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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에는 조민(趙敏)이 아니라, 조명(趙明), 명명특목이(明明特穆爾)였다더군요. 중국독자들은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추적해가면서 의천도룡기가 1262, 3년에서 1358년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실질적인 도입은 장삼봉이 90세 생일을 맞는 1346년부터이고, 소설이 종결되는 1358년에는 장무기가 22세 정도이지 않을까하는 것까지 추측해놓고 있더군요.^^ 장취산과 은소소가 장삼봉이 90세인 1346년에 빙화도에 들어가서 100세 생일(4월7일)즈음인 1356년에 10세의 장무기가 돌아왔다니, 1347년쯤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빙화도의 날씨묘사를 통해서 장무기가 겨울이나 초봄쯤에 태어나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더군요.^^ 장삼봉에 대해서는 여러 전승이 그때마다 달라서 기준으로 삼기에는 좀 애매하기는 하죠. 소설에서처럼 장납탑(張邋遢)으로 불리기도 했던 도교기록에 나오는 장삼풍(張三豊)의 경우는 1314년에서 1320년 사이에 출생해서 1417년까지 생존한 것으로 추정하고있던데, 소설에서와는 조금 아귀가 안 맞는 느낌은 있죠.^^
원나라의 마지막황제 순제(順帝)때인 1351년 황하가 범람하는데, 이때 치수사업에 동원된 허난성(河南省), 안후이성(安徽省)의 농민들사이에서 몽골정권에 대한 불만과 민심의 동요를 일어나서 소요의 조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때 이를 틈타 유복통(劉福通 1321~1365)과 한산동(韓山童)이 명교, 미륵교, 백련교의 결합을 중심으로 '미륵하세(彌勒下世), 명왕출세(明王出世)'기치로 일으킨 반란이 홍건적의 난(紅巾軍起義)이죠. 초기 반란진압에서 찰한특목이가 혁혁한 공로를 세웠던지 1352년 여녕부(汝寧府)의 다루가치(達魯花赤) 그리고 병부상서(兵部尙書)에 까지 오릅니다. 이후에도 의천도룡기에서처럼 실질적으로 원말의 혼란기에 병권을 휘두르는 요직을 두루 거치게 되죠. 다루가치(達魯花赤)는 원나라가 정복한 지역을 통제할 목적으로 둔 관직으로, 고려에도 다루가치가 파견되어 지나치게 내정을 간섭해서 분쟁의 단초가 되기도 했었죠. 1361년에는 이 혼란한 시기의 오히려 몽골정권내의 분열양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겠는데, 찰한특목이와 패라첩목아(孛羅帖木兒 Bolad Temur ?~1365)는 일촉즉발의 충돌까지가는 세력다툼을 벌이기도 합니다. 때가 홍건적의 반란 와중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몽골정권은 무능한 순제와 더불어 이미 되돌이킬 수없는 지경에 빠진 것 같기는 합니다.
그와중인 1362년 6월 찰한특목이는 투항한 홍건적 전풍(田豊)과 왕사성(王士誠)에 의해 피살되지요. 원의 순제는 찰한특목이를 충양왕(忠襄王)으로 추증하고, 헌무(獻武)라는 시호를 내렸다가, 다시 영천왕(潁川王)으로 추증하고, 충양(忠襄)이라는 시호를 내립니다. 이때 찰한특목이의 아버지 아로온(阿魯溫)에게 추증된 것이 여양왕(汝陽王)이더군요(封其父阿魯溫汝陽王) 그러니까 찰한특목이가 실권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생전에 제후왕(諸侯王)으로 봉해졌다는 기록을 적어도 열전(列傳)에서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여양왕(汝陽王)은 아니었던 거지요. 여양(汝陽)은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르우양(汝陽)현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군주(郡主)는 제후왕(諸侯王)의 딸에게 수여하는 칭호니까, 조민이 실제 (제후왕이 아닌) 찰한특목이의 딸이었다면 소민군주(紹敏郡主)라는 작위를 받을 수는 없었을 테지요.^^
'천하기남자(天下奇男子)' 고고특목이
太祖笑着說: "遇春雖人杰, 吾得而臣之. 吾不能臣王保保, 其人, 奇男子也."
상우춘(常遇春 1330~1369)이 북원(北元)을 공격하고 개선하다 급사할 때는, 주원장이 애도해서 詩도 남겼다지만, 서달(徐達 1332~1385)의 죽음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더군요. 일설에 의하면 서달이 대상포진을 앓았다는데, 서달을 시기하던 주원장이 의도적으로 금하고 있는 거위고기(鵝肉)요리를 보내서, 의중을 간파한 서달이 그 요리를 먹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답니다. 그리고 주원장이 집권해서는 명(明)의 건국에 공이 있는 웬만한 공신들은 반역으로 몰아 처형했으니, 확곽첩목아가 주원장의 회유에 응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나았을 수도 있겠죠.^^ 그러고 보면 조민의 아버지 찰한특목이(察罕特穆爾)나 오빠로 등장하는 '천하기남자(天下奇男子)' 확곽첩목아(擴廓帖木兒)도 예삿인물들은 아니었을 것 같군요. 두사람 모두『원사(元史)』와『명사(明史)』의 열전부분을 장식하는 인물들로, 이렇게 중원 몽골정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걸출한 인물들 사이에 조민낭자가 끼어있다고 생각하니까 한편 재미있기도 하군요.^^
조민(趙敏)은 위구르족일까?
조금 뜬금없기는 하군요. 이렇게 조민의 가계가 중원의 몽골정권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데, 위구르(維吾爾)족이라니...^^ 장무기와 조민이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녹류산장(綠柳山莊)은 감량(甘凉) 지금의 간쑤성(甘肅省) 량저우(凉州) 우웨이현(武威縣)즈음 정도가 되겠죠. 중국독자중에는 녹류산장의 위치도 그렇지만, 조민에게서 풍기는 면모가 몽골족 여인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점을 내세우기도 하더군요. 몽골군이 중국으로 쳐들어가서 1234년 금(金)을 명망시키고, 쿠빌라이가 1271년 국호를 원으로 정하고 1276년에 남송을 함락한 이후로, 1368년에 수도를 서달의 군대에 빼앗기고 몽골초원으로 달아난 것으로 치면 100년도 안되는 시간을 중국을 지배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조민이 몽골족으로 충분히 한족에 동화되었다 하더라도, 조민에 대한 묘사로 볼 때는 위구르(維吾爾)지역 여인에 좀더 가까운 풍모가 느껴진다는 군요.^^
『원사(元史)』<찰한첩목아열전(察罕帖木兒列傳)>의 첫구절입니다.
察罕帖木兒 字廷瑞, 系出北庭. 증조부 활활대(闊闊台)때 몽골의 대군의 일원으로 하남(河南)으로 들어왔고, 조부 내만대(乃蠻台), 아버지 아로온(阿魯溫)까지 하남(河南)에서 일가를 이루었으며, (찰한첩목아는) 영주(潁州) 심구(沈丘)사람이다.
National Geographic에서 스캔해본 건데, 지무싸얼(吉木薩爾)은 Jimsar로 표기된 곳인 것 같습니다.
영주(潁州) 심구(沈丘)는 지금의 안후이성(安徽省) 린취안(臨泉) 부근이라는군요. 그리고 찰한특목이의 가계가 '북정(北庭)에서 계출(系出)'되었다는 문구가 나오죠. 북정(北庭)은 당나라때인 702년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설치된 정주(庭州)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정주(庭州)가 어디냐 하면... 깐수성의 둔황에서 투르판으로 가다보면 신쟝위구르자치구의 하미(哈密 Hami)라는 곳이 나오는데, 여기서 투르판방향으로 계속 진행해서 천산남로를 따라가면 카슈카르나 호탄으로 타클라마칸사막을 애둘러가는 길이 되죠. 그리고 하미에서 윗쪽을 선택해서 천산북로를 따라가면 윗쪽으로는 몽골, 러시아접경지역으로 준가리아분지(準葛爾盆地 Dzungarian Basin)가 펼쳐지는데, 우루무치방향의 창지회족자치주(昌吉回族自治州)내의 지무싸얼(吉木薩爾 Jimusa'er)이 정주(庭州)인 것 같습니다. 지무싸얼에서 안후이성(安徽省) 린취안(臨泉)까지라면 참 멀리도 왔군요.^^ 찰한특목이(찰한첩목아)의 가계가 지무싸얼출신이면 몽골족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위구르지역에 분포하던 소수민족중 하나일 가능성이 좀더 크긴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확곽첩목아의 모계 그러니까 찰한첩목아가 내만인(乃蠻人)이라는 서술이 보이기도 하던데, 내만인(乃蠻人)이라면 나이만족(Naiman)을 말하는 것 같기는 합니다. 내만(乃蠻 Naiman)은 몽골어로는 여덟(8)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나이만족은 1177년까지 서요(西遼)의 지배를 받았고, 중앙아시아의 스텝지역에 분포하던 몽골인 또는 몽골화된 투르크족일 가능성이 있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이제껏 어설프게나마 살펴본 것으로는 조민의 가계가 적어도 지금의 신장위구르지역에 거주하던 소수민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물론 제 능력으로는 몽골족일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하지는 못하겠군요.^^;;
(추가)
『명사(明史)』<진왕협열전(秦王樉列傳)>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樉妃, 元河南王王保保女弟. 次妃, 寧河王鄧愈女. 樉薨, 王妃殉.
洪武四年九月, 冊故元太傅中書右丞相河南王保保女弟爲秦王妃.
그런데 1371년이면 북원(北元)으로 밀려니서 서달(徐達)의 명군과 대치하던 확곽첩목아(擴廓帖木兒)가 고향이며, 식읍으로 받은 봉토가 있는 영주(潁州) 심구(沈丘)에 있을 여동생을 주원장의 아들에게 시집보냈을 거라는 것은 이해하기가 조금 힘들기는 합니다. 물론 명군(明軍)이 확곽첩목아의 고향에 진군해서 여동생을 발견해내기도 했겠고, 주원장은 회유에도 굽히지않는 확곽첩목아에게 나름대로는 존경심을 가졌다니, 어쩌면 혼인자체가 회유의 명분이 될수 있을 것으로 판단할 수도 있었겠지요.. 주원장의 둘째아들 진왕(秦王) 주상(朱樉 1356~1395)에게 시집간 확곽첩목아 왕보보(王保保)의 여동생은 왕씨라는데, 찰한특목이의 딸인지, 아니면 왕보보의 친동생인지는 알 수가 없군요. 그래도 김용선생이 구상한 조민과 장무기의 애초의 적대적인 관계설정도 역사적인 근거에서 비롯되었다는 추정이 가능해지겠죠. 하지만 조민의 모델이었을 왕보보의 여동생이 장무기가 아니라 주원장의 아들에게 시집을 갔다니 조금은 섭섭해지는데요.ㅎㅎ 게다가 1395년 3월 주상(朱樉)이 죽자 따라죽었다(王妃殉)고 나오니...-0-;;
그런데 주상(朱樉)의 죽음 후에 따라죽었다는 것이 왕비가 슬픔이 지나쳐서 자발적으로(?) 죽음에 이르렀을지에는 의문에 있는 것 같습니다. 1389년 주원장의 10번째아들(주원장은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아들만 26명이더군요.^^)인 노왕(魯王, 魯荒王) 주단(朱檀 1370~1389)이 죽었을 때, 왕비인 '과(戈)씨'를 순장시켰다는 기록이 있어서, 왕보보의 여동생도 강제로 순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진왕(秦王) 주상(朱樉)이 죽은 1395년이라면 확곽첩목아는 1375년에 이미 죽었겠고, 북원(北元)의 몽골세력도 정벌했을테니 주원장으로서는 이용가치(?)가 없다고 느낄 수도 있었겠지요. 실제 주원장은 그런 목적으로 순장을 활용(?)하기도 했더군요. 그런데 무엇보다 그때까지 사라져가던 악습인 순장(殉葬)이 주원장에 이르러서는 부활되어 합법화되기에 이릅니다. 주원장은 죽기 전에 46명의 비빈(妃嬪)을 순장시키라는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 주원장의 넷째아들 영락제(永樂帝 1360~1424)가 죽었을 때는 조선에서 황제의 후궁으로 간 '공헌현비(恭獻賢妃) 한씨(韓氏)'도 순장되었다는데, 공헌현비는 폐비 윤씨를 내쫓고, 손자인 연산군(燕山君)에게 머리를 다쳐 죽은 인수대비((仁粹大妃 1438~1504)의 고모라는군요.
주상(朱樉)이 죽었을 때 왕보보의 여동생 왕씨는 등(鄧)씨와 함께 순장되었다고 합니다. 진왕(秦王, 秦愍王) 주상(朱樉)은 1370년에 진왕(秦王)으로 분봉되고, 실제 지금의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을 취번(就藩)한 것은 1378년이라는군요. 진왕 주상(朱樉)은 주원장이 자식들에게 분봉한 번(藩)중에는 막강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어서 일찍 죽지만 않았다면 황제도 될 수 있을텐데... 시안은 양귀비와 얽힌 일화가 있는 곳이며, 실크로드의 출발점인데 장안(長安)을 주원장이 1369년에 시안(西安)으로 개칭했으며, 명나라 진왕(秦王)의 무덤들이 이쪽에 분포해 있을테니, 다시 시안을 방문하게 되면 진왕비(秦王妃) 왕씨의 무덤에 대해서도 한번 알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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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곽정과 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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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无忌 |