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기다리는 사람이 어디 농부 만이랴
반도 남쪽, 전직 국가 총수를 배출 해낸 H군,
소재지인 읍(邑)에서 서북쪽으로 뻗어있는 외길을 따라가다 산모롱이를 돌면 제법 넓은 들판이 늘려 있고, 들 가운데로 난 길을 쭉 가다 보면, 나지막한 산이 막아서는데 바로 그 산 등허리를 오르면서 곧 왼 편으로 빠지는 가지 길을 따라 내려가면, 남북 양편으로 뻗은 산줄기 사이에 끼어있는 좁은 들판이 나오고 그 가운데로 위쪽에서 아래로 흐르는 개울이 있고, 개울 오른 편을 끼고 폭 4m정도의 아스팔트길이 있고, 그 길이 윤이 나게 잘 다듬어져 있다.
몇 해 전에 폭우가 쏟아져 둑길이 무너지고 논으로 물이 넘쳐서 부근 일대의 농사를 망친 뒤에 군청에서 예산을 풀어 닦아 놓은 길인데, 막 다른 동리의 진입로(進入路) 치고는 과분하여 이 동리 사람들은 군수(郡守)에게 고마워했다.
개울 길 양편으로 논들이 경지 정리도 되지 않은 채, 크고 작게 쪼개져 길게 뻗쳐있고, 골짝 중간쯤에 '바깥 A' 라 이름 하는 부락의 십여 호 주택이 남향 산자락에 어깨를 맞대고 오손 도손 모여 있다.
이 부락 바로 뒤편의 임야가 내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산인데, 동리를 정겹게 안고 있어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안온해 보인다.
이런 연고로 내가 이 마을의 한 귀퉁이 내 땅에 둥지를 틀고, 빌붙어 살게 된지도 어언 수
년을 넘기고 있다.
그러니 밤낮 부락민과 얼굴을 맞대어 살고, 대소사 문제를 함께 의논하고, 걱정하며 끈끈한 정을 주고받다 보니, 어느 새 내 라는 인간도 그들의 이웃이 되어, 소 마구간의 구린내에 익숙해졌고, 경운기 털털대는 소리를 듣고 이른 아침에 눈을 뜨고, 개골 대는 개구리의 합창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든다.
뒤 산 숲 속에선 뻐꾸기, 꿩들이 간간이 울어대고, 산비둘기와 까치들이 논 서리를 하는 농부 위를 가로지르며 날아다니는 모습은 한가하기 그지없다.
이런 풍경 속에 밤꽃 향기가 어려 있는 맑은 공기를 가슴 깊숙하게 빨아들이니 노쇠한 내 몸에 생기가 넘친다.
동리 남정 내 중에 가장 젊다는 사람이 곽씨 성을 가진 이장(里長)으로 오십을 넘었고, 7십이 넘은 분과 그 아래 분이 거의 같은 수인데 모두 합쳐 봤자 열 손가락 이쪽저쪽이다.
이런 촌 노들이 이 동리 주인이요, 농사꾼이며, 형이요, 아우이며, 아제와 조카들로 영농의 생산 수단이요, 관리의 주체이다.
남편을 잃은 과부 여인이 두 사람이나 되나 부인 잃은 남자가 없는 것이 이상하다.
이들 과부 노인 내 중 한 분은 억척스럽게 열 마지기 이상 되는 논농사를 거뜬히 해내는 것을 보면 정말 장한 어머니라 생각되고, 도회지에 나가서 사는 자식들에게 얻어 오는 것 보다 주는 것이 더 많다고 하니, 모정(母情)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위대함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모두가 자식 농사는 잘 지어 결혼 후 도회지로 나간 자식들이 토. 일요일이나 공휴일이 되면 자가용에 며느리, 사위, 손자 놈들을 가득 싫고 좁은 동리로 모여들고, 아들과 사위들은 오자마자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논밭으로 나가서 일손을 돕고 다시 때가 되면 가볍게 돌아간다.
촌 노들의 생활이 외로운 삶이지만 이들 자손들이 간간이 찾아와서 일을 거들어주고, 게다가 손자들의 재롱까지 덤으로 보여주니 그런 재미로 살아간다고 한다.
이런 귀한 자식들이 자기들처럼 땅만 보고 살지 아니하도록 쌀팔아 등록금 주고, 소 팔아 생활비 주어 힘들게 키웠고, 그런 대로 잘 커서 도회지의 복잡한 경제수단에 잘 적응하여 삶의 터전을 잡게 되었으니,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안도한다.
내가 이런 순박한 촌 노들과 타지(他地) 생활 일수를 빼고, 일 년에 오륙 개월 심심찮게 함께 어울리다 보니 격심(隔心) 없는 연(緣)이 맺어 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들과 동화(同化) 되었으니---.
이런 처지에서
가뭄은 남의 일이 아니고 바로 나의 일일 수밖에----,
이래서 나도 가뭄에 애를 태우다 보니,
물 걱정, 썰데 없는 나라 걱정 등으로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알려고 컴퓨터를 뒤지다가, 어느 모퉁이에서
"아침노을은 비의 징조, 저녁노을은 가뭄의 징조" 란 우리 속담이 있음을 발견하고, 과연 과학적 근거가 있을까 하고 궁금했다.
땅에 생명줄을 꽂고 사는 농민에겐 그 생명줄이 바로 벼농사이다.
벼농사의 성패는 모를 적기에 잘 심느냐, 심지 못하느냐에 좌우된다고 한다.
물이 없는 논에는 모를 심을 수가 없다.
햇님이 눈부시든 그 광도(光度)를 서서히 거두어 드릴 무렵이었다,
위 촌 노들 중에, 내 갑장 친구가 있는데, 그가 며칠 전 그 논두렁에 걸터앉아 서산에 지는 해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 비를 점쳐 본 모양이었다.
서산마루에 걸려 있는 그 해가 빛을 숨기면서 몸둥이를 용광로의 쇳물처럼 붉게 변신하여 기울고 있는데, 그 열기도 두렵지 않은 양, 듬성하게 떠돌던 구름이 가까이 다가서 붉게 치장을 하고 있고, 산과의 접경 선 위쪽 여백의 하늘에는 미처 뭉쳐지지 못한 엷은 띠를 두른 애기 구름들이 태양과 어미 구름과 어우러져 옅게, 진하게, 흐려지면서 긴 띠를 느풀그리는 색의 조화는 신이 하늘의 선경을 인간에게 자랑하듯 신비롭고 장엄했다.
그러나 친구 촌노는 노을의 아름다움이 오히려 원망스러운지 “제기랄 비오기는 걸럿구마” 하는 자조의 말을 까치가 버드나무 위 둥지를 향해 날고 있는 동네 어구를 보며 뱉었었다.
평생을 땅과 씨름하며 살아온 친구 촌 노의 얼굴이 그날따라 석양에 빗겨 쪼이는 햇살로 짙은 주름 골이 눈 밑에서 턱 아래로 길게 패여 더욱 처절해 보였었다.
언젠가 내 사지 육신에 근육께나 붙어 힘이 오르고, 몸이 날렵하여 무서운 것이 없었을 때, 나도 남들처럼 국방의무를 완수하기 위해 논산 훈련소에 입대했다.
늦여름, 훈련소 어느 귀퉁이에 마련된 수류탄 던지기 훈련장에서 교육을 마치고 내무반으로 귀대할 때, 서쪽 하늘에 물들어있는 환상적이었던 그 석양의 풍경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아스라한 산과 들녘의 지평선 위에 태양과 새털의 구름이 서쪽하늘에 걸려있고, 그 가장자리에 주황색이 옅게 진하게 어울리어 마치 스테인그라스에 붉은 색소를 총동원하여 물들여 놓은 듯 했던 황홀한 빛의 향연, 그리고 그 하늘 밑을 바치고 있는 검푸른 색으로 잠식되어 가는 대지에 하체들을 묻은 채 열 지어 이동하는 총과 헬멧과 강인한 어깨들의 감동적인 시루엣이 석양 하늘에 뚜렷하게 투영된 체, 군가의 함성에 파묻히면서 서서히 검은 대지로 빨려드는 낮의 유(有)가 밤의 무(無)로 소멸되는 과정의 짧은 시간, 그 때 그 신비롭고 감동적이었던 그 석양의 동영상을 지금도 기억에서 지울 수 없다.
고딕 시대에 3대 미적 관점이 신의 속성으로 위대함, 영광스러움, 조화로움이라 했던가---.
논산 훈련소의 석양빛 조화가 바로 그것이며, 또한 그 석양이 헤겔이 말한 것처럼 "빛은 신적인 것의 물질화"라고 한 말을 입증하는 사례라고 생각했던 것을 다시금 되새겨본다.
조상이 살던 시대,
농업이 천하지대본(農業天下之大本)이라면서, 왕이 실정(失政)을 거듭하면 흉년이 들고, 가뭄이 계속되면 자기 탓이라 한탄하며 신에게 기우제(祈雨祭)를 올린다고 했는데----,
지금의 위정자들이 정치의 이름 아래 정가치적 단비를 풍성하게 내렸는지--,
민생정치의 가뭄으로 국민이 고달파 하는지---,
이 촌노는 가늠 할 수 없고,
위정자들이 저녁 노을의 조화와 가뭄의 함수관계를 알고나 있는지도 궁금하다.
(이현진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