholesome things like making offerings and listening to a Dhamma talk is wholesome because the actions that occasion it generate wholesome kamma. This is wholesome happiness.
둘 다 행복과 연관되고, 그래서 행복을 느끼게 되지요. 그러나 보시를 한다거나 법문을 듣는 등과 같은 유익한 행위를 하는 것과 연관된 행복은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우에서의 행위는 유익한 업을 낳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유익한 행복입니다.
By contrast, unwholesome kamma results from doing unwholesome things like listening to music, so even though doing so makes one happy, it is unwholesome happiness.
반면에, 해로운 업은 음악을 듣는 것과 같은 해로운 행위를 함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그런 행위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해로운 행복이 됩니다.
The Buddha explains this in one of His discourses:
There are two kinds of happiness: the kind to be pursued, and the kind to be avoided.... Why have I declared this in regard to happiness? This is how I understood happiness: When I observed that in the pursuit of such happiness, unwholesome factors increased and wholesome factors decreased, then that happiness was to be avoided. And when I observed that in the pursuit of such happiness, unwholesome factors decreased and wholesome ones increased, then that happiness was to be sought after.
(quote from Dīgha Nikāya 21 The Discourse on Sakka’s Questions)
부처님의 경전 중의 한 부분에 이러한 사실에 대한 설법이 나옵니다.
행복에는 두 가지가 있노라. 추구해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이다. 행복에 관해 어떤 연유로 내가 이렇게 단언하는가? 이것이 바로 내가 행복에 대해 깨달은 바이기 때문이니라. 행복을 추구함에, 만약 해로운 요소가 증장되고 반면에 유익한 요소가 줄어듦을 알아차린다면, 그러한 행복은 피해야 마땅하니라. 행복을 추구함에, 해로운 요소가 줄고 대신에 유익한 요소가 더 커짐을 알아차린다면, 그러한 행복은 추구해야 할지니라.
(디가 니까야 제21장 제석천의 질문경에서 인용함)
Thus, based on ordinary experience, we all have a sense that mentality arises at the heart. However, this intuition still falls short of actually seeing the mental process. Whenever one feels happy or unhappy, mental processes arise very rapidly, one after another.
따라서 우리 모두는 일상의 경험을 기초로 하여, 정신은 심장에서 일어난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직관력은 실제로 정신 현상의 인식 과정을 지켜보는 것에는 여전히 미치지를 못합니다. 우리가 행복하거나 불행한 느낌을 가질 때마다, 그 인식 과정은 잇따라서 매우 빠르게 일어나지요.
They arise mostly based on heart materiality (hadaya rūpa). To see the mental process, one needs to develop concentration and discern ultimate materiality, because, in the realm of beings with the five aggregates, mentality arises based on materiality.
그 인식 과정들은 대부분 심장 물질(하다야 루빠)을 토대로 하여 일어납니다. 이러한 인식 과정을 보려면, 여러분은 삼매를 계발하고 궁극적 물질을 식별해야 하지요. 왜냐하면 오온으로 된 존재의 영역에서는, 정신은 물질을 토대로 하여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Therefore, one first needs to discern ultimate materiality thoroughly; only then will one be able to discern ultimate mentality, because all mentality arises based on materiality.
그러므로 여러분은 먼저 궁극적 물질을 철저히 식별해야 합니다. 모든 정신은 물질을 토대로 일어남으로, 여러분이 그리했을 때만이 궁극적 정신을 식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Profound discernment of this sort requires effort. We possess six sense organs, and all of them are directed outwards in an endless search for sense pleasure. Since our youth we have studied and learned a great deal and pursued our many interests in external things.
이러한 것을 심도 있게 식별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요구됩니다. 우리는 여섯 가지 감관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감각적 즐거움을 위한 끝없는 추구 속에 모두가 바깥으로 향해져 있지요. 우리는 어릴 때부터 많이 공부하고, 많이 배우고, 또한 외부적인 것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쏟아왔습니다.
We have spent a lot of time and money and effort - endless effort, because all our efforts in this direction never arrive at an end. There is always more. One will never come to know the truth through such pursuits; no matter how hard one tries, one will end up exhausted.
우리는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쏟아부었지요, 그러나 그것은 끝이 없는 노력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 우리의 온갖 노력은 절대로 그 끝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항상 뭔가가 더 있기 마련이지요. 우리가 그런 식으로 계속 추구해 나가는 이상, 진리는 결코 알 수가 없을 터이고,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도 결국은 지친 채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Instead of carrying on like this, we should change direction and seek the truth in this very body. Search inside, not outside. Direct your attention within, not without. How great that would be! Change direction and pay attention to your own body and not to external matters. You do not need money for this pursuit; all you need is to desire your own well-being and your own benefit.
그러니 이와 같은 삶을 계속하지 말고, 우리는 방향을 바꾸어 바로 자기 자신의 이 몸에서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밖에서 찾지 말고 안에서 찾으세요. 여러분의 관심을 외부가 아닌 내부로 향하게 하세요. 그렇다면 그 얼마나 멋진 일일까요! 방향을 바꾸어 여러분 자신의 몸 쪽에 주의를 기울이세요. 외부의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말이지요. 이런 일에는 돈도 들지 않습니다. 오직 필요한 것은 여러분 자신의 행복과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것입니다.
Human beings seek happiness in the external world, but in vain; there is no real happiness in the external world. Real happiness lies within. It cannot be found anywhere else. One will attain real happiness only when one knows the truth, and there is no chance of seeing the truth if one is always looking outward and pursuing happiness in the sensual world.
인간은 외부 세계에서 행복을 찾지만, 그러나 그건 헛된 일입니다. 외부 세계에는 진정한 행복이란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내부에 있습니다. 그 외에는 어디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게 될 때에만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으며, 항상 바깥쪽을 바라보며 감각적 세상에서 행복을 추구한다면 그러한 진리를 보게 될 기회는 없을 것입니다.
By observing everyday feelings, then, one can see that mentality arises not in the brain but in the heart. Mentality arises in the form of cognitive or mental processes. Above, I used the example of hearing a loud sound. One hears the sound at the ear, and at the same time it is felt at the heart. The sound impinges on the ear-door and on the mind-door or bhavaṅga simultaneously. This is the law.
돌이켜서, 우리가 일상의 감정들을 관찰해보면, 정신은 뇌가 아니라 심장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신은 인식 과정의 형태로서 일어나지요. 앞서, 저는 시끄러운 소리를 듣는 경우와 같은 예를 들어보았습니다. 그때 우리는 귀에서 소리를 들으며, 이와 동시에 심장에서 그것을 느끼게 됩니다. 소리는 이문과 의문(의문 역할의 바왕가)에 동시에 부딪칩니다. 이것이 법칙이지요.
This occurs with all five physical senses: When objects impinge on any sense door, they impinge on the mind-door at the same time. Therefore, every sense object impinges on two doors as it occurs. This is the way it really happens.
이것은 다섯 가지 몸의 감각 모두에서 일어납니다. 대상이 어떤 감각의 문에 부딪치면 이와 동시에 그것은 의문에도 부딪칩니다. 그러므로 모든 감각대상은 일어나면서 두 개의 문에 부딪치는 것이지요. 이것은 실제로 일어나는 방식입니다.
It is most easily perceived in the case of very loud sound; It is not hard to observe how loud sound with a deep bass line impinges not only on one’s ear door but also causes vibrations in the area of the heart in the chest. One can sense it impinging on the ear and on the bhavaṅga at the same time.
아주 시끄러운 소리의 경우는 가장 쉽게 인식할 수가 있지요. 굵고 낮은 베이스와 함께 하는 시끄러운 소리가 어떤 식으로 이문에 부딪치고, 또한 가슴 쪽의 심장 부근에서 진동을 일으키는지를 관찰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귀와 바왕가 양쪽에서 동시에 부딪치는 걸 느낄 수가 있지요.
우 레와따 사야도 'The Truth Taught by All the Buddhas'
첫댓글 Sādhu! Sādhu! Sādhu!
고맙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_()()()_
사-두! 사-두! 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