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82
4월1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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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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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7qA0-fn7byc (김민회 시몬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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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
누군가가 이유도 없이 노골적인 적개심을 품고 내 목숨을 해치려 할 때 가까스로 피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작정해서 나를 폄하하고 나를 음해하고 나를 못살게 군 끔찍한 경험이 있는지요?
그럴 경우 통상 즉시 나타나는 우리의 반응은 어떠한 것입니까? 대체로 동태복수법에 따라 처신하든지 아니면 더 센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내가 살기 위해, 내가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겠지요.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지속적인 생명의 위협 상태에 놓이셨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과 사사건건 대립각을 내세우다 보니, 특히 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안식일 규정이나 정결예식 등을 예수님께서 보란 듯이 파기하다보니 예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노기등등하던지, 얼마나 살기가 번득이든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셨습니다. 이런 연유로 예수님께서는 유다 지방보다는 위험부담이 조금은 덜한 갈릴래아 지방에서 더 많이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살기등등한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지속적인 압박 속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매일 수시로 죽음의 위협을 겪으면서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시기 위해,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부여하신 인류 구원 사업의 완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이윽고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다가왔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예수님을 향한 살의(殺意)는 더해갔고, 더 이상 드러내놓고 다니기조차 어렵게 되었습니다.
초막절은 당시 유다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가야 하는 세 명절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 명절은 오늘날 추수감사제 비슷했습니다. 그 해 수확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동시에 이집트를 빠져나온 히브리인들이 사막을 횡단하면서 보낸 오랜 체류 기간을 기념하는 축제였습니다
일주일간 지속된 이 명절기간에 유다인들은 초막 안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남자들은 매일 아침 봉헌제사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제물을 바치며 사람들은 하느님께 풍부한 비를 내려주실 것을 청했습니다.
저명한 성경학자 플라비우스 요셉푸스에 따르면 유다 사회 안에서 이 명절은 1년 중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명절이었습니다.
이런 중요한 명절이었기에 예수님께서도 축제를 지내기 위해 조용히, 그리고 남몰래 예루살렘 입성을 시도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은 또 난리들입니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떠벌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끝도 없는 불신,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함, 도를 넘어선 적개심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을 비애와 배신감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집니다.
예수님 당신은 어떻게 해서든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돌려보려고,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죽음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돌아서게 하려고 외치고 또 외쳐보지만 끝까지 귀를 굳게 막은 그들은 절대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담하지 않고, 단 한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묵묵히 당신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정말 대단해보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그 숱한 배신과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눈물겨워 보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당신을 핍박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더 큰 선, 더 큰 희망, 더 큰 사랑을 위해 꿋꿋이 그리고 당당히 뚜벅뚜벅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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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GKkf3GiAKy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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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당으로 파견 받는가, 성당에서 파견 받는가?>
오늘 복음의 시기는 ‘초막절’입니다. 초막절은 포도 수확 철에 가을걷이를 도둑맞지 않으려고 초막을 치고 농장을 지켰던 가나안 전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전통이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초막을 치고 살았던 시절을 되새기는 새로운 축제로 바뀐 것입니다. 초막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친 초막을 의미하기도 하고 성막을 의미할 수도 있겠습니다.
축제는 이렇듯 무언가를 기억하며 그 교훈을 잊지 않으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굳이 시기가 초막절이라 말하는 이유는 초막절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새로운 해석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남모르게 올라가십니다. 이 말씀도 예수님께서 치르시려는 초막절이 그들이 원하는 초막절에는 가지 않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메시아를 믿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그들은 예수님께서 나자렛 요셉의 아들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메시아일 수 없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구원자인데 자신들이 알 수 있는 곳에서 온다면 구원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양 떼를 새로운 곳으로 이끌어야 하는 목자는 양 떼가 모르는 새로운 곳에서 와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에 동의하시면서 결국엔 그들이 모르는 곳에서 오셨음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8-29)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로부터 파견받아 온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은 그 아버지를 모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오신 곳은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곳입니다. 아버지가 계신 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에게서 와서 아버지에게로 가는 것을 기억하기 위함이 초막절을 지내는 의미입니다.
영화 ‘안테벨룸’(2022)의 줄거리입니다. 남부 연합군이 운영하는 루이지애나 노예 농장, 노예들은
가혹한 대우를 받으며 말을 누군가 먼저 걸어주지 않으면 말도 한 마디 하지 못합니다. 탈출 시도하는 사람들은 살해당하고 그들의 시체는 화장당합니다. 그들을 도왔던 이든이라는 여자는 잔인하게 구타당하고 강간당하고 장군에 의해 낙인이 찍힙니다. 이든의 친구인 줄리아도 매를 맞아 유산합니다.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핸드폰 전화벨 소리가 들립니다. 이 모든 것은 꿈이었던 것입니다. 이든은 본래 베로니카 헨리 박사라는 유명한 사회학자입니다.
그녀는 인종차별에 대해 TV 토론 쇼에서 강력한 발언을 합니다. 친구들과 파티를 즐기고 일찍 집으로 돌아가려고 우버를 타고 레스토랑을 나가는데 실제로는 엘리자베스가 차를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의 남편 재스퍼가 베로니카를 때려눕힙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전 내용에서 이든과 흑인 노예들을 부리던 백인 부부였습니다.
베로니카가 눈을 뜨니 다시 과거의 농장입니다. 농장에서 베로니카는 줄리아가 목을 매 죽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분노한 그녀는 일라이에게 그날 밤 탈출할 거라 말합니다. 일라이는 이든과 함께 탈출하려다 아내를 잃은 남자입니다. 사실 현재 노예 생활하는 장소는 우리나라 민속촌과 같이 과거 시대를 재연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실제 목화를 따는 흑인들이 납치되어 말도 못 하고 실제 노예 생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로니카는 다시 한번 오두막에서 몰래 빠져나와서 장군의 전화를 훔칩니다. 장군이 베로니카를 공격하는데 일라이가 베로니카를 보호하다 살해당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총검으로 장군을 찌르고 전화기 잠금 해제하고 GPS를 사용해 남편에게 위치를 보냅니다.
베로니카는 그와 다른 병사들을 화장터에 끌어들이고는 불을 지르고 장군의 말을 훔쳐 타고 나갑니다. FBI가 들이닥쳐 백인우월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이 장소를 부수어버립니다.
다른 모든 납치되어 온 흑인들은 이 집단이 너무 무서워 조금씩 자신의 신원을 잊고 그들의 말에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야 적어도 생존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로니카만은 자신이 갇힌 곳에 딸이 그려준 그림을 새깁니다. 그 그림을 보고 만지며 자기 집이 본래 어딘지 잊지 않으려 합니다. 그리고 아주 조금씩 문에 왁스를 바르고 방에서 걸을 때 바닥의 나무 소리가 나지 않는 곳을 외워둡니다. 그리고 장군이 쓰는 핸드폰을 두는 위치를 기억하고 결국엔 자신만이 아니라 그곳의 모든 이들을 해방합니다.
내가 본래 어디서 왔는지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을 자신이 온 곳으로 이끌고 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것을 기억하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로부터 온 분은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나자렛 출신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출신입니다. 이것을 명확하게 기억하는 것이 ‘초막절’의 의미임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예루살렘이 목적지였지만 예수님은 이 축제 때 당신의 목적지는 천국임을 되새기시는 유일한 분이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일에 성당으로 향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의 초막은 성전입니다. 우리는 성전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로 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에 나가서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잊지 않고 살게 됩니다.
성당은 천국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 초막절입니다. 유대인들은 초막절이 되면 집 밖에 천막을 짓고 일주일을 삽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구원해주신 하느님을 기억합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기억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아야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압니다. 이를 기억하게 하는 초막이 지금의 성당입니다.
영화 ‘집으로’에서 아이는 버릇이 없었지만 억지로라도 할머니와 지내면서 남도 생각할 줄 아는 모습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이제 세상으로 나가는 아이는 할머니에게 가슴을 쓸며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영화 제목이 ‘집으로’인 이유가 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집으로일까요, 아니면 다시 힘들 때 돌아와야 하는 집이 할머니라는 의미일까요? 아무리 봐도 후자일 것입니다. 사랑이 주어지는 곳이 참으로 집입니다.
따라서 성당에 올 수 있음에도 TV를 보며 미사를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부모님을 직접 만나지 않고 전화로만 부모님을 만나면 된다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성전에 직접 와야 하는 이유는 베로니카처럼 자신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진짜 집이 성당이어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인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집에서 성당으로 파견 받는 것이 아니라 성당에서 집으로 파견 받는 것입니다. 성당은 추리가 축제를 지내야 하는 초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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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이제 당신 신변의 위협을 아시고 아직 당신의 때가 아니었으므로 갈릴래아 지방을 다니신다. 그리고 초막절이 되어 제자들과 따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
초막절이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던 생활을 기억하며 그때와 같은 천막을 세우며, 9월 말에서 10월 초순에 걸쳐 지냈다.
이 축제는 8일간 계속되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영광스럽게 변모시켜 보여주신 때가 바로 초막절이었다. 이 초막절 때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겁내고 계시리라 생각했는데, 축제 때 드러내 놓고 말씀하시자 군중은 놀란다. 사람들이 기를 쓰고 그분을 잡으려 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26절) 하고 말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27절) 이 말은 근거 없는 생각이다. 성경에는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 불릴 것이다.”(마태2,23) 또 헤로데가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냐고 묻자 메시아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자들의 증언을 증거로 제시하였다.(마태 2,6 참조)
메시아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은 “누가 그의 가계를 말할 수 있으랴”(이사 53,8 칠십인역 참조)에 근거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간으로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은 모르고 있다. 그래서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28절)고 하신다. 그러시면서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28절) 하셨다.
즉 그분의 가족들을 알고 고향을 아는 것뿐이며, 그분에 관해서 모르는 것은 당신이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에게서 오셨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들이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그들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하느님과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29절) 당신 말고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은 그분께서 아버지에게서 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본성으로 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유일한 분이시므로 그분만이 하느님을 아신다.
다른 모든 만물이 알지 못하는 아버지를 그분 홀로 아시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30절)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에 자신들의 지식을 믿고 있던 유다인들은 격노한다. 그러나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한다.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분이 원하시지 않으면 붙잡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분의 때’란 그분께서 죽음에 처하기로 된 때를 말한다. 우리는 그분을 잘 알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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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는 그분을 안다.>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요한 7,2.10)
요한복음 7장 8절을 보면, “나는 이번 축제에는 올라가지 않겠다.”라는 예수님 말씀이 있고, 7장 14절을 보면, “축제가 이미 중반을 지날 때,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올라가 가르치셨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루살렘에 가신 것도 아니고, 축제를 지내러 그곳에 가신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축제와 상관없이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가셨습니다. 여기서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라는 말은, 7장 3절-5절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이곳을 떠나 유다로 가서, 하시는 일들을 제자들도 보게 하십시오.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남몰래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할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십시오.’ 사실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요한 7,3-5)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지 않는 형제들은, 마치 좋은 뜻으로 충고하는 것처럼 예수님께 ‘세속의 명성과 인기’를 얻는 방법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요한 5,41)라는 말씀을 이미 하셨습니다. 그래서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라는 말은, “세속의 명성과 인기를 얻으려고 가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려고 가셨다.”로 해석됩니다.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5-27)
25절-26절의 말은, “왜 예수를 체포하지 않는가?”라고 최고의회를 비난하는 말입니다. 그런 비난과 항의 때문에 최고의회는 예수님을 체포하라고 성전 경비병들을 보냈는데(요한 7,32),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압도되어서 예수님을 체포하지 않고 그냥 돌아갔고, 의원들에게 혼나게 됩니다.(요한 7,45-49) 27절의 말은, “예수에게서는 메시아다운 신비감을 볼 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신비감이 없으니 메시아로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서 히브리서에 있는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먼저 그의 이름은 ‘정의의 임금’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또한 살렘의 임금 곧 평화의 임금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으며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끝도 없는 이로서 하느님의 아들을 닮아, 언제까지나 사제로 남아 있습니다.”(히브 7,2-3) 이 말은 ‘멜키체덱’에 관한 말인데, 여기서 ‘없다.’ 라는 말은, ‘알려진 것이 없다.’, 즉 ‘모른다.’라는 뜻입니다. ‘멜키체덱’이라는 인물은, 신상 정보가 알려진 것이 하나도 없어서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는 인물입니다. 아마도 예루살렘 주민들은 “메시아는 멜키체덱처럼 신비스러운 인물이어야 한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메시아는 이러이러해야 한다.” 라는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자기 마음대로 조물주를 규정지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계시된 대로 믿고 섬길 뿐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구원받아야 할 존재’는 ‘구원하시는 메시아’를 자기 마음대로 규정지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은총을 간청할 뿐이고, 은총을 주시면 감사히 받을 뿐입니다. (“메시아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라고 규정짓는 것은 감히 메시아의 위에 서려고 하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세상에 보내실 때, 멜키체덱처럼 신비스러운 인물로 보내시거나, ‘나자렛의 가난한 목수 예수’로 보내시거나 간에, 그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권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28-30)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라는 말씀은, “내가 나자렛 출신이며 가난한 목수라는 것을 너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를 아는 것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라는 말씀은, “나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직업, 집안 등을 아는 것은 ‘인간적인 지식’에 관한 일입니다. 그런 지식이 없거나 부족해도 구원을 받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알고, 믿는 것은 ‘신앙’에 관한 일입니다. 그 신앙이 없거나, 그 신앙을 거부하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은 인간적인 지식을 쌓는 생활이 아니라, 신앙을 키우는 생활입니다. ‘아는 것’보다 ‘믿는 것’이 더 먼저이고, 더 중요합니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너희는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지 않고 있다.”, 즉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알다.’라는 말은, ‘일치, 친교, 관계’를 뜻하는 말입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라는 말씀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라는 말씀과 뜻이 같은 말씀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신비스럽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 가난하고 평범한 시골 사람으로 오셨을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빠짐없이 구원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마태 18,14)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다는 것이 사도들의 설명입니다.(필리 2,6-8) 단순하게 표현하면, “예수님은 ‘바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나에게’ 오신 구세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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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연한 기회에 신학교 선배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1995년 이집트,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같이 갔었습니다. 1997년 미국으로 유학 온 선배는 열심히 공부하였고, 박사학위를 마쳤습니다. 이제 교구로 돌아가면 쉽고 편한 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학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면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교구청에서 주교님을 도와서 일할 수도 있었습니다. 본당사제가 되어서 공동체와 함께 할 수도 있었습니다. 어느 것이든지 장밋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배는 ‘메주고리예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마치 바오로 사도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체험하고 삶이 변했던 것처럼 선배도 메주고리예 성지순례를 하면서 놀라운 체험을 하였습니다. 교구의 방침에 따라서 일단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성지순례 중에 체험한 것이 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그리고 교구장님의 허락을 얻어서 교구사제에서 미국에 있는 카프친 수도회 사제로 소속을 바꾸었습니다.
선배 사제의 차는 작은 경당 같았습니다. 뒷좌석에는 제의가 있었습니다. 차의 오디오에서는 성시간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니 오랜 시간 운전도 즐겁다고 합니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장밋빛 미래는 아니었을 겁니다.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들에게는 배신자로 취급당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교구를 떠나 수도회로 자리를 옮긴 선배도 예상치 못한 일로 오해를 받기도 했을 겁니다. 그러나 20년 가까이 묵묵히 주어진 소명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메주고리예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헤어지는 길에 선배는 ‘메주고리예 성모님의 메시지’를 번역한 책을 주고 갔습니다. 성모님의 전구하심으로 건강하게 주어진 소명을 다할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1981년에 시작된 메주고리예 성모님의 발현은 아직도 계속 되고 있다고 합니다. 아직도 성모님의 발현이 계속되고 있기에 교회는 공적으로 성모님의 발현지로 인정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신자들과 사제들의 순례는 허락하고 있습니다. 순례지에서 행해지는 전례와 신심활동이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교황특사를 파견하였고, 메주고리예 성지가 교회의 가르침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순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2006년 처음으로 메주고리예 성지를 다녀왔습니다. 성당에서 이루어지는 전례는 거룩했습니다. 손에 묵주를 들고 순례하는 신자들의 모습은 아름다웠습니다. 거룩한 전례와 아름다운 신자들이 만났으니 그곳은 평화가 넘치는 하느님 나라와 같았습니다. 그 뒤로도 신자들과 함께 메주고리예 성지순례를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은총이 넘쳐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메주고리예 성모님의 메시지는 다른 성모 발현지의 메시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성모님은 기도할 것을 요청합니다. 미사, 묵주기도, 성경읽기, 성체조배, 성시간, 십자가의 길, 화살기도와 같이 적어도 하루에 3시간 이상 기도하도록 요청합니다. 굳은 신앙을 요청합니다. 현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인류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며 오직 그분만이 평화를 주실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회개를 요청합니다. 죄로 인해 닫힌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도록 요청합니다.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삶의 변화가 있을 수 없고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합니다. 단식을 요청합니다. 단식은 비단 음식을 포기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이기적인 자아를 죽이고 이타적인 사람으로 변형되는 것입니다. 평화를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평화를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를 이루는 길은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고, 그분께 온전히 의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도, 신앙, 회개, 단식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이웃과 하느님께 어떤 다리를 놓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부정과 비난의 다리는 분노와 미움을 키우게 됩니다. 칭찬과 긍정의 다리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보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이웃들에게 비난과 부정의 다리가 있다면 그것을 치워버리고 칭찬과 격려, 긍정과 사랑의 다리를 놓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으로 세상을 보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볼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신앙의 눈, 믿음의 눈, 사랑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길가에 핀 작은 꽃에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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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정근 테오디모 신부님]
<예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유다인들의 행위에 대해서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자기 스스로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예수가 유다인들에게는 눈에 가시였기 때문에 항상 못마땅하게 예수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를 죽이자니 사람들이 그를 그리스도로 여기고 있고, 살려두자니 자기들이 원했던 그리스도가 아니었고, 자기들을 향해 비판하는 예수가 못마땅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살다가보면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멀리 있는 사람들일 수도 있고,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일수도 있습니다. 나와 친한 가족일 수도 있고, 처음 만나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종류의 사람들이라도 나와 맞지 않을 때 우리가 취하는 방법은 자기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상대방을 무시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을 자기 마음속에서 없애버리고, 또 없애고자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더 나아가 상대방에 대해 비방하고, 모욕을 품고,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만들어가면서 상대방을 아프게 하는 우리들의 모습, 이때 상대방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주고, 이해해주기보다는 오로지 자기의 입장만 생각하는 우리의 삶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은 예수를 불신하고 있는 모습과도 유사할 것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성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삶의 기준이 예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어버리기에 신앙인이면서도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결국 주님을 향한 우리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진실을 보지 못하고, 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 삶을 통해 죄를 짓게 되고, 그 결과로서 예수를 외면해버리는 우리의 삶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예수님의 입장에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이 살아있는 예수를 추방하고, 죽이는 행위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살리는 사람이지 예수를 없애고, 죽이려고 하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가 좋아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예수를 살리는 신앙인이 되는 것이 우리의 목적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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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복음을 보면 군중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겪습니다. 예수님께서 반대자들을 두려워하시지 않고 가르치시는 것을 대하니, 예수님이 참된 메시아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메시아는 갑자기 아무도 모르게 오신다고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에 대해서는 출생부터 이미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군중에게 예수님께서는 대답을 두 가지로 하십니다. 첫째는, 군중이 아는 것과 달리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군중은 하느님을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잘 알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일생에서 큰 전향점이 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민으로서,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잘 안다고 자부해 왔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만이 하느님을 안다고 하니, 그들은 모욕감을 느낀 것입니다.
따라서 그동안 예수님을 안식일 파괴자 정도로 생각하던 그들은 이제 예수님을 하느님을 모독하는 중죄인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오늘 군중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음에도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깨닫지 못했지요. 메시아가 어떤 분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나는 그분께 무엇을 바라는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일상생활 중에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만들고, 나의 틀 안에 가두어 버린 그런 예수님 모습이 아니라 실제 예수님의 모습을 정립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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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성태 마태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초막절 축제를 지내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초막절이란 농사철이 끝나는 가을에 큰 기쁨으로 지키던 이스라엘의 중요한 축제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에서 탈출하여 40년간 광야에서 방랑하던 생활을 기억하며 언약을 새롭게 하는 절기로서 9월 말에서 10초 초순에 걸쳐 행해졌습니다.
예루살렘에서 32km 이내에 거주하는 모든 성인 남자는 이 축제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했고 축제는 8일간 계속되었습니다. 이 축제에 참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가셨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복음의 내용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버젓이 드러내놓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예루살렘 주민들은 혹시나 하는 의구심을 가집니다. 즉, 최고 의회 의원들이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분명히 지금 말씀하시는 예수님 같은데 그들이 아무말도 못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메시아에 대한 생각인데 메시아가 오실 때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데 자기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왔는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더욱더 최고 의회 의원들의 태도가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성전에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당신께서는 스스로 오신 것이 아니며, 당신을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그분께서 당신을 보내셨기 때문에 오신 것이라고 명백히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만이 당신을 보내신 분을 알지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분명히 밝히는 것 자체가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신성모독죄를 범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한갓 사람으로서 감히 하느님 행세를 한다는 죄목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한 상황 아래 있었다면 예수님을 어떻게 대했을까? 생각해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선입견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지 우리는 일상 안에 절실히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겉모습 즉, 예수님의 출신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출신에 대한 한 가지 정보를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해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우리는 열린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사고를 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갇혀 살게 됩니다.
열린 사고를 하되 정확하고 사실과 진리에 근거를 두고 정보를 받아 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거나 잘못된 정보를 통해서 잘 못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얼마나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나아가서 그 정보를 가지고 진리에 봉사할 것인지 아니면 진리를 숨기는데 이용할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보면 예수님을 잡으려고 갔지만 경비병들은 아무도 예수님께 손을 대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 생애에 그와 같이 올바르고 정당한 말을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기에 권력을 부정하게 사용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진리 앞에서 자신의 태도를 분명하게 결정지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여러분도 한 번쯤은 경험해봤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잡으러간 경비병의 처지가 그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앞에서 당신을 증언하면 당신께서도 성부 앞에서 증언할 것이며 부정하면 당신도 심판 때에 모른다고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희생을 각오한 증거가 요구되는 일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신앙은 끊임없는 선택과 포기의 갈림길에서 어느 쪽으로 가야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모든 결정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참 좋은 결정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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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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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신다면 우리를 그분을 제대로 알아볼까?>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예루살렘 주민들이 아는 예수님은 외적이고 습관적이며 피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참된 예수님의 본성도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 하느님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을 아십니다. 자신을 온전히 비우시고 사랑으로 채우셨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아는 예수님, 책에 나오는 예수님, 남들이 말하는 예수님을 넘어 진정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과의 더 깊은 사랑의 일치의 은혜를 청하며 이 미사를 온 정성을 다 해 봉헌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오늘은 제가 청원자 때 수도원에서 본 영화 이야기로 강론을 시작할까 합니다. 제목은 “에마논”입니다. 영화 제목이 왜 “에마논”일까요? 그것은 영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입니다. 영화는 예수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물론 영화 설정 자체가 신학적으로는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은 세상 완성의 날이요 구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은 신학적인 옳고 그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신다 하더라도 그분을 알아 뵙지 못하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다만 한 꼬마 아이가 그분을 알아보게 되는데 그 아이가 이름을 묻자 경찰에게 끌려가는 주인공이 자동차 뒷유리창에 “no name” 이라고 적습니다. 그런데 차창 밖에서 보면 이것이 “emanon”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아이는 그를 “에마논”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이 영화에서 주고자 한 메시지는 결국 우리의 선입견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도 예루살렘 주민들 역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결국 하느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니 유다인들은 화가 나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합니다. 자신들은 예수님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도 알고 있는데 모른다고 하니 화가 난 것입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어쩌면 우리도 이렇게 유대인들처럼 내가 아는 예수님을 갇혀 진정 그분을 알아뵙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는 않은지요? 내 뜻대로 안된다고 예수님께 화를 내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원망을 쏟은 적은 없는지요?
유대인들처럼 내가 아는 하느님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그 틀에 다른 이들을 끼워 맞추려 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과 충돌이 일어납니다. 물론 그릇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식별이 필요하고 교육이 필요하지만, 진정 내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지 않으면 그 식별도 그릇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앞서 소개한 “에마논”이란 영화에서 이름을 묻자, 주인공은 자신을 “no name, 이름이 없다”고 소개합니다. 구약에서도 하느님의 이름을 묻는 대목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볼 수 있는데 어디죠? 그렇죠 구약에서 모세가 하느님의 이름을 묻자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이것을 “야훼”라고 하는데, 하느님은 절대적이고 필연적 존재이며 모든 있는 피조물의 원천이신 하느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영화에서는 no name이라고 했을까요? 아마 이것은 우리가 인간의 언어로 예수님을 다 표현할 수 없는 그분의 신비를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없는 분, 우리가 모두 알 수 없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일 겁니다. 나아가 우리 곁에 다가 오셨지만 우리가 정해 놓은 것들 때문에 진정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하는 우리의 닫힌 마음을 표현하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그분의 삶, 그리고 그분의 죽음의 신비에 동참하고 관상함으로써 그분의 이름을 알지 못해도 그분이 누구인지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신비롭게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달리 말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묵상하고 관상하며 그분처럼 온전히 하느님과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갈 때, 하느님 사랑을 알게 되고 그래서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도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많은 말을 필요로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상상과 우리의 이성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토마스 머튼 신부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관상하는 … 진정한 이유는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과 보다 밀접한 관계를 갖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불붙기 시작하면 우리의 상상력을 더 이상 필요로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에 대한 한정되고 불완전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준에 따른 것입니다.”(새 명상의 씨, 173)
사순시기의 중반을 보내고 있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특별히 이 사순 시기에 우리는 우리 안에 살고 계시는 예수님과 생생한 사랑의 관계를 믿음으로 맺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분이 나를 한결같이 사랑하심을 믿고 그분의 뜨거운 사랑이 우리 안에 점점 충만해질 때 우리에게는 더 이상 의심도, 판단도, 편견도, 집착도 없는 온전한 일치 영이 찾아 올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사랑으로 일치할 때 우리는 제대로 예수님을 알게 되고 그분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또한 제대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구속이 아니라 온전한 자유로움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의 머리로 다 파악할 수 없는 신비로운 방법으로 다가 오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름없으신 그분께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 곁에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 오셔서 우리를 당신의 더 큰 사랑에로 초대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부르심에 사랑으로 응답하며, 그분의 사랑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데 다른 사람이 조금 나를 힘들게 한다고 그렇게 힘들어 할 필요가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는데 다른 사람이 내 방식대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원망하고 비난할 필요가 있을까요? 인내하고 기다리며 주님의 더 큰 사랑 안에서 영적인 자유로움으로 충만한 날 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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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초막절 축제일을 맞으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벌어진 일, 곧 예수님을 향한 대립과 배척이 고조되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정체성에 대한 문제로 극대화 됩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약 6개월 뒤 유월절에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는 말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30)
사람들은 우왕좌왕 합니다. 예수님을 두고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기원과 정체성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인성은 알지,만 신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습니다.”(요한 7,28)
그들은 비록 그분이 나자렛 사람이고, 어머니가 마리아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분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하느님에게서 왔다는 것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그리스도에 관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 불릴 것이다.”(마태 2,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당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공적이고 그들 삶의 중심적인 장소인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요한 7,28). 여기서 ‘큰 소리로 말하다’의 뜻은 성령의 영향을 받아서 ‘급박하게 외치다’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마치 희년선포 때처럼 성령의 힘으로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9)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위’에서 오신 분이심을 밝히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니코데모와의 대화를 떠올리게 됩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불어 가는지를 모른다.0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요한 3,7-8)
분명, 우리는 성령으로 난 사람들이며, ‘위’로부터 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수난의 사순시기를 당신과 함께 걸으며, 파스카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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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9)
주님!
위로부터 태어나게 하소서.
당신을 향해 있게 하소서.
영에 따라 흘러가게 하소서.
빠스카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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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과 사람>
요한 7,1-2.10.25-30 (저분이 그리스도이신가)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사람>
모든 사람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왔고
하느님께서
스스로는 올 수 없는
모든 사람을 보내셨기에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알 것 같지만
스스로 오지 않았음을
겸손하게 고백하는 사람만이
사람을 보내시는 하느님뿐만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들을
알 수 있고
스스로 온 듯
제멋에 취해 사는 사람은
사람을 보내시는 하느님만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들도
알 수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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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과 함께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며 큰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728-29)
이 소리를 듣고 유다인들은 화가 나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랜 역사 안에서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섬겨왔고 메시아를 기다려 왔는데 나자렛 촌놈인 예수라는 사람에게서 자신들이 하느님을 모르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습니다. 분노가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출신배경을 알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유다인들에 의하면 메시아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나타나야 하며 아무도 그의 출처를 몰라야 합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의 현존 안에 숨겨져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은 촌뜨기로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안다는 것이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습니다. 가난한 나자렛 목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 메시아가 될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그야말로 확실하게 알면 힘이요, 능력이지만 어설프게 알면 아는 게 병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비록 의문이 간다 할지라도 우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일단은 받아들여야 비로소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고 또 확고히 믿게 됩니다. 존 포엘신부는 “믿어라. 그러면 너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하지 말라. 먼저 믿어라. 그러면 나는 네가 애당초 기대했던 것보다 너에게 더 위대한 일을 행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모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 의심이 해소된 후 믿겠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과학적이 확인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단 한 번의 기도가 모든 것은 해결하는 것은 아니어도 우리는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은 절망을 극복하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비록 저의 믿음이 부족하오나 당신을 주님으로 믿사오니,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촌뜨기가 말하여도 그 말이 힘이 있고, 살아있으니 그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개천에서 용난다’ 는 옛말이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훌륭한 인물이 났을 때 쓰는 말입니다. 보잘것없는 집안에서는 훌륭한 인물이 나와서는 안 됩니까? 어디에서 태어났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어떤 삶을 사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지혜로 사느냐? 아니면 세상의 지식으로 사느냐가 믿음의 사람을 결정합니다. 글도 모르는 시골 할머니가 신학교 교수보다도 훨씬 더 큰 믿음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 그의 믿음을 판단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만든 예수님상’을 올바로 세우기를 희망합니다. 아무리 형편없는 나자렛 출신이라 해도 하느님과 함께하면 세상을 구원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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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고대 유다교 전통에 따라 ‘초막절’은 포도를 거두어들이는 9월에 지냅니다.(탈출 23,16; 레위 23,33-44; 신명 16,13-17 참조) 이때에 하느님께서 베푸신 한 해의 수확에 대하여 감사드릴 뿐만 아니라,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히브리 백성을 해방하셨던 하느님의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드립니다.
한편 구약 후기 문헌에 따르면, 초막절 축제는 메시아 시대에 펼쳐질 하느님의 축복을 예고하는 예언적 특징도 담고 있었습니다.(즈카 14,16-19 참조)
오늘 복음은 이 같은 배경 속에서 읽을 때 더 풍성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초막절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구약의 백성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메시아께서 초막절 축제를 지내시러 예루살렘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당시 유다교 지도자였던 최고 의회 의원들이 그분을 죽일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상황입니다. 구세주 메시아를 눈앞에 두고서 알아 뵙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유다인들, 그리고 예루살렘 주민들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이와 비슷한 상황을 우리도 일상에서 때때로 경험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복음 정신과 신앙의 가치를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 속에 매몰되어 현세적 가치를 좇을 것인가? 이 갈림길에서 종종 갈팡질팡합니다. 이처럼 나약한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는 참된 길이신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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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분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7,30)
<예수님의 때!>
우리를 살리시려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고, 우리를 살리시려고 당신 아들 예수를 죽게 하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손을 대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지혜2,1.12-22)도 유다인들처럼 의인이신 예수님을 죽이려는 '악인들의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지녔다고 공언하며, 자신을 주님의 자식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2,12.13.14.19.20)
'예수님의 때'(Kairos)는 '예수님께서 십자 나무에 달리시는 때'입니다. 그리고 그 때는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때'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
우리를 살리시려고 죽으러 오신 예수님!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라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죽음으로 순명하신 예수님!
먼저 이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모두를 살리기 위해 내가 먼저 죽고, 나의 부활을 위해 나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그래서 시몬처럼 십자가가 나에게 행운이 되는, 그런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제4처 :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 짐을 묵상합시다.
시몬은 자신이 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진 게 아닙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건 행운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도 때로는 재수 없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다는 마음만 먹으면 우리에게도 행운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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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17세기 바로크 음악의 대표 음악가로, ‘음악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받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맞습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독일어: Johann Sebastian Bach)입니다.
그는 하느님에게 바치는 음악을 수없이 작곡했습니다. 많은 미사곡뿐 아니라, 마태오와 요한 수난곡도 너무 유명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의 삶은 하느님께 은총을 받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11살에 고아가 되었고, 사랑하는 아내가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자녀를 20명이나 두었지만, 절반가량이 자신보다 먼저 하늘 나라로 갔습니다. 자신도 돌팔이 의사에게 받은 백내장 수술로 인한 시력을 잃었고, 수술 후 4개월 후에 뇌졸중으로 이 세상의 삶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아름다운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가 살아있을 때는 인정받지 못해서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해서 하느님께 바치는 곡을 만들었습니다. 상실과 절망으로 점철된 삶 안에서도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아마도 내 뜻대로 삶이 흘러가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흐처럼 하느님의 뜻을 보려고 노력한다면 어떤 상황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보이는 행복보다, 하느님 안에서 보이는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도 행복을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가르쳐야 할 중대한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군중 앞에서 거리낄 없이 자유롭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적대자들은 이 예수님을 향해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최고 의회 의원들도 메시아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성도 이름도 없이 언제 어디서 올지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어디에서 왔는지 잘 알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메시아가 맞다.’, ‘메시아가 아니다.’로 의견이 나뉘었습니다.
유다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모세나 엘리야 같은 예언자였습니다. 그들도 기적을 행하기는 했지만, 기적보다는 민족의 지도자 역할을 맡을 메시아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혜성처럼 나타나 이스라엘을 굳건히 해서 세상에 떨칠 왕국의 건설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즉, 세속적인 만족을 가져다줄 주님으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을 절대로 알아볼 수 없습니다. 참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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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인이 됩시다>
- 지혜와 선행에 대한 사랑과 훈련, 습관화 -
선인이, 의인이, 현인이 됩시다. 누구나 될 수 있습니다. 타고난 선인도 의인도 현인도 없습니다. 사랑과 선택, 훈련과 습관에 따라 누구나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청정욕은 언제든 좋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평생 성인이 되고자 하는 목표보다 더 좋은 목표는 없을 것입니다. 얼마전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 수녀님으로부터 받은 샤를르 드 푸코의 의탁의 기도가 좋았습니다.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뿐,
저는 무엇에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피조물 위에 이루진다면
이밖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도로 드립니다.
당신을 사랑하옵기에
이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하느님께 바치옵니다.
당신은 제 아버지시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선인이, 의인이, 성인이 되는 길은 비상하지 않습니다. 이런 기도문을 사랑하여 끊임없이 정성껏 바치면 성인이 됩니다. 선행도 성인도 훈련입니다. 어제 언뜻 발견한, 윤 당선자의 사진과 기사에 모처럼 연민의 마음과 더불어 신선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명동밥집에 다녀왔다. ‘매일같이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라는 대주교님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 기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필요한 곳에 손길이 닿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렵고 힘든 분들께 먼저 손을 내밀고 힘이 되겠다. 명동밥집, 다음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내용이었습니다. 타고난 악인은 없습니다. 악은 디테일 안에 숨어있다 합니다. 그러니 마음속 선심善心을 잘 보고 키우는 선행의 선택과 습관화가 중요합니다. 세상에 악인이 되고 싶은 사람은, 악인이란 말 들어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참 좋은 사람이다’ 찬사를 들으면 싫어할 사람 또한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어느 문예창작학과 교수의 고백도 잊지 못합니다.
“타인의 칭찬은 아이의 운명을 결정해요. ‘적절한 순간에 필요한 칭찬을 해주기’, 이것이 제 삶의 모토입니다.”
마침 어제 면담고백 성사차 찾았던 불우했던, 그러나 지금은 행복해 보이나 죄책감에 아파하는 자매에게 드린 격려 말씀이 생각납니다.
“오늘부터 감사하며 행복하게 사세요. 전혀 불필요한 죄책감입니다. 자매님은 죄인이 아니라 피해자예요! 약하니까 상처와 피해를 당할 수뿐이 없었어요. 하느님께서 좋은 남편과 좋은 자식들 선물로 주셨으니 이제 오늘부터 사순시기 감사하며 행복하게 사세요!”
더불어 보속으로 써드린 바오로 사도의 ‘말씀 처방전’입니다. 아마 가장 많이 써드리는 말씀 처방전일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이런 말씀의 실행이, 또 규칙적인 고백성사의 수행이 점차 고유의 참나의 성인이 되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는 악인들의 삶과 생각에 대한 긴 내용의 나열입니다. 지혜서 1장 서두에 앞서 ‘하느님을 찾고 악을 피하여라’라는 소주제가 선명합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하라. 영원히 남으리라.’(시편37,27) 말씀도 생각납니다. 이어지는 지혜서 서두 말씀입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아, 정의를 사랑하여라.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지혜1,1)
어찌 통치자뿐이겠습니다. 참으로 언제나 정의를 사랑하고 주님을 찾을 때 성인입니다.
오늘 악인에 대한 묘사를 보면 평범함을 느낍니다. 새삼 악은 디테일 안에 숨어 있음을 봅니다. 주님을 잊고 수행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리고 본능대로 살면서 허무주의에 자신을 맡겨버리면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서서히 악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사순시기 깨어 절제, 극기, 자제의 선택과 영성훈련이 참으로 적절한 처방입니다. 다음은 악인의 뇌까림입니다만 이또한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우리의 삶은 짧고 슬프다. 인생의 끝에 다다르면 묘약이 없고 우리가 알기로 저승에서 돌아온 자도 없다.
우리는 우연히 태어난 몸, 뒷날 우리는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될 것이다.”(지혜2,1-2ㄱ)
바로 이것이 악인의 생각이랍니다. 바로 이런 평범한 허무주의가 악의 온상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섭리의 ‘필연’이 아닌 ‘우연’이란 생각이 도덕적 상대주의에 빠지게 하는 원흉입니다.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지혜2,12ㄱ.19-20)
우리 마음 깊이에는 이런 어둠의 요소도 잠재해 있기 마련입니다. 집단적으로 약하고 착한 이를 왕따 소외시키는 행위에서도 이런 악의 발현을 봅니다. 결론 같은 후반부 말씀이 우리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며 중심을 잡아 줍니다.
“그러나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지혜2,21-22)
이어지는 오늘 독서에서는 생략됐지만 다음 인간의 정의가 고무적입니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지혜2,23)
특별히 드러나는 악이 아니라 누구나의 평범한 생각이 바로 악의 토양이라니 놀랍습니다. 이래서 악의 평범성이라 하며 식별이 힘든 겁니다. 악이 눈멀게 한다, 바로 무지의 악에 눈멀 때 비로소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지의 악이 문제입니다. 참으로 동방영성에서 많이도 강조해온 무지의 악, 무지의 병, 무지의 죄입니다. 무지에 눈멀 때 누구나의 가능성이 악인입니다. 그래서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이요, 하느님께 돌아가는 참된 회개뿐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말 그대로 악에 포위된 고립무원의 곤궁한 처지에 있는 예수님처럼 보입니다. 무지에 눈먼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호심탐탐 기회를 노립니다. 초막절 축제를 지내시고자 예루살렘에 갈 때도 남몰래 올라갑니다. 이런 악의 무수한 덫과 함정 속에서도 예수님이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흔들림 없이 자기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확고불변의 자아정체성에, 신원의식에 있음을 봅니다.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무지에 눈먼 유다인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잡으려 합니다만 하느님은 그분의 때가 될 때까지 보호해 주십니다. 그러니 참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나를 알아갈수록 비로소 무지의 악에서 해방되어 참 자유인이, 성인이, 의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점차 당신의 사람, 성인이 되게 하십니다. 다음 시편은 흡사 예수님의 고백처럼 느껴집니다.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거늘, 내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께서 내 생명의 바위시거늘, 내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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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_pkS_MICA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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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 30)
주님의 때가
오고 있다.
주님의 때와
주님의 뜻
사이에
우리가 있다.
주님께서
지나가신
방향으로
주님의 때가
펼쳐진다.
주님의 때가
있다.
주님의 때에서
봉헌의 삶을
배운다.
우리의 때와
주님의 때는
분명히 다르다.
주님의 때
앞에서
수많은 계획들을
세우는 어리석은
우리들 삶이다.
주님의 때를
알아보지
못한다.
주님의 때는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은총과 믿음의
때이다.
십자가에서
시작되는
주님의 때이다.
시작이 있으면
마무리의
때가 있다.
그러나
주님의 때 안에
정화되어야 할
우리들 욕심만
있다.
주님의 때와
우리의 때가
십자가로
만나는
아픔이다.
주님 사랑을
만나는 지점이
역설적이게도
십자가이다.
주님의 십자가로
주님의 때를
만나는 사순이다.
십자가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우리의 뜻을
짊어지고 가시는
주님이시다.
감출 수 없는
우리의 뜻이다.
우리의 뜻을
버릴 때
삶은 부활이
된다.
삶이 바뀌어야
할 때가 있다.
주님의 때를
가르쳐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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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는 그분을 안다."(요한 7, 29)
사순시기는 특별히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를
십자가라는 아픔을 통해
물음을 던지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관계의 결핍을
아버지 하느님과의
관계로 치유하여
주십니다.
폭 넓은 공동체의
관점으로
우리의 관계를
바라보십니다.
예수님 또한
관계맺을 통해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고
성장시켜 주십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 모두는
관계적 존재들입니다.
관계를 창조하시고
돌보아주시는 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는 것은
어떤 관계의 열매를
맺어야 할지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
모든 관계의
첫시작입니다.
사랑의 관계가
관계의 결실입니다.
오늘도
서로 사랑하라는
내면의 울림이
하느님을 향하게 합니다.
모든 관계의 여정을
이끌어가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압니다.
원천적 사랑의 관계인
하느님께로 돌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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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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