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함을 입은 자
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22:1-14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호2:16, 2:19-20)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 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잔치는 예비 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 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데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 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나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오늘 공부는 여기 14절에서 나타나는 데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택함을 입었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공부를 하도록 하겠다.
예수님께서 여기에서 말씀하신 청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입은 자, 8절에 보면
「마22: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자치는 예비 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청함을 받은 자가 합당치 못하다,
그러면 어떤 자가 합당한 자가 되느냐면 택함을 입은 자가 합당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청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입은 자」 이것이 바로 은혜라고 하는 문제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는 것인데
긍휼하심을 입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을 조건이 하나도 없는데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은혜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이 세상에서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얻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소위 구원, 조금 더 나아가서 말하면 영원한 생명과 함께 영광이다.
영생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나 영광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 같은 의미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
영생을 소유하는 자들이 영광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영광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구원을 전제하고 말씀하고 있지만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영광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
영생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는 것 이것이 진정한 구원이라고 그렇게 말씀할 수 있다.
그래서 구원과 영생을 엄격히 분리하면 이것은 다르다.
그러나 영생 영광 이것 자체를 전체적으로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출애굽사건을 통해서 말씀드릴 수가 있다.
여기에서는 구원과 안식을 구분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상태에서 놓임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홍해를 건너는 것을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는 것을, 예를 들면 영생이라고 보았을 때
그 수의 대다수가 구원에는 참여하였지만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안식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하였을 때 구원과 영생을 구분(분리)할 수 있고
그 대신 영원한 영생과 생명과 영광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광을 가진 얻은 상태를
일종의 전체적인 의미로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것이 포함된 구원이어야지 이것이 포함되지 아니하고 이루지 아니한 것은
참된 구원이 아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하고있는 마22:14 입장에서 말하면 청함을 받은 자들은 어떠한 자들인가.
예를 들면 애굽에서 나온 자들을 청함 받은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합당치 못하였다 그 말이다.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되어있지 못했다. 믿음이 되어있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있지 못했다는 입장에서,
예를 들어서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은 청함을 받은 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택함을 받은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이들은 바로 가나안 복지에 들어간 자들, 안식에 들어간 자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에서 엄격히 구분하면 구원과 영생을 구분하는 입장에서 구분하면
청함을 받은 자는 구원에 참여할 수 있고,
다시 말하면 세상의 마귀의 노예로부터 억압당하고 고통 당하던 상태에는 풀려났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어디에는 참여할 수 없었느냐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감을 얻을 수 있는
은혜에는 참여하지 못했다고 이렇게 볼 수 있다.
특히 이 말씀드리면서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 것은 이것은 기본적인 교리를 무시하는 말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이 문제는 실제적인 신앙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구원한 사람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없어서
여기에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청함을 받은 자들이지만 하나님의 무엇을 배척했느냐면 은혜 곧 긍휼을 배척한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거기에 참여함으로 하나님께서 덕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 때문에 그들을 초청한 것이다.
초청 받은 그들이 그것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합당치 못한 자이기 때문에 택함을 입지 못한
것이지 따로 있다는 말이 아니다.
청함을 받은 모든 사람은 모두 다 택함을 입을 수 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자격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이 자격에 제한을 두지 않으신다.
그러나 다만 이들이 여기에 택함을 입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면 합당치 못함이기 때문이다.
합당치 못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거역이다 그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보면
인간의 불신과 죄가 그들로 하여금 택함을 입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청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입은 자를 원래부터 구별해 놓아서
너는 영원히 멸망 받을 자식이다, 너는 영원히 택함을 받을 자식이다 라고 구별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무엇 얻기를 원하시느냐 면
택함을 입기를 원하신다 그 말이다.
그러나 택함을 입고 싶어하는 그런 믿음의 자세가 되어있지 못한 자들
하나님의 긍휼을 배척하는 자들이 많으므로 합당치 못한 자들로서 택함을 입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꼭 기억할 것은
하나는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나오는 것이 있어야 하고
두 번째는 하나님께 나왔으나 그리스도와 나, 즉 말씀과 내가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다시 한번 자세히 설명하면 첫 번째 세상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께로 나오는 것은
무엇과의 분리냐면 세상과의 분리다.
세상과 분리되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아니하면 안 된다.
그 말은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아직도 나는 나이면 안 된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세상으로부터 일차 분리가 되어야하고
그 다음에 두 번째로 하나님께로 나와서 그리스도와 말씀 안에서 하나가 되어져야 하고
이것이 바로 무엇을 얻는다고 말하느냐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제까지 공부한데로 세상에서의 분리 그래서 애굽으로부터 떠나서 광야에 참예하였다고
하는 것은 곧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서 교회에 나왔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행7장에 나오는 데로 광야교회라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광야교회는 항상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에 출석하면서 교회에 문제가 없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왜, 거기는 완성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는 과정이다. 그래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심지어 아론 같은 사람도 금송아지 만드는 일에 협조했다.
모든 제사장들 장로들이 부패하고 타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전부
멸망당하는 것을 하나님은 원치 아니하신다.
거기에서 어디로 이끌어 들이시냐면 가나안 복지이다. 가나안 복지에 참예한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하고있는데 이 두 가지 사실을 확실히 구분하고 교회생활을
하여야된다.
그 다음에 교회생활 다음에 취하여야될, 나아가야 될 우리의 방향이 어디인가 하는 것을
여기에서 구분할 줄 알아야된다.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교회에 들어와서 신앙생활하기 때문에
나는 구원 얻었고 영생 얻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에
들이시기 위한 과정이다. 가나안 복지에 들이시기 위한 과정일 뿐이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거기에서 목사님들 전도자들의 말씀의 가르침을 통해 누구에게 나가야 하느냐면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서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지는 것이 바로 택함을 입는 것이다.
교회생활에 대해서는 누가 우리를 지도해 주느냐면 사람이, 목사나 전도자들이 우리를 지도해 준다.
우리를 이끌어준다. 누구에게로? 바로 예수그리스도 말씀 앞으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그것은 중매자의 역할과 같은 것이다.
일단 그것이 성립되어 가지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혼인잔치에(호2:19-20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하나가 되어져버리면 자동적으로 중매쟁이는 빠져나가고
신랑과 신부가 한 가정을 이루고 한 몸을 이루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어야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적인 문제다. 말씀 안에서 그것이 성취되게 하기 위한 필요성이 바로 교회다.
교회는 그것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계속적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 역할을 할 수 없다.
누구만이?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참다운 신랑이고 그와의 말씀 안에서 하나가되고
그 안에서의 풍성한 삶 그것을 목적하기 때문에 교회는 그것을 이루어주는 가교 역할로서
자기의 사명을 다 하여야한다.
우리는 이미 청함을 받은 상태에 다 들어와 있다.
우리 모두 교회생활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그리스도가 누구고 중매쟁이의 말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말씀, 진리, 생명, 다 공부함으로 배워서 가르침을 받아
그것을 알게 되었다. 이해하게 되었으므로 이제는 우리가 누구에게 직행하여야 되느냐면
그리스도에게로 직행해서 택함을 입은 자의 상태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을 오늘 말씀에서
「예복을 입다」 이렇게 말했다.
오늘 공부에서 조금 빗나가는 것이지만 이왕 말씀이 나왔으니까 그러면 여기에 예복이라는 말이
무엇을 말하느냐면
「롬13:11-14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며 오직 주 예수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여기에서 보면 그리스도로 옷 입고 빛의 갑옷을 입자,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는가? 어떻게 말씀으로 우리가 옷 입을 수 있는가?
말씀, 진리의 성령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을 입게되면 우리가 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인가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오시는가. 우리가 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 안에 있는 것이 되냐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가 나라고하는 내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가 된다.
우리가 무엇 안에 들어갈 때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되느냐면
말씀 안에 들어갈 때 그리스도로 옷 입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요14장 15장에서 누누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자 예복을 입지 않았다, 물론 여기의 혼인잔치는 비유적인 이야기입니다만 혼인잔치에 참예하는
자들은 예복을 입어야되는데 흰 세마포를 입고, 계19장에 나온다.
「계19:6-7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어린양은 그리스도이시오 그 아내는 교회를 가리킨다.
「계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가 무엇인가. 하얀 빨래를 잘 빨아서 말리면 하얗다.
우리들의 더러운 의복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깨끗해지고 거룩해진다.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것이 혼인잔치에 참예하는 예복이다.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여기에는 옳은 행실로 나와있는데 원문에는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 義) 디카이오마(δικαίωμα, 공의) 그래서 의를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는 무엇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느냐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깨끗한 세마포의 예복
그래서 9절을 보면
「계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여기에서는 청함으로 나와있는데 원문에는 καλέω(칼레오,이름이 불리다 요1:42),
여기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택함을 입은 사람들이냐면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었다.
세마포 이것은 빛의 갑옷이다. 빛의 갑옷은 누구로 옷 입는 것이냐면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우리가 공부할 것은 구체적으로 택함을 입었다는 것을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택함을 입음」에 대해서 하나 하나 공부해 나가겠다.
「요13:18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택한 자가 누구인가.
「요13:10-11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요13장에서는 택함을 받은 자들이 무엇을 받았느냐면 깨끗함을 받았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깨끗함을 받았다. 그런데 여기에서 깨끗함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
자기를 팔 자 가룟 유다이다. 그러면 가룟 유다가 어째서 깨끗함을 받지 못했는가.
이 이유가 무엇인가.
가룟 유다는 택함을 받았는가? 열두 제자 가운데 들어가 있다. 그 중의 하나인데 그 중
다른 사람들은 깨끗함을 받았는데 유다만이 깨끗함을 받지 못했다. 여기에서 그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 가룟 유다가 왜 깨끗함을 받지 못했는가.
우선 깨끗함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말하나.
어떻게 깨끗함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여러분 신앙생활 하면서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셨는지. 어떻게 하면 깨끗함을 받을 수 있는가.
유다는 그동안 주님을 따라다녔고 나쁜 짓 하지 않았는데 왜 유다만 제외되었나.
마귀는 어떤 곳에만 들어가나. 근본적으로 깨끗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마귀가 들어간 것이다.
기본적으로 깨끗함 받았으면 그럴 필요가 없다. 깨끗함을 받았으면 마귀는 거기에 움쩍도 못한다.
그래서 더러운 귀신아 내가 명하노니 나가라고 했다.
마15장에서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했다.
그러면 무엇이 사람을 깨끗하게 하나. 말씀이다. 말씀 때문이다.
「요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여기에서 말은 톤 로곤(τόν λόγον) 그래서 호 로고스(ό λογος)이다.
말씀으로 깨끗해지는 것이다.
말로 사람이 더러워지고 이것 마15장 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15장 15장인데 마15장 요15장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사람을 더럽게 한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
역시 나오는 것이 사람을 깨끗게 한다.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그 말씀이 무엇이냐면
호 로고스(ό λογος)누구시냐면 그리스도의 말씀, 이것보고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고
이것이 바로 진리이다.
요17장17절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거룩하게 한다는 말이나 깨끗하게 한다는 말은 똑같은 말이다.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하라, 썩을 양식이 무엇인가.
사람이 더러워지면 이 사람은 멸망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으로 깨끗해지고 그 생명의 말씀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산다.
결국 말씀이다.
썩을 양식=멸망시키는 양식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갈라진다.
그러면 왜 가룟 유다는 말씀을 듣지 않았는가? 똑같이 제자들과 같이 다니면서 말씀을 들었다.
깨끗함을 받지 못한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기본적으로 우리가 깨끗함을 받아야 한다.
이 666은 계시록이 아니라 요한복음에 있다.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살린다고 하는 것은 원문에서 조포이에오(ζωοποιέω)하여서
살려준다는 뜻이다. 조(ζωο)라고 하는 말은 산다는 말이고 포이에오(ποιέω)라는 것은
~하다 그런 말이다, 살려준다.
살려주는 것은 무엇이라 하였느냐면 "영"이니,
이 영이라고 하는 것은 호 프뉴마(ό πνεύμά)하여서 성령을 말한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
영: 성령, 생명: 말씀 진리이다. 이것이 진리의 성령이고 롬8:2에 나오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 우선 기억해 놓아야 한다. 무슨 말인지 몰라도,
나중에 다 생각이 난다.
사람을 살려주는 것은 무엇이냐면 성령이시고 이 성령은 바로 누구냐면 말씀이고
말씀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면 생명을 가지고 있고 바로 그 말씀의 영이 살려주는 영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다.
「요6: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지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여기서 가룟 유다가 팔 자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팔아먹었는가? 믿지 않기 때문에,
예수의 무엇을 안 믿었는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바로 지금 예수님께서는 누구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느냐면 십자가의 죽으실
예수님을 말씀하시는가, 살려주실 생명의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인가.
살려주실 생명의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믿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믿지 않았느냐면 이것을 믿지 않았을 때 어떻게 하시느냐 면!!
가룟 유다가 가룟 유다 하나 뿐인가 가룟 유다 후손이 많이 나오는가, 나올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를 팔아먹는 사람들인가. 무엇을 믿지 않는가. 이들은 모두 청함을 받은
자들이나 이것을 믿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을 얻지 못해서 택함을 얻지 못해서
예수님을 팔아먹는 것이다.
요2장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오셨을 때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자들이 있었다.
무엇 무엇을 팔고 있었느냐면 소 양 비둘기, 왜 하필이면 소 양 비둘기인가, 왜?
하나님 앞에 바치는 예물로 소 양 비둘기이다.
성령이 무엇처럼 임하시느냐면 비둘기같이 임하신다.
그 다음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소 굽이 갈라졌고 새김질(묵상, 말씀 상고)한다.
거룩한 짐승 하나님 앞에 드린다 그 말이다. 그것은 누구를 상징하는 것인가?
이는 그리스도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것을 예물로 드려라,
우리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때 우리 안에 누가 임하시느냐면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하신다.
그 다음에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 앞에 그분은 무엇이 되느냐면 화목제물이 되는 것이다.
양이다.
하나님의 일하는 것. 일하는 것이 무엇인가, 소이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산 제물로
바쳐지는데 그것을 믿지 못하고 이것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때, 무엇이 살려줌을 받는 이것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때 자연히 무엇 하는 사람이 되는가, 이것은 대답보다도 각자가 잘 알아서
하여야 한다. 이것 아니면 이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거룩한 예물로 바쳐져버리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그 예물을 갖다 팔아 먹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이들이 어느 곳에서 장사를 하였나, 성전 안에서 장사를 하였다. 성전이 장사를 하는 곳인가?
그래서 예수님은 무엇이라 하셨는가,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아야 할 집이
강도의 굴혈이 되었다고 하셨다.
여기에서 분명히 가룟 유다가 왜 그랬는가하는 것이 나타나는데 믿지 아니한 때문이다.
무엇을 안 믿었느냐면 그 영, 말씀, 생명의 말씀, 진리의 성령의 생명의 말씀을 믿지 아니한
그것 때문에 결국은 12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는 제외를 당했다.
바로 그 말씀으로 다른 제자들은 이미 깨끗함을 받았는데 깨끗함을 받지 못했다 그 말이다.
그러므로 깨끗함 받지 못한 그 속에 사단이 들어갔고 사단이 들어가서 결국은 누구를 못박느냐면
살려주는 영 즉 생명의 성령 하나님의 성령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결국은 예수님을 3년 반 동안 따라다닌 가룟 유다 속에 마귀가 들어가서 그 가룟 유다를 통해서
예수를 팔게 하고 그 뿐만 아니라 결국은 가룟 유다는 목 메달아 창자가 터져 죽었다.
결국은 가룟 유다를 그렇게 멸망시킨 것은 무엇이냐면 마귀, 나아가서 이분(살려주는 영)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큰 교훈이 되고 예표가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믿어야 될 것은 무엇을 믿어야 하느냐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의 어린양도
믿어야 되지만 무엇을 더 믿어야 되느냐면 살려주는 이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살게되는 것이다.
이것을 믿지 아니할 때 청함을 받았다 할지라도 택함을 입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시간 분명히 알아야할 것은 우리가 깨끗함을 받는 것은 무엇으로냐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함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택함을 입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마지막 역사 이것을 말세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는데 말세의 역사는 우리가 공부한데로
환란이다. 환란은 누가 가져오느냐면 적 그리스도가 가져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환란 적 그리스도는 누구를 넘어뜨리기 위해 오느냐면 택함을 입은 자들이다.
근거가 어디 있느냐면 마24장을 보면
「마24:21-22 이는 그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그 날들을 감하시므로 말미암아 모든 육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
그러면 어떤 상황 가운데서 구원인가. 환란상황 가운데서의 구원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 날들을 감하시는 것은 누구들을 위해서 감하시느냐면 택하신 자들을 위해서 그 날들을
감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그 환란 때에도 어떤 자들만 환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근거가 확실하냐면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그 한란 가운데서 벗어나게 하실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더 나가 보면
「마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우리가 택함을 입었다 하는 말이 무슨 말이냐면 원문으로 엑크레고(έκλέγω, 택하다)
레고(λέγω)라는 것은 말하다 이고 엑크(ἐκ)는 ~으로부터 그런 말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이것만은 적어 기억하기 바란다.
엑크는 전치사 ~으로부터, 이렇게 가방 속에서 이렇게 할 때 엑크 그런다.
레고(λέγω)라고 하는 것은 말하다 그런 말인데 내가 일러준 말로 너희는 이미 깨끗하였으니
그런 말이다.
무엇으로부터 우리를, 말씀으로 세상에서부터 우리를 불러냈다, 그것이 택함을 입은 자들이다.
엑크레고 그러니까 원문이 말하는 택함과 우리가 말하는 택함의 개념은 약간 다르다.
우리가 말하는 택함의 개념은 여러 가지 중에서 내가 이것을 뽑았다할 때 택함의 개념인데
원문의 개념은 야 이리 오너라 하여서 불러냈다는 개념이 택함의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만민들 가운데서 우리를 무엇으로 불러냈느냐면 말씀으로 불러냈다.
그러면 우리들이 무엇을 듣고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느냐면 말씀을 듣고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주님의 양이라고 한다.
「요10:1-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리라」이것이 택함의 과정이다.
「요10:4-5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바로 누구의 음성을 아느냐면 자기 목자 누구? 선한 목자 그리스도의 말씀 음성을 들을 줄 알므로
말씀을 따라서 쫓아간다 그 말이다. 이것이 엑크레고이다. 그것이 양과 목자의 관계성이다. 그래서
「요10:14-16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누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느냐면
양을 위해서, 여기서 말하면 택한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버린다.
요10:16 바로 이것이 양과 목자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다.
목자가 양이 없으면 그것이 어떻게 목자이며 양이 목자가 없으면 어떻게 살 것인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신랑과 신부가 한 몸이 되어서 백년해로를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보면 택함을 입은 자들을 보호하시는데
누구 자신같이 그들을 보호하시느냐면 나 자신 즉 그분 자신 같이 우리를 보호하신다.
그래서 환란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느냐면 결코 그들이, 마24장에 보면
「마24:30-31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그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누구만 모으느냐면 택하신 자들만 모으신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누구의 그리스도가 되느냐면
택하신 자들의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이다. 택함 받은 사람들은 누구의 음성을 아느냐면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를 따른다.
「계14: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이 사람들은 144000, 여기의 여자는 음녀를 가리킨다.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면 어린양은 그들의 목자가 되는 것이다.
목자가 되셔서 이끌어 내시는 것이다.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사람 전체가 아니라 사람 가운데서 이다. 그들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계14: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계7:13-14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큰 환난은 마24장에서 나왔다.
희게 하였으니 이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이다.
「계7:15-17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이 상하지 아니할찌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임이러라」
바로 그들이 누구냐면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긍휼을 입은 자들이다.
그래서 성경 여기 저기에서도 환난 때에 그들을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그래서 환난에서도 넘어지지 아니하고 최후승리 얻는 자들을 말씀하고 있다.
이들이 바로 계3장 이하에 나오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계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또한 너를 지키어, 그분이 우리를 지켜주시면 악한 자들이 우리를 손댈 수가 없다.
「요일5: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하나님께로 나신 자는 그리스도시다. 저를 지키시매, 하나님께로서 난 자!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만지지도 못한다.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다.
우리가 그동안 공부한 것은 택함을 입은 자들이 어떠한 자들이냐, 깨끗함을 입은 자들이다.
깨끗함은 무엇으로 입는가. 말씀으로 입는다. 말씀은 누구시냐 하는 공부를 하였고
두 번째 공부는 하나님의 마지막날의 역사는 누구를 위한 역사냐, 말세의 역사는 환난의 역사인데
환난 때 누구를 지키시느냐면 택하신 자들을 지키신다는 것을 마태복음과 요한계시록 요한일서를
통해서 우리가 살펴보았다.
그러면 지금부터 공부할 것은 세 번째 공부는 택한 자들이 어떠한 자인가, 좀 막연합니다만
우선 기본적으로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오늘날 세계 모든 나라에 흩어져있는 교회들에 출석하고있는
교인들은 누구의 자녀라고 할 수 있느냐면 누구의 후손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면
아담의 후손은 모든 인류이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후손의 수가 얼마만큼 많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느냐면 하늘의 별 땅의 모래 수같이
많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이들이 다 택함에 들어갈 수 있나 없나? 이것에 대해서 지금부터 공부하겠다.
「롬9:6-7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몇이 있었느냐면 대표적으로 둘을 말한다.
하나는 이스마엘이요 또 하나는 이삭이다.
그러면 이스마엘과 이삭이 어떻게 다른가.
이스마엘은 육신의 자녀이고 하갈 즉 계집종으로부터 애굽여자이다.
이삭은 약속의 자녀요 사라에게서 낳고 정식부인이고 자유하는 여자이다. 이것은 명령에 의해서
약속에 의해서 얻어진 정당한 여자이다.
그러면 육신의 자녀는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느냐면 시내 산 율법으로 비유할 수 있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갈4:22-31) 이것은 자유로 비유할 수 있다.
육신의 자녀 계집종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느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멸망의 자식을 상징한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복지에 들어갈 약속의 자녀를 상징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속한 자이냐면 우리가 원래는 전자와 같은 상태의 사람이었으나
이 상태에서 어떻게 함으로서 후자와 같은 상태의 사람이 될 수 있느냐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음으로서 이다.
우리가 세례 받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면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옛사람이 십자가에
죽고 장사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다시 살리심을 받아서 살아난 자녀가
누구냐면 약속의 자녀다. 바로 이것이 부활의 자녀라 이 말이다. 그래서 이삭은 죽었다가
살아난 자인가 원래 태어난 그대로 있는 아들이었나. 이삭은 분명히 모리아 산에서 죽었다 살아난
자이다. 그러나 이삭은 그 전에 있던 이삭 그대로다. 바로 이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려졌다가 하나님의 긍휼의 은총으로 다시 살아난 아들, 그래서 도로 받은 것이다.
그래서 히11장을 보면
「히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누가 약속을 받았느냐면 이삭을 약속으로 받았다.
「히11:18-19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다.
비유컨대 죽은 가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것이 약속의 자녀라 그 말이다.
약속의 자녀는 하나님의 약속 말씀에 의해서 죽었다가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녀다.
「롬4:17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냐면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은 바로 이 믿음이다.
「롬4:18-20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이냐면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될 것이다, 다메섹 엘리에셀도 아니고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도 아니고 네 몸에서 날 자가 사라를 통해서 정식으로 날 약속의 자녀가
누구냐면 네 후손이다.
「롬4: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약속하신 그것이 무엇이냐면 반드시 네 몸에서 네 후손이 날 것이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 확신하였으니
「롬4: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이것이 무엇이냐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되어질 것!
바로 우리도 그 믿음을 가지면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이 복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롬4:23-24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것,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면
무덤 가운데서가 아니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무슨 영이냐면
살려주는 영이다. 이 살려주는 영은 누구 안에 있느냐면 우리 안에 계시다.
바로 이 약속을 믿는 자들은 그 믿음을 무엇으로 여기시느냐면 의로 여겨주신다. 그것을 믿어야하고
의심치 말아야한다. 반드시 그렇게 이루실 것을 확신하는 그 믿음이 이 세대가 오기 전에도 그 믿음을
하나님은 의로 여겨주시고 그 믿음을 가진 자들은 다 구원을 받았다.
그때 당시에도 하나님의 약속 이 믿음을 가진 자들은 다 천국 갔다.
「롬4:25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언제 의롭다함을 받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리심을 받았을 때
의롭다함을 받는다. 그래서 약속의 자녀
「갈4:22-26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났고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 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 우리를 낳았다 그 말이다. 그래서
「롬9:6-8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자녀, 약속은 바로 무엇이냐면 말씀이다.
약속의 자녀 말씀의 자녀 이것이 무엇이냐면 요1:12에서
「요1:12 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벧전1:23-25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여기에서 세세토록 있을 존재는 무엇뿐인가. 풀도 꽃도 아닌 오직 말씀뿐이다.
바로 말씀의 자녀 썩어질 씨로가 아니라 썩지 아니할,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자녀들만
세세토록 있도다. 그래서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우리가 누구를 전하느냐면 복음
곧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무엇 되심을 전하느냐면 말씀되심을, 살려주는 성령
되심을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행전도 보면 생명의 말씀을 계속 전하고 있다.
이것을 깨닫고 나서 깜짝 놀란 것은 이렇게 성경에서 많이 말하고있고 초대교회 사도들이
이 생명의 말씀에 대해 이렇게 많이 전하고 있는데,
그동안 그리스도가 생명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대해 여지껏 듣지 못했던가 하는 것이다.
너무나 이상한 사실이다.
그리스도가 생명의 말씀이라니? 분명히 성경에서 말하고있고 우리 믿음의 선배 선지자들이 그렇게
전해왔는데 우리는 그것을 별로 들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만약에 우리가 이 사실을 영원히 모르고 있었다면 생명이 없는 그래서 끝장이 나는 것이다.
바로 이 복음을 전해야되는 것이다. 그분이 바로 생명의 말씀, 그분이 생명의 성령이라는 사실을.
롬8장 1절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희를 해방하였음이라는 말씀을
그렇게 사람들이 인용하면서도 거기에 생명의 성령이 누구라고 똑 소리나게 가리켜준 자들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석 책을 뒤져보아도... 놀라운 일이다. 도대체 이 사실을 감추고있고 감추게 한
장본인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누가 그 엄청난 사건을 까마득히 우리에게 모르게 하였느냐 하는
것이다. 기독교!! 오만잡동사니 다 전해도 이것 하나 싹 감추어 놓아버리면 끝나는 것이다.
마귀가 쾌재를 부를 것이다. 승리했다고… 무엇만 감추어버리면?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의 성령 말씀의 진리의 성령이라는 사실만 감추어 놓으면 깨끗이 이겨버린다.
이제까지 이 사실이 감추어있으면서도 복음은 땅 끝까지 전파되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생명을 얻고자 좇아 다니고… 우리는 이제까지 어떻게 하여야 깨끗함을 받는 줄도 모르고
예수 십자가 믿으면 죄 사함 받고 구원 얻어 하는 말만 듣고 왔다갔다만 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성경은 여러 곳에서 자세히 말씀하고있는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 위에 세워진 교회이어야 하는가
교리의 바탕 위에 세워져야 하겠는가 이것이 문제이다.
자 은밀히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천국에 소망을 두고 영원한 나라에
복락을 누리는 것을 우리는 목적을 삼고 기도하고 있으며 신앙생활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얻어야 될 것인가. 택함을 입어야된다. 우리가 지금까지는 청함을 받은 자의
상태에서 신앙생활 하여왔으나 이제는 택함을 입은 상태로 한 발짝 전진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우리 남은 여생에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이다.
남은 시간에는 요13장을 통해서 영접의 실제적인 문제=택함의 실제적인 문제를 취급하려 한다.
요13장이 택함에 있어서 이 이상 자세하고도 분명하게 나타낸 것이 없다.
지금부터 요13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발 씻기는 사건을 통해서
택함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는 문제를 보겠다.
「요13:4-7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지금 예수님께서 발 씻기시는 일이 보통 대수롭지 아니한 일인가 중요한 일 같은가.
중요한 일이다. 무엇을 통해 알 수 있나.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이것이 어떤 의미를 두고서 하고 있다 그 말이다.
「요13: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 씻기지 못하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 씻기지 못하리이다, 원문에는 톤 아이오나 하여서
영원히 씻기지 못하리라 하였다. 영원히 절대로 씻기지 못하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문제는 이 말씀이다.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이 부분을 원문으로 설명하면 우크 엑케이스 메로스 멭 에무
이 엑케이스라는 말은 소유하다, 가지다 그런 말이다.
우크라는 것은 아니다 못하다 영어로는 not이고
메로스라는 것은 부분 지체 상속 그런 말이다.
멭은 함께 ]
에무라는 것은 나에
그래서 해석해 보면 나와 함께,
메로스 이것은 상속이라는 의미도 있다. 기업을 얻다 상속받다 그래서 지체를 소유하지 못한다.
이것의 원 뜻은 주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겨주심으로 인해 누구와 함께 한 지체가 되고
함께 상속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냐면 주님과 함께 라는 말이다.
나와 함께 상속을 얻지 못한다 그렇게 해 놓으면 되는데 그렇게 번역을 할 수 없으니까
상관이 없다라고 간단히 끝나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바로 무엇이냐. 이것은 택함 그 자체를 말한다.
그러면 택함을 입으려면 반드시 누가 우리의 발을 씻겨주어야 하느냐면
그리스도가 베드로의 발을 씻겨줌으로 해서 주님과 함께 메로스(μέρος)를 엑케이스(έχεις)
할 수 있다. 그런데 영원히 내 발을 씻기지 못합니다 그러면 발을 씻겨주는 것하고
못 씻기는 것하고 그냥 그때 당시 예수님이 제자 발 안 씻는 것으로 끝나는 것인가
그것이 영원히 결정적인 문제를 가져오는 것인가. 결정적인 문제를 가져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 것이다.
절대로 내 발은 씻기지 못합니다 하니까 내가 네 발을 씻지 아니하면 너와 상관이 없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것을 강조하셨는데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이다.
「요13:9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주옵소서」
여기 베드로가 하는 이야기를 보면
우크 엑케이스 메로스 멭 에무(ούκ έχεις μέρος μετ΄ έμου)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뜻을 가지고있다는 것을 여기에서 케치 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 복을 받는다고 할 것이면, 만약에 그것을 주님과 함께 얻는다고 할 것이면
주님 발뿐만 아니라 손 머리까지도 씻겨주옵소서,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베드로의 대답 속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무엇이라 하셨느냐면
「요13: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그러면 문제는 지금부터 이다.
제자들이 깨끗함을 받았나 못 받았나.
다시 말하면 베드로가 발 씻김 받기 전에 이미 깨끗함을 받았으나 꼭 발 씻김을 받아야한다 그 말이다.
이미 깨끗함 받은 베드로 깨끗함 받은 것은 과거이다.
과거에 이미 깨끗함 받았지만 또 발을 씻어야 한다.
그러면 깨끗함 받는 것하고 발 씻는 것은 무엇인가. 심각한 문제이다.
「요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그러면 깨끗함 받는 것이 무엇인가.
벧전1:23 항상 있고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너희가 거듭났다고 하였다.
깨끗함 받은 것 그것은 거듭난 것이다. 무엇으로 거듭났냐면 말씀으로 거듭난 것이다.
벧전1:23을 근거로 해서 말씀으로 거듭났으면 이제 다 된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무엇이 더 필요한가. 우리가 여기에서 주제파악을 분명히 할 것은 기본적으로
첫째는 거듭나야한다, 깨끗함을 받아야한다. 이것으로 다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에
하나가 또 있다. 무엇이냐면 발 씻기이다.
야 이것 첩첩산중이구나 나는 그냥 교회만 다니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이것 괜히 다니는데…
없던 것으로 해주세요, 그렇게 할 것인가. 그렇게 할 수 있는 문제인가? 웃고 끝날 문제가 아니다.
큰일났다 그 말이다. 지금까지 교회 다니면, 예수 믿습니다 신앙고백하고 학습 받고 세례 받고
교회 출석 잘하면, 그리고 시키는 대로 잘하면 이미 중생 한 사람이고 그 사람이 천국예매표 사놓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알고있었는데 깨끗함 받은 사실을 이제야 알게됐다. 이제야 알게되었는데
그나마도 여기에 보면 그것은 과거지사로 되어있고 이렇기 때문에 발 씻김을 받아야된다 그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말씀을 심는 것이다. 옥토에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기어짐으로 우리가 거듭나는 것이다.
말씀, 누구시냐면 그리스도가! 심기어지므로 우리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깨끗함을 받아야한다.
그러면 심기어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자라야한다. 그 다음에 열매를 맺어야한다.
뿌리에서 진액을 뽑아 올려서 가지가 열매를 맺는다.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깨끗함 받았으면 말씀이 우리 마음에 심긴바되고
심기어진 그것은 누가 심은 것이냐면 하나님께서 심은 것이다. 심으신 것은 자라서 반드시
열매로 발전해야한다. 우리가 계속해서 무엇 안에 있어야 하느냐면 말씀 안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요15장에서는 열매 과실의 문제가 나오는데 과실 문제는 우리가 많이 들었으니까 그만두고
말씀 안에 거한다고 하는 것은 누가 우리를 영접해줌으로서? 그리스도께서!!!
그러면 발 씻는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생각해 보면,
왜 하필이면 영접의 문제를 발씻는데 비유를 하였나?
「눅7:44-47 여자를 돌아보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여기서 깊이 간절히 영접하는 자는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면, 그들의 풍습에 진정으로 영접하는 자는
발을 씻겨준다. 풍습이 그렇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영접한다고 하는 문제를 결국은 택함 받는 문제로 비유할 때,
택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택하는 것인가 주님이 우리를 택하는 것인가.
주님이 우리를 택하여야 한다.
주님이 우리를 택하여 주는데 누가 누구의 발을 씻겨주어야 하느냐면 주님이 우리의 발을
씻겨주는 것은 곧 누가 누구를 영접하여 주는 것이냐면 주님이 우리를 영접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가지가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포도나무는 주님이시고 우리는 가지라고 보았을 때 접붙임이 누가 누구에게 대하여되느냐면
가지가 포도나무에 의해서 접붙임을 받아야한다.
「롬11:13-20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 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지긍할찌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돌감람나무 이방사람인 우리가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다.
감람나무나 포도나무나 마찬가지다.
우리 들 포도가 참 포도나무인 주님께 접붙임 받아서,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가 거룩한,
즉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아서 열매를 맺는 자들이 되었다.
그러면 이것은 누가 누구를 영접하는 것이냐면 주님이 우리를,
포도나무가 가지를,
참 감람나무가 돌 가람나무의 가지를 접붙임을 받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을 영접으로 이것을 택함으로 말하고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풍습에 의해서 영접은 발 씻겨주는 것이고 또 롬11장에 보면 나무에 가지가
접붙임 받아 뿌리의 진액을 공급받아 그들로 열매를 맺게 만든다.
「요13: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목욕한 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해진 자들(=거듭난 자들 벧전1:23) 이제는 발을 씻겨 영접하심,
예를 들면 우리가 주님 안에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주님과 분리될 수 없다.
둘이 한 몸이 될찌니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마19:6)
분리가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 안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과 함께 거하게되면
발을 깨끗이 씻어서 영접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입장에서 영원히 우리를 당신의 처소로 영접하는 의미에서 발씻기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때 당시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이후에는 알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요13:10下-11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여기에서 가룟 유다의 발을 씻기지 아니했다는 암시가 나타난다. 여기서 씻김을 받지 아니한 자는
예수님이 책임을 지지 아니하신다. 그것을 아셨기 때문에 여기서는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있는 것을
뒤에서도 계속 나오고있는데
「요13: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그때 당시 제자들은 몰랐다.
「요13:13-14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종이 씻기는 것이 아니라 주와 선생이 너희 발을 씻긴다 그 말이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큰 자는 섬기는 자가 큰 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바로 그 말씀이 나오는 것이다.
주와 선생이 아랫사람의 발을 씻기는 것이다.
「요13:14下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이것이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게 하려함이라, 어떤 사랑인가.
그들이 영접하는 그 사랑은 무엇을 주는 사랑이냐면 생명을 주는 사랑, 포도나무에 가지를 접붙이는,
이것이 바로 중매쟁이의 사역이다.
「요13:15-17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하나님의 역사는 영접의 역사이다. 자기가 크면 큰 만큼 적은 것을 영접한다.
그래서 내 이름으로 소자 하나를 영접하면, 지극히 작은 것, 작은 형제에게 한 것이 곧 누구에게
한 것이냐면 내게 한 것이라, 마15장에 나온다. 최후에 큰 분이 누구시냐면 하나님이시다.
여러분도 보다도 더 작은 컵은 영접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온 세계 만방에 퍼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긍휼과 자비다. 내가 제사를 원치 아니하고 자비를 원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이냐면 자비 긍휼히 여김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느냐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가 지극히 적은 소자 하나를 영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이것이 서로 사랑이다. 기억하여야한다.
부담 갖지 말고 영접하여야한다. 모르면 모르는 것만큼 알면 아는 것만큼 크면 큰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영접하여야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다.
「요13:18-19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로라」
우리를 영접해 주는 그분이시다. 포도나무다.
그분은 나무이고 우리는 그 가지가 되어서 그로부터 열매를 맺게되는 것이다.
「요13: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보면 삼 단계이다.
원문에는 "내가 보낸 자" 누구냐면 파송된 자들 사도들이다. 아포스톨로스.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누구를 영접하는 것이냐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나를 영접하는 것은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다. 삼 단계가 나온다.
하나님, 예수그리스도, 보낸 종들이다.
그래서 발씻기는 일의 결론은 무엇인가. 20절이다.
「요13: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그래서 21절에서는 가룟유다에 대해서 나오고 있다.
내가 보낸 자, 무엇을 가지고 가는가.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간다.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가는 자 영접하면 무엇 안으로 영접하느냐면 생명의 말씀 안으로 영접을 한다.
생명의 말씀 안으로 영접하는 그 영접은 누구의 영접이냐면 그리스도의 영접이다.
그리스도의 영접은 누구의 영접이냐면 하나님의 영접이다.
반대로 보면 하나님이 영접하는 자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가 영접하는 자는 보낸 자이고 보낸 자가 영접하는 것은 말씀이다.
그 관계성에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체적인 영접의 역사는 누구에 의해서 되어지느냐면 보낸 자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종이 누구냐 하는 문제가 나온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여기서 거짓선지자의 문제가 나온다. 이것을 우리는 구분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보낸 자가 누구이고 거짓선지자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면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열매로 안다.
열매로 그 나무를 알찌니, 나무, 포도나무, 생명나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갈라진다.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
못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열매가 무엇인가,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다.
마15장에서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악한 생각 음란 간음 도적질 거짓증거 훼방 그렇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것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롬10:8-10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10: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왜 그 말씀이 나오느냐면 13절을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다.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누가 구원을 얻느냐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주여 주여 부르는 것이 아니다.
어떤 자가 주의 이름(=말씀)을 부르는가, 믿는 자가 주의 이름을 부른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그 다음에는 누가 믿느냐면 2번째는 듣는 자가 믿는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부르리요
그 다음에 3번째는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들을 수 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그 다음 15절 4번째는 보내심을 받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보면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에 전파한다. 전파함으로서 듣는다. 들음으로서 믿게되고
믿음으로서 주의 이름(=말씀)을 부르고 그럼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러면 구원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면 보내심을 받은 자가 전파하고 전파하는 그 소리를
들음으로서 믿고 믿음으로서 주의 이름을 부르고 부름으로서 구원을 얻는다.
문제는 여기서 듣고 믿고 부른다. 그런데 이것은 원문에는 상소하다 호소하다 그 말이다.
상소하다 호소하다.
그러면 주의 이름이 무엇인가. 말씀이다. 그러므로 말씀에 호소하고 상소한다 그 말이다.
그것이 구원을 이룬다 그 말이다. 그래서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보내심을 받은 자는 무엇을 전파하게되어 있느냐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파하고
전파하는 그 말씀을 듣고 들음으로서 믿고 들음으로서 주의 이름에 호소하고
호소하므로 무엇을 얻느냐면 구원을 얻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미련한 방법 전도이다.
「고전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전도의 미련한 방법, 사실은 이것은 미련한 방법이다.
자기가 하나님을 깨달아 가만히 앉아서도 독방 속에 혼자 앉아서도 하나님을 깨달아야한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깨달아야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무슨 미련한 방법을 썼느냐면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그래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이 전파하고 전파하는 말씀을 듣고 들음으로서 믿고
믿음으로서 구원을 얻는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무엇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느냐면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 것은 보내심을 받은 사람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들음으로서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
들으면서 믿고 그 다음에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기 시작하면 이 사람은 필요 없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사도 바울이 계속해서 다른 지방으로 간다.
듣고서 믿으면 그 다음에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가르침 속에서 계속 성장한다.
더 이상 사람은 필요 없다.
「요15:3-4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내 안에 거하라, 어디 속에 쏙 들어가라는 말이냐면 말씀 속에 쏙 들어가서 말씀 안에서
말씀이 공급하는 생명의 진액을 받고 자라가므로 열매를 맺게되고,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15:5-6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니라」
열매 없는 가지 찍어서 불 속에 던진다. 마태복음 세례요한의 메시지로부터 계속 나온다.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무엇이든지, 착각하지 말아야한다.
그때부터는 집 달라하면 집 나오고 돈 달라하면 돈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무엇이 계속 공급되느냐면 생명이 계속 공급된다는 이야기다.
결론을 맺으면 택함을 받은 자는 무엇으로 그가 택함 받았다는 분명한 객관적으로 증거를
갖게되느냐면, 내가 택함 받았다는 객관적 증거가 무엇인가.
내가 택함 받았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다, 나를 구원하셨다는 종합적으로
무엇이 객관적 증거가 되느냐 하는 것이다.
「열매」다.
우리가 보는 성경은 계약의 책이다. 약속의 책이다.
너희들이 이렇게 하면 내가 구원해주겠다,
너희가 이러한 사람이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거절할 수 없다.
「열매」이다. 그것이 성경이다.
그런데 성경의 핵심이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도 우리의 계약 취소할 수 없고 우리의 구원 취소할 수 없다.
바로 무엇이 보증하고 있느냐면 성경이 계약의 책으로 보증하고 있다.
다른 것 걱정할 필요가 없다. 사람 말 들을 필요가 없다. 혼란할 필요가 없다.
성경이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고 이 계약의 책에서 계약조항이 무엇 무엇인 것만 분명히 알면
우리가 그분한테 당당히 요구할 수 있고 그분도 그 계약조항에 대해서 거절하실 수 없다.
세상에서 다 계약으로 말미암아서 모든 거래가 성립이 된다.
그 계약조항 어기면 국가도 변상하여야 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도 계약의 책이다.
특별히 이것은 무엇으로 세운 계약의 책이냐 하면 피로서 세운 계약의 책이다.
피는 무엇인가. 그 계약 어기면 죽인다는 말이다.
아브라함 시대 고대 구약시대에는 계약을 체결할 때 새나 짐승의 가운데를 갈라놓고 두 사람이
그 사이로 지나간다. 만약에 이 계약을 어길 때 계약을 어긴 사람을 두 쪽으로 가른다.
그런 의미에서 피의 계약을 한다. 이것이 맹서다. 이것을 맹서로 보증했다.
맹서가 무엇인가. 히브리서에 나온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이 계약 체결한 대로 이행하지 아니하면 우리도 반쪽 짝 갈라지는 것이고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행하지 아니하시면, 하나님은 자기 자신에게 맹세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꼭 지키시는 분이시다.
결론은 열매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무슨 소리를 한다할지라도 성경의 열매맺으면 그것은
어디 붙어있는 것이냐면 나무에,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이다.
그가 우리를 영접함으로서 그에 의해서 열매를 맺었다는 사실,
열매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은 계약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다른 말 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열매이니까. 열매로서 그 나무를 안다고 했다.
생명의 열매냐 아니면 선악과냐.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고 말씀이 우리 마음에 있고 우리 생각에 기록이 되고
그 말씀이 우리 입에 있어서 입으로 시인하게 된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요3장의 말씀을 보고 마치고자한다.
「요3:31-36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 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그 외에도 여러 곳에 많습니다만
열매에 대한 말씀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 많이 공부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마치고
청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입은 자,
기억하여야할 것은 잎사귀만 무성한 나무 주님은 저주하였다. 무엇까지 말라버렸느냐면
뿌리까지 말라버렸다.
우리가 주의하고 또 유념하여야 될 것은 반드시 선한 열매가 가득한,
그것은 누구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수단방법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말씀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다.
생명의 열매 그것은 분명히 먼저 그 열매가 내 안에 있으므로
나는 택함 받은 백성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 앞에 가서
영광의 면류관 상급을 얻게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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