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체성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을 통해 실현된다
《소설의 이론》의 첫 구절은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에게 인용되었다. “별이 총총 빛나는 밤하늘을 지도로 삼아 길을 찾아가는 고대 그리스인들은 얼마나 행복하였는가.”라는 구절은 곧 자연이 인간에게 낯선 외부가 아닌 포근한 공간임을 뜻한다. 사회와 자연은 인간에게 낯선 것이 아닌 인간과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며, 사회는 인간에게 질곡이 아닌 요람과도 같다. 개인과 사회가 하나의 유기적 통합을 이루는 상태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사회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신화와 서사시를 외우고 이를 통해서 하나의 공동체를 지향한 고대사회는 그러한 유기적 통합을 이룬 이상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루카치는 개인과 사회의 이러한 통합을 ‘총체성(Totalität)’이라는 말로 요약하며,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이후에도 총체성은 그의 사상을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개념이 된다. 루카치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저서인 《역사와 계급의식》(Geschichte und Klassenbeßustsein, 1923)에 수록된 ‘정통 마르크스주의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요체를 총체성의 복구로 규정한다.
루카치에 따르면 근대 부르주아지 사회는 부르주아지라는 말 자체가 의미하듯이 시민사회로 규정할 수 있다. 근대 시민사회에서 시민이라는 개념은 사회화된 개인, 즉 사회와 개인의 통합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루카치가 보기에 시민사회에서 개인과 사회의 통합은 항상 가상적으로만 이루어진다.
이미 살펴본 대로 소설은 이러한 가상적 총체성을 묘사하고 있다. 근대소설은 개인과 사회의 통합이라는 총체성의 이념을 구현하고자 하면서 동시에 근대사회가 지향하는 이념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는 철학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칸트 철학은 세계와 개인의 완전한 통합을 꿈꾸면서도 주관의 세계와 객관의 세계를 철저하게 분리시켜 놓았다.
근대사회가 그러하듯이 칸트의 철학 역시 객관의 세계에서 주관적인 요소를 철저하게 분리함으로써 객관적 세계와 주관적 세계의 통합을 꿈꾸었다. 그리하여 세계란 객관적인 세계이면서 동시에 인간적인 세계일 수 있었다. 소설가에 의해서 철저하게 계산된 소설의 세계가 어떠한 인위적인 허구도 제거된 객관적인 현실처럼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루카치는 이러한 가상적 총체성을 현실적인 총체성으로 실현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임무라고 보았다. 루카치에 따르면 헤겔은 근대 부르주아지 사회의 총체성이 허구적이라는 것과 오로지 주관의 개입에 의해서만 현실적인 총체성이 실현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헤겔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적인 제약 때문에 그것을 현실적으로 어떻게 실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루카치에 따르면 이러한 총체성을 실현시킬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한 사람이 다름 아닌 마르크스이다.
루카치는 그 유명한 〈사물화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이라는 글에서 프롤레타리아트야말로 총체성을 실현할 수 있는 역사적 임무를 맡은 주체라고 천명하였다. 앞서 살핀 대로 현실에 감춰진 진실은 오로지 피지배계급의 시각에 의해서만 볼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지배계급은 당연히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의 진실을 드러내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으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구조 탓에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자신이 자본주의 사회를 추동하는 근원적인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밝히고 있듯이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은 모든 생산물이 시장에서 교환을 위한 상품으로 생산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상품은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의 가치 증식 수단으로 기능한다. 그런데 마르크스에 따르면 상품의 이윤은 근본적으로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을 착취하는 데서 비롯된다.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고 노동력의 가치대로 임금을 지불한다면 자본의 이윤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서는 노동력 자체가 이미 하나의 상품이 되어야 함을 날카롭게 분석하였다. 상품이란 가치를 지녀야 한다.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보다 더 큰 가치를 생산해내는 데 있다. 말하자면 자본가가 노동자를 고용하는 목적은 노동자의 노동이 그 노동에 지불한 임금보다 더 큰 가치를 창출하여 이윤을 얻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노동력 자체가 상품이 된다. 이는 달리 말하면 노동자 자신이 하나의 상품이 된 것이다. 루카치는 인격체인 노동자가 사물과 같은 상품으로 전락한 현상을 ‘사물화(Verdinglichung)’라고 부른다.
영화 〈모던 타임스〉의 한 장면.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에 지불한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창출하여 이윤을 얻기 위해 노동자를 고용한다. 노동력, 그러니까 노동자 개인이 상품이 된 것이다. 루카치는 인격체인 노동자가 사물과 같은 상품으로 전락한 현상을 ‘사물화’라고 부른다.
루카치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가 통합적이고 유기적인 하나의 전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상품화, 즉 사물화의 과정이 필수적이다. 루카치는 프롤레타리아트야말로 자본주의적 질서를 벗어나서 완전한 통합적 사회, 즉 총체성을 달성하는 데 절대적인 특권을 가진 존재임을 강조한다. 《자본론》 1권에서 언급되는 것처럼, 마르크스의 사유가 상품의 분석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은 상품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반영하는 세포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카치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가 상품이 되었다는 것은 그 자신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반영하는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에서 언급한 근대소설의 주인공인 ‘문제적 개인’이라는 예외적 존재자가 〈사물화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보편적 개인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 ‘문제적 개인’이 총체성을 지향하는 근대사회 혹은 근대소설의 가상과 그로부터 벗어난 현실 사이의 괴리를 보여주는 예외적 인물이라면, 프롤레타리아트는 그의 존재적 기반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의 가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나타내는 보편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의 이론》에서 근대소설의 주인공은 결코 가상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하는 비극적 인물이다. 소설의 결말은 오로지 비극일 뿐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루카치에게 자본주의의 현실은 비극적 결말로 치닫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소설 속의 ‘문제적 개인’과 달리 가상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할 수 있다. 그것은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처지, 즉 자신이 모순에 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깨달음으로써 가능하다.
이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계급적 각성을 통하여 계급의식을 갖게 됨을 뜻한다. 이렇게 하여 비극적 운명을 피할 수 없었던 문제적 개인은 계급적 연대를 통하여 비극적 상황을 벗어나 세상을 구원하게 될 임무를 지니게 된다. 여기서 독자들은 루카치의 마르크스주의가 왜 낭만주의적이고도 관념적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총체성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을 통해 실현된다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